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원] 마지막 여름, 첫 번째 겨울
1002 / 글
요즘 ‘광고천재 이제석’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대부분 집이나 연습실을 왔다 갈 때 지하철에서 많이 읽는다. 그런데 오늘은 깜빡하고 책을 집에 두고와 멍하게 지하철을 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참 길다. 60분 동안 버려져야만 했던 그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2013.06.02.-
*
2016/11/ 열아홉 한솔
서리가 낀 창틀 너머로 보이는 나무는 가지만 남아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한솔은 이제 정말 겨울임을 실감했다. 수능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고3의 겨울.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하나둘 패딩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아침 일찍 등교해 창밖을 보며 하릴없이 멍때리는 건 한솔의 심심한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재성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한솔을 쏘아보며 다가왔다. 야, 먼저 왔으면 히터부터 틀었어야지! 한솔은 제 어깨를 치는 감각에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긴다. 아, 미안.
“오늘 너무 춥지 않아? 오다가 동상 입을 뻔.”
재성이 옆자리에 앉아 담요를 말아쥐며 웅크렸고, 한솔은 자연스레 또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게, 너무 춥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한솔의 머리를 스치는 순간은 따뜻하다 못해 더웠다.
그러니까 그건, 한솔이 기억하는 마지막 여름의 순간이었다.
2014/8/ 열일곱 한솔, 열아홉 원우
승용차 뒷좌석에서 자다 깬 한솔은 창문을 내렸다. 덥지만 상쾌한 바람이 한솔의 앞머리를 흩트리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온통 푸르렀다. 이윽고 진해지는 바다 비린내와 커지는 갈매기 소리는 할머니 댁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한솔의 예상대로, 얼마 안 가 아버지가 몰던 차가 멈췄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할머니가 쪄주신 옥수수를 먹으며 선풍기 앞에서 땀을 식혔다. 마루에서 보이는 고즈넉한 바닷가의 풍경과 규칙적인 파도 소리는 한솔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한솔은 날이 저물기 전 수영을 가기 위해 가방을 뒤적이다, 얼마 전 이웃집에 한솔 또래가 있는 가족이 이사 왔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한솔은 수영복을 내려놓고 곧장 동네 유일한 슈퍼로 향했다. 쭈쭈바 하나를 입에 물고 또 다른 하나는 검은 봉지에 넣어 쥐고선 옆 집 대문 앞으로 고개를 반쯤 내밀었다. 한솔의 행동엔 큰 결심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같이 수영하면 재밌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비롯된 적극적인 행동, 그쯤이었다.
마당에는 잘 가꿔진 식물들이 한솔을 반겼다. 몇 번을 불러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한솔은 봉지를 손목에 걸고 쪼그려 앉아 작물 사이를 비집고 핀 작고 노란 접시꽃을 구경했다. 그리곤 검지를 이용해 살살 쓰다듬는다. 예쁘다.
“누구세요?”
“아.”
저 옆집 할머니 손잔데요, 혹시 원우 형이세요? 할머니가 지나가듯 말씀해주신 이름을 용케도 기억해낸 한솔이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원우는 눈이 부신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살짝 뜬 머리를 소용없이 매만졌다. 내려온 햇빛이 원우를 노르스름하게 밝혔다. 오후 4시가 다 지나간 시간인데 아직도 자고 있었던 건가? 의문을 품은 한솔은 원우를 빤히 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감상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방금 본 접시꽃과 비슷한 감상.
“할머니가 말씀해주셔서요. 일단, 이거 드세요.”
정신을 차린 한솔이 검은 봉투를 건넸고, 봉지를 받아 든 원우는 내용물을 발견하곤 한솔을 향해 곤란한 듯 바라봤다.
“고마워. 근데 내가 아이스크림을 안 먹어서.”
아, 그러시구나. 죄송해요. 팔자 눈썹까지 하곤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한솔에, 원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거 냉동실 넣어 둘 테니까 놀다가 이따 네가 또 먹어. 같이 놀아도 된다는 일종의 확답에 한솔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한솔과 원우는 공통분모가 꽤 많아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원우가 이사 오기 전 동네가 마침 한솔이 다니는 학교 근처였고, 둘 다 만화와 우주를 좋아했다. 원우는 한솔보다 2살이 많았다. 한솔은 두 살 차이나는 학교 형들을 떠올렸다. 저속한 말을 일삼으며 자존심만 챙기기 바쁜 그 형들과 원우는 확실히 달랐다. 그래서인지 한솔은 형, 형 하며 원우를 잘 따랐다. 여름 휴가가 끝나자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갔고, 한솔은 남은 방학 내내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재성에게 왜 안 오냐는 원망 섞인 전화를 받았을 때, 한솔은 이렇게 말했다. 어, 그냥.
대부분 둘이 보내는 공간은 원우의 집이었다. 원우 부모님은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나 들어오시니 원우의 집은 둘만의 아지트가 따로 없었다. 아지트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것을 하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방바닥에 엎드려 한솔이 가져온 만화책을 읽고, 가끔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원우를 위해 한솔이 수학 문제집을 가져다 같이 풀기도 했다. 활동적인 한솔은 원우와 함께 비활동적인 일상을 보내는 것이 충분히 재밌었다. 가끔 재성에게 ‘고2가 다 돼가는데 이래도 되는 거냐’며 핀잔 섞인 카톡이라도 오면, 그러게. 하고 넘겨버리기도 했다.
“누구야?”
“학교 친구요.”
아, 친구.
“나도 네 친군가?”
“아뇨, 형은 친구는 아니죠.”
“왜, 나이가 더 많아서?”
“음.”
제가 형을 좋아해서? 일순간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손부채질을 하던 원우의 손이 멈췄다. 짧은 적막 속 낡아서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당연하게도 그 적막을 깬 건 한솔이었다.
“몰랐어요?”
“….”
“그렇구나.”
“….”
“맞다. 수박 가져왔는데.”
한솔은 돌려 말할 줄을 몰랐다. 몰랐다기보단 제 마음을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게 더 맞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제 고백에 원우가 굳는 것. 그래도 솔직하지 못한 원우가 조금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솔은 원우에게 수박 한 조각을 건넸다. 저 창피하니까 이거나 받아요. 다짜고짜 고백한 한솔은 아무렇지 않고 정작 무언의 거절까지 한 원우의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수박을 다 먹고 마루에 나란히 누웠다. 대낮인데도 어렴풋이 달이 보였다. 한솔은 눈 부신 해를 손으로 가리고 달을 보려 애쓰다가, 문득 원우를 향해 몸을 돌아눕고 말을 걸었다.
“형, 우주는 정말 끝이 없을까요?”
“글쎄, 있을 것 같아?”
원우는 늘 한솔에게 되물었다.
“아직 끝을 발견 못 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맞네, 그럴 수도 있네.”
그리곤 늘 한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
있다고 믿지만 직접 볼 수는 없잖아. 오,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형은 항상 내가 예상치도 못한 걸 생각해요. 완전 대단.”
“이제 안 거야? 나 원래 완전 대단한 사람인데.”
“대박. 이 대답도 예상 못 했는데.”
한솔이 웃음을 터트리자 원우도 따라 웃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둘 사이엔 또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좀처럼 사족을 덧붙이지 않던 한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아졌다. 철부지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장난도 많이 쳤다. 한솔도 자신이 변했음을 느꼈다. 그 이유는 한솔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원우가 수박 껍질을 치우러 다녀온 사이 한솔이 먼저 잠들면, 원우도 그 옆에 누워 한솔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다 함께 잠이 들었다. 이따금 부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은 한솔의 붉은 입술에 호선이 그려졌다. 할머니 댁으로 돌아온 한솔은 쓰임 받지 못한 제 수영복을 가방 안쪽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원우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했다.
서울로 올라가기 하루 전, 한솔은 원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밤바다를 보자’고. 원우는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다. 이사 온 이래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라고 했다. 그런 원우가 밤바다를 보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 한솔은 생각했다.
여름이지만 밤바다 근처는 바람이 찼다. 한솔이 제 손을 원우에게 건넸고, 원우는 아무 말 없이 따라잡았다. 마냥 웃었다. 마냥 웃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평소와 같이 우주나 밤하늘 따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 진짜 빠르네요.”
“그러게.”
“….”
“가면 아쉽겠다.”
“누가요, 형이?”
“너랑 나.”
서로. 뒤편에 들리는 폭죽 소리에 원우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이방인들이 터트리는 형형색색의 것들이 원우의 눈에 담겼고, 그런 원우의 모습은 고스란히 한솔의 눈에 담겼다. 원우 형은 바다보다 하늘을 좋아하는구나. 한솔이 생각했다.
“예쁘다. 그치?”
원우가 묻자, 한솔은 대답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원우의 맞은편에 섰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한솔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원우의 시선은 여전히 폭죽에 머물러 있었다.
“원우 형.”
원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제 앞에 선 한솔이 저를 또렷이 마주 봤다. 가로등에 비친 한솔의 짙은 속눈썹 아래가 그늘지며 시선이 더 깊어졌다.
“키스해도 돼요?”
“….”
“고백은 저번에 했으니까.”
원우는 대답 대신 제 입술을 한솔의 입술에 갖다 댔다. 쪽. 입술을 떼자 낯간지러운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원우는 멋쩍게 웃으며 발로 애꿎은 모래 위를 비볐고, 그런 원우를 향한 한솔의 시선은 더욱 집요해졌다. 바닷바람이 거세지자 밀려오는 파도의 크기 역시 함께 커진다. 이번에도 당연히 한솔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저는.
“키스라고 했는데.”
한솔이 고개를 든 원우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원우가 먼저 스르르 눈을 감았고 한솔이 양손으로 원우의 볼을 감쌌다. 천천히 맞추고, 떼고, 이내 서로를 다시 찾았다. 느리지만 다급한 움직임이 계속됐다. 첫 키스는 서툴렀고, 부드러웠고, 또 뜨거웠다.
한솔에게 키스는 조금 짰다. 원우의 따뜻한 눈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한솔이 입술을 떼려고 하자 원우는 거리를 좁혀 안겨 기대며 팔로 한솔의 허리를 감아왔다. 왜 울어요. 묻고 싶은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입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대신 입술 새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솔의 볼에 또 한 번 물이 떨구어졌다. 이번엔 원우의 눈물이 아니었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밤 소나기는 꽤 거셌다. 며칠 전 뉴스에서 흘러나오던 비 얘기가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예보라도 보고 일찍 만날걸. 한솔은 답지 않게 괜한 후회를 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도 입술을 떼지 않던 둘의 키스는, 빗줄기가 거세지자 먼저 정신을 차린 한솔이 원우의 손을 잡아끌고 근처의 문 닫은 민박집 처마로 몸을 피하며 끝이 났다. 온몸이 젖은 채로 쪼그려 앉은 게 딱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와중에 서로의 입술만이 비가 아닌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한솔과 눈이 마주친 원우가 픽 웃었다. 원우는 웃다가 잔기침을 했다. 달리 그치게 할 방법이 없던 한솔은 원우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응, 괜찮아. 그 대답은 확실히, 확신이 없었다. 기침을 멈춘 원우는 꾸벅꾸벅 졸았고 한솔은 조용히 원우의 젖은 등을 쓸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빗소리가 잦아들자 한솔이 잠들었던 원우를 깨웠지만 원우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어날 수 없었다. 한솔은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원우 형, 형 일어나봐요.”
“….”
“형?”
“..나.”
아파. 그대로 정신을 잃은 원우가 한솔에게 기대 쓰러진다. 한솔은 원우를 업고 원우의 집으로 달렸다. 아줌마 아저씨, 형이 이상해요. 형이 아프대요. 어떻게 해요? 작은 시골 마을로 들어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들것에 실려 가는 원우, 그리고, 혼자 남겨진 한솔. 조각조각 나뉜 순간들이 한솔의 속을 파고들었다. 원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솔은 울었다. 행여 누가 들을까, 아무도 없고 파도 소리만 철썩이는 밤 바닷가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향해 한솔은 훌쩍이며 울었다. 이제야 알았다. 왜 처음 만난 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는지. 왜 학교에 다니지 않는지. 왜 수영을 하지 않는지. 그리고 생각했다. 왜 그날, 이럴 줄 알면서 나왔는지.
2016/11 열아홉 한솔
정신을 차려보니 인터넷 강의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한솔은 또 한참 생각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이상하다. 원우를 만난 건 여름인데, 이상하게 한솔은 추운 겨울이면 원우가 더 떠올랐다. 그해 겨울의 원우는 어땠을까, 따위의 잡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젓고 느릿하게 독서실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한솔은 그 뒤로 할머니 댁에 가지 않았다.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학업이란 아주 좋은 핑계였다. 드디어 발등에 불이 붙은 거냐는 재성의 농담에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원우에 대해서는 한솔답지 않게 합리화를 했다. 그냥, 어딘가에서 분명 잘살고 있으리라.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우주처럼. 한솔은 정리되지 못한 마음을 지우려 우주에 대한 생각을 한다.
2017/2 스물 한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던 한솔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시간엔 늘 원우의 생각을 했다. 지하철을 탈 때 책을 읽는 습관도 사라졌다. 그냥 하염없이 원우의 생각으로 시간을 축냈다. 졸업식인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의 따분한 훈화 말씀이 시작되자 한솔은 시선을 다시 아래로 떨궜다.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다시 원우의 생각을 한다. 선풍기 바람에 앞머리를 휘날리며 제 문제집을 풀던 원우. 마루에 누워 우주에 대해 얘기하며 눈을 반짝이던 원우. 제 옆에서 곤히 잠들었던 원우. 그리고, 제게 먼저 입 맞추던 그 여름날의 원우.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졸업식도 끝이 났다. 한솔은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그 대신 재성을 포함한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강당 밖으로 어딘가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원우의 것을 한 형체. 한솔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더러 다른 사람을 보고 착각을 하곤 했다. 제 착각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착각하고 싶지 않다. 상실감을 자신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한솔의 걸음이 느려졌다.
“잠깐만.”
“왜? 애들 다 밖에 있다는데.”
“어, 너 먼저,”
나가 있어. 말이 끊김과 동시에 한솔의 걸음이 멈췄다. 정면으로 그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한솔은 고개를 들어 그 형체를 마주했다. 한솔아. 착각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근원지, 시선 끝에는 제가 그토록 그리던 원우가 서 있었다. 비현실적인 감각에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떴다.
“오랜만이네.”
“….”
“졸업 축하해.”
원우가 미소를 짓는다. 그때 그날, 폭죽을 바라보던 때처럼.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겨울의 원우라는 것. 그때 그 여름의 접시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감상이라는 것. 한솔의 시선은 한시라도 원우를 놓칠세라 그를 쫓았다. 옆에 있던 재성이 아는 사람이냐 물었지만, 한솔에겐 들릴 리 만무했다.
원우는 한솔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한솔은 벌게진 눈으로 원우를 끌어안았다. 한솔이 확 당겨오는 탓에 원우가 놓친 꽃다발을 재성이 부케마냥 받았다. 나이스 캐치. 이미 그건 둘 모두에게 안중에도 없었지만. 끌어안은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눈꽃이 내려앉았다.
*
한솔은 확신이 선다.
형, 나는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형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스물둘의 원우가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