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쿱] Track Into My Elder
익명 / 글
Prologue.
“솔아 형이 내는 문제 맞혀봐.”
“응, 알게써.”
“우리 솔이 달리기 해봤지? 네가 3등이었는데 엄청 열심히, 열심히 달려서 2등을 따라잡았어. 그럼 솔이는 몇 등이게?”
“2등 앞에....? 1등!”
“땡! 2등을 잡으면 2등이지.”
내가 당연히 틀릴 줄 알았다는 듯 꺄르르 웃는 형을 바라보며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눈만 깜빡이는 나를 보더니 앞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겨주고 주위에 있던 장난감들로 설명을 시작했다. 하얀 토끼인형이 맨 앞, 그 뒤로 파란 자동차와 작은 우주선을 놓고 우주선이 자동차를 앞지르는 모습을 보여줬다.‘봐, 이제 우주선이 2등이지?’라는 형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토끼인형을 빤히 바라봤다.
“형아, 그러면 솔이는 1등 못해?”
“응?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아니다, 됐다. 5살한테 너무 어려운가봐.”
형은 꽤나 어른스럽게 말하며 토끼인형을 다시 내 품에 안겨줬다. 그래봤자 본인도 그 당시 8살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늘 그랬다. 어른이었고, 큰 사람이었으며 뭐든지 다 알아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형, 그거 알아? 나는 따라잡지 못할 시간위에서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아주 오래도록 달리고 있어.
#1. 내가 당신을
우리 부모님은 디자인을 업으로 삼으시는데 예나 지금이나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신다. 두 분의 첫 만남은 뉴욕에서였고 연애는 밀라노에서 했으며 결혼 하신 뒤 내가 태어난 곳은 다시 뉴욕이었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다섯 살 생일을 지내고 며칠 만이었다. 장거리 비행도 처음이었지만 그 긴 시간을 날아와 밟아 본 땅도, 들이마신 공기도,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낯선 것들 이었다. 두려움이나 설렘을 느꼈냐면 딱히. 그런 감정적인 것들 보다는 그저 직관적인 새로움이 와 닿았다. 새로 이사 온 집–한 층에 두 가구씩 사는 아파트였다-에서 옆집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엄마와 함께 초인종을 누르던 그 순간에도 별 다른 생각은 없었다. 문이 열리고 내게는 커보였던, 그러나 실은 며칠 뒤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 둔 상태였던 남자아이가 나왔다.
“솔아, 형아 안녕? 해줘야지.”
엄마 손만 붙잡고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내게 그 남자아이가 먼저 무릎을 굽히고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 형 이름은 최승철이야.”
아마도 한국에 와서 가족 외에 처음으로 내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 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반갑다 말하는 목소리가 다정했고 웃느라 올라간 입 꼬리가 따듯했던 사람. 그리고 마주한 눈이 별 빛을 품은 밤하늘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꽤 오랫동안 바라본 그 눈에 대해 얘기했다.
“I love it.”
첫 인사로는 예상하지 못할 법한 말에 엄마와 그는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왠지 따라 웃었다.
그 뒤로 형과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물론 최대한의 노력으로 나의 성장과 애착형성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부재하는 시간은 존재했기에 그때마다 나는 옆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형과 학교를 같이 다녀본 적은 없다. 우선 2월생이지만 ‘빠른 입학’은 하지 않은데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3년씩인데 하필 형과 내가 딱 세 살 차이인 것이 누군가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는 6년이지 않은가 하면, 내가 8살이 되던 해에 다시 미국에 가야 했고 돌아오고 나니 형은 이미 중학생이었던 탓이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아파트 화단 중에 우리 동 앞에 심어진 유독 작았던 나무 한 그루가 어느새 훌쩍 자라있었고, 단지를 나서자마자 보였던 세탁소가 편의점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지고 들자면 고향도 아니면서 떨어져있자니 그리워지던 이곳의 공기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라 반가웠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옆집에는 형이 살았다. 문 앞에 서있던 하늘색세발자전거가 이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친숙한 그 집 초인종을 누르자 그때처럼 형이 문을 열어줬다. 형은 규정 때문에 짧은 머리를 하고 품이 조금 넉넉한 교복을 입은 채였다. 앞서 느낀 주변의 변화들은 전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겼는데 형의 처음 보는 모습은 꽤나 이질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어색할 적에 유일한 익숙함이었던 그가 이제는 유일하게 낯선 것이 되어있었다.
4월 중순의 어느 날, 하교시간이 다가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내 가방엔 우산이 없었고 우산을 가져왔다는 친구와는 집이 반대방향이어서 함께 쓰지 못했다. 결국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건물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몇 명 있었지만 얼마 뒤 데리러 오신 부모님과 함께 한 둘 씩 집으로 향했고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쭈그려 앉아 물길을 구경했다. 그쳐가기는커녕 더 굵어지는 빗줄기와 패어가는 운동장을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풀잎 사이에 숨은 달팽이를 만나 반가워하는 것 외에는. 그렇게 바닥에 고정돼있던 내 시야에 순간 익숙한 운동화가 들어왔다.
“솔아, 집에 가자.”
올려다 본 형은 쓰고 있던 샛노란 우산보다도 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형아 오늘 학교 안 갔어?”
“응, 오늘 학교 쉬는 날 이었어.”
“왜?”
“어… 학교 생일이라서?”
“아 개교기념일이구나.”
내가 개교기념일이라는 말을 모를 줄 알았는지 한참을 고민해 답한 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서로가 말없이 걷기만 했다. 형의 옆에 꼭 붙어 내 몫으로 가져온 투명우산을 쓰고 걷는데 길가에 핀 어느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눈에 띄었다. 꽃을 보니 며칠 전 같은 반 친구 민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서는 자신이 시현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내게 비밀스레 속삭였다. 꽃을 주고 싶었지만 시들고 나서 시현이가 슬퍼할지도 모른다며 고민하던 민서는 오늘 드디어 꽃모양 장식이 달린 머리핀을 선물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인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저 꽃을 꺾어다 형에게 준다면… 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2. 따라잡을 수 없는
자라면서 내가 모르는 형의 시간들은 점차 길어져갔다. 꽤나 분하고 속상한 일이었으나 주위 어른들에게는 그저 친했던 형에 대한 어리고 우스운 집착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겐 중요한 문제였으며 언제나 내 삶의 목표는 형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내가 더 빨리 어른이 되는 것. 아주 어릴 땐 정말 가능한 줄 알았나보다. 일부러 우유도 많이 마셨고, 설날에 떡국도 두 그릇씩 먹었다. 그 시절엔 희망이었고, 어느 순간 습관이었다가 이제는 아무렴 그런 것들이 다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간절함이었다. 누군가 최승철도 이 노력을 알아주었냐고 묻는다면 형이 첫 모의고사를 치르고 일찍 귀가했던 날의 일을 말해줄 것이다. 나보다도 일찍 우리 집에 와있던 형은 제집인양 소파에 늘어져있었다.
“솔이 왔어? 급식은 잘 먹었고?”
“어떻게 그 질문은 나 초등학생 때부터 변함이 없어?”
“야 밥 먹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그래서 뭐 나왔는데?”
“떡국.”
“떡국? 좋았겠네.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때 느낀 감정은 아마도 허탈함이었겠지. 그의 눈에 나는 그저 떡국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매년 마다 두 그릇씩 먹어 치우는 어린 동생일 뿐이라는 것에 대한. 돌이켜보면 형은 참 지독하리만큼‘내 동생’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동네 어른들께서‘한솔이는 어쩜 이렇게 의젓할까.’라고 한마디씩 얹으실 때에도, 내 생활기록부에 ‘또래에 비해 성숙하며’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된 날에도 그에게 나는 여전히 작고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얼굴 봤으니까 형 갈게.”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지나간 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닿았던 어깨가 뜨끈해진 채로 형이 있던 소파를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 안고 있던 것인지 한 쪽이 찌그러진 쿠션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여튼 뭐든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고개를 저으며 쿠션을 원상태로 잘 다독였다가도 울컥하는 마음에 다시 꾹 눌러봤다.
“내가 좋아한 게 떡국이었겠냐고.”
주위 친구들이 이성에 눈을 떠가던 중학생 시절은 나에게 ‘내가 형을 연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성애를 느끼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3년을 마친 뒤 그제야 두 번째 교복을 입을 준비를 하는 내 앞에 성인이 된 형이 서있었다. 17살과 20살. 따라잡기는커녕 이제는 아예 벽이 세워진 기분이었다. 탈색한 머리, 수능이 끝나자마자 서너 군데 뚫었지만 결국 한 곳에만 달려있는 귀걸이, 그리고 술 약속.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학교에 무슨 모임이 그렇게나 많은지 보고 있자면 괜히 심술이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의 주량이 센 편이라 어디내놓아도 인사불성 될 일은 없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알코올이 들어가면 평소보다 웃음이 많아지고 묘하게 애교도 늘어난다. 남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신경 쓰였고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할 수도, 형과 따로 술을 마실 수도 없다는 점이 싫었으며 이 모든 마음을 말할 수조차 없는 사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우리 솔이~ 형 왔다~”
부모님께서 출장으로 집을 비우셨던 2월의 어느 날 밤, 형이 찾아왔었다.
“뭐야, 술 냄새나.”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으려는 팔을 제지하자 머리칼이 찰랑였다. 며칠 전에 물들인 파란색 머리가 꼭 일렁이는 바다 같았다. 겉보기에 친절해 보이는 그 바다는 사실 한없이 무심해서 나는 금방이라도 잠겨 질식할듯했다.
“너는 무슨 형을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냐.”
“그러니까 이 시간에 왜 남의 집에 와? 형 집에나 가.”
“우리가 남이야? 에이, 솔이 요즘에 형이 덜 놀아줘서 서운했구나?”
“그만하고 돌아가던지, 여기서 잘 거면 빨리 자.”
“우응, 그러지 말고. 내 동생 오랜만에 형이랑 같이 잘까?”
“아 제발, 좀!”
다시 한 번 나에게 팔을 뻗는 형을 밀어내고는 결국 소리쳐버렸다. 그간 억눌렀던 것이 아차 하는 순간 폭발한 뒤에 집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소리를 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어색한 농담이라도 던져 무마해볼까. 짧은 순간 여러 선택지가 스쳐갔으나 미미하게 남은 향수 향과 뒤섞인 알코올 냄새가 싫어서, 자꾸만 어린애 어르듯 하는 목소리가 야속해서, 아직까지도 내 눈높이보다 위에 있는 저 사람이 못 견디게 아득해서 질식하기 직전 숨을 토해내듯이 뱉을 수밖에 없었다.
“형, 좋아해. 내가 좋아해… 그러니까 그러지마.”
앞뒤 없는 고백에 사정없이 흔들리던 형의 눈동자를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도망쳐 문을 닫았다. 이렇게 꺼내려던 것이 아닌데, 이렇게 무책임한 날 것을 내던지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나는 이리도 어린 사람이었는지 자책했다. 하지만 어쩌면 내 마음이 어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농익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무르익다 못해 때를 지나버린 과일은 손을 대기만 해도 터져버리듯 누르고 눌렀던 마음이 저들끼리 뒤엉키고 짓물러져 이리도 물러버리고 말았다.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는 밤이었다.
#3. 시간 속에서
고백은 다음 날 형의 숙취와 함께 묻혔다. 그랬던 건지, 그러길 바랐던 건지, 그래야만 했던 것인지는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자연스럽다하면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각자 학교 다니기 바쁘다는 핑계였다. 그리고 형이 연애를 시작한 이유도 있었다. 봄이었고, 새내기였으니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형의 연애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어느 주말 이모와 엄마가 나누는 얘기로부터 알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약속 많던 애가 요즘은 애인 생겼다고 집에 있는 시간이 더 줄어들었어요.”
“아무리 다 큰 자식이라지만 좀 서운하시겠네요.”
“그것도 그런데 어떤 애냐고 물어봐도 알려주는 게 없어서…”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 하며 연애하는 형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러나 형의 옆에서 사랑받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질투가 나서 상상하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오면서도 한 번도 서로의 이상형이나 연애 성향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자 아이 두 명이 청소년기를 같이 보내면서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꺼내 적이 없다니. 둘 중 누군가 일부러 회피한 것이 아니라면 상당히 의외인 부분이었다.
그 해 거리가 분홍빛에서 초록빛으로, 초록빛에서 다시 붉은빛으로 물들 무렵에 심한 몸살감기를 앓았다. 여름 감기는 개도 걸리지 않는다하니 용케 여름만 피했던 것인지 가을을 맞이할 문이 열리자마자 호되게 걸려버렸다. 약을 먹고 이불에 파묻힌 채 열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색색거리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기를 수 없이 반복하여 몽롱한 와중에 가만가만 내 앞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주 어릴 적 내가 잠을 설치면 형이 해주던 습관 같은 것이었다.
“한솔아”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물 나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주했다. 형의 눈에는 여전히 밤하늘 별빛이 있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별빛은 사실 인간의 생으로는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전에 출발한 빛이라던데 그래서 형과 내가 이토록 지독한 시차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형을 불러보고 싶었으나 부어올라 잠긴 목에서는 쉽사리 소리가나지 않았다. 입을 달싹이다 포기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는데 그때 형의 표정은 당시로써는 꽤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픈 사람은 나인데 왜 나보다도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도 나인데 형은 왜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듯했는지. 그리고 왜 나는 그 얼굴이 문득, 금방이라도 사랑을 속삭여줄 것 같았다고 느꼈었는지. 창 밖에서는 가을비소리가 퍼지고 방 안에는 그저 온도가 다른 두 숨소리만 들리기를 한참.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솔아. 나는 네가”
“…”
“내 동생인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형이 내게 고백을 할 것 같았다니, 역시 우습지도 않은 착각이었다. 형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었지만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말라서 떨어진 낙엽이 아무리 저 비를 다 맞는대도 다시는 생기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왠지 떨리고 있었는데 그 중 왼손에는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인 줄을 알았으나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프지 말라는 말이 왜 이토록 숨 막히게 아플까. 내가 지금껏 그렇게 숨차게 달렸는데, 왜 형 안의 나는 아직도 제자리일까.
이듬해 9월에 형이 입대했다. 애인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지 연말부터 다시 빈손이었다. 인사하러 온 형은 한껏 짧아진 머리가 어색해서 쓰고 온 모자를 몇 번씩이나 들썩였다. 짧게 친 머리를 보니 중학생인 형을 처음 봤던 날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는 형의 눈높이를 살짝 웃돈다는 것과 형이 더 이상 나를 솔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잘 다녀와.”
“응, 너도 건강하고.”
“보통은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하던데.”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그리고 형 아직 그렇게 잔소리하는 어른 아니거든?”
팔짱을 끼고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다. 입이 삐쭉 나온 것이 딱 심술 난 다섯 살배기의 그것이다. 이 또한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다. 아주 가끔씩 이렇게 어린 모습을 내비치는 것. 언제가 기점이었으며 무엇이 계기였는지 나는 알 수 없는 개인의 심경변화였다.
“형 다녀오면 나 스무 살이야.”
“그러겠네. 시간 빠르다. 너 진짜 애기였는데.”
“그럼 그때는 좀 다르게 봐주나?”
“…한솔아 나는,”
“어어, 지금 대답하지 말고. 다녀와서 얘기해줘.”
입대만으로도 충분히 심란할 사람에게 마음의 짐을 한 개 더 얹어주는 비겁한 부탁인지라 내 마음도 썩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1년 반 동안 매일같이 불편하게나마 내 생각을 해줄지, 안 된다는 답은 이미 내려둔 채로 잊고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꼭 나를 받아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그때정도 되면, 그래도 형이 나를 동생으로만 두고 싶다면 그럼 내가 정말 후회 없이 마음 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내가 부린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 심술이었다.
#4. 이제는 우리
그리고 현재. 무사히 시간은 흘러 스무 살이 된 나는 미국 남동부 소재의 예술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기 위해 가을 학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형에게는 한 달 전 즈음에 전역했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워서 13시간의 시차가 나는 거리를 무시하고 당장 만나고 싶었으나 역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들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던데 나는 아닌가봐.”
“오랫동안 좋아했다며. 그럴 수 있지.”
“오늘은 꿈에도 나오더라고.”
“꿈? Umm, Wet dream?”
“Nope. 전-혀. 내가 사춘기도 아니고.”
“오, 그럼 사춘기 때는 그랬어?”
전화기 너머로 슈아형의 웃음소리가 퍼졌고 나는 어차피 보이지 않을 어깨만 으쓱였다. 통화의 시작은 여전히 커져만 가는 내 마음에 대한 고민 상담이었으나 결국 놀림만 받고 있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졌으니 나름의 소득이 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별안간 초인종이 울렸다.
“어, 누가 왔나봐.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어느 문학에서 보았다면 빤하게도, 하지만 내 삶에서 겪기에는 매우 놀랍게도 형이었다. 서있는 배경으로 보이는 거리도, 어렴풋이 들려오는 행인들의 말소리도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마주하는 형이라니. 꿈만 같지만 꿈은 아닐 것이다. 감히 꿈에서조차 그려보지 못한 상황이니까.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얼어 있다가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처음 와보는 곳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연락도 없이 왔느냐 물으니 사실은 내일 플로리다에 일정이 있는 우리 부모님께서 데려다주셨단다.
“와 그걸 나한테 비밀로 하셨다고? 누가 아들인지 모르겠네.”
농담과 진담이 섞인 말에 형은 그저 웃는다.
“원래는 성년의 날 선물을 사들고 오고 싶었는데 여기서 혼자 쇼핑할 용기까지는 안 나더라고.”
그러고 보니 내일이 성년의 날이다. 나는 방금 전까지 인지조차 못했을 정도인데 형은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같이 쇼핑을 가자고한다. 괜찮다고 사양해도 온 김에 구경하고 싶은 것이라며 저렇게 눈썹을 축 늘어뜨리면 못이기는 척 들어줄 수밖에 없다.
5월의 애틀란타는 봄보다는 초여름에 가깝다. 물론 완전한 여름과 같은 무더위는 아니었으나 걷다가 아이스크림 생각이 날 정도는 되었다. 알아서 주문해달라는 말에 적당히 베리류가 믹스됐다는 맛을 주문했고 나온 아이스크림을 형에게 건네주자 묘한 표정을 짓는다.
“왜? 뭐 이상해?”
맛이 없어 보이나, 아니면 뭐가 묻기라도 했는지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인다.
“아니 그냥 새삼 네가 많이 컸구나 싶어서.”
아마도 또 형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있는 어린 날의 내가 잠시 스쳐간 모양이다. 그 뒤로 이어진 쇼핑은 생각만큼 평화롭지는 않았다. 향수까지는 무난히 고를 수 있었으나 낯 간지럽게 무슨 장미냐는 나와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한다는 형의 고집이 꽤 오랫동안 대치되었다. 결국 장미가 그려진 무언가라도 사라는 말에 손잡이 부분에 장미 한 송이가 각인된 와인오프너를 골랐다. 평소에 음주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밤에 같이 마신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옆에서 뿌듯해하며 걷는 형과 여름의 일교차를 체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신기하다. 내가 너랑 술을 마시는 날이 오네.”
“그러게. 형 신입생 때 술 진짜 많이 마셨는데. 기억나?”
“그래도 누구랑 단둘이 와인은 처음 마셔봐.”
“연애할 때도?”
“연애사가 그리 로맨틱하지는 못해서.”
이 말을 하며 쓴 웃음을 짓는 그 얼굴은 십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생소한 무엇인가였다.
“우리가 연애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지?”
“응. 내가 일부러 피해왔으니까…”
포장해왔던 샐러드를 다시 접시에 담아 내려놓고 비어있던 와인 잔을 붉은색으로 채우며 말했다.
“형, 실은 나 지금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원래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은 그 대답이었다. 입대 전 내가 부탁했던 그 대답. 그러나 지금은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평생 형의 뒤를 쫓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리도 내가 이 사람에 관해 전혀 모르는 것만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드는지. 나의 혼란이 번지기라도 한 듯, 형의 손에 들려있는 와인 잔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미세한 떨림에 파동을 만들어 내던 와인을 전부 비워낸 형이 나를 바라본다. 나의 밤하늘이자 우주이자 세상이었던 것이 일순간 일렁이고 그제야 정적이 깨진다.
“나 게이야.”
첫마디는 충격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담담했다. 지금껏 형만을 좋아한 나에게 동성을 향한 이끌림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가벼운 문제는 아님을 안다.
“중학생 때, 처음 자각하고는 겁부터 났어. 원망할 대상도 없는데 누구 탓이라도 하고 싶다가 나조차도 나를 부정했어. 그래서 네가 처음으로 고백한 날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라. 너는 나를 많이 따랐으니까, 혹시 이런 일조차 나의 영향을 받아버린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죄책감이 들었어.”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말을 잇는다.
“내 연애는 행복하지 않았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있는 사람 중에 좋아해야 하는 것도 싫었고, 애인이 생겨도 부모님께 얼굴도 못 보여드리는 게 속상했어. 이렇게 아픈 건 나만으로 족해서 너는 꼭 모두에게 축복받는 그런 연애를 하길 바랐어.”
이제야 그동안 잃어버렸던 퍼즐조각을 찾은 기분이다. 형의 짧았던 연애들과 그 이야기들을 피했던 이유, 어머님께서 애인 얘기를 도통 하지 않는 다며 서운해 하시던 목소리가 아직 생생한 이유도. 형이 어떤 시간들을 보내왔는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한테 선 그은 거야?”
“네 마음을 알고부터 솔직히 흔들렸는데, 너는 내 동생이고, 어린 너를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대답을 해주러 온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뭐가 맞는지 모르겠고….”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고 기어이 눈에 맺혀있던 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쩌면 내가 형을 너무나 크고 강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형이 나를 어리게만 보던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나또한 그를 곡해하고 있었는지도.
맞은편에 앉은 형에게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밀리며 바닥과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홀로 있던 내게 우산을 가져다주던 그 봄날,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심정이었을 형에게. 터져버린 마음이 나를 괴롭혔던 겨울 밤, 그것들이 옭아매어 숨이 조여 왔을 당신에게. 나 혼자만 아픈 줄 알았던 가을 속 어두운 방 안에서 실은 나보다도 침몰되어있었을 그대에게. 이제는 내가 확신을 줄 차례였다.
“뭐가 맞을까 부터 생각하지 말고 형을 그대로 보여줘. 나는 이제 어리지 않고, 아픈 것이 무서워서 내 행복을 두고 뒤 돌만큼 여리지도 않아.”
방금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젖은 채 무릎에 얹어진 형의 손등. 그 위를 덮어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보다 손끝에 걸리는 손목시계를 끌렀다. 시계를 테이블에 두며 얼핏 본 시간은 이제 막 자정을 넘어가고 있다. 옅게 자국이 남아있는 그 손목을 끌어다 입을 맞춘 뒤 물었다.
“이제 성년의 날인데 세 번째 선물도 나한테 줄래?”
작게 끄덕인 고개와 가지런히 내려앉는 속눈썹, 조심스레 끌어안아오는 팔이 충분한 대답이었다.
나의 모든 계절을 바쳐, 나의 모든 생애를 달려 드디어 형에게 닿았다.
Epilogue. 같이 걸어요.
매미소리를 들으며 거실소파에 앉아있던 내게 다가온 형이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청포도를 한 알씩 먹는다. 원래의 계획은 정식 입학 전에 여행도 할 겸 미국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으나 형과 한국으로 왔고 며칠 전에 그의 생일도 축하했다. 이 여름을 온전히 즐기다 개강에 맞춰 출국할 것이다.
“네가 나 좋아한 시간 따라잡으려면 나 엄청 노력해야겠다.”
청포도를 세 알 남겨두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굳이 애쓰지 마. 그거 내가 해봤는데 별로더라.”
내려다 본 형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기에 내려가 있는 눈썹 끝을 어루만졌다.
“시무룩 눈썹 하지 말고.”
“그래도 미안하니까 그렇지.”
우리는 그동안 결국 각자의 시간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시간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였고 누군가의 뒤를 쫓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나온 날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15년 된 짝사랑의 결론이었다.
“그냥 이제는 뭐 누가 누구를 따라잡고 그런 거 말고 같이 걷자.”
그러니 같이 걷는 수밖에.
“나 그냥 국내 대학 다닐 걸 그랬나?”
“아니야. 너 보러 가면서 외국에 적응하면 좋을 것 같아.”
“적응? 왜?”
“우리가 나중에 결혼하면 식은 외국에서 올려야하니까?”
꽤나 멀리까지 내다보는 이야기가 고마움과 동시에 귀여워 웃음이 터졌고 형은 민망한지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고개를 숙여 가까이하자 여지없이 빛나는 눈동자가 반긴다. 형은 내 첫 인사를 기억하려나. 그때의 나는 먼 훗날의 내가 같은 눈에 대고 조금 다른 이 말을 할 줄 알았을까. 아무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 별빛에 맹세하듯 말 할뿐이다.
“I love you.”
나와 평생을 같이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