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츄찬] 잃어버린 시간 속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ZereN / 글
“찬 씨! 후배님!”
찬은 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서,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발이 빠른 그에게 곧 잡히고 말았다.
“저기, 후배님 우리-”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도 잠깐 얘기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과제가 많아서 바쁜데 가도 될까요? 찬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를 살짝 힐끔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고, 찬은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바보 선배…”
벌써 1주나 된 일인데,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츄찬] 잃어버린 시간 속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2020년 8월 솔페스 합작 참가작
친하지 않은 사이에는 전하기 어려운 말이 존재한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말을 전하지 못하면 관계는 지속되지 않고 서먹한 시간이 이어지다가 결국 서로 등 돌리게 된다.
이찬과 최한솔이 그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 안녕하십니까.”
같은 수업에서 조별과제를 함께 하는 사이였다. 학과도 완전히 다르고 공통점도 없이 둘 다 수강신청을 망한데다가 서로 잘 아는 학생들끼리 팀을 구성했으니 남은 사람들끼리 과제를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설상가상 같은 조에 배정된 학생들이 잠수를 탔으니 5인용 과제는 2인조의 몫이 되었다.
악연 아닌 악연으로 만나게 된 사이가 친해지기는 쉽지 않았다. 나이차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왜 친해지지 못하고 누가 묻기라도 한다면 찬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어제 자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할 일은 해야죠. 튀는 애들이 양심 없는 거예요.”
“이건 오늘 발표용 자료입니다.”
“헐, 엄청 깔끔하게 하셨네요?”
“후배니-… 찬 씨가 발표할 부분은 형광펜으로 체크했습니다.”
먼저 선을 그은 사람은 한솔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지 않으면서 제 영역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듯 경계를 하는 사람마냥 경어까지 쓴다. 이왕 과제를 둘이 하는 거 관계라도 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찬에게는 가시방석과도 같은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선배인 한솔이 말을 편하게 해줘야 찬도 편하게 대할 텐데, 존댓말을 쓰고 깍듯하게 후배님이라고 부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나마 지난주에 과제를 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서 밥을 먹었는데, 찬이 꼭 후배님이라고 불러야겠냐며 이름을 편히 불러달라고 했더니 ‘찬 씨’라는 호칭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이제 찬도 완전 포기했다.
어차피 오늘 발표 과제만 끝나면 안 볼 사이가 될 것이다.
“찬 씨, 혹시…”
“네, 선배님.”
“오늘 바쁘십니까?”
어찌어찌 발표까지 잘 마치고 수업이 끝난 후, 레포트를 쓰기 위해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한솔이 찬을 붙잡았다. 이제 더는 만나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한 느낌이었는데 찝찝해졌다.
“왜요?”
“과제도 잘 끝났는데 뒷풀이라도 합시다.”
“네?”
“삼겹살에 소주 좋아합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파악이 되지 않아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따라갔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자취촌 앞 가게는 아직 한산했다. 그도 그럴게 아직 5시 조금 넘었을 뿐이지 본격적인 식사 시간은 아니었다. 일단 사준다니까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를 굽는 한솔의 손만 가만히 바라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오히려 한솔이 제게 관심 아닌 관심을 주니까 괜한 욕심이 들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거리를 둔 채로 끝나버리는 관계라면 딱 좋았을 것을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을 해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괜히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춰보는 것도 힘들고.
찬은 양성애자다. 남자도 가능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고2의 여름, 동급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후였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남자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도 남자도 모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니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살게 되었다. 주변에 커밍아웃한 오픈게이는 아니지만 반대로 은둔까지도 아니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랄까.
한솔을 처음 봤을 때에는 첫눈에 반하기도 했다. 이국적인 외모를 포함해 큰 키와 낮은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이미지까지 딱 제 취향이었는데 그가 그렇게까지 선을 그으니 욕심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호의를 베풀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딱 먹기 좋습니다.”
“네? 아, 네.”
한솔이 제 앞에 놔주는 고기를 가만히 보다가 가볍게 소금을 찍어 입에 넣었다. 건배라도 하겠습니까? 정말 확 깰 정도로 무뚝뚝한 말투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도 되지 않았지만, 일단 주는 대로 받아먹기는 했다.
“술은 잘 드십니까?”
“그럼요, 제법 잘 노는 편이기도 하고.”
“좋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호의에 영문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술잔에 미련 따위는 털어버리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그가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 편히 마시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번 학기도 2주 남았으니까,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술을 마셨는데.
급발진을 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뭔가 허리 위로 묵직한 기분이 들었고, 어째서인지 웃통까지 벗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 아래를 보니 굵고 곧은 손이 제 허리를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곤히 자고 있는 한솔의 얼굴이 있었다. 빠른 판단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깨지 않게 조심히 팔을 빼내고 옷과 가방을 챙겨서 숨 막히는 방을 빠져나왔다. 저녁을 먹던 자취촌 안쪽의 주택가였다. 지금 제 위치가 어째서 이곳인가. 술이 그렇게 약했던가 싶기도 하고, 필름 끊기도록 마신 것도 오랜만이라서 꽤 당황스럽다. 시간도 아직 새벽2시, 식당 골목에는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이제 막 넘어오는 시점이니 평소의 찬이었어도 실컷 놀았을 시간인데, 오늘은 정말 평소 같지 않았나보다.
무슨 생각으로 그 사람과 잔걸까.
“미쳤어, 이찬.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기숙사로 돌아오는 내내 온몸이 욱신거리고 허리가 아픈 걸 꾹 참았다. 주저앉고 싶어도 참고 참았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목덜미부터 시작해 어깨며 가슴이며 등이며 심지어 다리 안쪽까지 빼곡하게 잇자국에다가 키스마크까지 흔적이 가득해 더 당황스럽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진짜 미쳤나봐, 어쩌자고 그 사람을 꼬신 거야?”
꼬신 건가? 내가 꼬신 게 맞는 걸까? 아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까지 게이일 리는 없잖아. 그래도 이상한데. 내가 왜 아래였지? 내가 대줄 테니까 자자고 꼬셨나?
아니, 내가 그럴 리가 없지!
“아, 진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욕실에서 한참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기억도 없어서 더 속이 터진다. 머리를 쥐어 싸매도 고작 몇 시간 전인데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이었는데. 한솔과의 관계만 처음이 아니라 제가 안기는 역할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중요하고 답답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최한솔’의 품에 안겨 ‘처음’을 내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제일 억울했다.
“이대로 끝날 거면 기억이라도 해야지, 빡대가리야-…”
한참 찬물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고 나오니 벌써 4시가 넘었다. 과제도 해야 하고 곧 다가올 기말고사 공부도 해야 하는데, 진짜 글러먹었다. 몸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그래도 주말이니까 일단 자고 생각해야겠다 싶어서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후 늦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한솔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다섯 건이나 남아있었다.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찬은 그 밑에 남아있는 문자를 보며 심란함을 느꼈다.
[일어났더니 없어서 놀랐습니다. 왜 말도 없이 갔습니까?]
[전화도 안 받고. 피곤한가봅니다. 주말인데 푹 쉬시길.]
[늦어도 되니 일어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아픈 거라면 더 걱정입니다.]
차라리 기억하지 말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찬은 눈을 감았다. 비참하다. 이렇게 된 상황에 괜히 제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연락하기도 애매하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 지도 모르겠고 괜히 좋지 않은 말이라도 들을까 두렵기도 해서 피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 주 내내 한솔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찬은 제가 속학 예술관 이외의 장소에는 가지 않았다. 특히나 한솔이 주로 머물 문학관은 근처도 지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래도 수업에는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등교해 가장 구석자리에 앉는 플랜을 택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찬 씨! 후배님!”
찬은 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서,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발이 빠른 그에게 곧 잡히고 말았다.
“저기, 후배님 우리-”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도 잠깐 얘기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과제가 많아서 바쁜데 가도 될까요? 찬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를 살짝 힐끔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고, 찬은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다음 주면 기말고사고, 이제 정말 볼 일이 없다.
정말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한솔은 끈기가 있었다. 귀찮을 정도로 자주 연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찬의 전화에 부재중 통화를 남겼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둥, 만나서 말을 하자는 둥, 답장을 전혀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락을 남겼다.
“찬 씨.”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한솔을 피하기 위해 전력으로 시험지를 제출하고 일찍 나왔던 찬은 오랜만에 클럽도 가고 실컷 놀다가 꽤 늦은 새벽에 돌아왔다. 평소 수업을 들으러 갈 때처럼 단정한 차림새가 아니라 각 잡고 놀다 온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취했다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칠까 싶어 술은 최대한 자제했지만 오랜만에 클럽에서 신나게 놀고 돌아오는데, 기숙사 건물 앞에 한솔이 있었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니 그도 다가오길 멈췄다.
“찬 씨, 우리 정말 얘기를-”
“싫다고 말씀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한 번 자니까,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뭐요?”
“미안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속상해서 그럽니다, 찬 씨가 자꾸 피하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한솔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괜히 이상했다. 슬쩍 다가가서 코를 킁킁대니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겼다. 제게서 나는 위스키와 다르게 소주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한솔도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선배님, 술 드셨어요?”
“…이제 다시 선배님입니까?”
“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정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한 한솔이 찬을 지나쳐 간다. 움직일 수 없었다. 한솔을 붙잡을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찬 씨-… 아니, 후배님.”
한솔이 찬을 불렀다. 호칭도 다시 후배님이 되었다. 돌아보기도 뭣해서 가만히 서있었는데, 뒤에서 한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제 안 그럴 겁니다.”
이런 감정도 부담인걸 아니까 다시는 안 마주치도록 제가 피할 테니 다음 학기 수강신청 끝나면 시간표라도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솔의 말에 찬은 제 귀를 의심했다. 좋아한다. 누가 누구를? 최한솔이 이찬을? 취했나? 고작 위스키 두 잔에 취한 건가 싶어 제 볼을 꼬집었는데,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다.
놀란 눈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무덤덤한 표정의 한솔이 서있었다.
“선배님.”
“너무 심하게 프레셔를 준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아니요, 선배님. 그런 게 아니고-…”
찬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츄찬] 잃어버린 시간 속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