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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원] 내 시간을 멈추게 해줘

ZereN / 글


“자고 가.”

  원우는 제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무심한 시선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샤워를 하고 나온 한솔이 제 은발의 물기를 탈탈 털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원우는 이제 막 입은 파카의 지퍼를 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가 왜.”
“시간이 너무 늦었어.”
“신경 쓰지 마.”

  잠깐만 기다려, 데려다 줄게. 단호하게 거절하는 원우의 대답에 한솔이 급하게 옷을 꺼내 입고 차키를 꺼냈다.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거절하지 않은 원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다시 제안할 생각은 없는 거야?”
“…어차피 갈 거잖아.”

  내가 널 잘 아는데 뭘.



[솔원] 내 시간을 멈추게 해줘
- 2020년 8월 솔페스 합작 참가작
- Written by. ZereN


  처음 만난 시기는 어느 가을의 늦은 새벽의 모텔 복도였다. 원우는 원우대로 한솔은 한솔대로 다른 상대와 가볍게 한 판 뛰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귀가하기 위해 나오다가 눈이 맞았다. 원우는 섹스 후의 나른함이 남아있었고 한솔은 아직 목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눈 맞기에는 충분한 배경이었다.
  다음에 또 만날래?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절륜했던 그의 몸짓에 정신 못 차리고 안기다가 눈을 뜨니 동이 틀 무렵이었고, 저를 안고 밤새 보기만 했다면서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한솔의 제안에 흔쾌히 긍정을 표했던 것도 당연한 수순은 아니었을까 싶다.
  두 사람은 적어도 주1회, 많으면 주3회까지도 만났다. 한솔은 번화가 재즈카페의 사장이었고 원우는 사진작가였다. 둘 다 시간 활용이 자유로웠고 속궁합도 제법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파트너 관계를 2년 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다음 주에 출국해.”
“아… 그래.”
“2주 이상 걸려.”
“그렇구나. 돌아오면 연락해.”

  2년이 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원우도 한솔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싸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불만은 분명 있었다.
  원우는 한솔이 뒤처리도 잘 해주고 매너도 깔끔한 편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호감이 애정으로 진화한 지도 꽤 되었고, 한솔만 괜찮다면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이렇다 할 관심도 받지 못하고 확신이 없어지니 관계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저 몸만 보고 마는 그런 사이가 되는가 싶어 우울감도 느꼈다. 그 후로 원우는 제가 먼저 한솔에게 연락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반대로 한솔은 원우가 제게 먼저 연락하지 않아서 불만이 있었다. 속궁합도 좋고 마치 제 것처럼 딱 좋게 품에 들어와 안겨드는 몸도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원우에게서 연락이 줄어들고 시선을 덜 주는 것을 느껴서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었다. 그래서 꽤 오래 고민을 했지만 딱히 이렇다 싶은 일이 없었으니, 혼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원우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분명 알고 있었다, 이 관계가 왜 틀어졌는지.

“나 없는 동안 다른 사람 물지 말고.”
“내가 너도 안 무는데 누굴 물겠어?”
“그 날 물었던 애는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였나?”

  한 마디를 안 져. 한솔이 작게 투덜거리니 원우가 피식 웃었다. 네가 나도 안 물면서 다른 인간을 문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 원우의 말에 한솔은 입을 닫고 운전에 집중했다.

“갈증은 없어? 요즘은 내가 너무 멀쩡하네.”
“멀쩡한 게 정상이야, 다치면 아프잖아.”
“그래도… 너 배고프잖아.”

  그냥 내 목 물고 피 좀 먹어. 원우의 말에 한솔이 쾌활하게 웃었다. 나는 굳이 피 안 먹어도 된다니까. 그 말에 원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괜히 신경이 쓰여서 힐끔거리던 한솔도 곧 운전에 집중했다.

  한솔은 뱀파이어다. 정확히 몇 살인지 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에 태어났다는 정도는 그간의 대화를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한솔과 같은 이종족의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는 브로커가 있어서 지금은 취미삼아 가게를 차리고 유유자적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언젠가의 한솔이 말했었다.
  그러니까, 한솔이라는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닌지도 모른다.

  원우가 그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에 종종 만나면서 좋은 감정을 키워나가던 시기였다. 원우의 스케줄이 끝날 시간에 맞춰서 한솔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던 날이었다. 느긋하게 버스에서 내려 카페 뒷문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다가 한솔이 벌건 대낮에 누군가의 목을 물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눈이 마주치니 급했냐며 재밌게 즐기라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원우를 한솔이 다급히 붙잡으려 했는데, 그 상대방의 심상치 않았었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눈이 뒤집혀서는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서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본 원우에게 뒷수습까지 마치고 며칠 후에야 연락해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사실 뱀파이어였다고.

“내가 요즘 다치지를 않네.”
“안 다치는 게 좋다니까.”
“누가 굶다가 사고라도 낼까 걱정되어서 그렇지.”

  한솔은 원우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후에 충분한 유예를 주었다. 무섭다면 도망가도 괜찮다고 제 비밀만 유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더는 어울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이대로 연락을 끊어버려도 괜찮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원우는 도망가지 않았고 한솔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비밀을 밝힌 후에 원우가 먼저 연락하기도 했고 오히려 호기심을 표현하기도 했었다.
  한솔도 싫지 않은 눈치로 적당한 선에서는 자신과 일족에 대해서 말해주고는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적당한 선이란 원우가 알아도 괜찮은 종족의 특성이라거나 생존방식을 의미했다. 브로커가 있다는 것도 한솔은 종족 안에서도 신성한 혈족이기 때문에 ‘식사’는 자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원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는 한솔에게 거리를 두었다.

“…너 따라갈까?”
“됐어, 여권도 없잖아.”
“날아가면 되지.”
“그냥 얌전히 한국에 있어.”

  단호하게 선을 긋는 원우의 말에 결국 한솔이 입을 닫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발언하지 않고 선이 그어지면 절대로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그게 무관심처럼 느껴져서 원우는 그에게 더 다가가기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사실은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함께하기를 바랐다.

“자, 도착.”
“그러네.”
“조심히 들어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는 원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솔은 그의 뒷목을 잡아끌어 입을 맞췄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인 원우도 곧 한솔의 옷깃을 끌어당겨 적극적으로 응했다. 이럴 때 보면 분명 같은 마음인 것 같은데, 좀처럼 다가와주지 않는 원우가 답답해서 한솔은 괜히 심술이 났다. 하지만 안다, 원우가 어째서 거리를 두고 있는 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 다만 그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가 없으므로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으응…”

  뒷목을 쓰다듬으니 원우가 얕게 신음을 낸다. 긴장한 기류가 여실히 느껴지지만 한솔은 그걸 무시하고 오로지 입술만을 탐냈다. 원우가 먼저 제 파카의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으려 제스쳐를 취했지만 한솔은 그 손을 꽉 붙들고 원우의 혀와 입술만 쪽쪽 빨아대다가 곧 떨어져나갔다.

“…나쁜 새끼야.”
“미안해.”

  핏기가 전혀 없는 차가운 손으로 볼을 쓰다듬으니 움츠리던 원우가 부루퉁한 얼굴로 히터를 껐다. 오로지 저만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온종일 한솔의 차가운 손길을 받아냈을 원우를 배려하려는 의도로 빵빵하게 켜진 히터였다.
  성정 자체가 둔한 편이라서 꺼두는 걸 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원우는 늘 한솔의 차에서 내릴 때에는 히터를 껐다. 특히나 그는 신체 구조 자체가 온기와 냉기를 구분하지 못한다. 히터가 켜진 것도 모르고 차 안에서 쉬다가 방전시킨 이력이 있을 정도였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한솔을 챙기는 건 원우의 몫이었다.

“나 진짜 가.”
“그래, 출장 조심히 다녀와.”
“그 전에는 나 안 보려고?”
“혹시 모르니까 미리 인사하는 거야.”

  가만히 한솔의 눈을 응시하던 원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한솔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원우의 집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원우는 집에 들어와 아직 차가운 몸을 녹이려고 보들보들한 수면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다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가슴팍에도 허리에도 심지어 다리 사이까지 엉망진창으로 물고 빨아댄 흔적이 가득했지만 모두 납작한 앞니 모양을 하고 있다. 뾰족한 송곳니로 깨문 자국은 전혀 없다. 난잡하게 구른 몸에 빼곡하게 흔적을 남겼으면서 오로지 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그냥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솔을 만나고 오면 항상 쓰는 전기장판도 켜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비참했다. 인간도 아닌 존재를 사랑하게 된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고, 자신의 목을 물지 않는 한솔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화가 나서 한숨만 나온다.

  언젠가 우연히 카페에 갔다가 그의 동족을 본 적이 있었다. 네가 반려성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솔에게 물어봤었다, 반려성이 무엇인지.
  반려성은 뱀파이어의 영혼의 계약을 맺을 반려 예정자. 즉, 약혼자를 의미한다. 재생력이 한정적인 인간의 몸이기에 영생을 살지는 않지만 노화가 멈춰 불로장생을 함께 지내게 되는 것. 피의 맹세를 위해 뱀파이어는 반려의 목을 물어 피를 마시고 제 몸에 상처를 내서 그 피를 취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라고 언젠가 한솔은 원우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설명이 전부였다.
  한솔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원우의 목을 문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잘 맞고 몸이 좋은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원우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렇다고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자니 한솔이 저를 버릴까 싶어 속으로 삼켜왔다.
  그래서 하얀 제 목을 볼 때마다 슬픔에 빠졌다.

“진짜… 내가 미쳤어.”

  이런 관계는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한솔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오는 전화를 차마 끊어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필요로 해주는구나 싶어서 그 손을 놓지 못해 아직까지도 이렇게 이어온 관계였다. 끊어내고 싶어서 멀리 떠나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한솔에게 오는 연락을 다 받았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하는 이상 절대 손을 놓지 못했다.
  매번 해외 출장 스케줄을 잡을 때마다 다짐한다, 꼭 잊겠노라고.

  3주 만에 돌아온 한국은 더 추워졌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을 벗어나 택시 정거장 표지판을 따라 걸으면서도 아직 실내인데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따뜻하게 푹 자야지. 더운 나라로 가는 스케줄이라서 가볍게 입었는데 입국 심사를 할 때 별 생각 없이 외투만 꺼낸 것을 후회했다.
  더 따뜻하게 목도리도 장갑도 꺼낼 것을. 한솔의 곁에서 추위에 익숙해진 탓에 밖이 추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만큼 한솔이 많은 것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떨쳐내려고 연락이 오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몇 번 왔었던 연락도 출장이 2주를 넘어가면서 오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났을 관계를 괜한 미련으로 지금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씁쓸했다.그래도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앞으로도 연락이 오지 않을 테니 이대로 제 감정만 잘 추스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뱀파이어와의 사랑 따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바보 같은 전원우.

“옷 좀 입고 다녀.”

  따뜻한 커피를 살까 고민하다가 얼른 자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서 걷다가 공항 건물을 나오니 진짜 춥다 싶어서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팔을 붙드는 힘이 느껴졌다. 한솔이었다. 추위를 느끼지 않아 대충 입으면서도 주변 이목을 신경 쓴 모양인지 모직 코트에 얇은 목도리를 손에 든 그는 감정이 없는 텅 빈 잿빛 눈으로 원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온다고 딱히 말하지 않았는데 오늘 입국하는지 알고 찾아왔을까 궁금했지만, 원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솔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목도리를 둘러주고 제 옷까지 벗어서 원우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대충 봐도 얇은 니트만 입은 한솔은 한 손에 원우의 캐리어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원우의 손목을 꽉 붙잡은 채로 앞서 걸었다. 그의 손에 휘둘리듯 따라 걸으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솔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처럼 원우를 태운 한솔은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기 위해 차 뒤로 향했다.
  차 안은 따뜻했다. 누군가를 태웠다가 끄는 것을 깜빡한 것일까 고민도 되었지만 그런 생각은 접기로 했다. 이왕 만났으니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좋은 마음으로 함께 있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짐을 싣고 운전석에 오른 한솔은 뒷자리에서 쇼핑백을 집어 원우의 무릎에 올려 주었는데, 그 안에는 아직 김이 가시지 않은 모과차 한 잔과 따뜻하게 데워진 핫 팩이 여러 개 담겨있었다. 그리고 핫 팩을 하나 꺼내 원우의 볼에 대주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치는 기분이 묘하다.

“추워? 아직 덜 데워진 건가.”
“…뜨거워, 바보야.”

  차가운 것보다는 나으니 다행이네. 한솔의 긍정적인 사고는 이길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떻게 행동을 해도 나쁘게 생각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아무리 부정적인 언사라도 한솔은 싫은 내색도 없이 다 받아주기만 했다. 그래서 더 기대하는 지도 모른다.

“히터는 잘 돌고 있나?”
“더워.”
“그래, 그럼 티부터 마시고 좀 자.”

  집에 도착하면 깨울게. 그 말에 원우는 모과차를 마시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한솔의 차가 스무스하게 주행을 시작했다. 공항 주차장을 벗어나면서 꽤 거액의 주차요금이 나온 것 같았지만 피곤해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피곤해서 잘못 봤겠지. 주차 요금이 어떻게 몇 십만 원이 나오겠나 싶어서 눈과 귀를 의심하다가 제가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기기로 했다.
  원우는 잠시 운전하고 있는 한솔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이 차의 목적지는 집이다. 분명 누구의 집으로 가겠다는 주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한솔의 집은 아니겠지 싶었다. 애초에 만날 약속도 하지 않았고 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후라 휴식이 필요했다.
  결국 나른해져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에는 제 집이 아닌 한솔의 집 근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어째서 여길 온 걸까. 원우가 깬 걸 눈치 챘는지 힐끔거리던 한솔이 먼저 말을 걸었다.

“더 자도 돼. 아직 10분 남았어.”
“우리 집으로 가.”
“그래, 우리 집.”
“네 집 말고, 내 집. 차 돌려.”

  고집부리지 말고 오늘은 여기서 쉬어. 평소와 다르게 낮게 깐 목소리에 움찔거린 원우는 한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표정도 행동도 평소와 다름없는데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점은 늘 봐왔던 한솔이 아니다. 공항에서부터 낯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적응도 안 되고 불편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빤히 바라보니 그 시선을 느낀 한솔은 거의 다 왔다는 말만 남기고 운전에 집중한다.
  커다란 대문 앞에 차가 다다르니 당연하다는 듯이 열렸다. 입구까지만 들어가 멈추니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도 늘 봐오던 모습이지만 어쩐지 낯설어서 원우는 차에서 내려 차 뒤편으로 향했다.

“원우, 어디 가?”
“트렁크 열어. 나 쉬고 싶어.”
“여기서 쉬어, 애들이 다 해줄 거야.”
“…내가 왜 네 고용인들한테 수발을 받아야 하는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말없이 바라보던 한솔은 냅다 원우를 어깨에 들쳐 메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대기하고 있던 하우스 메이드가 인사를 하고는 그의 뒤를 따른다. 침실에 도착한 그가 원우를 침대에 눕히니 메이드 다섯 명이 붙어서 잘 데워진 온찜질 팩이며 두툼한 이불이며 이것저것 가져와 따뜻하게 쉴 준비를 한다. 이어서 집사가 들어와 원우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한솔을 향해 말을 건넸다.

“주인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따뜻한 물에 씻자.”
“…사람 다 물려. 나랑 얘기부터 해.”

  단호하게 거부하는 원우의 말에 한솔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손짓을 했고, 곧 방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너 오늘 왜 그래?”
“뭐가?”
“대체 언제부터 날 챙겼어?”
“항상 챙기고 있었어.”

  원우가 혀를 차며 한솔을 노려본다. 그렇게 좌절하고 포기하려 수차례 다짐을 했을 정도로 그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원우는 이번 일정이 길었던 덕에 생각의 정리도 제대로 할 수 있었고 정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여겼는데,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의 모습에 벌써부터 무너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자기방어를 시도했다.
  기약 없는 애정이 그만큼 힘들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 자고 얘기할까?”
“말 돌리지 말고, 나 이제 정말 너랑 안 만날 거야.”
“도망치고 싶어?”
“그래.”
“난 이미 기회를 줬고, 넌 그 기회를 거절했잖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제게는 손 끝 하나 대지 않으면서 무표정으로 저런 말이나 하고 있는 한솔이 답답하고 싫고 질린다. 지금껏 저를 단 한 번도 무시하거나 불편하게 한 적 없던 그가 변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나 벗을까?”
“왜?”
“섹스하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
“전혀.”
“엊그제 넘어져서 무릎이 좀 까졌는데, 피라도 마실래?”
“아니, 난 그냥 네가 편히 쉬길 바라.”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편하겠어. 목적을 말해.”

  잠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한솔은 마치 원우가 왜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작게 한숨을 쉰 원우는 곧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운을 띄웠다.

“너한테 난 뭐야?”
“어?”
“우리 그냥 욕구만 채우는 그런 관계 아니야?”
“아… 우리 그런 사이였어?”
“뭐?”
“그렇다면 미안. 내가 너무 오버했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 목소리는 분명 덤덤했지만 원우는 알 수 있었다. 한솔이 크게 당황했다. 동요하고 있는 눈빛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한솔아.”

  원우가 이름을 부르니 방을 나가려던 한솔이 뒤를 돌아본다. 평소에도 흐릿했던 잿빛 눈동자가 더 옅은 색을 띄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낯설어서 잠시 주춤하던 원우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저를 가만히 보기만 하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한솔아.”
“응, 말해.”
“너한테 난 뭔지 대답 안 해줬어.”

  원우의 말에 한솔은 반응이 없었다. 별 생각 없던 것인가 싶어 체념하려던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너는…”

  잠시 머뭇거리는 것처럼 뜸을 들이던 그가 말했다.

“항상 곁에 두고 싶은 인간.”
“…곁에 두고 싶어?”
“응.”
“왜?”
“좋으니까.”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까. 원우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내가 좋아?”
“응.”
“좋다는 게 어떤 의미야?”
“어떤 의미?”
“왜 내가 좋다고 생각했어?”

  한솔은 원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잿빛의 눈동자가 잠시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원우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리고 약한 인간 따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게 뭐야.”
“피가 맛있어서 다 뽑아 먹고 싶지만,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맛있으면 먹어.”
“죽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방금.”

  원우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죽이기 싫다. 그런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싶은데 한솔이 해줄 수 있을까.

“그런 거 말-”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어.”
“뭐?”
“피를 마시지 않아도 만지고 싶고, 집에 가둬서 혼자 보고 싶어.”

  이런 생각들을 좋아한다고 하는 거라는데 틀렸나. 한솔의 물음에 조금 놀란 원우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 그리고 가둬도 돼.”
“넌 약하니까, 항상 배려해야만 해.”
“약하지 않아. 인간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흐릿한 눈동자에 고스란히 저만 담겨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그래서 조금 더 희망을 갖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까 공항은 어떻게 왔어?”
“차로 운전해서.”
“그게 아니라… 내가 오늘 오는 거 알고 있었어?”
“모르니까 기다렸어.”
“기다렸다고?”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우가 연락이 되지 않아서 바쁘다고 여겼지만 보고 싶어서 한국에 들어오면 바로 만나려고 공항에서 열흘 넘게 기다렸다는 말을 하는 한솔의 표정은 담담했다. 언제라도 원우가 오면 따뜻하게 있을 수 있도록 수시로 음료와 핫팩을 사서 바꿔놓고 기다리다가, 오늘 밤에서야 드디어 원우의 체향을 느끼고 데리러 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원우가 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원우는 제 웃옷을 벗었다. 균형이 잘 잡혀있는 마른 몸에도 한솔의 시선은 원우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손을 잡은 원우는 제 목덜미에 차가운 손을 올렸다.

“여길 물어.”

  한솔의 눈빛이 흔들렸다.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원우는 그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면서 지금까지 꼭꼭 숨기고 인내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원우가 용기내고 있음을 알려줘야만 했다.
  굳어버린 그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작게 속삭였다.

“날 네 반려로 인정해줘, 한솔아.”

  내 시간을 멈춰서 너와 함께 있도록 해줘.




[솔원] 내 시간을 멈추게 해줘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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