1st Vernon RPS COLLABORATION
[부솔] 찰나가 태양을 가를 때
델리 / 글
아멘.
천정 높은 교회 안, 일제히 기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만큼은 정말로 세상 모든 이들이 신을 믿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모두가 손을 모아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지금 당장 비를 그쳐 달라고 기도하면 신님은 들어줄까. 하느님 하느님 외치며 땅만 보니 목소리가 오르지 못하고 뚝뚝 떨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산책을 좋아했다. 이미 익숙해진 수많은 길들을 걸으면서 나는 구름 떠 있는 하늘을, 새카만 아스팔트를, 그 사이 드문드문 나 있는 꽃을 봤고, 그 평화를 사랑했다. 그렇다 할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는 동안의 그 재미없지만 화려한 시간을, 나는 동경했다. 행복을 주세요. 그 찰나를 나에게 주세요. 나는 종종 빌곤 했다.
교회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신을 푹 빠지도록 믿어 본 적은 없다. 모든 게 허상 같아서. 보이는 것이 없고 잡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믿으라니. 구름에 대고 펑펑 울면 그게 신앙심이라니. 돈을 많이 낼수록 독실하다니. 종종 믿음은 간사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엄마의 그림자가 짙었다.
엄마는 나보다 화투패를 더 신뢰하는 듯했다.
우리 집이 처음부터 그렇게 어려웠던 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웬만하면 누구나 누릴 평범한 정도였다. 필요한 것을 사고, 과하지는 않더라도 가끔 사치 한 번 부릴 수 있었던 정도.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빚은 불어났다. 내가 알아차릴 즈음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판을 깔다 잡혀가는 건 부지기수였고, 같이 도박판을 벌였던 아줌마들이 현관문을 마구 두드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쯤 되니 모를 수가 없었다.
뭣 모르고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 드린 적이 있다. 아줌마들이 싸구려 장미 향을 몰고 우르르 현관에 들어서더니, 온종일 나에게 엄마가 빌려 간 돈을 내놓으라며 성을 냈다. 엄마가 그렇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와 이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다. 딱히 떠들고 싶었던 주제도 아니었을 뿐더러, 애초에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아빠가 살아 계셨을 때에도 꽤 서먹했던 터라, 돌아가시고 나니 아예 남남이 된 것만 같았다. 서로 신경을 안 쓰다 보니 당연히 졸업식도 혼자였다.
틈 없이 붐비는 교복들 중에 꽃 한 송이 손에 없이 혼자였던 사람은 나 하나였을 것이다. 항상 바글거리던 버스 정류장이 휑했다. 다들 부모님하고 갔나 보네. 무뎌졌던 것들이 간만에 서러웠다. 눈은 왜 추위에 빨개지지 않는 걸까. 팅팅 부어 벌건 눈을 추위 탓으로 돌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죽어도 눈물만큼은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남자가 저 건너편에서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를 뚫고 다가왔다. 한겨울에 후드 한 장을 입은 이상한 남자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차를 피하지도 않고 직선으로 올곧게 걸어오는데도 경적이 울리기는커녕 차들이 그 남자를 피해 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무지 그 남자한테는 공기만 닿아서, 귀신인지도 헷갈렸다. 이질적인 모습 가운데 반짝거리는 목걸이 같은 게 찰랑였다.
“….”
“안녕.”
“누구… 신데요.”
“네 찰나.”
“뭐라고요?”
네가 날 빌었잖아. 그 남자의 목걸이 속 깃털마저 찰랑였다.
찰나가 태양을 가를 때
“진짜 제가 빈 그게 맞아요?”
“맞다니까.”
“거짓말 아니고요?”
“승관아. 차들이 나 있는 둥 마는 둥 했던 거 기억 안 나?”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이 아저씨 그냥 스토커 아냐?”
“아저씨라니. 이 얼굴에 아저씨는 좀.”
눈물을 닦아 내고 보니 그 남자는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을 닮았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다 못해 박수갈채가 나올 만큼 잘생겼다. 이런 얼굴에 대고 아저씨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저런 얼굴 입에서 들으니 어딘가 신뢰가 갔다. 아빠는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모르는 잘생긴 남자 집에 들었으니 괜찮은 거겠지 싶었다. 그래, 구원이고 자시고. 더 얘기를 들어 보는 게 먼저였다.
“내 기도를 받았다고?”
“따지자면 전달이지. 근데 왜 갑자기 반말해.”
“네가 반말하니까.”
남자는 내 기도를 전달받고, 혼자인 나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얼떨떨했다. 그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싶어서. 혹시 우는 거 보고 불쌍해서 저러나. 근데 그러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내 기도는? 원래 신은 다 소원 들어주나? 아니면 나만? 그렇다면 왜 하필 나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을 위해서 나를 던지는 일. 그게 만약 강제적이더라도. 억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욕심도 의지도 남자에겐 없는 걸까.
모든 게 말도 안 됐지만, 괜히 안도했다.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서. 이런 드라마 같은 상황에서도 안심이 됐다. 확실치는 않지만 믿을 수밖에. 믿을 수밖에 없다면 그 구원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게 나았다. 끝끝내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한솔.”
여러 일을 정리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동안 일 년 정도가 지났다. 걔는 내 기도를 듣고 온 사람치고는 열일곱 학생의 신분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걔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정이라면 정도 들었다. 최한솔은 그날 과속하는 차들을 모조리 제치고 와서 나한테 그랬다. 기도가 닿은 거라고. 정말, 사이빈 줄 알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걔는 차를 뚫었고, 내 기도의 내용을 알았고,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었다. 기도를 듣고 왔구나. 아직은 이것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사람을 받은 나에게는 딱히 우리를 칭할 말이 없었다. 갑을 관계? 아니고. 주종 관계? 으,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할 수 있나? 잘 모르겠다. 한동안은 그냥 다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 같다.
일 학년 때였다. 장맛비가 쏟아졌다. 하필이면 비가 오는데 아이스크림 내기를 해서, 축축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그날도 정말 별거 아닌 걸로 내기를 했다. 바나나우유에 바나나가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뭐 이런 거.
“아니, 바나나우유에 바나나가 안 들어가면 왜 바나나우유냐. 어이없어.”
“바나나 맛이 나니까.”
“그 얘기 하는 거 아니거든?”
결론은 안 들어간다, 였다. 우리끼리 하는 내기에서 내가 이긴 적은 손에 꼽았다. 최한솔 쟤는 운도 좋아 가지고. 나란히 서서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 걸었다. 차라리 해라도 쨍쨍할 때 사 먹을걸. 그러게. 영양가 없는 대화를 했다.
평화롭다 생각했다. 크게 무슨 일이 있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냥, 혀에 남는 바나나 맛 아이스크림보다 빗소리에 겹쳐 듣는 네 목소리가 더 달게 느껴져서. 우리를 정의 내리는 흐릿한 이름이 빗속에 파묻혀 일렁였다. 차라리 물장구를 쳐 더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저 그 평화가 좋았다. 선물 받은 나의 평화.
실은 신이니 뭐니 다 잊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걸 다시 상기시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최한솔은 이 학년이 되자마자 매점에서 김주영하고 한 판 붙었다.
김주영은 게이로 유명했다. 그냥 게이면 괜찮은데 뭣 모르는 게이라 문제였다. 얼굴이 마음에 들면 여기저기 찔러 보다가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짓밟았다. 목사 아들이라고 들었는데 행동거지는 도무지 그렇게 안 보였다.
나는 최한솔이 김주영을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 얼굴을 보면 개처럼 달려들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매점에 데려갔는데, 어쩐지 순조롭더라니. 하필 거기서 딱 김주영을 마주쳤는데, 사실 한 판 붙었다, 고 할 만큼의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최한솔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김주영에 대한 주의를 숨 쉬듯이 줬기 때문이었다. 최한솔과 나는 삿대질까지 하는 김주영을 등지고 빠르게 매점을 빠져나왔다. 그게 한이었는지, 김주영은 그날부터 최한솔을 집중해서 공략하기 시작했다. 사실 괴롭히는 걸지도 모르지만, 공략을 가장한 괴롭힘이든 괴롭힘을 가장한 공략이든 최악은 확실했다.
살면서 딱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조건 방금 그 시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언젠가 김주영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애초에 절대 안 마주치기엔 너무 빛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여기까진 그냥, 체념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기도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행복. 찰나. 멀고 먼 그것들이 사람이 되어 내게 나타났다. 어떻게? 걔는 사람인데. 어떻게 남남인 나에게 그렇게 쉽게 삶을 통째로 내놓을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나를 만나기 전의 최한솔의 삶. 온전한, 걔의 시간. 내가 걔의 시간을 뺏어 버린 것 같아서 동시에 두려웠다.
나를 위함이 아닌 걸 안다. 그냥 하느님이 시켜서 나한테 온 거지. 나도 안다. 아는데도 자꾸만 오해하고 싶어졌다. 정말, 평범한 사람 대 사람으로. 그날 마주쳤다면. 그때 역시 나를 위해 그렇게 건너와 줄까.
“승관아.”
행복해? 최한솔이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행복. 나는 행복한 걸까. 이렇게 키 큰 행복이 나를 위해 내려왔는데도 행복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천사야?”
“난 사람이지.”
“나 만나기 전엔 어떻게 살았어.”
“선택받았지.”
“아.”
왠지 이해가 됐다. 내가 신이었어도 한솔을 선택했을 것이다. 죽을 때를 기다리기엔 조급했을 것이다. 나도 역시 최한솔을 편애했을 것이다. 그만큼 특히나 예쁜 아이였다.
“선택받으면 뭐가 달라?”
“그럼.”
“어떻게?”
“난 죽다 살아났어. 원래 버스에 치여 죽을 운명이었대. 그냥, 계약 같은 거라서. 운이 좋다거나 사고가 날 일은 없다거나 하는 거 말고는 특별한 건 크게 없어. 하나 빼고.”
“하나?”
“천상계에서 가져다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불을 만들거나, 시간을 건드린다거나. 근데 시공간이 틀어질 수도 있어서. 너무 위험해서 살면서 딱 한 번밖에 못 써.”
“그럼 엄청 아껴 써야겠네. 그건 패스. 김주영이 너 괴롭힌다고 신한테 꼰지르면 안 돼? 짜증 나잖아.”
“그렇게는 못 해.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
“그런 게 어디 있어.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런 건 법원이나 하는 거지.”
“무책임해.”
신성 모독을 들은 최한솔이 건조하게 웃었다. 툭하면 김주영한테 발 걸리면서. 억울하지도 않은지. 그렇게 웃는다.
저번엔 옥상에서 개수작 부리던 걸 본 적이 있다. 최한솔이랑 점심 먹으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주영을 중심으로 우르르 몰려와서는 최한솔을 데리고 갔다.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언제 적 옥따와. 이 정도면 최한솔을 괴롭히려는 건지 나를 괴롭히려는 건지 헷갈렸다. 그 촌티 나는 괴롭힘에 알면서도 말려드는 나도 진짜, 바보라면 바보였다.
“그만해.”
유치뽕짝의 끝은 옥상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냥, 최한솔이 조금만 덜 좆같았으면 좋겠다, 하는 거. 조금만 덜 맞았으면 좋겠다, 싶은 거.
“야, 부승관 완전 백마 탄 왕자님 같은데?”
“무슨 동화책 읽니.”
“쟤 뭐래냐. 야, 재미없어졌는데 가자.”
김주영이 옥상 문을 열자 또 우르르 몰려갔다. 저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감싸고 있던 놈들이 빠져 나가니 난간에 기대 앉아 있는 최한솔이 보였다. 이게 지금 느긋하게 휴대폰 볼 상황이냐?
“너 바보야? 왜 거기서 그냥 맞고만 있어? 운명이 다 그래? 괜한 애가 맞아야 돼? 차라리 그때라도 도망쳤어야,”
“승관아.”
“….”
“도저히 모든 것들이 회피가 안 되면,”
직면해야 해. 직면을 각오한 아이치고는 가벼운 얼굴이었다. 그게 또 속상해서, 애꿎은 땅만 갈라져라 노려봤다. 운명에서 도망칠 수는 없어.
“정말 작은 것부터, 감당 안 될 만큼 큰 것까지.”
“….”
“어릴 땐 드라마가 좋았다가 크면서 영화가 좋아지는 것도, 닭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도, 어쩌면 사고로 죽는 운명까지도.”
“….”
“운명에서 도망친 나한테 새로 내려진 운명이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네가 그러다 죽을까 봐.”
“승관이 너도 알잖아. 나 그렇게 쉽게 못 죽어.”
불안해? 응. 너무. 너무 불안했다. 아닌 걸 알지만. 날 두고 네가 죽을 리 없는 걸 알지만. 불안했다. 혹시나 네가, 아빠처럼, 그렇게, 네가.
“믿어, 승관아. 믿으면 돼.”
“… 모르겠어. 도대체 뭘 어떻게. 보이는 게 없고 잡히는 게 없어. 그런 내가, 뭘 어떻게 믿어야 해. 응? 솔아.”
최한솔이 내 손을 끌어다 최한솔의 볼에 갖다 댔다. 심장이 쿵쿵거려 손에 땀이 찼지만 도무지 놔 줄 생각을 않았다.
“나는 보여?”
“응.”
“나는 만져지지.”
“… 응.”
“나를 믿어. 네 찰나를. 하늘이든 뭐든 도저히 안 믿기더라도. 나는 믿어.”
“넌, 없어지지 마. 최한솔. 너 나한테 내려진 거니까 네 마음대로 막, 사라지지 마.”
그럴게. 최한솔이 온전하게 햇볕을 받으며 서 있었다. 너무 벅차 미처 받아 내지도 못했던 태양 빛을. 너는 그 강인함을 가르는구나.
“승관아.”
“응.”
“뽀뽀할래?”
새삼 알았다. 하늘이 내린 아이였다는 걸. 태양 빛마저 흩날리는 듯했다. 앞머리가 바람에 잔잔히 흔들렸다. 시야를 터 주려는지 그게 아니면 눈을 가리려는지 그 목적을 모를 만큼. 그래서 함께 흔들렸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뚫고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걔의 볼이 말도 안 되게 부드러워서. 햇볕이 따뜻해서. 나는 결국 그 애를 믿어 주기로 했다.
애당초 태양이란 그런 존재였다. 나기를 관찰자로 태어나 머리 꼭대기에서 지켜보는 존재. 나기를 선도자로 태어나 앞을 밝히는 존재. 그 빛이 너무 강해 절대 마주할 수 없는. 눈이 멀어 버릴까 두려웠고 마주 볼 수조차 없었다. 근데도 덜컥 믿어 버리고만 싶은 그 빛. 그게 최한솔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승관아.”
“왜.”
“너 표정만 보면 진짜 입원한 환자 같아.”
“죽을래?”
안 그래도 더운데 열 받게 그런 소리 하지 마. 다시 생각해야 했다. 관찰자니 선도자니 다 개소리였다. 이런 날씨에 체육대회라니. 그늘에 있어도 더웠다. 하필이면 반티도 환자복이라, 이런 착장에 뜀박질까지 하면 진짜 열사병으로 사람 한 명 죽어 나갈 수준이었다. 대전표를 떠올렸다. 농구는 안 나가고. 피구 아니고. 줄다리기? 두 명쯤은 빠져도 모를 듯. 그리고 또, 아, 축구….
“한솔아. 너 축구 나가?”
“아니. 너 골키퍼 하지 않아?”
“예비 있어.”
우리 땡땡이 치자. 그래도 돼? 되지. 최한솔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싸. 에어컨 틀어 놓고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지. 최고의 계획이었다.
텅텅 빈 교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교실에 아무도 들어올 리 없는 체육대회 날인데도 에어컨은 조금 추울 정도로 빵빵했다. 추우면 어때. 딱 붙어 있음 되지. 우리는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솔아.”
“응.”
“나 네 얘기 듣고 싶어.”
“어떤 얘기?”
“어릴 때 얘기 해 줘.”
짧기만 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해 줘. 블라인드를 걷는 최한솔의 엉덩이를 팡팡 쳤다. 최한솔이 웃으면서 입을 뗐다.
함박눈이 우수수 떨어지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었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이제 막 한국에 도착했을 때였다 했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주지 않는단다. 할머니는 늘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는 한국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를 보다 즐겁게 보내고 싶어하셨고,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고 하셨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조립식 트리를 꾸미고 가랜드를 달아 분위기를 냈다. 아빠와 나는 임신한 엄마를 위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러 가기로 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목도리를 꽁꽁 싸맨 채로 아빠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웬만한 가게는 모조리 문을 닫거나 케이크가 품절된 상태였고, 우리는 꽤 오래 걸어야 했다. 그러던 중 딱 한 곳, 환하게 켜진 불빛 아래 초콜릿 케이크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하나 남은 케이크를 위해 아빠는 나를 들어 안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지금에서야 어릴 적 걸었던 그 거리를 떠올린다면, 화려한 전구와 눈 밟는 소리, 코가 새빨개질 정도의 추위에서 쥐었던 아빠의 손만이 존재했다. 아빠는 다정하신 분이었다.
그때였다. 아주 밝은 빛이 우리를 비췄다. 미끄러웠던 눈길에 차마 속도를 줄이지 못했던 시내버스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빵빵대는 경적 소리에 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다음부턴 기억이 없어. 그때 날 살렸던 게 저승사자라는 것만 기억 나.”
“왜 안 울었는데?”
“할머니가 생각 나서.”
“… 미안.”
“이제 괜찮아. 너도 있고.”
“너 진짜 이런 말 하고 나서 그런 말 하지 마.”
이런 말은 뭐고 그런 말은 뭔데. 몰라. 하지 마. 머릿속이 복잡했다. 얼핏 궁금하긴 했어도 그냥 안 물어봤던 건데. 어릴 적 얘기를 해 달라니까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얘기를 들어 버렸다.
“진짜 괜찮은데.”
“조용히 해.”
“승관아.”
“조용,”
“키스해 줘.”
“뭐?”
해도 돼? 최한솔이 점점 다가왔다.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확 코를 물어 버릴까. 진짜 할 작정은 아니겠지? 근데 또 새삼 잘생겼다. 더 오면 진짜 닿을 것 같은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코를 무는 대신 눈을 팍 감았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 왔다. 카톡!
“….”
아 씹.
“누구야?”
“김주영.”
“걔가 너한테 카톡을 왜 해?”
“체육 창고로 오라는데.”
“안 가면 안 돼?”
“안 되는 거 알면서.”
김주영 진짜 지옥불에 내던져 버리고 싶다. 승관아, 그런 말 하면 나중에 다 너한테 간다. 헉.
“나도 갈까?”
“아냐. 금방 올게.”
“알겠어. 십 분 지나도 안 오면 나 진짜 갈 거야.”
“삼십 분만 기다려.”
“십오 분.”
“그래, 십오 분.”
복도 창문 밖으로 최한솔의 옆모습이 보였다. 속눈썹 진짜 기네. 아깐 진짜, 닿는 줄 알았다. 닿은 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어감이 주는 아무튼 그런 게 있다.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지, 갑자기 그렇게 막 오는 앤 또 처음 봤다. 미친. 근데 속눈썹 진짜 길다.
안 되겠다 싶어 에어컨 온도를 내렸다. 더 내려가면 냉방병 온댔는데. 지금 내가 더우니까 잘 모르겠다. 창밖으로 본 운동장은 보기만 해도 뜨거웠다. 엄청 움직이고 시끌시끌한데 나 혼자 조용하니 다른 공간인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최한솔은 무슨 공간에 있을까.
김주영. 목사 아들놈이 게이인데다가 사람이나 패고 다니는 미친놈. 그렇게 타이밍 나쁘게 방해를 하니 또 열이 뻗쳤다. 개자식. 근데 또 때마침,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최한솔 왜 안 와?”
“나 최한솔 아닌데?”
김주영이었다. 스피커 너머로 낄낄대는 소리가 넘어왔다.
“너 왜 최한솔 폰으로 전화해?”
“그러게?”
뚝, 액정 위로 최한솔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최한솔. 체육 창고로 가야 했다.
나를 창고로 오게 하려는 걸 안다. 쥐덫에 걸어 들어가는 꼴인 걸 안다. 그래도 어쩌겠어. 최한솔을 데리러 가야 한다. 알지만, 알지만. 가지 않는다면 고를 선택지 같은 건 없다.
최한솔, 최한솔. 최한솔. 발이 다 까지도록 뛰며 생각했다.
“믿어, 믿어. 부승관. 믿어.”
그때의 너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믿지 않는다. 신이 내린 아이까지 받아 놓고서는. 걔는 내 믿음이 부족해서 불안한 거랬다. 하지만, 솔아. 내가 믿는 건, 눈에 보이고, 들을 수 있고, 발돋움하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오직 하나. 그게 너야.
이딴 것도 운명이라고. 오지랖을 겨우 참아 냈던 그 차분한 얼굴을 떠올렸다. 운명. 그 애의 삶은 운명이라서 개입할 수 없는 거라며. 그치만 한솔아, 내가 널 만나게 된 것마저 운명이라면.
내가 주저 않고 네게 뛰어들 것도 결국 나의 운명이었던 거야.
“최한솔!”
“야, 승관아. 무슨 그렇게까지 뛰어와. 내가 뭐라고.”
“… 김주영.”
최한솔. 괜찮아? 안 맞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최한솔의 입가에 피딱지가 만져졌다. 안 맞기는. 입술에 앉은 피딱지 빼고는 다친 덴 없는 것 같았지만 하필 얼굴이라 더 속상했다. 이 새끼가 얼굴이 생명인 애 입술을.
“근데 왜 날 찾으러 와 놓고 다른 놈 이름을 불러. 기분 좆같게.”
“너 미쳤어? 적당히 해. 애먼 사람 때리는 게 취향이야?”
“와, 어떻게 알았지. 잘생긴 애 패는 게 내 유일한 낙이야. 어? 부승관.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요즘은 범죄자도 변태면 면제인가 봐.”
“뭐라고 했냐?”
“너 변태라고.”
이 새끼가. 김주영이 제대로 빡돌았는지 빠따를 질질 끌어왔다. 저건 또 어디서 났대. 내가 왜 쟤 대신 처맞으러 왔는지는 여전히 몰랐지만 저거 한 대 맞으면 좆된다, 딱 하나 알았다.
피해야 되는데. 저거 피하면 최한솔이 빠따 맞을까 봐. 두 발은 바닥에 찰싹 붙어 있을 작정인 듯했다. 은색 빠따가 머리 위로 빠르게 떨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헉….”
“너 진짜 뭐 해?”
저거 맞으면 어쩔 뻔했는데. 최한솔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나는 거기 서서 어쩔 생각이었지. 그제야 등골이 오싹했다. 김주영 쟤 지금 머리 노린 거 맞지.
“승관아.”
말이 안 통하는 미친놈은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했다.
“또 피하면.”
그렇다면 무장한 미친놈은,
“둘 다 진짜 병원복 입혀 버린다.”
당장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뛰자.”
“아!”
발목이 얼얼했다. 최한솔이 빠따를 피해 날 잡아 끌었을 때 발목을 삐끗한 모양이었다.
“발목이 그따구인데 어떻게 뛰려고 그래.”
바닥에 빠따 끌리는 소리만 웅웅 울렸다. 엄마. 어떡해. 나 미친놈한테 맞아 죽나 봐.
“아악!”
그 순간 김주영의 위로 나무 판때기가 떨어졌다. 창고 내에 탄내가 진동하더니 곧 파란색 창고가 일렁이는 빨간 불에 삼켜졌다. 농구공이고 꼬깔이고 불이 붙어 타올랐다. 최한솔 짓이구나.
“솔아.”
“이것도 운명일까?”
운명이고 나발이고. 도망쳐야 했다. 우리까지 타 죽게 생겼어, 최한솔. 빨리 일어나. 혹여나 놓칠세라 손을 꽉 쥐었다. 이미 타고 있던 집은 한참 전에 벗어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체 없던 그 능력. 살면서 딱 한 번. 내가 위험할까 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집까지 태우면서. 진짜, 나쁘고,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 울어?”
“너 이제 어디서 잘 거야. 이제 진짜 어떡할래. 너 큰일 났다.”
“나 재워 주면 되지.”
“… 내가?”
“어, 네가.”
이상하게도 차분한 목소리에 조금 진정된 마음이었다. 반대로 더 빨라진 걸음으로, 우리 아파트를 향해 뛰었다. 가자. 우리 집. 땀에 젖은 손바닥을 애써 무시하며 최한솔을 잡아 끌었다.
“솔아, 솔아.”
“응.”
“한솔아, 내 솔아.”
“응, 승관아.”
“나. 나 직면했어. 도저히 널 외면할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서. 나 직면했어. 나 잘한 거지?”
잘했어. 거실 찬 바닥에 볼이 눌려 발음이 우스웠다. 바보 같은 최한솔. 사랑스러운 내 찰나. 그 입술에 손을 뻗었다. 충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정말, ‘찰나’였다. 최한솔이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이번엔, 진짜 했다. 바싹 마른 최한솔 입술이 거칠었다.
당장이라도 탄내가 날 것 같았고 피딱지가 딱딱했다. 하지만 그냥, 모르겠다. 다 모르겠고 단지 눈 감았다. 뭣 모르는 첫키스에 혀만 쪽쪽 빨았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둘기가 까마귀마냥 까악거리며 창문에 날아와 부딪히는 것만 같은 환상이 보였다.
살면서 딱,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말한다. 누구든지, 후회하고 있는 과거가 있다고. 모두 그 과거로 돌아갈 거라고. 내 삶에 후회가 절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서. 그치만 후회가 모여 지금의 시간을 만들어 낸 것이라 믿는다. 나는 역시, 네가 좋다. 지금이 좋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지금에 의미가 있는 걸 이제는 안다.
“잠깐, 잠깐만. 숨, 숨이 차서 그래.”
“거스른 운명마저 운명이겠지.”
넌, 진짜, 끝까지. 안도한 눈빛 밑으로 목걸이가 뚝 떨어졌다.
해방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