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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홍] 파랑과 빨강

드위치 / 글

처음 든 생각. 이 행성엔 파란색 뿐인가?

탐사선의 문이 열리고 철제 계단이 미지의 땅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할 때, 한솔은 제일 먼저 짙은 파란색 하늘을 봤다. 우주 탐사대원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몇 발자국만으로 지난 8개월간 그를 지켜주었던 탐사선 안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외계 행성의 땅을 밟아온 두 발이 이번에도 기어코 제 역할을 한다.

한솔을 주위를 둘러다 본다. 불시착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이다. 올려다본 하늘도, 땅에 돋은 풀도, 키가 훌쩍 높은 나무도 전부 익숙한 것들이었지만 한솔이 알고 있는 색에서 파랑을 더 섞어 놓은 듯한 오묘한 빛깔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름도 모르는 별에 떨어진 지금 상황에 현실감이 들었다. 한솔의 행성에는 파랑이 드무니까.

별은 아주 고요했다. 한솔은 손에 쥔 소라고동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조용한 행성에서 소리를 모을 수 있을까. 그때, 흙을 힘주어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첫소리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고개를 돌렸다. 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한솔은 이 순간을 제일 사랑했다.

 

 

 

 

조슈아는 이 숲의 주인이라고 했다. 이 넓은 숲에 혼자 산다고. 한솔은 그에게 탐사선에 구비해둔 코코아를 타주었다. 솔잎이 덮은 흙 위에 나란히 앉아 두 사람은 머그컵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면 온 행성에 군림해있던 파랑이 걷힌다. 한솔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간밤에 먼지 묻은 커튼을 열어젖히듯 순식간에 파란색이 밀려나자 그 밑에 숨겨져 있던 색이 드러난다. 이 별에 온 사람은 한솔이 최초일 거다. 이 순간을 두 눈으로 보는 사람도 역시.

 

-그래서 말인데. 내 탐사선을 이 숲에 둬도 될까?

-응. 상관 없어.

 

푸른 나뭇잎이 하늘을 가득히 가린다. 이젠 완전히 초록색이다. 그 사이로 내리는 빛에 고개를 위로 치켜든 한솔의 눈이 살짝 찡그려진다. 작은 바람이 분다. 이파리들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 조슈아가 자리를 고쳐 앉는 소리, 그래서 어깨에 두른 카키색 담요 끝자락이 흙 위를 끄는 소리들이 전부 한솔의 옆에 놓인 소라고동에 흘러들어 간다. 조슈아는 다 마신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 내용물은 없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 거다. 추위를 느껴서 그런가. 이 별의 생명체도 추위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니 새벽의 숲에 담요를 두르고 나왔겠지.

 

조슈아는 한솔의 탐사선이 떨어진 지점에서 약 이천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에서 살고 있다. 탐사선에 착륙하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일어나 숲 안쪽으로 들어왔다가 한솔을 만난 모양이다. 주변이 완전히 환해지자 조슈아는 동이 텄다고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한솔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잠자코 조슈아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새벽에 깼는데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 건 오늘이 처음이야. 네 덕분인가 봐. 고마워.

 

한솔은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탐사선 가까이로 다가갔다. 나무가 자라지 않아 이젠 따뜻해진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에 탐사선이 있고 그 앞에 지구인이 있다. 조슈아는 한솔을 봤다. 두 번째로 든 생각. 외계인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넌 이 행성을 뭐라고 불러?

 

조슈아는 어느새 어깨에 둘렀던 담요를 손에 들고 있다. 거기에 붙은 나뭇잎을 털며 그가 대답했다. 이곳은 지구라고. 멀리서 새가 울었다. 그 소리마저 소라고동에 담겼다.

 

새벽이 지나간 뒤, 조슈아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한솔은 머그컵 두 잔과 소라고동을 들고 탐사선에 들어갔다. 어쩐지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두 잔을 동시에 사용한 건 처음이다. 한솔은 테이블에 머그컵을 올려 두고 의자에 앉았다. 소라고동에 귀를 갖다 댄다. 호흡을 갈무리하고 귀를 기울이면, 이 별에서 모은 소리들이 들린다. 눈을 감고 그것들을 듣는다. 이건 한솔의 습관이다. 이상하게도 귀로 흘러들어오는 그 소리들 중에 이 별의 이름을 말하는 조슈아의 목소리만이 또렷하다. 

 

 

 

 

사실은 조슈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진 않았다. 그의 숲에 불시착해 단잠을 깨웠음에도 친절하게 숲의 일부를 내어주기까지 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라 여겼지만 그 이상의 친절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고, 혼자서 숲을 탐사하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던 까닭이었다. 한솔은 창 가까이에 둔 작은 티팟에 돋은 이끼에 남은 물을 모두 나누어주었다. 로즈. 펜으로 쓰인 삐뚤빼뚤한 글씨 위로 물방울 하나가 흐른다. 하얀 티팟의 겉면은 약간 낡았지만 늘 반질반질 빛났다. 한솔이 매일 닦아주기 때문이다. 로즈는 우주의 어느 환경이든 잘 자랄 수 있는 종이었기 때문에 항상 창가 자리에서 그의 탐사 파트너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는 고요하고 어두운 우주를 부유하면서도 용감해질 수 있었다.

 

한솔은 로즈와 소라고동을 들고 잘 닦인 길을 걸었다. 가끔 로즈와 탐사선 밖으로 나가는 건 한솔의 두 번째 습관이었다. 해가 쨍쨍하다. 위를 올려다보자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다닌다. 이 행성에는 파랑이 많구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구름을 보며 한솔이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또 조슈아를 만났다. 그는 커다란 나무에 솜씨 좋게 설치한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예상치 못한 두 번째 만남에 한솔의 걸음이 멈춘다. 흔들의자도 뒤늦게 움직임이 멎는다. 한솔은 잠시 고민하다 그의 앞까지 천천히 걷는다. 조슈아가 무릎 앞에 선 한솔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조슈아에게로 길게 그림자가 진다.

 

-앉아 볼래?

-응.

-이게 뭔지 알아?

-아니. 근데 재밌어 보여. 여기 자주 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시간을 방해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이미 그의 앞까지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한솔은 그의 옆에 조심히 앉았다. 자꾸 나란히 앉는 일이 많아졌다. 조슈아가 땅을 박차자 의자가 앞뒤로 움직였다. 한솔은 로즈를 놓칠까 봐 반사적으로 티팟을 꼭 쥐었다.

 

-그건 네가 키우는 식물이야?

-응. 이름은 로즈.

-만져봐도 될까.

 

한솔은 또 잠깐 고민하다 로즈를 넘겨준다. 친절한 사람이니까. 게다가 식물을 싫어한다면 애초에 숲에 살지도 않았을 거다. 조슈아는 두 손으로 티팟을 받아 들어 손가락으로 이끼를 살짝 훑는다.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른다.

 

-촉촉해.

-물을 줬거든.

-이렇게 작은 곳에서도 이끼가 자라네...

 

조슈아가 감탄한다. 의자는 느리게 앞뒤로 흔들거린다. 

 

-식물 좋아해?

-조금. 잘 알지는 않아.

-네 탐사선이 내 숲에 와서 다행이다. 사막이었다면 얘도 힘들었을 거야.

 

한솔은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어쩐지 조금 졸리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았을걸.

-얼마나 머무는데?

-보통 사흘. 길면 일주일 정도. 소리를 모으기엔 충분한 시간이니까.

 

조슈아가 다시 돌려준 티팟을 건네받으며 한솔이 눈을 감는다. 문장을 끝내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이 별의 소리들이 좋아졌다. 잘 오지 않던 잠이 몰려왔다. 조슈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난생처음으로, 탐사선 밖에서.

 

 

 

바람이 좀 더 서늘해져 있다. 한솔은 눈을 반짝 떴다. 고개를 돌리자 조슈아도 잠들어있다. 흔들의자에 나란히 앉은 채로. 약하게 의자가 흔들리고, 조슈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정말 미안. 여기가 너무 편안해서 잠들었나 봐.

-아냐. 나도 잘 잤어.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켠다. 한솔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빨갛다.

 

-하늘이 빨갛네.

-응. 해가 지고 있어서 그래.

-내 고향별의 하늘도 붉은색이야.

-늘?

-응. 거긴 이 별처럼 하늘이 변하지 않아.

 

이 행성은 낯선 것 투성이다. 하늘은 변하고, 온도는 오락가락하고, 이렇게 온 세상이 빨갛거나 파랗게 물든다. 한솔은 낯선 것을 사랑했다. 심장이 새롭게 펌프질을 시작하며 온몸으로 피를 보낸다. 소라고동에 순간까지 담을 순 없을까. 그랬다면 깜깜한 우주에서도 지금 이 시간을 꺼내어 볼 수 있을 텐데.

 

-내 별에 온 기분이야.

-.......

 

한솔은 조슈아와 시선을 맞춘다. 몇억 광년을 뛰어넘어 만난 둘이 서로의 앞에 있다. 빨간빛이 조슈아의 뺨 위로 떨어진다.

 

 

 

 

 

조슈아는 담요를 두르고 저택의 바깥으로 나왔다. 바람이 차다. 한솔은 어제 고향별로 떠났다. 숲에 불시착한 외계인은 우주로 돌아갔다. 한솔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불시착한 탐사선 따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숲은 너무나 조용했다.

 

조슈아는 흔들의자에 가지런히 놓인 티팟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 만졌을 때처럼 두 손으로 조심히 들었다. 로즈. 결코 가지런하지는 않은 외계인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정정. 한솔은 딱 하나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 조슈아는 함께 앉았던 흔들의자에 홀로 앉으며 티팟을 소중히 쥐었다. 흔들의자가 느리게 움직인다. 조슈아의 숲은 또 파랑이다. 어느 날 탐사선이 착륙한 그 새벽의 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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