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홍] Mermaid
루리 / 글
Remember, once in 500 years, a mermaid comes up to the land. Mermaids are very beautiful, but this one, the one that comes up once in 500 years, will seduce you the moment you see it.
(500년에 한번씩, 인어가 땅으로 올라온단다.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해. 인어들은 모두 다 아름답지만, 500년에 한번 올라오는 이 인어는 다른 인어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서 보는 순간 바로 널 홀릴 수 있단다.)
어린 소년이 숨을 헉,하며 들이쉬었다. 자기 전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인어의 전설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고 신기했다. 그가 졸려 반쯤 감겼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자, 어머니가 웃으며 소년의 코 끝을 사랑이 듬뿍 담긴 손길로 톡 치고서 다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Mermaids can make their wish come true, but only once in their whole life. Isn’t it beautiful? However, they are immortal, their life being a never-ending tragedy. Son, if you ever meet a mermaid, never fall in love with them. Even their kiss won’t save you from the awful pain.
(인어들은 살면서 딱 한번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어. 아름답지 않니? 하지만, 그들은 끝나지 않는 비극적인 삶을 영원히 살지. 아가, 만약에라도 너가 인어를 만나게 된다면, 절대 그와 사랑에 빠지면 안돼. 그러면 인어의 키스조차 너를 끔찍한 고통에서 구해줄 수 없게 되거든.)
Awful pain?
(끔찍한 고통이요?)
Yes, awful pain. Much more awful than the pain that makes your father say ‘Bloody hell!’
(그래, 끔찍한 고통. 아버지가 ‘이런 젠장!’하고 외칠 때에 고통보다 훨씬 더 아프고 끔찍한 고통이란다.)
꾸벅꾸벅 졸며 어머니의 말을 듣던 소년은 마치 비눗방울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소년을 꼭 안아주자, 소년은 다시 눈을 느리게 꿈뻑거리다가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그를 걱정과 사랑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는, 소년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주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Your life would be a never-ending life, just like the mermaid’s, with a tragic ending in the end.
(인어들과 사랑에 빠지면, 너도 끝은 항상 비극적인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거야.)
——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항구로 나왔다. 방파제에 앉아서 밤새 비가 와서 그런지 특히 더 추운 공기에 입김을 불어보며 자신의 목에 둘러져 있는 목도리를 더 단단히 묶었다.
멀리서 빠앙— 소리를 내며 인사하는 배에 소년도 방파제에 위태롭게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깜빡거리는 배의 불빛을 유심히 바라본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다 황급히 주머니에서 작지만 아주 밝은 손전등을 꺼냈다. 딸깍 딸깍 소리를 내며 열심히 배를 향해 메세지를 보낸 소년은, 다시 돌아오는 답장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방파제 위를 걷기 시작했다.
“People call me the ‘child of the port’… I don’t know why they are so worried about me. I never fall off from the tetrapods.”
(내가 그 항구의 아이인데… 왜 저렇게 걱정하는지 모르겠어. 나 방파제에서 절대 안 떨어지는데.)
소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항구의 아이’라고 불리었다. 항구에 아주 가까이 살아서인지, 아니면 항구에서 태어나서인지, 소년도 자신이 왜 항구의 아이라고 불리는지 몰랐지만 뭔가 멋지게 들려서 마냥 좋아라했다. 하지만 소년이 항구에서 한번도 위험한 적이 없던 건 사실이었다. 보통 어린 아이들이 방파제에 올라가면 중심을 못 잡고 바다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곤 했지만, 소년은 걷지 못하는 나이에도 방파제에 안정적으로 앉아 꺄르륵거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위험하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주는 것은, 소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계속 궁시렁대며 폴짝폴짝 방파제 위를 뛰어다니던 소년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잘만 보이던 눈 앞이 순식간에 안개로 가득 차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hello?”
자신이 겁이 없다고 자부하던 소년도 지금만큼은 무서워졌다. 이렇게 안개가 짙게 끼인 날에는 절대 바다와 가까이 하지 말라던 항구 사람들의 말이 기억난 소년은 서둘러 땅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아 섣불리 발을 내딛였다가는 방파제 사이를 밟아 바다에 빠져버릴 수도 있었다. 소년은, 안개가 걷힐 때까지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손전등이 도움이 될까 싶어 안개 속으로 비추어 보았지만, 끝도 없이 보이는 흰색 안개에 두려움만 커질 뿐이었다.
“I don’t like this..”
소년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항상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안정하던 그에게 지금은 파도 소리가 마치 괴물의 소리처럼 들렸다. 뱃고동 소리도 들리지 않아 소년은 불안해졌다. 마치 귀가 먹은 것 같았다. 소년이 이제 추위와 겁에 부들부들 떨며 무작정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순간,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신기하게도 노랫소리가 들리자 안개가 말끔히 걷히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 소년은 자신이 방파제와 방파제 사이, 그러니까 바로 바닷속으로 빠져버리기 직전이었는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안전한 땅으로 돌아가려고 소년이 뒤를 돌았을 때,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낮지도 않지만 높지도 않은, 공기 중에 울리는 듯한 몽환적인 목소리의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소년은 땅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무엇에 홀린 듯 노랫소리를 향해 걸어갔고, 방파제 사이 숨겨진 공간에 묶여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그곳엔, 반짝이는 눈물을 흘리는 인어가 있었다.
.
소년의 머릿속에 아주 어릴 때 어머니가 말해주신 ‘never fall in love with them’이 기억났지만, 이미 인어에게 홀려버린 후였다. 그는 천천히 인어에게 다가가 밧줄을 풀어주려 손을 뻗어 밧줄 끝을 쥐었지만, 인어가 몸을 크게 움찔하자 깜짝 놀라 손을 뗐다.
“Do you need some help?”
뒤늦게 항상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고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낸 소년은 조심히 물어보았지만, 인어는 떨리는 눈빛으로 소년을 쳐다봤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 영어를 못 하나, 하고 생각한 소년은, 기억을 더듬어 어릴 때 잠깐 배웠던 한국어를 떠올려 띄엄띄엄 끊으며 물어보았다.
“도와… 드릴까요? 아, 도움이.. 필요하신 가..요?”
인어가 경계심으로 가득 한 눈으로 계속 그를 쳐다보자 소년이 아, 하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I’m Hansol Vernon Chwe, and… 아 한국어. 그, 저는 한솔이에요. 한솔 버논 최.”
인어는 여전히 떨리지만 경계심은 아까 전보다 떨어진 눈빛으로 소년을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영어 할 수 있어.”
아. 한솔은 민망해졌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다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솔이 다시 조심스럽게 밧줄을 잡은 후 복잡한 매듭을 낑낑거리며 푸르자, 인어의 아름다운 몸에 붉은 자국들이 남은 것을 발견했다. 일단 인어를 치료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를 방파제 위로 끌어올리려고 그의 손을 잡은 한솔은, 너무 차가워 화들짝 놀라 잡은 손을 놓았다.
“안 추워요?”
한솔이 자신의 목에 둘러져있는 목도리를 인어에게 주려고 풀기 시작하자, 인어가 고개를 저었다.
“I belong to the cold sea.”
아직 기껏해야 10살 정도인 한솔이 그의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인어는 한솔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고 한솔에게 손을 뻗었다.
“장갑 끼고 나 올려줘.”
한솔은 서둘러 손전등이 들어있지않은 다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장갑을 꺼내어 쓰고 다시 인어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가 방파제에 안전히 올라오자, 그제서야 한솔은 그의 아름다운 하반신을 보았다. 아름다운 곡선의 허리부터 빛나는 꼬리까지 찬찬히 뜯어보던 한솔은, 남의 하반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내고 곧바로 시선을 옮겨 인어의 눈을 보았다. 하얗지만 입술만 붉은 그의 얼굴과 부드러울 것 같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 짙은 쌍커풀에 끝이 살짝 휜 눈 끝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고마워.”
인어가 한솔을 보며 활짝 웃자, 한솔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은 추워서 코가 빨개지고 얼굴이 얼어서 못생겨 보일 텐데 인어는 너무나도 예뻤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을 놓고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천천히 다가가 그에게 입술을 붙이려고 하자, 인어가 울상을 짓고 한솔을 밀어냈다.
“No.”
“...”
“안돼 한솔. No kissing.”
밀려난 한솔은 인어를 쳐다보았다. 뽀뽀해주고 싶은데, 하던 한솔은, 손등은 괜찮겠지, 싶어 인어에게 다시 바짝 다가갔다. 예의를 아주 중요시하는 나라인 영국에서 나고 자란 한솔의 이런 행동을 보았다면, 항구 사람들 모두 다 그를 혼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인어에게 빠져버린 한솔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살포시 자신의 손을 인어의 손 밑에 가져다 대자, 인어가 놀란 눈으로 한솔을 주시했다. 한솔이 인어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고 조심히 자신의 얼굴을 인어의 손에 가까이 들이밀자, 인어가 이번엔 한솔을 더욱 더 세게 밀쳤다.
“I said no kissing.”
한솔이 상처 받은 눈빛으로 인어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인어의 눈에 반짝이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뽀뽀도 안돼요?”
“어. Don’t love me.”
“...”
“한솔아, 나 좋아?”
“네.”
“나… 사랑해?”
“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한솔이었다. 인어는 세상의 모든 슬픔이 모여있는 듯한 눈빛으로 한솔에게 말했다.
“조슈아 지수 홍. 내 이름이야.”
“조슈아 지수 홍… 이름 예뻐요.”
“만약에 너가 조슈아를 만나게 되면, 절대 그를 사랑하지마. 알겠지?”
“...”
“Please, for your own sake, don’t love him. You will still be too young to love when you meet him, and he’s not your destiny.”
(제발, 너 자신을 위해 그를 사랑하지 마. 그를 만날 때 너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어릴 거고, 그는 네 운명이 아니야.)
“l choose my own destiny.”
(제 운명은 제가 골라요.)
한솔이 고집스럽게 대답하자, 지수는 울음을 삼키는 듯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하고, 마지막으로 한솔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나 계속 사랑할거야?”
한솔이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I can’t let this happen again. You must never love me, Vernon, for the love of the mermaid is never happy.”
(나는 이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어. 넌 날 사랑하면 안 돼, 버논아. 왜냐하면 인어의 사랑은 절대 행복할 수 없거든.)
그리고 손을 뻗어 한솔의 손목을 잡은 그는, 한솔이 뭐라 할 틈도 없이 그와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
“야 최한솔!”
승관이 소리를 냅다 지르며 한솔에게 뛰어갔다. 그에게 헤드락을 걸자, 그제서야 한솔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내 말 안 들었지?”
승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묻자, 한솔이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왜 이렇게 멍 때리고 다니냐… 그래가지고 이 각박한 세상 어떻게 살아나가겠어!”
한솔은 승관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심각하게 눈썹을 모았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승관이 가만히 한솔을 주시하자, 한솔이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렸다.
“계속 뭔가 생각나. 계속 생각나는데, 기억이 안 나. 약간 기억이 조각조각 난 느낌? 그래서 너무 짜증나. 물에 빠진 것 같은데.”
승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너 뭐 전생에 물에 빠져서 죽었니? 저번부터 자꾸 그 얘기 하던데… 이번 생에 주는 경고인가 봐. 물 조심하라고 하는 경고.”
한솔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근데 나 수영 잘 하는데. 짧게 대답하고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지려는 한솔을 바라보던 승관은, 뭔가 기억났는지 눈을 부릅 뜨고 한솔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래서, 아까 내가 한 말 궁금하지 않아? 너가 생각하느라 못 들은 내 말.”
“딱히?”
“아이씨… 궁금하다고 해주라, 응?”
“알겠어, 뭔데?”
“우리 반에… 전학생 온대! 그것도 오늘!”
아 그래? 하고 영혼 없이 대답한 한솔의 어깨를 다시 흔들며 승관은 말했다.
“영국에서 왔다는데, 엄청 멋지지 않아? 이름이 뭐였지 조샤… 슈…”
“조슈아.”
한솔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슈아. 조슈아. 조슈아 ㅈ...수. 지수. 지수?
“아 맞아 조슈아! 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너 이 녀석 관심 없는 척 하더니 이미 다 알고 있었구만.”
혼자 쫑알거리는 승관의 목소리를 서서히 차단시키며 한솔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조슈아 지수. 조슈아 지수… 홍. 어디서 들었더라.
“You must never love me, Vernon”
한솔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귀를 막았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옆에 승관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최...ㅅ...하….솔.”
“He’s not your destiny.”
“최한솔!!”
한솔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돌아왔다. 가쁜 숨을 헐떡이자, 승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솔을 쳐다보았다.
“솔아… 괜찮아? 너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은데, 무당이라도 찾아가 봐야 하나?”
승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솔의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 범벅이 된 한솔은 대충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아니야 승관아. 반으로 가자. 수업 종 쳤다.
.
한솔은 깨질 듯한 두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에 누웠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전학생이 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조슈아였다. 조슈아 지수 홍. 하얗지만 입술만 붉고,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왜?
대체 왜?
어디선가 봤었던 느낌이 들었다. 짧지만 사랑했었던 느낌이 들었다.
…물에 잠긴 느낌이 들었다.
한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목에 걸려있지만 교복 셔츠 안에 숨겨놓아 그 누구도 모르는 목걸이를 잡아꺼낸 한솔은 눈을 감고 손가락을 목걸이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어릴 때 받아 누가 줬는지도 기억 못하지만 항상 걸고 다니는 목걸이었다. 동그란 펜던트 가운데에는 인어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손에 펜던트를 쥐고 심호흡을 하던 한솔은, 조금 진정했는지 침대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나마 한솔의 머릿속을 잘 아는 승관을 불러 뭐라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승관은 오늘 학교가 끝나자마자 전학생, 그러니까 지수의 손을 잡고 학교를 나갔다. 시계를 확인한 한솔은 이제 겨우 8시라는 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자고 10시에 승관 불러야겠다.
.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한솔은 숨을 토해내며 일어났다. 또 그 개 같은 꿈이었다. 누군가에게 팔을 붙잡히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꿈. 한솔은 이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겨우 통화목록에 들어가 가장 최근에 있는 승관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대었다.
“부승관 내 집. 제발 빨리 와줘.”
.
한솔은 매서운 눈으로 승관을 쳐다보았다. 승관은 당황스러운 듯 한솔을 마주보았고, 그의 뒤에는 지수가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난 너보고 우리 집에 오라고 했지, 쟤랑 같이 오라고 한 적은 없는데.”
승관은 안절부절 못 하며 입술을 깨물다, 자신의 뒤에 있는 지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참에 친해지는 거지 뭐… 얘 엄청 착해! 너도 좋아할… 걸.”
큰 소리로 말하던 승관은 한솔의 눈치를 보며 서서히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와 지수는 마치 소동물 두 마리가 겁먹은 모습이었다. 싫은 티는 낼 수 있지만 문전박대를 할 정도로 모진 사람이 아니었던 한솔은, 짜증난 듯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
.
“그래서, 무슨 얘기길래 지수를 방 밖으로 내보내는 거야?”
한솔은 지수가 화장실을 쓴다고 방 밖을 나갔을 때 망설임 없이 문을 닫고 잠궜다. 승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문을 열려고 했지만, 한솔은 그의 손목을 잡아 침대에 앉히고 속삭이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학생, 이상해. 그냥… 이상해. 진짜로. 나 맨날 느끼는 거 쟤랑 관련 있는 거 같아.”
승관은 한솔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솔의 손을 쳐내었다.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마세요 최한솔씨. 그리고 너 말이야, 지수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니면 너… 지수 좋아해? 그래서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거야? 이야, 멋쟁이 최한솔 다 죽었네. 너가 무슨 초등학생이냐?”
한솔이 승관의 입을 막으며 부인하려고 하던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솔아 승관아 난데, 들어가도 될까?”
.
짜증나. 한솔은 자신의 옆에 앉아서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는 승관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아! 소리를 냄과 동시에 연필심을 부러뜨린 승관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한솔을 쳐다보았다. 너 요즘 왜 그래?
“너 때문이야.”
“너 왜 그러냐? 내 캘리그라피가 망한 것도 너 때문이야 최한솔. 나한테 뭐 쌓인 거 있어?”
한솔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 부승관 때문이야. 이건 다 부승관 때문이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솔은 지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승관이 그 말을 하고 나서부터 갑자기 지수가 의식되기 시작했고, 나중에 승관과 지수와 셋이 한솔의 집에서 자게 되었을 때 완벽히 빠지게 되었다.
… 잠결에 들은 지수의 노랫소리가 너무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으니까.
——-
홍지수는, 인어였다. 비록 시대에 맞게 진화해 다리는 없었지만, 평생을 살았고 끝나지 않는 —인 삶을 살았다. 인어들 사이에서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 있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한 인어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결국 인간과 함께 물에 빠져버린 비극적인 내용의 전설. 지수는 이것이 순 거짓나부랭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인어들이 인간들과 사랑에 못 빠지게끔 겁을 주려고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 운명은 인간이야, 그리고 그건 최한솔이야.
지수를 향한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깨달은 한솔은 무작정 직진을 했고, 그런 한솔에 놀랄 만도 한데 전혀 당황하지 않는 지수에 놀라는 건 승관의 몫이었다.
“최한솔 너 전학생 싫다고 지수가 화장실 간 사이에 문 잠근 거 기억 안 나? 지수야, 네 남친이 이런 놈이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알콩달콩 지내는 거야!”
“심플해. 지금은 안 그러잖아.”
한솔이 지수 대신 대답을 하자, 승관은 환멸스러운 얼굴로 둘을 쳐다보았다.
“난 너네가 이렇게 빨리 사귀게 될 줄 몰랐다… 부러워 죽겠어 아주!”
승관은 일부러 장난식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고, 그가 화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한솔과 지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냥 행복했다. 지수는 인어의 전설을 까마득하게 까먹고, 한솔은 깨질 듯한 두통과 물에 빠지는 꿈을 잊은 채 살아갔다.
인어의 전설이 괜히 있는 게 아닐텐데 말이지.
지수와 한솔이 사귄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아직 지수는 한솔에게 자신이 인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솔을 향한 사랑이 커지는 지수였고, 결국 그는 자신의 비밀을 말하기로 하였다. 나중에 단둘이 바닷가로 여행 가면 말해줘야지. 내년 겨울에 가자고 해야겠다. …그냥 이번 주말에 갈까. 돈을 쓸 때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썼지만, 여행만큼은 충동적으로 가는 지수였다. 게다가 한솔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날인데, 다음 주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점심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바로 한솔에게 가 이번 주말에 당일치기로 겨울 바다 여행을 가자고 한 지수는, 한솔에게 좋다는 대답을 듣고 그의 입술에 뽀뽀했다. 한솔은 지수의 뽀뽀를 받고 기분이 좋은지 웃다가 안되겠다, 하고 지수의 손목을 잡아 빈 교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점심이 끝나고도 한참 뒤에 나타난 그들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입술이 부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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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가 굳이 겨울 바다를 가고 싶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다는, 전 세계에 있는 인어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화되어 다리가 있는 인어들과 다리가 없어 땅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인어들. 지수는 한솔과 겨울 바다에 가 바닷가에 앉아 자신의 인어들과 얘기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장 아름답게 자신이 인어임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인어가 인간에게 자신이 인어임을 밝히는 건, 그 사람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아직 한솔이 성인도 되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그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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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가 오늘도 무지개색 옷 입을 줄 알았어. I was just about to call you to go and change if you were wearing that weird rainbow shirt again.”
(나 너한테 전화 걸어서 무지개색 옷 입고 있으면 다시 돌아가서 갈아입으라고 하려 그랬는데.)
역에 먼저 도착한 지수가 한솔을 발견하고 그에게 뛰어가 그의 품 속에 안기며 말했다. 한솔은 머쓱하게 웃으며 오늘이 어떤 날인데 그 옷을 입고 와, 하였다. 한솔은 자신의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내리고 목폴라와 블랙진, 코트를 입고 있었다. 신발로 워커를 신고 짙은 갈색 목도리까지 두른 그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던 지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예쁘다 한솔아. 지수는 손을 뻗어 한솔의 손을 잡았다. 지수는 가슴팍이 파인 빨간색 니트 위에 패딩을 입고 있었다. 지수가 패딩 안에 파묻혀있어 아주 가까이 오지 않으면 패딩 안에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한솔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지수의 패딩을 여며주었다. 지수는 그런 한솔을 빤히 쳐다보다 자신의 패딩 지퍼를 확 내린 후 한솔에게 혀를 메롱 내밀고 호다닥 기차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저 저 홍지수… 한솔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저 멀리 뛰어가는 지수를 바라보다 그를 따라 기차 쪽으로 달려갔다.
멀미를 많이 해 걱정하던 한솔은 기차가 달리는 내내 지수의 어깨에 기대어 잤다. 그로 인해 3시간 동안 할 게 없어 심심했던 지수는, 승관과 짧게 영상 통화를 해 입 벌리고 자고 있는 한솔을 보여주거나 미리 챙겨왔던 간식을 먹었다. 간식을 다 먹고 애인과의 첫 여행에 대한 설렘이 살짝 잦아들었을 때, 지수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인어라는 사실을 말해도 될까?
한솔이가 나를 받아주고 더 사랑해줄까?
날 떠나지는 않을까?
…아직 한솔이는 어린데 내가 너무 섣불리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혹시라도 전설이 진짜면 어떡하지.
아니야, 너무 불안한 생각하지 말자.
.
겨울 바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같이 물드는 바닷물이 예뻤고,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조차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다. 가만히 손을 잡은 채로 한솔과 지수는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멀리서 인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하지만 지수가 앉아있는 곳은 바다와 너무 멀어, 희미한 노랫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no’와 ‘go’가 반복되는 것을 어렴풋이 들은 지수는, 순간 너무 불안해졌다.
“한솔아.”
“어?”
“나 사랑해?”
“왜? 내가 너 안 사랑하는 거 같아?”
“너가 나 한번도 사랑한다고 안 한 것 같아서.”
“듣고 싶어?”
“지금 너가 말하면 마치 내가 말해달라고 눈치 준 것 같잖아. 나중에 해줘, 너가 나를 진심으로 너무 사랑할 때 말해줘.”
“사랑해.”
“지금 말고 나중에,”
“사랑해 슈아야.”
“...”
“너는 나 사랑한다고 안 해줄 거야?”
한솔이 지수의 손을 당겨 자신의 얼굴을 지수 쪽으로 들이밀자, 지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도 사랑해.”
작은 목소리로 지수가 대답했다. 한솔은 눈에 모든 감정이 다 담겼다. 의미 없는 말은 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눈 속 파도 안에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솔이 지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한솔의 눈 안에 있는 파도는 소용돌이를 쳤다. 하지만 그 거친 파도 가운데 작은 등대가 버티고 서있어서 지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불안하지만 적어도 등대만큼은 우뚝 서있고 그 안에 한솔의 진심이 담겨있었으니까.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한솔이 지수의 볼에 짧은 뽀뽀를 하고 떨어지자,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숙소를 따로 잡아 잠을 자지는 않을 것이어서 당일치기라고는 했지만, 내일 오전 7시 기차를 예약해놓아 그때까지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있었다. 지수는 저녁을 먹고, 다시 한솔과 바다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어둡지만 가장 아름다운 곳과 시간에서 말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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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아, 많이 취했어?”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마시고 집에서 몰래 챙겨온 술을 마신 둘이었다. 지수는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찌푸리며 술잔을 멀리 밀어놓았지만, 한솔은 나머지 한 병을 다 들이마신 상태였다. 술을 못 마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짝 알딸딸해 보이는 한솔에 지수는 걱정이 되었다. 이래가지고 깊은 바다 쪽으로 나가겠나… 겨울 바다가 제일 위험하다는데 괜찮을까. 하지만 한솔은 지수를 꽉 끌어안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나 괜찮아. 너가 계속 겨울 바다 오자고 한 거니까, 나 걱정하지 말고 너 가고 싶은 데 가자. 나 추위도 잘 안 타고 수영도 잘 하는 거 너 알잖,”
I am the child of the port…
순간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한솔의 머릿속 안에 울려퍼졌다. 항구의 아이. 항구의 아이. 항구의 아이? 순식간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한번 기억해낸 조각난 기억들은 여전히 조각난 채로 한솔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안에 잠겨 못 나오려던 찰나, 지수가 한솔의 팔을 붙잡았다.
“한솔아, 괜찮아? 많이 안 좋으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바다 다음에 보러와도 난 괜찮은데.”
목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고 지수의 손의 온기가 한솔의 몸에 돌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더듬어 지수의 손을 찾아 잡은 한솔은, 느릿하게 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진짜 신기한게 네 손만 잡으면 괜찮아진다? 계속 네 손만 잡고 다녀야겠어.”
지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한솔이 대답하자, 지수가 안심한 듯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수는 한솔이 걱정되었기에, 한솔을 일단 안전한 모래사장에 앉혔다.
“나 저기 등대 있는 데까지 걸어갔다 올 거야. 길 좁고 바위도 틈이 많아서 지금 너가 가기에는 너무 위험해. 나 금방 안전한지 보고 올테니까 너 여기서 꼭 기다리고 있어야 돼, 알겠지?”
한솔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 따라올 거 같은데… 하고 걱정하던 지수는, 자신의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등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11시 4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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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maids.”
지수가 깊고 어두운 바닷물에 손을 담그며 말하자, 저 멀리 바닷물에 거품이 일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지수는 목을 잠시 가다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 읖조리기 시작했다.
“I came here with my love. I do not doubt his love for me, and he does not doubt mine as well. I’m sure that he will be my first and last love before I die.”
(오늘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여기 왔어요. 저도 그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가 제가 죽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이라는 것을 전 확신해요.)
지수는 깜깜한 바닷물에서 손을 빼내고 신발을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놔두고 돌에 앉았다. 발끝까지 물이 밀려와 양말이 살짝씩 젖는 것을 느끼며 지수는 가만히 앉아 답변을 기다렸다. 양말이 너무 젖자, 지수는 서둘러 양말을 벗었다. 빨리 답변을 받고 싶었다. 가슴이 너무 뛰었다. 순간, 저 멀리서 엄청난 파도가 일었다. 지수가 놀라서 살짝 움찔하며 몸을 일으키던 순간, 낮은 목소리가 온 사방에 울렸다.
“Don’t.”
무슨 뜻이지? 지수는 이런 답변을 예상하지 않아 동그래진 눈으로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은 곡선을 일그러지더니,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Don’t, my love, for him and yourself.”
(하지 마, 내 사랑아, 너와 그 둘 다를 위해서.)
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발로 물을 치자, 팍 팍 소리가 나며 물방울들이 튀었다.
“What do you mean by him and myself?”
(둘 다를 위해서라니, 무슨 뜻이에요?)
“That I cannot answer, but he is not your destiny. You’ve heard about the myth of the mermaid who loved a human boy.”
(그것은 내가 대답할 수 없지만, 그는 네 운명이 아니란다. 너도 인어의 전설을 들었잖니.)
“If he is not my destiny, then I will make him mine. I choose my own destiny.”
(그가 제 운명이 아니라면, 제가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제 운명은 제가 골라요.)
저 멀리서 바다가 으르렁거리고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소로움, 안타까움, 슬픔, 온갖 감정들이 다 섞인 웃음이었다.
“Ah, you sound just like him.”
(아, 하는 말이 그와 똑같구나.)
“Who is that?”
(‘그’가 누군데요?)
“The human child. The ‘Child of the port’. Maybe he is your destiny, though I do not know if it is a blessing or a curse.”
(그 인간 아이. ‘항구의 아이’. 그가 네 운명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가 네 운명인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잘 모르겠구나.)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항구의 아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대체 그 아이가 누구길래, 또 자신이 얼마나 그 아이와 비슷하기에 인어들이, 바다들이 왜 저렇게 웃는지 궁금해졌다. 지수가 심각하게 미간을 모으고 생각에 빠지자, 요란하게 치던 바다는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고요해졌다.
“You should go and check on your ‘love’.”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한참 동안 앉아 생각하던 지수가 일어났을 때는, 해가 막 떠오르려고 하는 참이었다. 한솔을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위해 비밀 말하기를 조금 미루기로 한 지수였다. 한솔이가 많이 기다렸겠지, 하며 지수는 다급하게 신발을 구겨신고 모래사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
왜 한솔이가 없지.
여기가 아닌가?
반대쪽인가?
왜 없지
왜.
왜.
어디갔어 한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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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은 등대 쪽으로 걸어가는 지수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한솔은 지수의 행동을 예상할 수 없었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가장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다. 살짝 취해 몸에 열이 오른 상태로 계속 가만히 앉아있던 한솔은, 바다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겨울 밤바다가 무서워봤자 얼마나 무섭겠어. 승관이가 내가 물 주변에 있는 게 불안하다고 했지만 지수 만나고 난 다음부터 잠기는 꿈도 안 꾸었으니까. 한솔은 자신이 앉아있던 곳에 모래를 모아두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지수가 오기 전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제자리에 돌아가 앉아야 하니까. 바다는 아름다웠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저 그랬지만, 가까이 와보니 파도 소리부터 달빛에 반짝이는 어두운 바닷물까지 다 너무나도 고왔다. 한솔은 그 아름다움에 발을 담궈 보고 싶어 신발과 양말을 천천히 벗어서 모래사장에 두었다. 바짓단을 접어 무릎 바로 밑까지 올린 한솔은, 바다와 모래 그 사이 경계선에 서서 발가락 사이로 차가운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한솔은 취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말짱했고, 아까는 지수를 놀리려 취한 척을 한 것이었다. 한솔은, 절대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 깊이 들어가볼까. 한솔은 한 걸음 한 걸음 저 먼 수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겨우 잠기게 하던 바닷물은, 점점 한솔의 발목, 종아리, 이제는 바지 끝자락이 살짝 젖을 정도로 높게 차올랐다. 저 멀리 있는 등대 밑 쪽에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 지수겠지. 등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솔이었다.
조각난 기억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한솔에게 다가왔다. 조금 뒤에 퍼즐처럼 맞춰질, 하지만 다시 조각나버릴 기억들이었다.
if you… meet a mermaid… never... love… them.
아. 또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한솔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물에 잠기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턱 막히며 앞이 뿌얘졌다. 위험했다.
안돼, 안돼.
한솔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얕지만은 않은 캄캄한 겨울 바다 한 가운데 갑자기 눈과 귀가 막히자, 두려움이 한솔을 덮쳤다.
seduce… the moment… tragic …never-end… life… won’t save you.
날 구해주지 못해?
누가? 어디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한솔은 무의식적으로 목에 달려있는 목걸이를 꺼내려 목을 더듬거려 목걸이 선을 잡는데 성공하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살짝 잡았지만 목걸이 줄은 쉽게 끊겨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한솔은 나지막한 비명을 내뱉었다. 목걸이까지 없어지니, 불안함과 두려움이 극대화 되었다. 손을 바닷물에 담그고 휘저어 보았지만, 목걸이는 잡히지 않았다.
도와줘 지수야, 나 좀 도와줘.
지수에게 닿지 않을 말을 한솔은 가쁜 숨 사이로 내뱉었다. 무작정 앞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물이 어느새 허리까지 차올랐다.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뒤로 돌아 걸었으면 모래사장 쪽이었을 텐데, 한솔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극한의 두려움으로 휩싸인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어느새 어깨까지 올라오는 바닷물 사이에 서있었다.
지수야, 지수야. 어디있어. 보고 싶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한솔의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따뜻함 또한 몇 초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You should’ve never loved him.
귀를 찢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거친 파도 속으로 한솔은 사라졌다. 한솔은 잡아먹은 파도는, 마치 자기가 언제 거칠었냐는 듯 잔잔해졌다. 바다는 마치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한솔이라는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듯 흔적 없이 그를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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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야, 굳이 너 혼자 등대로 가야 했었어? 한솔이랑 갈 수는 없었던 거야?”
한솔이 가기 전 덩그러니 남겨두고 간 신발을 꼭 안고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하는 지수에게 승관은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에서는 매일 같이 붙어있잖아. 왜 하필 거기에서는…”
승관은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았다. 지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다. 내가 한솔이랑 같이 갔으면, 한솔이를 혼자 두지 않았더라면, 한솔이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더라면, 내가 한솔이랑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인어인 내가 감히 인간이랑 사랑에 빠져서… 지수는 승관을 볼 면목이 없었다. 지수가 고개를 숙이자, 승관은 그의 동그란 뒷통수를 바라보았다. 지수가 원망스러웠다. 지수의 애인이기도 했지만, 승관의 아주 오랜 친구기도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갈 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제대로 할 걸. 마지막으로 한솔을 본 것은 지수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자고 있는 한솔의 모습을 영상통화 중에 보여준 게 끝이었다. 그때 억지로라도 깨워달라고 하고 인사할 걸. 그 영상통화 녹화해놓을 걸. 하지만, 승관은 머지않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들 사람은 지수였다. 이미 스스로에게 온갖 원망과 질타를 하고 있을 지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원망이 아니었다. 승관은 한숨을 푹 쉬었다. 크게 실수했구나 내가.
“아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미안해 지수야. 너는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 텐데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고, 또… 쉽지는 않겠지만 자책하지 마. 네 탓 아니고 네 잘못도 아니야. 그냥, 불가피한 운명이었던 거야, 알겠지?”
지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승관을 바라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무너져 내렸다.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깨물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아무도 네 탓하는 사람 없어. 그니까 울어도 돼. 빨리 나한테 안겨 홍지수.”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엉엉 우는 지수를 보며 승관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승관이 울상을 짓고 지수를 향해 팔을 뻗으며 말하자, 지수는 비틀비틀 일어나 승관의 품에 안겼다. 여전히 한솔의 신발을 꼭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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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빨갛게 붓고 아플 정도로 짓눌린 눈으로 멍하게 한솔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한솔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를 따라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던 지수는, 차마 못 웃겠는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한솔이가 나 우는 모습 보는 거 싫어할 텐데…”
지수는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미처 들어가지 못한 눈물이 지수의 얼굴 옆으로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또 다시 후회와 원망과 슬픔이 몰아쳐 지수를 어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가려던 찰나, 지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살면서 딱 한번 빌 수 있는 소원, 그걸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잖아. 그거면, 그거면 한솔이가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을 거야.
지수는 주저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왔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지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수가 바다 앞 모래사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흠뻑 젖어있었다. 지수는 망설이지 않고 바닷물로 뛰어들어갔다.
“제발, 제발 저 소원 지금 쓸게요. 아무나 들어줘요. 나 살면서 한번도 안 썼어. 그러니까 이루어 줄 수 있는 거잖아, 그쵸?”
지수는 횡설수설하며 앞으로 걸어나갔고, 어느새 몰아치는 파도와 비는 지수의 허리 높이까지 와있었다.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갈 시간을 버틸 수 없었는지, 지수는 그대로 다리를 접어 잠수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그는 입에 바닷물이 몰려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기도했다.
“I wish to go back many thousands of years back, before I met Hansol, before he was even born. Please, I don’t care if I get stuck in that time loop. Just turn back the clock for him. Bring him back.”
(수천년 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요. 제가 한솔이를 만나기 한참 전, 한솔이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간으로. 제발, 제가 그 시간의 루프에 끼어서 영원히 못 나온다고 해도 상관 없어요. 그냥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주세요, 그를 돌려주세요.)
짭짤한 물이 지수의 목을 타고 그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숨이 점점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지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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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항구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