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부] 순정 보고서
텐찌 / 글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이석민 김민규 서명호였다.
부승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중요하다는 고등학교 3학년 반배정을 그따구로 받은 것. 그리고 하필 셋과 죽이 척척 맞아서 친하게 사이좋게 잘 지낸 것. 그것들 뿐이었다. 수업시간에 들으라는 수업은 안 듣고 철 지난 쪽팔려 게임을 하다가 벌칙 당첨된 머저리 셋. 그 셋과 같이 쪽팔려 게임을 하고 있던 박하준, 정시우, 한도훈이 어째 수업 끝나기 십분 전부터 끊임 없이 키득대더라더니. 부승관은 하필 그들의 중간 자리에 앉아있어서 걔네들이 뭔 지랄을 하는지 훤히 다 보였다. 왼쪽에서는 김민규가 머리 싸매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고 그 뒤에는 이석민이 귀가 빨개져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이석민 짝궁 서명호는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는 박하준이 개쪼개고 정시우가 개쪼개고 한도훈이 개쪼갰다. 쉬는 시간이 되고 선생님이 반을 나가시자마자 김민규는 탄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섹시 댄스를 추냐고!! 난 일어나면 너무 티나잖아 키 커서!! 그 말에 김민규 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키가 큰 이석민이랑 서명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변명을 거들었다. 그러게 쪽팔려 게임을 왜 시작해. 한도훈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약을 올렸다. 문학 시간에 수업만 듣고 있으면 잠 와서 도저히 깨어있을 수가 없다는 구차한 이유로, 우리 그냥 재미로 했잖아 얘들앙 한번만 봐주랑 뀨우, 애교까지 떨어가며 벌칙을 묻어가려 했으나 그들은 실패했다. 고3이나 되어가지고는 그 지랄을 떨고 있는 순간에 부승관은 머저리들의 향연을 애써 무시하고 선생님이 남겨놓고 가신 판서를 노트에 예쁘게 옮겨적고 있었다. 적자생존. 무조건 옮겨 적자, 그래야 생존할 것이니. 반에서 일등은 아니었더라도 부승관은 선생님들도 다 인정하시는 모범생이었다. 그니까 부승관은 정말 절대로 이 바보들이랑 엮일 일이 없었단 말씀.
미션 수행 실패시 벌칙이 변깃물 마시기랬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부승관이 혀를 찼다. 김민규가 그 큰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이 무슨 가정집에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내내 숨어지내다 집주인에게 딱걸린 벌레처럼 징그럽기도 했다. 어디서 애교를 떨어 나이 열아홉 먹고. 벌칙 집행자들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절대 벌칙'을 우겼으나 셋 다 죽어도 변깃물은 못 마시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다른 대안으로 야매 밴드부를 시작하게 됐다. 학교 축제 무대에 밴드로 참여하기. 그게 변경된 최종 최종 최종 벌칙이었다. 밴드부는 정식은 아니고 그냥 축제에 한번 나가는 정도로 끝날 예정이었다. 근데 거기에 이상하게 말려들어서 부승관도 꼈다. 누구 맘대로? 바보들 맘대로.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라고 부승관은 회상한다. 기타를 김민규가, 베이스를 서명호가, 마이크를 이석민이 잡고 나니 드럼이랑 키보드를 잡을 애가 없었다는게 이유였다. 급식실에 한줄로 나란히 앉아서, 김민규랑 이석민이 양쪽에서 승관아 한번만 해죠 너 피아노 잘 치잖앙 웅웅? 거리며 들들 볶는 바람에 서명호한테로 도망갔더니 되려 서명호의 말에 설득당해서 부승관은 키보드 앞에 서게 됐다. 야…… 이거 꿈이냐? 초등학생때 뚱땅거리던 게 전부인 건반을 누르며 그는 중얼거렸고. 셋은 깔깔댔다. 수능이 87일 남았던 시점이었다.
그렇게 부승관은 팔자에도 없는 밴드부 키보드 담당이 되었다. 연습은 수능 끝나고 일주일 그 사이에 몰아서 했다. 그래도 아예 악기를 처음 잡아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나름 소리가 깔끔하게 났다. 이석민이 노래를 어마무시하게 잘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넷은 끝까지 드럼 멤버를 구하지를 못해서 엠알에 드럼소리를 깔아놓고 했다. 이렇게 대충 해도 축제 무대 참여가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럴거면 키보드 소리도 깔아놓으면 됐을 거 아냐.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정신 차려 보니까 축제날이었고 부승관은 무대 위에 이석민 김민규 서명호와 나란히 서있었다. 부승관의 시야가 아득했다. 내 팔자야.
무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솔직히 연습때 했던 것보다 실전에서 몇배로 잘했다. 근데 그럼 그걸로 만족해야지. 이 새끼들이 나란히 같은 대학 와서도, 심지어 1학년 두 학기를 아무 일 없이 멀쩡하게 보낸 후에도 밴드부를 하겠다고 지랄 설치는 것이 아닌가. 반응 좋았던 건 고등학교 때였으니까 그랬겠지. 부승관이 필사적으로 설득해도 귓등으로도 안들어 처먹었다. 명호 형??? 좀 말리지???? 매사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서명호도 얘네랑 놀다가 머리가 좀 돌았나 신나가지고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면서 셋이서 동아리 개설 신청서 써댔다. 진짜 실화냐? 꿈인가, 아직도 내가 얘네한테서 못 벗어난 악몽에 시달리는 건가, 생각에 뺨을 후려쳐봤는데 아프기만 했다. 짝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부승관의 쪽팔림과 정비례했다.
김민규가 미대 입시 실기를 마치고 부승관과 같은 대학에 최종적으로 합격한 후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지랄쑈를 하는 걸 한심하게 바라봤어야 했는데, 부승관은 이제야 그런 후회를 한다. 김민규가 수능을 본 이후에도 몇주를 식음전폐하며 얼마나 피말리는 입시를 했는지 전부 지켜봐온 부승관은 그의 합격 발표 소식을 듣자마자 김민규와 같이 눈물 콧물 흘릴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그들의 우정은 좀 더 돈독해져 버렸다. 적당히 어색하게 지냈어야 했는데 말이다. 이석민의 음대 입시 실기날과 서명호의 2차 추가합격 발표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겨울에 볼이 다 얼어붙을 정도로 눈물을 질질 흘렸다. 이석민은 울보였으니까 몰라도 적어도 서명호보다는 부승관이 더 많이 울었을 것이다. 여기서 제일 웃긴 점은 그렇게 실기날마다 질질 짜고 추합 뜰때마다 질질 짠 부승관은 정작 깔끔하게 최초합격했다는 점이다. 먼저 결승선에 도착해가지고 나머지 세명이 골인하는 걸 전부 본 눈물 많고 감수성 충만한 부승관에게, 그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안 생길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3 같은 반에서 같은 대학으로 우르르 붙은 넷은 뗄래야 뗄 수 없는 4총사가 되어버렸고 훗날 부승관은 이 조합에 자기가 끼어있다는 사실을 존나게 후회할 걸 알면서도 이 웬수들과 떨어지질 못했다. 나는 너무 감정적인게 문제인가보다……. 뒤늦게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이미 밴드부가 있었던 관계로 '밴드 동아리'로서 동아리를 개설할 순 없었다. 이름을 바꿔야했다. 야 뭐하지? 헤비메탈? 아니면 간지나게 락 동아리? 어 락 좋다. 짱 좋다. 완전 간지나. 김민규의 랜덤 발언에 이석민이 얻어 걸렸다. 뭐가 간지나는데. 부승관은 도통 생각들을 이해할수가 없어서 입술을 잔뜩 내민 채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머저리 셋을 관망했다. 그럼 이석민 니 락커냐? 앟핳핳핳핳. 김민규가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락커면 무슨 머리라도 기를 거냐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는데. 그럼 머리 기를까? 이석민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새끼 진짜 미쳤나?
"야 김민규."
"엉."
"동아리 이름 구리면 나 진짜 안 해."
"무슨 소리야 승관아 우리는 함께 가야지."
"진심이야. 나 진짜 안 해."
"아~ 진짜 맨날 혼자 빠질라고 하고! 부승관 왕치사!"
"뭐가 치사야 이석민 진짜 니네가 맨날 니네 맘대로 하고 나 끼워 넣는 거지!!"
이석민과 부승관이 벌떡 일어나서 쌈박질을 시작하려던 그 순간, 서명호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동아리 이름 생각났어. 순식간에 방안이 조용해졌다. 한참을 가만히 있길래 멍 때리거나 또 명상하는 줄 알았는데…… 동아리 이름 생각하고 있었나. 비장한 표정에 침이 꿀떡 넘어갔다. ……뭔데? 김민규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렇게 정해진 그들의 동아리 이름은.
[고생 끝에 ROCK이 온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노답 동아리에 신입생이 들어온 것이었다. 이 이름으로 결국 되다니. 부승관은 일단 그것부터 믿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의 대학 생활에 도움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2학년들만 모아놓은 고생끝에ROCK이온다 이하 고끝롹에 신입생이. 와 여기에 신청서가 오긴 하네. 부장이라고 이름이 올라간 김민규도 놀란 말투였다. 신청서 달랑 두개였는데 사실 두개도 그들에겐 과분했다. 한개는 동아리방 지 집처럼 편하게 쓸 목적으로 보이는 이석민 동생 이찬의 신청서였고, 하나는…… 부승관이 보기도 전에,
"헐 야 얘들아!!!! 드럼 왔다!!!!!!!!"
동아리방에 쩌렁쩌렁 울리는 김민규의 목소리 덕에 알았다. 포지션에 '드럼'이라고 정갈히 적힌 영광의 신청서는 동아리 방의 공기를 타고 날아다녔다. 이석민과 서명호는 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최한솔은 락커 없는 락 동아리에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최한솔 맞나?"
"넹."
"어서 와여. 완전 환영. 근데 편하게 말 놔도 될까요? 우리 걍 편하게 해여. 그냥 형이라고 부르구. 반말 하셔두 되고."
"네 형. 반말은 제가 좀 편해지면 할게요."
"구래. 난 김민규야. 얘는 이석민이고 얘는 서명호고 쟤는 부승관이고 승관이는 너랑 동갑이야. 빠른 년생이거덩."
"아 글쿠나."
부승관은 그런걸 왜 알려주냐며 불평했다. 의자에 앉아 책상에 널브러진 종이들, 채워진 두개의 신청서와 나머지는 죄다 텅빈 신청서들을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문 앞에 서서 대화하길래 난 또 신입생 아닌 줄 알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네. 부승관이 그제야 최한솔을 보았다. 야 승관아 한솔이 석민이랑 생일 똑같대. 너랑 생일 한달밖에 차이 안 나는데 형 소리 듣고 싶냐? 저 꼰대 으유. 김민규의 핀잔을 덤탱이로 쓰고는 부승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거 아니거든! 최한솔은 김민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려 부승관을 흘끗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부승관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확 붉혔다. 그냥 손 인사 하지……. 같잖은 선배 노릇 하려던 거 아니거든. 누가 동갑내기한테 형 소리 듣고싶어 하냐고. 아 진짜 김민규 저것이 괜히 헛소리를 해가지고는.
"……나한테는 반말 해도 돼 그냥."
"……엉."
"반가워. ……한솔아."
김민규가 초 쳐놓은 바람에 이름을 부르려니 괜히 어색했다. 아 그냥 내가 자기소개 하면 됐었는데 진짜 오지랖 태평양이야 김민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왠지 모를 민망함에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김민규의 팔뚝을 팍팍 치다가 다시 돌아본 최한솔은 동아리방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악기들 말고는 책상 하나 의자 몇개가 전부인 작은 동아리방, 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김민규 이석민 서명호(이것도 부승관은 제외)가 밴드 동아리에 어마무시한 애착을 갖고 있는 나머지 신물나게 들락날락 거릴 것이 뻔했다. 어차피 허구한 날 맨날 올거 뭐하러 저렇게까지 눈에 담아두려고 하는 거지. 아니면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 잘생겨서 모든 장면이 영화같이 보이는 건가. 좁은 동아리 방에는 소파도 놓을 데가 없어서 생략했다. 최한솔이 들어온 지 정확히 십오 분 뒤 동아리방을 찾은 이찬은 어떻게 동아리방에 이렇게 있는게 없냐고 어이없어 했다. 그러니깐 인생 쉽게 살려고 하지 마. 이석민과의 혈연으로 악기를 하나도 연주할 줄 모름에도 프리패스 합격 당한 이찬은 서명호의 일침에 침묵했다.
근데 진짜 잘생겼네. 저렇게 잘생긴 애가 왜 하필 이딴 동아리에 들어와서 얼굴도 썩히고 어휴 아무튼 불쌍해서 부승관은 최한솔을 구석구석 쳐다보았다. 최한솔은 그런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의연했다. 큰 눈동자 왼쪽으로 도로록 굴려서 드럼을 봤다가, 오른쪽으로 도로록 굴려서 책상에 널브러진 신청서와 홍보 포스터와 이석민의 책가방을 봤다가. 중간중간 부승관과 시선이 얽히기도 하였으나 흠칫 조차도 하지 않았다. 되게…… 뻔뻔한 성격인가? 아니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건가?
하여튼 부승관은 최한솔을 '잘생겼는데 바보 삼총사(본인은 절대 제외) 때문에 팔자 꼬인 불운의 미남'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미 학교에서 유명인사였다. 공대 디카프리오. 최한솔의 풀네임보다 더 자주 불리는 그의 별명이었다. 생긴 건 세상 제일 잘생겼으면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패션의 후드를 입고 다니길래, 패디과 김민규와 우스갯소리로 설마 공대생 후드? 라며 키득거렸는데 진짜 공대생이었다. 공대 건물에서 나오는 걸 보았을 때에도 둘 다 그냥 볼일 있었겠거니 했는데. 상상도 못한 정체에 김민규와 부승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주선을 만들고 싶어서 기계공학과에 갔대. 서명호에게 들은 공대패션갑 디카프리오 사건의 전말이었다. 진학 사유도 상상도 못할 정체여서 김민규는 허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고 부승관은 왁,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진짜 특이한 애네. 김민규의 한마디에 모두가 동의했다. 오랜만에 맞는 말 하네, 하는 이석민은 덤이었다. 또 치고패고 싸울라고 그러지. 이 자식들 키우는 것도 아닌데 자꾸 엄마 같은 잔소리를 뱉는 역할을 자처하게 되는 부승관은, 그래서 최한솔과 친해지기 힘들겠단 생각을 했다. 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저라지만. 차라리 고등학생 때 만났음 몰라두, 성인 되어가지고 저렇게 본인 세계가 확고한데 내가 어떻게 쟤 세계에 들어가겠어……,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최한솔은 단 한번도 부승관의 예상에 맞아드는 게 없어서.
"승가나."
"악! 깜짝이야."
"미안. 옆자리 비었어?"
"어? 어어. 앉어."
"땡쓰."
최한솔이 이런 교양도 듣나? 팔자 좋게 늦잠 잔 죄값을 하려 울며 겨자먹기로 듣게 된 '우리은하의 역사', 여기서 얼굴을 아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부승관은 얼굴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가방을 치웠다. 최한솔은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필기구를 꺼냈다. 오늘은 무지개색 안 입었네. 검은 반팔티에 검은 츄리닝 바지였지만 비니는 그대로였다. 화려한 색은 아니구, 비니도 검은색. 최한솔은 표지에 떡하니 강의 제목이 적혀 있는 전용 필기 노트까지 꺼내가며 수업에 열심이었다. 이 녀석 꽤나 우리은하에 진심이잖아.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하품을 참느라 고생하던 부승관은 그런 최한솔이 궁금해져서, 충동적으로.
"한솔아."
"엉?"
"점심 같이 먹을래?"
"그래도 돼?"
"안될 건 뭐야. 당연 되지."
"응. 좋아."
소곤소곤 말을 하는 목소리가 조금 들뜬 것 같아 부승관은 더더욱 최한솔을 알 수 없어진다. 얘는 진짜 진심으로 이 강의 듣는 게 재밌나? 흰 머리가 희끗하고 정수리 쪽이 빛나는 늙은 교수의 강의에는 고개를 돌려봐도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 뿐인데. 최한솔만이 눈을 반짝반짝 밝히며 열심이었다. 하여간 특이해. 좋아,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입모양은, 누가 보고 들어도 정말 '좋아'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부승관은 괜히 마음이 이상해진다. 밥 먹는게 좋아서 좋다고 한거잖아. 근데 왜, 이상하게 마음 다른 곳이……? 부승관은 최한솔의 하얀 뺨에서 교수의 보노보노 퀄리티 피피티로 시선을 옮기며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해버린 건 다 최한솔이 너무 잘생긴 탓이라고 돌려본다.
학식으로 왕돈가쓰가 나왔다. 생긴건 뉴욕에서 브런치 먹을 것 같이 생겨가지고는 최한솔은 가리는 거 없이 같이 나온 콘샐러드도 싹 해치웠다. 뿌듯한 식사를 마친 후 편의점에 가서 나란히 바나나맛 우유에 빨대까지 꼽으며, 최한솔은 맛있다 승가나, 하고 개구진 아이처럼 웃었다. 우리 학교 돈가쓰 원래 맛있기로 유명하잖아. 맛있는 메뉴가 나와서 다행이라는 속마음은 넣어두고 부승관은 대꾸했다. 처음 같이 밥먹는데 맛 없는거 먹으면 그것 또한 낭패가 아닌가.
"나 학식 첨 먹어봐."
"엥? 왜?"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아……."
"혼자 먹음 쫌 외롭잖아."
그렇게 안 생겨서는 외로움을 탄다. 사람 좋고 친구 좋다며 왕왕대는 강아지들 사이에서 홀로 고독한 도둑고양이 같아 보였던 최한솔은 알고 보니 외로움을 탔다. 그건 정말 의외라서 부승관은 대답하기에 마땅한 말을 고르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둘 다 말 없이 우유만 쭉쭉 빨다가 부승관은 그 침묵을 버티기가 힘들어 결국 한마디 던졌다. 공대 완전 정 없는 놈들이네, 동기들끼리 같이 좀 먹어주지. 그 말에 최한솔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정 많은데. 엉? 난 정 많은 공대생. 아, 너도 공대생이지…… 미안. 그 한마디에는 웃었던 최한솔이. 나 바본가 봐, 내가 좀 그래, 하고 덧붙이는 말에는 웃었던가. 웃질 않았던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솔아."
"응."
"앞으로 별 일 없으면 밥 같이 먹자."
"그래도 돼?"
"안 되긴 왜 안 돼?"
"너 친구들은?"
"됐어. 어차피 이석민 김민규 서명호야. 버려."
"진짜?"
"가짜겠냐?"
"아니. 고마워."
"엉. 뭘 이런 거 갖구."
고마우면 내일도 밥 같이 먹고 그땐 니가 바나나 우유 쏴. 그 말을 한 건 최한솔이 고마워 하는 것도, 미안해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디 가? 난 동방 가는데. 부승관의 그 말에 최한솔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도. 그러고는 가방을 활짝 열어 아까 수업할때 썼던 노트와 작은 필통과 드럼 스틱 두 쌍만이 든 안쪽을 확인시켜주었다. 너 이거 하나 들으려고 오늘 학교 왔냐? 최한솔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밴드 동아리 경험도, 공연 경험도 없고, 하다 못해 남 앞에서 드럼을 쳐본 적도 없다던 최한솔은 생각보다 드럼을 곧잘 쳤다. 집에서 혼자 연습했다는데 그런 것 치고는 수준급이었다. 연습을 시작한 지 한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디테일한 부분 빼고는 어디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한솔이 때문에 한 곡 연주하는데 좀 오래 걸릴 줄 알고 연습 일찍 시작하자 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다. 서명호가 베이스를 내려놓으며 그 말을 하자마자 김민규와 이석민이 바닥에 엎어졌다. 어제 새벽까지 피파 온라인 하다가 늦게 잠들어 수업 듣는 내내 고역이었다던 둘은 몇분 지나지도 않아 곯아떨어졌다. 이석민은 코까지 골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러냐? 부승관이 어이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김민규는 고등학교 때 화장실에서도 잤는데 뭐. 서명호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이찬이 동방 불편해서 이대로는 못 있겠다며 작은 소파를 들여오긴 했는데 그 소파의 사용자는 거의 대부분이 이찬이었다. 허구한 날 와서 누워있고 앉아서 뭐 보고 있고 아무튼 잘도 썼다. 지가 사온 거라 아무도 태클을 못 걸었다. 그리고 이석민이 이찬을 끔찍이도 싸고도는 바람에 아무도 뺏을 생각을 못했다. 소파는 다 좋은데 단 한가지 장점이 있었다. 푹 꺼져서 이찬 같은 쪼꼬미가 웅크리고 누워있으면 책상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인데, 바로 지금 같이…….
"한솔이 형! 연습 끝나고 어디 가요?"
"아 깜짝이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형이랑 한솔이 형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는데?"
"인기척을 내야할 거 아니야. 맨날 숨어 있을래?"
"형이 몰라놓고 왜 나한테 그래? 한솔이 형은 알았을 걸?"
"엉. 아까 봤어."
"최한솔 내 편 들어라."
"사실 못 봤어."
"니네 뭐하냐?"
보다 못한 서명호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거들었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최한솔이랑 죽이 잘 맞아 최한솔이 동아리에 들어올 때부터 친했던 서명호는 부승관과 최한솔의 달라진 관계가 흥미롭다는 듯 굴었다. 아까 같이 밥 먹었어. 한국인은 밥심인데 같이 밥 먹은 사람 편 들어야 할 거 아냐. 최한솔은 억울해하는 이찬을 보며 키득댔다. 한솔이 형 왜 부승관 말 들어요! 어쭈, 최한솔만 형이고 나는 형도 아니다? 이찬과 부승관이 그르릉대자 이석민이 중얼거렸다. 야 잠 좀 자자……. 아주 여기가 자기 집이야? 주객전도도 정도껏이지. 시끄럽다는 듯 손을 설레설레 휘젓는 이석민에 부승관이 허공 주먹질을 날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안에서는 서명호의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흐르다 이내 사라졌다.
부승관이 심술이 나서 등을 돌리고 의자에 털썩 앉자 이찬은 다시 소파 속으로 몸을 움츠렸다. 찬아. 최한솔이 이찬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나 이거 끝나고 알바 가는뎅. 뭔 알바? 이찬과 부승관이 동시에 말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인형탈."
"인형탈??"
"웅."
"니가…… 왜?"
그 잘난 얼굴 왜 안 써먹고 인형탈 알바를 하냐는 말에는,
"사람들이 나 구경거리 삼는 게 싫어서."
상당히 미안해지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한솔은 자꾸 할말이 없어지게 만든다. 부승관이 입술을 쭈뼜댔다.
"알았어요 형. 나는 같이 피씨방이나 가자 하려 했는데. 버스 타고 가요?"
"아니. 나 오토바이 타고 왔는데."
"오토바이?" 이건 이찬의 대답이었고,
"오토바이?" 이건 부승관의 대답. 최한솔은, 두 반응에도 부승관의 답에만 눈을 반짝였고,
"왜? 승가나."
탈래?
정신 차려 보니 최한솔의 허리에 양팔을 두르고 그를 꽉 붙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날은 더웠는데 바람을 갈라서 그랬는지 하나도 덥지가 않았다. 이씨, 나 머리 다 망가지겠다. 기껏 이쁘게 만지고 온 머리 헬멧에 구겨넣은 부승관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소리만 질렀다. 안 그래도 겁쟁이 중 겁쟁이가 오토바이를 얻어 탄 업보다. 그러게 왜 말 꺼낸 이찬이 자기는 이석민이랑 집에 가야한다고 내빼서는.
"승가나. 괜찮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무서워. 흐아아아아악."
"더 천천히 달릴까? 지금도 천천히 달리고 있긴 한데."
"으아아아아아악. 야! 방지턱, 허어어어어. 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악.“
무슨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 마냥 부승관은 호들갑을 떨었다. 최한솔의 처음 듣는 웃음소리가 오토바이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부승관의 알바 장소 앞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삼십분 정도는 달리고 또 십분 정도는 걸어야 하는 곳인데 오토바이로는 체감상 오분만에 도착한 것 같았다. 혼이 빠져서 헬멧을 벗는 부승관에게 최한솔은 신발 앞 코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앞으로 태워다 줄게."
"나 그러다가 무서워서 사망할 수도 있어."
"에이, 처음 타봐서 그러지. 적응 되면 괜찮을 걸, 너두."
"그런가?"
"응. 그리고 빨리 오잖아. 같이 밥 먹어주는 거에 대한 보상."
뭔 보상씩이나. 거절하면 최한솔 마음에 짐이 생길까봐 부승관은 내심 무서우면서도 알겠다고 했다. 최한솔은 부승관이 썼던 헬멧을 받아들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 인형탈 쓰러 간다. 빠잉. 해맑은 표정을 하고 인형탈을 쓰러 간다는 말이 웃겨서 부승관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어 빠잉. 낼 봐.
〓〓〓
고삼때 올랐던 축제 무대가 아직도 말도 안되는 것 같은데 대학까지 와서도 오르게 됐다. 부승관은 그 사실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짚어 올라가다 박자를 놓쳤다. 앞에 선 기타, 베이스, 보컬이 일제히 부승관을 돌아보았고, 민망한 나머지 본인도 뒤를 돌아보았다가 최한솔과 눈이 마주쳤다. 드럼 실력이 그새 늘은 최한솔은 스틱을 휙휙 돌려가며 묘기를 보여주었다. 이석민 바로 앞에 소파를 끌고 와서 앉아 연습을 구경하던 이찬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분위기가 유쾌해졌다. 최한솔은 이를 다 드러내며 웃었다.
강제 쉬는 시간이 되고, 서명호의 편의점에 가서 마실 것을 사온다는 말에 김민규와 이석민이 아이스크림을 사먹겠다며 따라 붙었다. 부승관은 드럼 뒤쪽까지 가 벽면에 몸을 기대고 스르르 쭈그려 앉았다. 아까부터 자꾸 멍하니 집중을 못하는 그를 본 최한솔이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승관아. 무슨 일 있어? 원래 안 그러던 사람이 자꾸 그러니깐 걱정 되잖아. 부승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닌데…… 그냥……. 현타 온다…….
"왜? 하기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냥,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고……."
"그래? ……난 기대 되는데. 얼른 무대 서고 싶어."
"넌 잘하잖아."
"고마워. 너도 잘해."
"나는 못해."
"무슨 소리야. 실수 한번도 한 적 없으면서."
"그건 그냥 곡이 쉬우니까……."
"네가 잘 하니까 그걸 쉽게 할 수 있는 거지."
"으응……. 그른가."
"엉. 그니까 앞으로 그런 말 금지."
"뭐?"
"나 못한다, 난 안된다 금지."
"……."
"승관아. 나는 무대 서는 거 처음이잖아. 그래서 기대 되고 얼마나 재밌을 지 설레고. 빨리 너랑 같이 무대에서 재밌게 놀고 싶어. 너도 나도 막 움직이면서 무대 쏘다니진 못하지만, 뭐…….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거 아니겠어. 나는 아직 무대에 선 네 모습도 본 적 없잖아. 기대 되는데."
"야, 너는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부승관의 얼굴이 한여름 뙤약볕을 맞은 것 처럼 붉어졌다. 듣기만 해도 부끄럽고, 또 사실은, 기분 좋은 말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부승관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다가, 앙탈 아닌 앙탈을 부렸다.
"야. 최한솔."
"엉."
"너 나 좋아하냐?"
무슨 농담도 그런 농담을 치냐며 웃어 넘길줄 알았던 최한솔은 뜻밖에도, 너무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누가 널 안 좋아해?"
무책임한 말을 했다. 부승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의 없는 마음에 나쁘게 당할 수도 있을 거 같다고. 저 얼굴을 하고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에겐 사랑 빼고 사랑을 표방한 모든 감정이 들어있을 수도 있겠으나, 정말 외로운 사랑을 하게 되면 너무 힘들어질 것만 같아서. 처음 점심을 같이 먹은 이후로 계속 같이 식사를 한 일이나 동아리 방에 나란히 출석을 찍던 일이나 시간이 애매하게 뜨면 카페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일들이, 부승관은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좋았어서, 그 일상적인 것들이 혼자만 힘든 일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우주선이 만들고 싶었는데 막상 대학에 와보니 해저 탐사선이 더 끌린다는, 여름에는 서핑을 배워볼까 생각중이라는, 주말에는 여동생과 자전거를 탄다는 얘기들을 듣는게 좋았으니까.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벼운 마음은 종종 순식간에 겉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다. 똑똑한 부승관이라고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시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그는 미리 대비를 하기로 했다. 열여섯의 고등학교 1학년 부승관, 그리고 스무살의 대학교 2학년 부승관. 어린 부승관, 어른 부승관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최한솔에 대한 제방 쌓기.
그러나 최한솔은, 다시 한번 더, 단 한번도 부승관의 예상에 맞아드는 게 없어서.
자랑스러운 여초과의 남자 일원인 유아교육과 부승관은 동기 선배 후배들의 최한솔 호들갑을 오롯이 혼자 받아내야 했다. 최한솔이 인형탈 알바하는 걸 자처하는 이유를 알것도 같았다. 고양이 세수 겨우 하고 나온 것 같은 몰골에도 동기들은 앓는 소리를 냈고 후배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에 대한 찬양을 했으며 선배들은 맛있는 걸 사들고 그를 쫓아가기 바빴다. 공대 디카프리오의 숙명인가? 최한솔 딴에서는 상처 안 주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으나 부승관의 눈에는 은근하게 불편해하는 것이 그저 훤했다.
미스테리 범벅인 최한솔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고, 친해지고 싶어하는 욕망의 불똥은 그대로 부승관에게 튀었다. 부승관이 그와 어느정도 친하고, 같은 동아리, 심지어는 같이 점심을 먹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마자 모두가, 심지어는 다른 과 사람들 마저도, 성격 좋고 착하고 어떤 면에서는 조금 호구 같은 그에게 매달렸다. 한솔이 연락처 좀, 이건 자기도 카톡 친구만 되어 있고 번호는 없다고 둘러댔다.(당근 구라. 맨날 문자했다.) 한솔이 뭐 좋아하냐는 말에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고,(이건 어느정도 맞는 말.) 한솔이 바쁘냐는 말에는 알바 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다고 대답했다.(이건 완전 맞는 말.) 최한솔과 오천만 인간의 사랑의 작대기를 이어주느라 진절머리가 난 큐피드 부는 한동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환상으로 쌓아올린 최한솔에 대한 찬양을 듣다가, 자기 앞 자리에서 순두부 찌개를 불어 먹으며 뜨겁다고 인상을 찌푸리고, 편의점에 신상 초코빵 나왔다는데 같이 먹으러 갈 시간 되냐고 묻는 최한솔을 마주하는 것이 웃긴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최한솔은 정말 어떤 사람을 좋아하려나. 초코빵의 띠부띠부씰을 소중하게 핸드폰 케이스에 붙이는 최한솔을 보다가, 부승관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나 보나마나 최한솔이 누군가를 좋아했다기 보다는 누군가가 최한솔을 좋아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을 것이 뻔하기에(이미 실질적으로 증명도 되었고), 부승관은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초코 크림을 다 묻히고 먹는 최한솔을 어휴, 하고 타박하며 엄지 손가락으로 닦아주었을 뿐이었다. 최한솔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어쭈. 민망한 줄은 알어.
"승가나. 동방?"
"놉. 교양."
"엥? 아, 맞다. 이번주만 그 시간이라고 그랬었지."
"웅."
"그럼 나 합주실에 있을 테니까. 끝나는 시간에 내가 나갈게."
"안 그래도 돼. 먼저 가."
"시러."
"허."
"같이 가자."
"길이 같지도 않은데 왜."
"같이 가면 좋잖아."
"그래라. 니 맘대루 해."
"아싸. 그럼 좀 이따 봐 승가나."
"웅. 합주 팟팅!"
"파이팅!"
은근히 애교 부리는 최한솔이 귀여워, 부승관은 모션까지 취해가며 더 심한 애교로 받아쳤지만 최한솔은 오글거리다고 질색하는 일 없이 웃으며 편의점을 나섰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우리가 지금 친구라고 이러고 있긴 한데. 최한솔은 자꾸 헷갈리게 부승관이 좋다고 말한다. 아니 좋긴 하겠지, 부승관도 최한솔이 좋았지만. 애초에 '좋다'는 말은 조금 위험하지 않은가. 좋다는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더 자세하게, 좋음을 더 표현할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최한솔은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그냥 좋다고만 해서 부승관을 더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마음대로 오해하라는거지, 너.
부승관은 편의점 유리 창문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최한솔에게 딱밤을 날린다. 바보 최한솔.
부승관도 최한솔이 좋았다. 그것이 그 둘의 단 한가지 문제점이었다. 최한솔은 부승관을 좋아한다. 부승관은 최한솔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두 문장에 쓰인 '좋아한다'라는 말의 정의는 같아지지가 않을게 분명했다. 결국 부승관은 그날 밤, 최한솔과 점점 더 좁아지는 거리를,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게 하기로 결심한다, 좀 절망적이었고, 생각보다 어려웠고, 꽤 힘들었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을 해서. 바보 부승관.
〓〓〓
큐피드 부는 영업 몇주만에 장기 휴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승관이 아침에 등교하다 우연히 흡연구역을 지나가다 들은 이야기 탓이다. 그 곳을 지나가기 2분 전까지만 해도 부승관은 최한솔과 문자를 하며 오늘은 오랜만에 학식 대신 레스토랑이나 가볼까, 하는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고, 최한솔은 학교에서 은근 먼 곳들의 주소를 보내며 오토바이 타고 가면 금방이라는 얘기로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파스타 먹을 생각에 마음이 들뜬 그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한 목소리들.
부승관은 뭔데 최한솔이랑 친해? 존나 안 어울리잖아. 부승관은 걍 존나 나대는 애고 최한솔은 매사 진지한 앤데 어떻게 친하대? 성격 존나 안 맞을 듯. 보나마나 부승관이 들러붙는 거겠지 뭐. 걔도 얼빠잖아. 하여간 걔도 웃기는 애야.
부승관은 최한솔과의 대화도, 바쁘게 움직이던 두 발도 멈춘 채 그 목소리들을 가만히 서서 들었다. 근거 없는 소문이었고 증거 없는 짐작이었으나 그 말들은 부승관을 아프게 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의연하게 넘어갈 정도로 의젓하지 못한 스무살의 이학년 부승관은 억울함, 그리고 당혹스러움에 찔끔 흐르려 하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갑자기 답장이 오지 않는 대화창에 당황한 듯한 최한솔이 일분에 네다섯개씩 문자를 보내왔으나 읽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부승관도 알았다. 최한솔과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 얘랑 이대로 괜찮은걸까.
결국 부승관은 최한솔과 만나기로 한 시간 직전까지도 연락에 답장을 하질 않았다. 최한솔은 부승관의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으나 빠져나가는 인파 속에 묻혀 몰래 나간 부승관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출석은 했다는데,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최한솔이 당황해있을 동안 부승관은 집에 가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조금 울었다. 앞으로 진짜 최한솔 무시 깔 거라고.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울지도 않았겠지.
"승가나!"
"뭐…… 저거 뭐야?"
"타!"
저 사람도 아니고 저거라니. 너무한당. 짐짓 속상한, 그러나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최한솔은 무슨 아보카도 그림이 그려진 헬멧을 쓴 채로 부승관에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진짜 왜 저래?!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서 모르는 척 지나가고 싶었는데 그러면 상처받을까봐 다가가줬다. 진짜 미치겠다 너. 헬멧이 이게 뭐냐? 최한솔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쁘지 않냐고 되물었다.
"새로 장만한 건데. 헬멧 하나 더 있어. 타."
"나 오늘은 안 급하대두."
"응. 좀 돌아서 갈거야."
"뭐야, 그럼 내가 니 오토바이를 왜 타?"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안 돼?“
부승관의 결심은 약 2주만에 처절하게 무너졌다. 최한솔이 부승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요주의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최한솔은 부승관이 거리를 두려고 하든 말든 끝임 없이 말을 걸었고 밥을 같이 먹었고 오토바이를 태워줬다. 부승관은 천성이 모질지를 못해서 그를 내치기가 힘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최한솔을 해맑기만 했다. 부승관은 제 앞에 앉아 차돌박이 김치볶음밥을 깔끔하게 비운 최한솔을 미워할지 원망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엔 한숨을 내쉬었다.
축제가 코앞이었다. 합주는 생각보다 더 막히는 일 없이 순탄했고 오합지졸 밴드의 영원한 첫번째 관객 이찬은 합주를 들을때마다 저번보다 이번이 더 좋았다며 칭찬을 아끼질 않았다. 그게 진심인지 아님 사탕 발린 말일진 모를 일이었으나 이석민이 잔뜩 신나서 이찬을 껴안고 꺅꺅대는 걸 보는 것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축제 공연 전 마지막 합주까지 마친 고끝롹 멤버들은 다들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해산했다. 최한솔은 백팩에 드럼스틱을 쑤셔넣고 먼저 동방을 나서는 부승관을 쫓았다.
"승가나. 알바 가?"
"오늘은 안 가. 왜 자꾸 쫓아와."
"같이 집 가자. 나도 오늘 알바 안 해."
"우리 집 방향 다르잖아.“
"그럼 태워다줄게."
"됐어."
"왜?"
"그냥, ……타기 싫어."
내일 보자. 부승관이 최한솔을 지나쳐 걷는다. 부승관의 입안 여린 살들이 잘근잘근 씹힌다. 부승관은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급한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
"승관아! 내일, 내일은 몇시에 와?"
"왜?"
"데리러 갈게. 너랑 같이 오면 좋을 것 같아서. 시간 맞으면……."
"최한솔. 어휴. 됐어. 나 혼자서 올 수 있거덩."
"너 혼자서 올 수 있는 거 알아. 그냥 내가 같이 오고 싶어서 그래."
"혼자 올거야."
"왜?"
"왜냐니."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어?"
상처 받은 목소리가 들려, 부승관은 이리저리 회피하던 시선을 최한솔의 얼굴로 옮긴다. 그 목소리 그대로 녹아난 상처 받은 얼굴이다. 부승관은 최한솔에게 약하다. 천성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제법 단호하게 다물렸던 입술도, 꽉 쥐고 있었던 주먹도 최한솔의 얼굴을 보자마자 본인도 모르게 스르르 풀려버렸다. 사실 어느정도는 예상했으면서도, 최한솔을 자신이 상처주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은 이기적인 마음에, 부승관은 눈을 질끈 감는다. 최한솔 바보야. 누가 누구한테 바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너랑 같이 다니면 내가 무슨 소리 듣는지 아냐구. 너 때문에 피곤해서 힘들어. 안 들어도 될 말도 괜히 듣고……."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맞는 말들도 아닐거면,"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신경이 쓰여. 쟤는 뭔데 쟤랑 다니냐 이런 말들도 나는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야."
"네가 나랑 친한 게 이상하대?"
"어, 이상하대."
"왜? 우린 그냥……."
"너랑 나랑 안 어울리니까."
"누가 그래?"
"그냥 딱 봐도 안 어울리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승관아. 왜 그런 말을 해?"
"……그래, 너 다 잘났다. 나는 쫌생이라서 그래. 너랑은 다르게."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어? 그런 말을 해서 나를 속상하게 만들어……."
"……."
"……승관아."
"나 갈게. 내일 보자."
최한솔은 그 말만 남기고 정말 집에 가버렸고 부승관은 한참을 그 자리에 발이 붙은 사람처럼 서있다가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에 주책처럼 눈물이 줄줄 났다. 모질게 군 사람은 최한솔이 아니라 부승관이었고, 심하게 말한 사람도, 상처 준 사람도 부승관이었는데도 억울했고 서러웠고 눈물이 났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쪽팔려서 눈물이 흐르는 족족 닦아내었더니 볼이 홧홧했다. 당장 내일이 축젠데 어떡하냐고. 어쩔 작정이어서 그런 말을 했냐고. 탓을 본인에게 돌렸다가 최한솔에게 돌렸다가를 반복했다. 누구 하나 잘못한 게 없었으니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그날 밤 최한솔에게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문자도 전화도 카톡도. 하루 전까지만 해도 온갖 요상한 이모티콘까지 남발해가며 대화한 기록이 있는게 낯설기까지 했다. 다음날 부승관은 전날 연막을 미리 쳐놓은 덕에 어차피 일찍 갈 필요도 없어 최대한 늦게 학교로 갔고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기타를 튜닝하던 김민규가 아무것도 모르고 부승관에게 핀잔을 주었다. 부승관 맨날 지각해! 이석민도 거들었다. 아직 지각 안 했거든?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오분 남았거든? 다들 설레발 쳐서 일찍 나온 거면서 뭐. 부승관이 입술을 삐쭉였다. 얼굴 보자마자 투닥대는 셋에 서명호는 정말 너희 여전하다, 말과 함께 베이스를 어깨에 맸다. 부승관은 괜히 서명호에게 매달리며 은근슬쩍 최한솔을 곁눈질로 흘긋대며 살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뭘 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텐션을 보이는 걸 눈치 챈 이찬이 최한솔 앞을 서성이며 텐션을 높여주려 하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한데, 부승관의 귀에는 들리지를 않았다. 얘들아 백스테이지 가자! 서명호의 목소리에 안 그래도 호들갑을 떨던 이석민과 김민규가 더 부산스러워 졌다. 김민규 저것은 동아리 부장 타이틀은 뭐하러 가져간 거야. 부승관의 혼잣말에 이찬이 웃었다.
백스테이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스탭 명찰을 달고 있는 학생들이 일분에도 몇번씩 눈앞을 왔다갔다 거리며 뛰어갔고, 이쪽에서 불렀다 저쪽에서 불렀다 하도 불러대는 바람에 김민규는 그 긴 다리로 겅중대며 불려다녀야 했다. 부승관은 구석에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관망하다, 최한솔이 시야에 들어올때마다 차오르는 눈물을 옷 소매로 찍어내다, 최한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싸맸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무대가 몇분 남지 않은 와중에도 최한솔 생각만 나는 것도 진짜, 징하다. 부승관은 제 자신이 한심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고등학교 밴드부에서는 수능이 그러했고, 수능이 끝난 뒤에도 마땅한 합주실이 없어 학교에 나와 연습을 해야했던 일들이 그러했고, 마침내 오른 학교 축제 무대가 그러했다. 막고 싶어도 막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건…….
"고끝락 여러분 올라갈 준비하실게요!"
"얘들아 모여!"
김민규의 부름에 부승관은 벌떡 일어나 손을 모으고 있는 동아리 멤버들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얼떨결에 닿은 최한솔의 손이 뜨거웠고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제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 정말 다시 오르는 구나. 이 년만에, 무대에. 그리고 이번엔…… 최한솔과 함께.
"얘들아 우리 연습한대로만 하자!!"
"응!!!"
"끝나고 회식 가자!!!"
"예!!!!!"
"고생 끝에!!!!!"
"롹이 온다!!!!!!!!!!"
김민규의 선창으로 동아리 구호를 외쳤다. 이름 구려서 밴드 하기 싫다던 부승관도 그 순간 만큼은 환하게 웃으며 후창했다. 그리고 올랐다, 무대에.
이석민은 나이를 먹더니 노래 실력이 더 늘었다. 고삼때는 좀 떠는 것 같더니 이젠 떨지도 않았다. 김민규는 관객들의 반응에 신이 나서 무대를 눈 처음 본 강아지마냥 방방대며 쏘다녔고, 서명호는 연습때도 하지 않았던 애드리브를 했다. 키보드 부승관은 무대를 날아다니며 온갖 난리를 피우는 셋을 바라보며 웃다가, 문득 떠오른, 제일 뒤에 있는 그에게 시선이 닿았다. 충동적으로 돌아본 최한솔은, 햇살을 받아 정말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하마터면 연주를 놓칠 뻔 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아이처럼 입을 다 벌리고 웃으면서, 드럼을 부술 기세로 치면서, 항상 백팩에 박혀 있어서 유독 하찮아 보이던 그 드럼 스틱 한 쌍이 요술이라도 부리는 지팡이처럼 최한솔에게 한번 더 반하게 만들었다.
그래. 부승관은 최한솔을 좋아한다. 하필 사랑 노래를 연주하고 있어서 였을까. 아님 때마침 덥지 않은 봄바람이 불어와서 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와서 였을까. 부승관은 확신했다.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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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하고 소주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다들 연습때보다 배로 잘했다. 김민규가 세상 뿌듯한 얼굴을 하고 이찬이 무대 바로 앞에서 찍은 영상을 여섯 번째 돌려보려는 걸 서명호가 손을 뻗어 제재했다. 그만 좀 봐, 잘 했으니까. 이석민은 벌써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실실댔다. 우리 실전판가봐. 그때 고삼때도 실전에서 개잘했잖아. 답지 않게 무대에서 잔뜩 흥분했던 서명호도 이석민의 말에는 웃었다. 석민이 형이 노래 진짜 쩔었어요. 나도 잘 하는거 아는데 오늘은 진짜 대박. 듣다가 너무 잘해서 주변 둘러보니까 다들 석민이 형만 쳐다보고! 신이 나서 직관 썰을 들려주는 이찬을 김민규가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내가 아니라 이석민 쳐다 봤다고? 나도 개잘했는데! 이석민은 김민규의 팔뚝을 치며 투정에 응했다. 이 새끼는 친구 칭찬 듣는게 그렇게 아니꼬와서는 이러냐? 으흐흐흐. 서명호의 웃음소리에 셋이 동시에 바보 같이 터져서는 한참을 웃었다. 이찬도 따라 웃었다.
최한솔은 기껏해야 미소만 지으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이찬은 아까 최한솔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그에게 무리하게 술을 따라주거나 말을 걸질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승관은 속만 탔다. 제일 걱정 하던 걸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기분이 후련할만도 한데 전혀 그러질 않았다. 찝찝하기만 더럽게 찝찝했다. 최한솔은 화가 난 건지 부승관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명호 형이랑은 잘만 얘기했으면서! 웃기도 했으면서! 울컥 치솟는 마음에 잔에 남은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이석민이 오올, 하는 되도 않는 소리를 내었다.
이석민이 화장실에 가고 김민규가 담배를 피우러 가고 서명호가 2차 장소를 찾는 동안 부승관은 몰래 뒷문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앞문으로 나가면 김민규에게 딱 걸릴 것 같아 일부러 뒷문을 찾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었다. 휴, 하고 숨을 내뱉고는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최한솔이랑 다시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그냥 미안하다고 해야하나, 내가 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받아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술자리를 싫어하지 않는 편인 그에게 오늘 자리는 가시방석 같았다. OT때도, 신환회때도 불편하지 않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들리는 목소리.
"승관아."
"…….“
최한솔이었다. 방금까지도 최한솔 생각을 하고 있던 부승관은 우습게도 최한솔을 보자마자 다시 감정이 벅차올랐다. 어제 울면서 집에 갔던 것, 오늘 백스테이지에서도 무대 생각이 아니라 최한솔 생각을 한 것, 그런 것들이 모두 한번에 섞여 부승관의 목구멍을 치솟고 올라와서…… 아프게 했다. 부승관은 이제 최한솔을 보기만 해도 아팠다.
"어디 아파?"
"아니?"
"왜 그렇게 못 먹어, 그럼."
너 때문이잖아, 이 말이 튀어나오려다 급히 들어갔다. 부승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최한솔을 다시 상처줄 것만 같았다. 사과 하고 싶었고, 다시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냥 친구였던 때로, 최한솔을 봐도 심장이 요동치지 않았고 팔다리가 오작동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부승관이 무슨 말을 해도 그게 최한솔을 향한 사랑 고백이 될까봐, 부승관은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부승관은 모진 말을 했다. 그게 본인의 잘못인 줄 알면서도, 최한솔이 싫어하고 속상해 할 줄 알면서도,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었다. 부승관은 그렇게 해서라도 최한솔을 잃고 싶지 않아서.
"아니야."
"뭐가 아니야. 음식 통 먹지도 못하고 깨작거리다가 술만 좀 먹는거 다 봤어."
"봤어?"
"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승관아. 우리 친구잖아."
최한솔의 그 말이 야속했다. 부승관은 최한솔 앞에서 울고싶지 않았으나 눈물샘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눈에 눈물이 차오르게 만들었다. 차마 떨어뜨리고 싶진 않아서 눈을 부릅 떴다. 찬 밤바람이 불어 그의 눈물을 말려주었다. 다행이었다. 최한솔 앞에서 울게 되면 그에게 안기고 싶어, 참을 수 없어질 것만 같았다.
"우리가 친구야?"
"친구 아니야?"
"그럼 친구처럼 행동해. 왜 자꾸 니가 내 남자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굴어."
"뭐?"
"……."
"…… 승관아,"
"최한솔. 넌 다 쉽지? 세상에 어려운 거 하나 없지?"
"어려운 게 왜 없어?"
"너는 다 잘났으니까 다 네맘대로 될거 아냐. 세상이 전부 니편이라 안되는 거 못 하는 거 하나 없을 거 아냐!"
"부승관."
"뭐."
"맘대로 안되는 거 있잖아. 부승관.“
부승관은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남은 학기 내내 최한솔과 어색하게 지낸 부승관은 방학이 되자마자 본가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고끝롹 웬수떼기들이 단체로 바다여행을 가자고 지랄을 하기 전까지는. 부승관 절대 빠질 생각 말라며 못을 박아놓는 바람에 맘대로 튈수도 없게 되었다. 친구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들 친구 같은 형이었기에, 친구들과 여행은 처음 가본다며 잔뜩 들뜬 이찬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서도 부승관은 본가에 가겠다며 시치미를 뗄 수가 없었다. 부승관은 천성이 모질지를 못했다. 그럼 칠월 되자마자 바로 가는거다? 날짜는 금세 잡혔다. 김민규와 서명호가 에어컨도 없는 동방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맥북 하나 놓고, 딱 달라붙어 숙소를 예약하고 갈 맛집을 정하는 것을 보던 이석민은 우리 김민규 입시 때문에 수능 끝나고 나서도 한번도 못 놀았잖아, 얘기하며 이찬과 함께 방방댔다. 신난 건 알겠는데. 이 눈치 단체로 팔아먹은 놈들은 나랑 최한솔 어색한 거 알면서도 붙여놓겠다 이거지. 처음에는 둘이 왜 싸웠냐며 화해하라고 호들갑을 떨던 이들도 하루이틀이 지날수록, 그게 쌓여 한달이 되고 두달이 되어갈 수록 말이 없어졌다.
최한솔도 바다 여행에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나만 심각하지, 나만. 학교에선 최대한 안 만나려고 기를 쓰면 그래도 몇번 얼굴 안 볼수 있었는데 여행 같이 가면 같이 자야하지, 같이 차 타야하지, 생각만 해도 어색했고 불편해서 몸이 다 떨렸다. 근데 이 해맑은 새끼들은 마냥 신나서. 좋은게 좋은 거지, 생각하려 해도 힘들었지만…….
7월 1일은 다가왔다. 6월 30일에 캐리어까지 다 싸놓은 부승관은 11시부터 다음 날이 오지 말아달라고 물떠놓고 절을 하며 빌었으나 디데이 알람 어플은 띵,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1일이 기어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대빵 큰 차를 렌트해와서 아침부터 멋쟁이 틴트 선글라스를 쓰고 야! 타! 외치는 김민규에게 썩소를 날려준 부승관은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차에 올라탔다. 최한솔은 학기 초에 김민규와 부승관이 놀랐던 무지개 후드티와 디자인이 똑같은 무지개 반팔티를 입고 뒤에 앉아 뭐가 좋은지 이찬과 깔깔거리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 우울해 하면 뭐하냐. 피할수 없으면 즐기자! 부승관은 조수석에 앉은 서명호의 핸드폰을 뺏어 자기 핸드폰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했다. 이석민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부승관 오랜만에 가나요? 아 가나요~?"
"그럼. 디제이 뿌뿌뿌 레쓰기릿."
"와!!! 승관이 형 짱!!!"
마지막 말은 김민규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부승관은 앞이나 잘 보라며 김민규의 머리에 딱밤을 놨다.
여행은 즐거웠다. 휴게소에서는 그 휴게소에 파는 모든 것들을 다 하나씩 사서 펼쳐놓고 나눠 먹기도 했고,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무한 리필 횟집에 가서 15인분을 해치우기도 했고, 신발 벗고 무작정 모래사장에 뛰어들었다가 발바닥이 빨개진 김민규를 보고 다 같이 한참 동안 웃기도 했다. 펜션에 짐을 대충 풀어놓은 뒤에는 바로 바다로 뛰어갔다. 이찬이 챙겨온 공으로 비치 싸커도 했고, 가위바위보 진 순으로 입수하다 파라솔 밑에 누워있는 서명호를 데려와 입수시키기도 하고. 물놀이를 끝낸 후에는 펜션 근처의 횟집에서 술을 죽어라 마셨다. 휴게소 이후로 텐션이 높아져 내내 붕 떠있던 부승관은 알콜이 좀 들어가고 나서야 다운이 됐다.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며 펜션에 들어간 고끝롹 멤버들은 대충 씻은 후에 이불을 깔고 거실에 나란히 누웠다. 먼저 누워있던 부승관 옆으로 최한솔이 손을 더듬대며 다가왔다. 방에 불을 꺼놓아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이석민이 코를 골기 시작했고 김민규가 그런 이석민의 배를 때리며 조용히 하라고 웅얼댔다. 부승관은 잠이 안 와서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최한솔도 잠이 오지 않는지 자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최한솔."
"응?"
"잠 안 와?"
"응."
"나갈래?"
"응."
펜션에 있던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바닷가에 나와 앉았다. 후덥지근한 여름 밤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부승관은 뜨거운 볼을 손으로 주물대며 식혔다. 최한솔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승관의 옆에 털썩 앉았다. 모래가 흩어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심장이 쿵쿵댔다. 둘 다. 회식 날 이후로 단 둘이 있는걸 필사적으로 피한 터라, 너무 오랜만에 단 둘이서 있는 거라서.
"승관아."
"응."
"우리 다시 친구하면 안돼?"
"풉."
웃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 순수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 최한솔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부승관을 바라보는 최한솔이. 너무 귀여워서, 좋아서. 햇빛을 전부 받아내며 빛나던 최한솔을 사랑하는 것처럼, 달빛에 스며드는 최한솔도 사랑해서. 부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구 하자.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고마워."
"뭘."
"승가나. 사실, 나 너랑 친구 하면서 좀 힘들었거든."
"뭐?"
"……술 기운 빌려서 그냥 말 해볼게. 나 사실 너 좋아해. 처음 봤을 때 부터 쭉. 그래서 나 원래 그런 성격 아닌데도 무작정 너한테 다가갔고 너랑 친해지려고 했던 거야. 인형탈 알바 그만두고 나서도 그 핑계 대고 너 오토바이로 데려다준거야. 나는 너 좋다고 계속 말했는데 너는 다르게 이해했잖아. 그것 때문에 좀 힘들었어. 나는 니 친구 말고 니 남자친구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때 회식에서 니가 그 말 했을때도 힘들었어. 근데 괴롭지는 않았어. 니가 좋으니까."
"……야."
"나는 너 좋아.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니가 그게 싫다면 어쩔수 없지만…… 싫지 않다면 같이 있어주면 안될까? 나 너 없을 때 좀 슬펐어. 매일."
"최한솔."
"어."
"나 좋아한다고?"
"엉."
"니가 나를 좋아한다고?"
"응, 승가나."
그 말을 하면서 웃는 최한솔의 얼굴이 밤하늘에 뜬 달보다 밝게 빛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승관은 그제야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이름을 승관아, 하고 부를 때에도, 최한솔이 항상 승가나, 하고 불렀던 이유는, 부승관을 부르는 얼굴이 잔뜩 미소를 짓고 있어서 였다는 걸. 최한솔도 부승관의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났다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전부 진심이어서, 그래서 부승관이 그 말을 들을때마다 최한솔의 심박과 동일하게 심장이 뛰었을지도 몰랐다. 부승관은 참을 새도 없이 왼쪽 눈에서 눈물을 똑 떨어뜨렸다. 최한솔이 보지 못하게 얼른 닦아내었다. 믿기지도 않아서 행복할 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안심이 되는 마음이 새삼스럽게 벅차올랐다. 최한솔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흡, 하고 최한솔이 숨을 참았다. 볼이 말랑말랑했다. 우유빵 같이.
"최한솔."
"응."
"바보야."
"웅."
"너는 진짜. 내가 너한테 그런 말들을 했는데두.
"갠차나. 니 잘못 아니자나."
"너는 나밖에 모르냐?"
"우응."
부승관이 최한솔의 볼을 잔뜩 주물거리는 바람에 볼이 점점 눌려서 발음이 늘어졌다. 이리저리 온갖 방향으로 잔뜩 찌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고 키득대니 최한솔도 따라 웃었다. 봄에 웃던 최한솔은 참으로 해사했었는데. 여름에 웃는 최한솔은 시원했다. 고작 하루이틀 차이에, 여름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처럼. 최한솔 진짜. 나 적당히 좋아해라. 부승관은 나도 네가 좋아, 그 말 대신, 한발 물렀다.
"승관아. 근데 나는 진짜 농담으로 하는 얘기 아니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니가 좋아. 널 싫어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적당히 좋아하는 방법도 모르겠어. 그러고 싶지도 않아 그냥. 끝도 없이 너 좋아하고 싶어. 이게 내 사랑이야. 이게 너에 대한 내 사랑 방식인 것 같아."
"지독하다. 최한솔. 무섭지도 않아?"
"사랑이 왜 무서워? 너는 사랑이 무서워? 나는 그냥 좋기만 한데.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감정들도 좋고 네 덕에 바뀌는 내 세상도 좋고, 전혀 다른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고 그걸 다 너랑 할 수 있어서 좋아."
"미쳤어 하여간. 세상 로맨티스트네."
"흐흐."
"너 그거 순정이야."
"그럼 그런가봐. 나 너랑 순정 그거 하나 봐. 나 살면서 순정 처음 해봐. 니가 내 첫 순정이야, 승관아."
그 말에 부승관도 참을 수 없어졌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던 이번 여행, 그리고 막고 싶었지만 막을수 없었던…… 사랑. 한솔아. 나도 너 좋아해. 미안해. 용감한 너랑은 다르게 나는 무서워서. 겁나서 그랬어.
"나한테는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응."
"승가나."
"응?"
"그럼…… 키스해도 돼?"
……그러든가. 부승관이 눈을 감았다. 최한솔의 숨결이 느껴졌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최한솔의 처음은 부승관에게도 처음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