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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정] 불시착 외계인

둥 / 글

혼자 남았다.

아마 건물이었던 것의 잔해들만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간은 저 한 명뿐이다. 급하게 가지고 나왔던 라디오의 주파수를 계속 조절해 보아도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릴 뿐이었다.

 

분명 저는 제 연인의 손을 잡고 건물에서 나왔는데. 한솔이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 연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보다 뒤에서 나오는 바람에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버린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굉음이 들렸을 때 제 연인의 손을 놓쳐 버렸더라. 한솔은 연인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손을 쳐다보았다. 일단 무너져 가는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급급하여 건물 밖으로 나오더라도 무너지는 건물에 깔릴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던 그 찰나의 순간, 한솔과 그의 연인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제 안전하다고 안심했던 것이다.

 

 

“... 정한이 형.”

 

 

혹시나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솔은 제 연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하다. 폐허가 된 도시에 ‘정한이 형’ 네 글자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래, 살아있을 리가 없지. 굉음이 들린 후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니 지금까지 살아있을 확률은 0에 가까웠다. 아니, 그냥 제로다. 0 퍼센트. 0,000001%의 가능성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린 사람이, 그 건물 잔해에 의해 부상까지 당했다고 가정했을 때,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지. 아마 정말 운이 좋아야 겨우 1시간 정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한솔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서서 제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저와 제 연인이 있었던 건물 잔해들 사이의 틈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직 살아있다면 신음 정도는 들릴 텐데. 고요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최한솔은 서기 3017년 인류 대멸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류가 되었다.

 

 

한솔은 무너진 건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희가 살아있을 때 인류가 멸종할 거라는 것은 예상했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봄과 가을은 존재하지 않았고, 여름과 겨울, 두 가지 계절이 1년 단위로 바뀌었다. 한솔이 그러한 말을 꺼내면, 주변 사람들은 천 년보다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똑같은 소리를 했다며 한 소리 하고는 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이 무색하게, 인류가 멸종해버렸다. 한솔이 살아있으니 완전한 멸종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세상에 홀로 남은 인간이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한솔은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혹여나 제 연인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 나섰겠지. 한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념을 하곤 제 연인의, 또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떠났다. 만약 이런 장면을 다른 인간들이 살아있어서 보게 된다면, 한솔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며 욕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솔은 살아남은 사람이기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있는 사람의 본분을 다해야 했기에, 그 무덤을 떠났다.

 

한솔은 제 연인이 살아있었다면 했을 듯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덤을 떠나는 것이 그 첫 번째 행동이었고, 그다음은 걸어 다니며 쓸만한 것들을 찾는 것이었다. 이 근방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한솔은 아마 편의점이 있었을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마 안 가 지붕이 무너져 내려서 건물 내부가 훤히 드러난 편의점 건물이 보였다. 지붕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콘크리트 덩이들을 밟고 올라가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편의점 안에도 사람이 많았을 테니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마스크의 악취 제거 필터가 가동되었다. 한솔은 선반에서 쏟아진 식품들을 줍고, 문 유리가 깨진 음료수 쇼케이스에서 물과 이온 음료 등을 꺼냈다.

식량을 들고 다닐 만한 것을 찾던 한솔의 눈에 에코백 끈이 들어왔다. 한솔은 에코백을 깔고 있는 작은 콘크리트 덩이 하나를 들어서 에코백을 꺼내었다. 에코백 안에는 푸른빛 액체가 들어있는 작은 병이 들어있었다. 병에는 뭐라 작게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뭐지? 음료수인가? 한솔은 약간 갈증이 나는 상태였기에 병뚜껑을 열고 그 액체를 마셨다. 음료수였는지 달달한 맛이 났다. 이 에코백 주인은 왜 음료수를 이런 병에 들고 다녔을까? 한솔은 편의점에서 구한 식량들을 에코백에 차곡차곡 담으며 생각했다.

 

어느새 잿빛이었던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한솔은 넓고 평평해서 침대로 쓸만한 건물 잔해를 발견하곤 그 위에 누웠다.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멸종시킨 지구가 축제라도 벌이는 것인지 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린다. 정한이 형이 예전에 유성우 쏟아지는 거 보고 싶댔는데. 한솔은 눈을 감았다.

 

 

 

한솔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 무너졌던 그 건물에 있던 제 집 천장이다.

 

어, 꿈이었나?

한솔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익숙한 풍경이다. 언제 무너졌었냐는 듯 너무나도 멀쩡하고 익숙한 풍경이다. 연인과 함께 가구점에서 골랐던 식탁 위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건딸기가 들어간 씨리얼이 놓여있었다. 거실로 나가니 제 연인이 좋아하는 연보라색 러그가 깔려있었다. 러그는 마치 새 것처럼 깨끗했다. 어, 이 러그 때 탔다고 어제 형이 빨아서 널어놨던데. 언제 다시 깔았지?

생각해보니, 제 연인은 절대 저보다 먼저 일어난 적이 없다. 항상 제가 먼저 일어나 깨워줬는데 오늘 일어날 땐 제 옆에 없었던 것 같다. 한솔이 소파 쪽으로 고갤 돌렸다. 금발에 긴 머릴 한 한솔의 연인은 이불을 덮고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다.

 

 

“형,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으응... 솔아...... 조금만 더 잘래......”

“그래요. 근데 형 침대에서 자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얼른 들어가서 누워요.”

“으응...? 오늘은 네가 침대에서 자는 날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같이 자잖아요.”

“너야말로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우리 침대 좁아서 같이 못 자잖아... 그나저나 지금 몇 시야...?”

 

 

한솔은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쳐다보았다. 3016년 8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 4분. 3016년? 인류가 멸종한 어제의 날짜는 3017년 8월 16일이었다. 형 우리 시계 고장 났어? 한솔의 연인은 한솔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해. 우리 저 시계 어제 샀잖아.”

“아......”

 

 

그렇게 1년 전으로 돌아왔다. 한솔은 제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제 연인을, 혹은 제 연인과 다른 사람들도 구할 기회가. 1년 전 지구 위의 인간들은 여전히 똑같았다. 저들이 살아있는 동안 인류의 멸종은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미 인류의 멸종을 겪었던 한솔은 그들 사이에 섞여 살아갔다. 한솔의 연인은 처음엔 이상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곧 그런 한솔에 적응하며 익숙해져 갔다. 1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둘은 데이트도 다니고, 집에 있던 좁은 침대를 두 명이 넓찍하게 잘 수 있는 침대로 바꾸었다. 5주년 기념일도 챙기는 등 한솔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과 다름없는 하루들이 반복되었다. 반년도 안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정한이 형, 일어나요. 우리 오늘 일찍 일어ㄴ,”

 

 

자는 제 연인을 깨우려고 한솔이 옆으로 손을 뻗었을 때 손에 잡힌 건, 말랑하고 따뜻한 제 연인이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콘크리트 덩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전에 제가 유성우를 보며 눈을 감았던 그곳이다. 저를 제외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솔은 다시 3017년 8월로 돌아왔다.

 

왜 다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온 걸까. 그것보다 저는 어떻게 과거로 돌아간 걸까. 뭘 잘못 먹었나? 먹은 거라고는 그 파란 음료수가... 아, 그 음료수. 한솔은 옆에 두었던 에코백에서 푸른빛 액체가 들어있던 병을 꺼내었다. 병에 붙어있는 스티커에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이 물약을 마시고 유성우가 내리는 날 잠에 들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단, 이동한 시간대 기준 4개월이 지나면, 원래 시간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약 한 병당 시간 여행은 3번까지 가능합니다.’

 

‘이동하는 시간대를 정할 수 있는 주문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랜덤 시간대로 이동하게 됩니다.’

 

‘주문:⪋

 

 

가장 중요한 부분이 찢긴 상태였다. 주문이 없으면 원하는 시간대로 이동할 수 없는데. 주문이 없다. 횟수에 제한이 있어서 원하는 시간대로 갈 수 있을 때까지 무진장 과거로 시간 여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번의 시간 여행 중 한 번이 아무런 성과 없이 날아가 버렸다.

 

유성우가 또다시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진다.

 

깜빡 잠들어 버렸다.

 

 

한솔은 다시 눈을 떴다.

한솔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앉아있었다. 한솔의 상의는 흰색의 약간 빳빳한 재질의 반팔 옷이었고, 가슴께에 붙어있는 초록색의 네모난 무언가에 ’최한솔‘ 석 자가 흰색 실로 적혀있었다. 바지는 역시나 약간 빳빳한 재질에 남색이었다. 여긴 또 어디란 말인가. 주변을 둘러보던 한솔의 머리를 무언가 톡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최한솔, 너는 등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수업 시간에 자고 있냐? 어제 등교했다. 어제!”

“... 네? 그... 진짜 죄송한데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서요. 여기가 어디인가요?”

“얘가 진짜... 당연히 학교지, 그럼 어디겠냐? 너 혼자 아직 집이야?”

 

 

흰 마스크를 쓴 어른이 한솔에게 다가왔다. 제 주변의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도 죄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왠지 답답하다 했더니 한솔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한솔이 원래 시간대에서 쓰던 마스크와는 디자인이 달랐지만, 그게 마스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솔은 순간 평행우주 세계 간의 이동도 가능하다고 착각할 뻔했다. 한솔이 살던 시간대에서는 공기 질이 좋지 않아서, 외출을 할 땐 항상 마스크를 차고 나갔다. 학교라는 공간은 온라인 상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현실에 존재하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서 건물 안에서도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옆에 분필이나 주워라. 수업 계속하게.”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그게 분필이지, 수수깡이겠어?”

 

 

마스크를 쓴 어른이 한솔의 손에서 분필이라는 것을 낚아채곤 진초록색 판 앞으로 갔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인데. 한솔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아는 것과는 재질이 다르긴 했지만, 달력 같은 것이 벽에 걸려있었다. 2020년 6월 4일. 망했다. 3017년 4월로 왔어야 했는데. 한솔은 거의 1000년 가까이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었다. 아, 이 장면 교과서에서 영상으로 본 것 같애. 전자 교과서로만 봤던 2000년대 한국 교실의 모습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서기 3017년의 최한솔은, 서기 2020년에 불시착했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던 학교가 끝나자, 한솔에겐 아주 큰 문제 하나가 생겼다. 첫 번째 시간 여행 땐 제 집 침대에서 깨어났지만, 이번엔 학교에서 깨어나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4개월을 보내야 하는데 집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 연인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한 건데, 정작 제 연인이 없다.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제 연인은 보이질 않았다. 큰일 났다. 어떡하지? 한솔은 멍하니 교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한솔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이구, 우리 솔이 형 기다렸어?”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체향. 분명 그 사람이다. 한솔이 뒤를 돌아보자, 오늘 한솔이 학교에서 그렇게 찾아 헤매던 사람이 있었다. 저와 같은 옷을 입고. 가슴께에는 하얀색에 검은 실로 ’윤정한‘ 석 자가 적혀있었다.

 

 

“정한이 형?”

“맞아, 나야!”

 

 

천 년 전에도 한솔의 연인은 그대로였다. 말투와 체향 그리고 웃는 모습까지도. 너무 그리웠던 나머지, 한솔은 그대로 그를 안을 뻔했다. 아, 지금은 2020년이지. 제 눈앞에 서있는 제 연인은, 제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2020년에 사는 ‘윤정한’이었다.

 

 

“먼저 가지 왜 기다리고 있었어. 나 오늘 좀 늦게 끝나서 아침에 먼저 집 가라고 했었잖아!”

“아... 까먹고 있었어요.”

“으음~ 사실 나랑 같이 가고 싶었던 거 아냐?”

 

 

한솔의 귀가 빨개지자, 정한이 한솔의 볼을 꼬집었다. 으이구, 귀여워라. 아! 얼른 집 가서 아이스크림 먹자! 좀 덥다, 그치? 정한이 한솔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중심을 못 잡은 한솔의 발이 정한의 다리에 걸리자, 정한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쿠당탕-

한솔이 급하게 정한을 붙잡고 뒤로 넘어진 탓에 바닥에 누워있는 한솔 위에 정한이 올라탄 모습이 되었다. 가깝다. 입술 사이의 거리가 1cm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정한의 얼굴이 빨개졌다. 내 얼굴도 지금 저렇게 빨갛겠지.

 

 

“어... 형, 괜찮아요?”

“ㅇ, 어? 응... 어, 나는 네가 잡아줘서 괜찮은데... 너는 괜찮아? 등이랑... 안 쓸렸어?”

“아... 괜찮아요, 가방 메서 안 다쳤어요.”

 

 

... 형, 이제 내려오면 안 될까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정한은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얼른 한솔의 위에서 내려왔다. 미, 미안해 한솔아. 한솔은 일어나서 옷을 툭툭 털었다. 부끄러운지 정한은 한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으론 한솔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2020년의 형과 나는 이런 관계인 건가. 얼굴 가까워졌다고 서로 얼굴을 붉히는, 그런 관계. 연애를 하기 전 먼 미래의 저와 제 연인의 관계가 딱 이러했다. 얼굴만 좀 가까워져도 부끄러워 얼굴 붉히는 관계. 2020년의 형과 나는 아직 안 사귀나 보다.

 

 

“야, 최한솔 안 다치긴 뭘 안 다쳐!”

 

 

으이구, 피 나는 거 봐! 팔꿈치 다 쓸렸네. 제 팔꿈치를 보니 정한의 말처럼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 아까 넘어지면서 쓸렸나 보다. 쓸린 걸 보니 이제야 팔꿈치가 쓰라린 것이 느껴졌다.

 

 

“얼른 집 가자. 소독하고 반창고 붙이자. 일단 이 손수건이라도 대고 있어.”

“네.”

 

 

정한이 한솔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정한의 포실포실한 검은색 짧은 머리가 정한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들썩거린다. 형은 천 년 전에도 귀여웠구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한은 주방 선반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와 탁자 위에 놓았다. 한솔아, 여기 앉아. 정한이 접이식 의자를 펼쳐서 팡팡 두드렸다. 한솔이 앉자, 정한이 소독솜을 꺼내어 상처 부위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아!”

“많이 따가워?”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많이 따가워서 한솔은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미안해. 금방 끝내 줄게. 정한이 구급상자에서 큰 반창고 하나를 꺼내었다. 정한이 반창고를 붙이는 동안, 한솔은 집을 둘러보았다. 여긴... 정한이 형 집인가? 잠금 기계 비밀번호를 정한이 입력했던 것을 보면, 정한의 집인 것 같았다. 사람 한두 명이 그냥저냥 살만한 크기의 옥탑방이다. 어른과 함께 사는 듯한 흔적은 없었다. 혼자 사나 봐.

 

 

“자! 됐다! 이제 가도 돼!”

“아, 네. 그럼 저 가볼게요. 내일 봐요.”

“응? 뭔 소리야? 어딜 가? 아니... 네 방 들어가도 된다는 소리였는데.”

“아.”

 

 

아, 2020년에도 형이랑 같이 살았나 보다. 한솔은 머쓱한 듯 머릴 긁적이며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뒤에서 정한이 급하게 한솔을 막아 세웠다.

 

 

“아! 한솔아! 거긴 내 방이잖아!”

“아...! 미안해요.”

“... 거긴 화장실이고...”

“... 아?”

 

 

거긴 베란다야... 그 옆방이 네 방이잖아. 세 번이나 방을 잘못 찾아가고, 정한이 나서서 방을 알려주고 나서야 한솔은 제대로 방을 찾아갈 수 있었다.

적응되지 않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한솔은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던졌다. 아! 원래 시간대에서 사용하던 침대와는 달라서 한솔은 침대 나무 부분에 다리를 박았다. 한솔의 비명에 놀란 정한이 무슨 일이냐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려는 걸 한솔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이대로 어떻게 4개월을 보내지. 또 한 번의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과연 내가 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원래의 저였다면 이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제가 그 물약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어떻게든 아무도 남지 않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끝을 맞이했겠지. 물약을 마시고 시간 여행을 하는 지금은? 이번에는 제 연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이 공존한다. 희망 고문이다. 제 연인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반창고를 붙인 팔꿈치가 여전히 쓰리다.

 

 

-

 

 

“한솔아, 자가 검진 했어?”

“아, 맞다. 고마워요.”

“오늘은 웬일로 비가 안 오네. 비 안 오니까 좋다.”

“그러게요. 장마 끝났나?”

 

 

이제 당분간은 비 안 왔으면 좋겠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뜨자, 정한은 오랜만의 비타민 D 섭취라며 방방 뛰어다녔다. 18살의 정한이 형은 진짜 귀엽구나. 26살 때도 귀여웠지만. 17살의 몸을 한 23살의 한솔에겐 18살의 정한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쏴---

 

 

“아니... 학교 올 때까지만 해도 쨍쨍했는데......”

 

 

나 우산 없단 말야! 하교 시간이 되자 다시 구멍이 뚫린 하늘에 정한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정한이 한솔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 저도 장마 끝난 줄 알고 우산 안 챙겨왔어요. 한솔의 말에 정한은 허어어- 하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집 어떻게 가?

 

 

“우리 반에 남는 우산도 없던데...”

“저희 교실에 주인 없는 우산 있는데 들고 올까요? 어차피 애들 안 챙겨 가던데.”

“그럴까?”

 

 

한솔은 얼른 교실로 가서 우산꽂이에 꽂혀 있는 우산을 꺼내 펼쳐보았다. 안 들고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구나. 딱 두 개 있던 우산 모두 제 구실을 못 하게 생겼다. 하나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우산 대가 부러져 쓸 수 없었다.

 

 

“형, 우산이... 다 못 쓰는 우산이던데요.”

“아 진짜... 우리 집 어떻게 가?”

“그냥 얼른 비 맞으면서 뛰어갈까요?”

“감기 걸려서 내일 학교 째고 보건소 가려고?”

“뛰면 2분 컷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난 몰라. 네가 뛰자고 했다? 셋을 세고 한솔과 정한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비를 맞으면서 가자던 한솔도, 방금까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정한도 비를 맞으면서 달리니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고 있었다. 비록 집에 도착했을 땐, 둘 다 홀딱 젖은 생쥐가 되었지만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킥킥거렸다.

그다음 날, 한솔과 정한은 사이좋게 몸살 감기에 걸려 학교 대신에 보건소를 가야 했다.

 

 

-

 

 

“한솔아, 내일 생일 파티는 여기 앞에서 할까?”

“...”

“한솔아?”

“네? 미안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

“... 내일 내 생일 파티 우리 옥탑방 앞에서 하자고.”

 

 

... 너 요즘 좀 이상해. 정한의 말에 한솔 역시 동의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저는 다시 3017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2020년의 정한과 3017년의 정한은 생일마저 10월 4일로 똑같았다. 한솔이 2020년에 불시착한 날짜는 6월 4일. 4달 후는 10월 4일, 정한의 생일이다. 2020년의 제 연인이지만, 비록 2020년엔 연인이 아니지만, 생일은 제대로 챙겨주고 싶었던 한솔이었다. 그런데 제가 정확히 언제 떠날지 모르니, 주어진 시간이 다가올수록 한솔은 초조해져 갔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3017년으로 돌아가 있을까 봐.

 

 

“... 한솔아, 진짜 어디 아픈 거야?”

“...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요.”

“아... 두통약 줄까?”

 

한솔이 고갤 끄덕이자, 정한은 두통약을 꺼내와 물 한 잔과 함께 한솔에게 건넸다. 먹고 푹 자. 머리 아플 땐 그게 최고야. 약을 삼킨 한솔은 방에 들어가기 전 정한을 한 번 쳐다보았다. 정한은 빨리 들어가서 자라며 손짓했다. 어쩌면... 저 모습이 2020년의 정한이 형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겠지. 한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유성우가 떨어지는 검은 하늘이 아니라, 베이지색 천장이 보였으면. 차가운 건물 잔해 위가 아니라, 푹신한 침대 위에서 깨어났으면.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으면.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면 정한이 형이 있었으면. 제발.

 

한솔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베이지색 천장이다. 제가 누워있는 곳은 푹신한 침대 위이다. 방문이 보인다. 한솔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 한솔아! 머리는 좀 어때? 이제 안 아파?”

 

 

정한이 형이다. 다행이다. 나 아직 2020년에 있구나. 한솔은 달려가 정한을 제 품에 가두었다. 정한이 배시시 웃었다. 뭐야~ 생일 선물이야?

 

 

“네. 생일 축하해요, 정한이 형.”

 

 

다행이다. 생일 축하도 해줄 수 있어서.

 

한솔이 꽤 오래 잤었는지, 어느새 시간이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정한이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한솔의 팔을 툭툭 쳤다. 빨리 생일 준비하자! 케이크는 어제 네가 사서 왔고... 치킨은 내가 시킬게! 너는 옥상에다가 돗자리 깔고 책상 이것 좀 옮겨줘! 우리 피자도 시킬까? 음... 둘이 먹기엔 너무 많나?

 

 

“형 마음대로 해요. 오늘은 형 생일이니까.”

“그래! 그럼 솔이 생일 땐 솔이가 먹고 싶은 걸로 시키자!”

 

 

정한의 말에 한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때는 내가 아니라 2020년의 최한솔과 함께이겠지.

정한은 한솔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 책자를 꺼내어 이 페이지 저 페이지 넘겨보기 시작했다. 한솔도 화장실에 가서 세수 한 번 하고 정한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형, 소원 빌어요.”

“한솔이랑 평생! 건강하게 함께 살게 해주세요!”

 

 

어느새 해가 지고 세상이 어둑어둑해졌다. 정한이 촛불을 불자, 한솔은 옥탑방으로 달려가 거실 불을 켰다. 창문을 통해 전등 빛이 옥상을 밝혔다.

 

 

“초콜릿은 형이 먹어요.”

“아냐, 반 나눠 먹자.”

 

 

둘은 옥상 난간 앞에 나란히 앉아서 조각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오늘 별 진짜 예쁘다. 그렇지? 정한의 말에 한솔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꼭 유성우가 떨어질 것만 같은 밤하늘이다.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밤하늘이다. 한솔과 정한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익숙하지 않은 정적에 한솔이 정한을 바라보자, 정한이 입을 뗐다.

 

 

“... 한솔아, 너 떠나는 거지? 다른 곳으로.”

“네? 아...... 네. 근데 어떻게...?”

“그냥, 요즘 보면 꼭 어디 떠날 사람처럼 행동하길래 ‘곧 떠나겠구나’ 했어. 근데 진짜 떠나는 거였네.”

 

 

아... 한솔이 생각하기에도 최근 저의 행동들이 부자연스럽긴 했었다. 얼마 전부터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주말 등 비는 시간에 짬짬이 하던 알바도 그만 두었다. 옥탑방에 있는 저의 물품들도 제가 이곳에 불시착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리했다. 그걸 옆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던 정한의 입장에선 당연히 한솔이 곧 떠날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 어디로 떠나는 거야?”

“원래... 있던 곳으로요.”

 

 

이런 말 하면 안 믿겠지만, 전 미래에서 왔어요. 3017년에서요. 말하자면 길어서... 제 연인이었던 형을 살리려고 시간 여행을 하다가 2020년에 불시착한 거였어요. 정한이 아무 말 없이 한솔을 바라봤다.

 

 

“그럼... 997년 뒤에 우린 사귀고 있는 거야?”

“네? 네.”

“그럼 그때도 우린 만나겠구나.”

 

 

다행이다. 그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우리 영영 못 만나는 건 아니네. 정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한솔에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 여행마저 원하는 시간대로 가지 못한다면, 이젠 영영 못 만나게 되겠지. 저 미소를 볼 수도, 저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겠지.

아마 제가 떠나면, 이 시간대의 사람들은 앞으로 3017년의 최한솔이 아닌 2020년의 최한솔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럼 아마... 형은 혼란스럽겠지.

 

 

“... 저를, 최근 4개월 동안 봤던 최한솔을 그냥 형 인생에 잠깐 스쳐 지나간 외계인 하나라고 생각해주세요. 4개월 동안 봐왔던 최한솔이라는 외계인은 잊고,”

 

 

4개월 전까지 봤었던, 앞으로 볼 최한솔이라는 인간만을 기억해주세요.

 

 

“...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한솔은 정한의 볼을 잡고 붉은 정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밝은 별들이 수놓은 까만 하늘에 유성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형, 저 이제 돌아가 볼게요. 10월 5일 0시가 되자, 한솔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 좋아해, 한솔아.”

 

 

유성우처럼 빛나고 있는 한솔을 향해 정한이 말했다. 어떻게든 눈물을 참겠다는 듯 정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정한의 볼을 타고 또르륵 흐른다. 한솔은 정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저도 좋아해요, 형.”

 

 

우리, 미래에서 꼭 다시 만나요.

 

꼭 다시 만나자.

 

 

 

눈을 감았다 뜨니, 한솔은 다시 건물 잔해 위에 누워있었다.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이번에 3017년 4월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제 앞으로 영영 제 연인을 살려낼 수 없다.

 

 

‘제발, 이번에는 3017년 4월 16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정한이 형을 구해낼 수 있게 해주세요.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솔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잔해 위에 누워,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는다. 마지막 기회이다.

2020년의 정한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한솔은 마지막 시간 여행길에 오른다.

 

 

유성우가 떨어진다.

한솔의 몸이 밝게 빛난다.

 

3017년 8월 16일 지구에는 더 이상 인류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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