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icon 2.png

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순솔] 은하수를 여행하는 현상수배범을 위한 안내서

밤부 / 글

눈을 뜨자마자 남자친구가 보였다. 아 어제 같이 잤지. 피곤한가. 안 일어나네. 한참 눈을 감고 있길래 얼굴을 구경하다가 문득 미시감이 들었다. 어? 어제 같이 잤나? 아니 집에 같이 오긴 했나? 애초에… 내가 남자친구가 있었던가? 절대로 NO. 권순영 인생에 남자친구란 있었던 일도 있을 일도 없을 존재였다. 으악! 순영이 소리를 지르자마자 멀건 껍데기의 남자친구가 비척비척 일어난다. 형 시끄러워. 누구세요! …아 들켰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흡사 디카프리오를 닮은 그 남자는 차분한 음성과는 달리 눈으로 무지개 빔을 뿜었다. 아니 잠시만요 저기요 제발 저기요 죽이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눈을 꼭 감고 바닥에 주저앉자 지잉 소리와 함께 눈 속으로 빔이 빨려 들어간다.

 

 

“죽이려던 거 아닌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현상수배범을 위한 안내서

 

 

 

 

한솔은 멋대로 서랍을 열더니 코코아 가루를 꺼냈다. 대체 그게 어디서 났어요? 서랍이요. 아니 나는 그런 걸 산 적이 없는데? 네 내가 넣어뒀어요. 물 반 우유 반 수준의 진한 코코아를 타더니 순영의 앞에 털썩 앉는다.

 

순영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낯선 남자의 기행도 기행이거니와 아니 분명 냉장고에서 찬 우유를 꺼내 넣었는데…. 제가 방금 데웠어요 손으로. 마시멜로는 대체 언제…. 만들었어요 지금. 꿈뻑꿈뻑 한솔이 하는 짓을 A to Z 지켜봐도 현실성이 없었다. 아까의 그 무지개 빔이 더 괴랄하기야 했지만 이런 사소한 초능력(인지도 모르겠다)이 더 와닿는다고. 꿈에서 깨어나려 몇 번 때려 갈긴 뺨이 아직도 얼얼하다. 물론 깨어날 수는 없었다. 이건 꿈이 아니니까. 아무리 한솔이 평범한 인간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짓만 할지언정, 이건 현실이다.

 

그럼 코코아도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재밌잖아요 귀찮게 컵에 가루 넣고 물 넣고 하는 거. 귀찮은 걸 왜…. 지구 오면 해보고 싶었어요. 한솔은 코코아를 후루룩 마시더니 도로 바닥에 베에엑 뱉었다. 도대체가 순영은 상식적으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찮게 만들어놓고 왜 뱉는데. 축축하게 바닥을 적신 코코아가 곧장 증발해 사라진다. 순영은 한솔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사람 죽이려다가 코코아 만들어 마시고 토해버리는 외계인이랑 무슨 얘길 하냐고.

 

 

“좀 보기 추하죠. 사실 우리 행성 사람들은 음식을 안 먹고 사는데 한 번 마셔보고 싶어서 마셔봤어요.”

 

 

한솔이 어깨를 으쓱한다. 순영은 그 무해한 얼굴을 보며 시름에 잠겼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범하러 온 건가. 나를 죽일 건가. 왜 하필 나를? 착하게는 아니어도 나쁘게 살지는 않았는데. 아아 인생 부질 없다. 변화무쌍하게 변해가는 순영의 얼굴에 한솔이 쿡쿡 소리 내 웃는다. 한솔은 식탁을 두어번 쓸어내더니 아…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형은 이거 안 보이죠. 뭐가요…. 형은 72차원은 못 보니까. 72차원이요? 72차원에서는 감정들이 가시화 되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 이 식탁 위에 있는 걱정이나 불안 같은 거. 벙찐 얼굴을 하자 그건 또 그거대로 웃기는지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제야 순영은 한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기긴 했네. 외계인은 다 저런가? 그 와중에도 한솔은 멀끔한 얼굴로 한 차례 더 코코아를 머금었다 뱉었다.

 

 

“내가 지구까지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다름이 아니라?”

“형을 보고 반해서예요.”

“…뭐?”

 

 

순영이 눈을 부라리자 한솔이 손을 젓는다. 워워 한 번만 들어보세요. 순영은 벌떡 일으켰던 몸을 제자리에 앉혔다. 형이 태어나기 전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아주 먼 시절을 회상하는 듯 한솔의 시선이 멀어졌다.

 

 

“제가 우연히 우주 감시카메라를 보다가 형의 엄마를 발견했어요. 27년 전에.”

“아니 잠시만요. 그럼 제가 동생이잖아요.”

“그렇죠. 그래도 지금은 23살로 지구에 왔으니까 내가 동생이죠. 형은 25살이잖아요. 우주 감시 카메라는 엄청 광범위하고 특정성을 띄지 않는데 그게 형 엄마를 몇 년 동안 비추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행성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몇 년이나 지나고 알았어요. 그 감시 카메라를 관장하는 감시관이 형 엄마한테 반한 거 있죠.”

“…설마 그게 우리 아빠예요?”

 

 

한솔은 중요한 대목이라는 듯이 식탁을 툭툭 두들겼다.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 마냥 눈을 깜빡이다 순영을 가리킨다.

 

 

“형 아빠도 외계인이었어요. 나는 형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죠. 27년 동안 인수인계가 안 돼서 계속 이 집만 보였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원체 카메라에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죠. 아니었으면 형을 찾아온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아니 그래도 되는 거예요?”

“형 입장에서 27년이면 좀 길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체감 상 몇 개월이에요. …그러니까 형을 사랑하러 38광년 거리를 날아온 거 아니겠어요?”

 

 

사랑… 미친…. 순영은 우수수 닭살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눈앞의 천지 분간 못하는 외계인은 사랑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타령을 하고 있었고 저는 그 정신 나간 외계인의 피앙새, 뮤즈 따위라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코코아도 못 삼키는 저런 애가 나를….

 

 

“그래서 형 원래 남자친구였던 것처럼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는데 형 기가 세서 안 됐나 봐요. 미안해요. 아까 그것도 죽이려던 게 아니라 잠시 기절시키려던 거였는데.”

“아니 그게 뭐든 범죄거든요?”

“이 정도는 로맨스 아니에요? 나는 한국의 모든 로맨스 드라마를 다 공부하고 왔어요. 특히 별에서 온 그대가 인상 깊었는데. 꽤 외계인을 정확하게 묘사하더라구요.”

 

 

와 진짜 이건…. 어 형! 한솔이 작정하고 기절시키려 할 때도 멀쩡하던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간다.

 

 

 

 

 

 

눈을 뜨니 남자친구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머리 아래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다리 저리지도 않나. 한솔은 기척을 눈치챘는지 순영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형 배고프지. 어어 우리 뭐 시켜 먹을까? 아냐 내가 해놨어. 와 무슨 외계인도 아니고 이렇게 금방… 외계인?

 

 

“야 저기요!”

“아 안 먹히네. 왜 이렇게 기가 세요?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사실 사람을 처음 보는 거긴 해요.”

 

 

순영은 우르르 쏟아지는 말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순영의 뺨을 쓸어내렸다. 순식간에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와 이것도 외계인 능력인가. 병원비 좀 굳겠는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자취인이라면 지당 할 수 밖에 없는 속물적 계산을 눈치챘는지 한솔이 웃음을 터트린다. 

 

 

“내가 말 많이 해서 머리 아파요? 형도 말 많은 편이잖아요.”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이랑은 좀….”

“조금만 참아주세요. 25년 동안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어요. 내가 형을 보러 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온 줄 알아요? 우주여행용 비행선을 훔쳐서 우주 범죄자가 됐어요. 지구보다 비싼 현상금이 걸렸다구요.”

 

 

…미쳤나 봐. 순영은 이제 이 꿈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솔을 마주 보고 손을 그러잡았다. 한솔은 무덤덤하게 정보값을 뱉어내던 때와는 달리 상기된 얼굴이었다. 형은 안 보이겠지만 형 얼굴에서 결연, 의지 이런 게 떨어지는…. 조용히 해봐. 네. 한솔아 너 이름이 한솔이는 맞아? 아뇨 사실 제 이름은 지구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청 영역이라 제 임의로 한국식 이름을 지어왔는데 원래 내 이름을 인간 언어로 제일 비슷하게 발음하면 버논에 가까워요.

 

술술 불어내는 티엠아이에 순영은 한솔의 볼따구를 잡아 뜯었다. 아! 한솔이 얼굴을 감싸고 원망스러운 눈을 한다. 외계인도 아파요! 너 원래 이 얼굴은 맞아? 여태까지 감정의 동요를 크게 보여주지 않던 한솔이 순식간에 민망한 낯을 했다. 아니 원래 얼굴은 보여주기가 좀…. 야 그럼 이건 사기지 안 보여주면 대화 안 할 거야. 한솔이 쩌저적 돌처럼 굳더니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본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줘야겠죠?

 

한솔은 두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무지개색 빛을 내뿜었다. 무대 사이키 조명이라도 되는 양 번쩍거리는 빛이 눈을 찔렀다. 한솔을 감싸던 화려한 조명이 사그라들자 정체 모를 원석 덩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 이게 원래 제 모습이에요. 도저히 생물체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보석 덩어리가 말을 걸었다. 제 이름은 ----이고요. 뭐라고? ----이요. 뭐? 어차피 형은 못 들어요.

 

 

“이제 됐죠?”

 

 

금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솔은 몸을 비비 꼬았다. 좀 부끄러워요. 대체 왜? 형한텐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나한텐 쌩얼을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근데 왜 여자로 오지를 않고…. 아 그게요 제가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재밌게 봐서…. 그게 남자끼리 사랑하는 내용은 아닐 텐데. 그래도요. 한솔은 38광년을 날아온 것치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까부터 드라마 얘기만 해대는 것 하며, 지낼 곳도 없이 내려온 무대뽀 심보 하며. …일단 이 집에서 지내. 네 저 돈은 많아요. 순영은 이 우주적 범죄자를 거둬들이기로 했다. 절대로 한솔의 마지막 말에 혹한 건 아니고. 같이 사랑은 못 해줘도 나 때문에 현상금까지 걸렸대는데…. 한솔은 순영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감정들을 본 건지 기쁜 표정을 했다.

 

 

“형 후회 안 하게 해드릴게요.”

“그냥 뭘 할 생각을 하지 마….”

 

 

 

 

 

 

한솔은 꽤 도움이 됐다. 돈이 많다고 한 게 장난이 아니었다는 듯 진짜로 펑펑 지폐를 꺼내썼다. 너 그거 통장에 넣어둬야 하는 거 아니야? 물을 때마다 한솔은 여느 때처럼 어깨를 으쓱 하고 말았다. 하긴 외계인은 통장도 없을 테지. 가끔 한 번씩 주기적으로 혼자 방에 틀어박혀 무지개 빔을 쏘아대는 것만 빼면 완벽한 동거였다. (한솔은 그 무지개 빔을 울트론체스트 빔이라고 불렀다) 아 목욕할 때 문 따고 들어오는 것도 빼고.

 

함께 장을 본 후 한솔이 먹어보고 싶다던 다코야키를 (한솔의 돈으로)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솔은 관례처럼 굳어진 집 수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영도 질색팔색을 했지만 우주 도청기나 우주 카메라를 몰래 심어놨을 수도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허락이 떨어졌다. 무지개 빔이 좁다란 집 구석구석을 살펴 지나가고 나서야 한솔은 안심하고 장바구니를 풀었다. 열심히 집안일을 하는 뒤통수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로봇청소기보다 적중률이 높았다. 들이길 잘했지. 순영이 선택에 만족감을 표출하던 찰나 한솔이 방으로 냅다 뛰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눈에서 그 어마무시한 무지개 빔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취하는 행동이었는데 요즘 따라 주기가 잦아졌다.

 

 

“야 괜찮아?”

 

 

방문을 몇 번 두들겨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문틈 사이로 강한 무지개색 빛이 흘러나온다. 한참을 문 앞에서 기다리고 나서야 심각한 표정의 한솔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형 사실 제가 간간이 울트론체스트 빔을 쏘던 건 우주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보안 프로토콜을 강화하는 과정이었어요. 저한테 접근을 할 때마다 반응하게 설계해놨거든요. 그런데 제 강화 속도보다 추적 속도가 더 빨라서 이제 거의 도망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어요.”

“뭐? 그럼 어떡해.”

“나랑 같이 도망가야죠. 형도 나를 숨겨준 죄목으로 우주 재판을 피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한솔은 방 안에 덮개로 덮어두었던 커다란 물체를 꺼냈다. 이게 우주 망원경이에요. 그 커다란 우주 망원경을 거실로 질질 끌고 나오더니 미리 자리를 봐둔 듯이 베란다에 설치한다. 너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구나? 배신감에 발등이 얼얼했다. 우주 망원경은 설치되자마자 자아를 가진듯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지금 행성들을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한솔이 우주망원경과 티브이를 연결하자 다른 행성들이 화면에 담겼다. 이걸로 행성들을 좀 탐색해보고 목적지를 정해야 해요. 순영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금세 적응했다. 원체 적응력이 빠른 탓도 있었고 한솔과 살며 현실 감각이 둔해진 탓도 있었다.

 

그래서 며칠 안에 가야 하는 건데. 빠르면 빠를 수록 좋지만 아마도 내일 안에는 이 집을 떠나야 해요. 순영은 그제야 머리가 멍해졌다. 애초에 한솔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래야 했던 건데. 생각해보면 더뎌도 지나치게 더딘 반응이었다. 내 친구들은? 전부 다 지구에 두고 우주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한다고? 걔네도 위험해질지 모르는데? 한솔은 72차원에서 망설임을 보았는지 순영의 손을 잡았다.

 

 

“형. 우주 헌법 상 우주 경찰들은 우주 범죄자가 아닌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게다가 형 부모님도 우주 경찰을 피해 우주 어딘가를 떠돌아 다니고 있는걸요. 한 번씩 지구에 들어오시잖아요. 그것처럼 형도 오고 싶을 때 지구로 오면 되죠.”

“뭐? 분명히 이번에 괌으로 여행 간다고 했는데? 괌이 아니라 우주였어?”

“네. 아마도 지금은 S615 행성에서 여행을 즐기고 계실 거예요. 거기 사람들은 춤을 좋아하거든요. 여행하기 좋은 행성이에요.”

 

 

순영은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에 습관적으로 한솔의 손을 잡아 올렸다. 한솔과 함께 지내는 동안 이 외계인의 초능력인지 뭔지를 약 대체재로 써온 행동의 결과물이었다. 한솔은 순영이 여전히 저를 찾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재수 없어. 고개를 모니터로 돌리자 마침 오로라가 넓게 펼쳐진 행성이 보였다.

 

 

“저기는 H218이라는 행성이에요. 시리우스계의 행성이죠. 저 행성도 지구와 같이 자기장을 띄고 있어 가끔 오로라가 생겨요. 저기로 갈래요?”

 

 

붉은색으로 펼쳐진 오로라를 보다 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감을 느끼건 말건 순영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몇 개 없었다. 한솔과 지구에서 체포를 당하거나, 한솔과 우주를 떠돌아다니다 체포를 당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 의지가 섰다.

 

 

“그래 가자. 지금 당장 출발해. 더 끌어서 뭐 하겠어. 필요한 건 네가 만들어주면 되지.”

 

 

형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요. 한솔은 환하게 웃으며 우주 망원경을 없앴다. 아니 그게 없어질 수도 있는…? 아 이거요 우리 행성 사람들이 낸 특허인데 물건을 없애는 게 아니라 14차원을 주머니처럼 쓰는 거예요. 한솔은 친절한 설명과 함께 우주 비행선을 꺼냈다. 제가 훔쳐 왔던 비행선을 조금 고쳤어요 이름은 파피용이고요. 이름도 붙였어? 그냥 제가 파피용을 재밌게 읽었거든요. 한솔이 수줍은 낯빛으로 손짓한다. 순영은 미적미적 파피용에 올라탔다.

 

파피용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넓었다. 제가 원래 5인승을 훔쳐 오려고 했는데 글자를 잘못 봐서 50인승을 훔쳐 왔어요 그래서 현상금이 더 세졌죠. 한솔이 뻔뻔스레 파피용을 출발시켰다. 야 잠만 이러면 집 천장이…! 아 괜찮아요 이 비행선은 57차원을 통해 움직이는 거라. 순영이 다급하게 창문으로 달라붙자 멀쩡하게 멀어져가고 있는 집이 보였다. 빠르게 구름이 보였고, 몇십초간의 시간이 지나자 이제 지구가 보였다. 순영은 파란 구슬 같은 행성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 한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구 탈출이 이렇게 쉽네….

 

 

“…이제 나도 외계인인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지구에서나 형이 지구인이지 지구 밖으로 나오면 다른 행성 입장에서는 지구인도 외계인이거든요. 형은 M406행성 사람들을 좀 조심해야 해요. 지구인이 맨날 인공위성으로 우주 쓰레기만 만든다고 화나 있어서.”

 

 

…그래? 한솔이 전해오는 정보는 순영의 귀에 전혀 닿지 못했다. 순영은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리며 처음 겪는 경험에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한솔은 멀뚱멀뚱 서 있는 순영에게로 다가갔다. 순영은 삐질삐질 땀이 배어 나오는 손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한솔이 미묘한 표정으로 순영을 바라본다. 형 미안해요. 괜찮아. 아니 이제 미안할 거라구요. 한솔은 재빨리 순영의 멱살을 잡았다. 야 너 뭐 하는…. 입술이 맞부딪힌다. 상상치도 못한 키스신에 순영은 버둥거리던 손을 툭 떨어트렸다. 가만히 입술을 꾹 붙이고 있자 무언가 넘어왔다. 그러니까 침이나 혀 이런 게 아니라 무슨….

 

 

“미리 구해 놓은 우주 여행권을 형 몸에 넘겼어요. 이게 있어야 공기비나 중력, 기압, 온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주를 여행할 수 있거든요.”

“근데 꼭 키스로….”

“…사실 손만 잡아도 넘길 수 있는데 제가 해보고 싶었어요. 형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도 없길래.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형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한솔은 낯부끄러운 말을 줄줄 내뱉었다. 순영은 25년 평생을 보수적으로 살아왔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킨십은 처음이었다. 첫키스는 아니지만… 사귀지도 않으면서 키스해 본 적은 없다고! 한솔도 멋쩍기는 한지 조종석에서 움직일 생각을 몰랐다. 빨갛게 익은 한솔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한솔의 앞으로는 커다랗게 뚫린 창을 통해 우주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머리는 작동을 멈추었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물고기가 되어 은하수를 역행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기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드넓은 우주를 여행하며. 외계인과 단둘이서. 파피용을 타고. 키스를 하고.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게.

 

순영은 막연히 아랫배가 들끓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사랑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꿈같은 상황을 겪은 상대에게 애틋함을 가지게 됐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순영은 비행선을 헤쳐가는 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솔아. 너는 내가 왜 좋아?”

“지구에는 그런 연구 결과가 있더라고요. 연인에게 서로가 좋은 이유를 물어보면 물어보기 전보다 호감도가 떨어진대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는 건데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 하다 보니 호감도가 떨어지는 거죠. 25년 동안 보다 보니 좋아졌어요. 그냥 그래요. 그냥 좋아요 형이.”

 

 

여느 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을 한다. 38광년 거리를 날아왔다느니, 비행선을 훔쳐 지구보다 비싼 현상금이 걸렸다느니. 외계인 같기만 한 고백 이후 처음으로 듣는 제대로 된 고백이었다. 그냥 그래요. 그냥 좋아요 형이. 그 두 마디가 듣기 좋았다. 어쩌면 지구 탈출로 인해 쿵쿵 뛰어대던 가슴이 착각을 불러일으킨 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냥 그랬다. 그 말이 그냥 좋았다.

 

지금 지나가는 곳은 C211 행성이에요 여기 사람들은 부지런하기로 유명해요. 한솔아. 네? 순영이 한솔의 멱살을 잡는다. 한솔이 눈을 끔뻑거린다. 긴 속눈썹이 펄럭거렸다. 순영은 충동적인 감정을 느꼈다. 무수하게 날아 지나가는 별들 사이에서. 입술이 맞붙는다.

 

 

 

 

 

 

객석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자 목표로 했던 H218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지구로부터 8.5광년 정도를 날아온 셈이다. 야 8광년이 이렇게 빨리 도착하는 거면 38광년도 얼마 안 걸리는 거잖아. 그렇죠 4일인가? 멀리서 온 척은 다 하더니. 먼 건 맞잖아요 약 11,400,000km를 날아온 건데 참고로 지구 반지름은 약 6,400km 정도 돼요. 한솔은 비행선을 세우더니 문을 열었다. 순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괜히 딴지를 걸었다. 야 착륙은 안 해? 누가 봐도 우주 범죄자가 탄 비행선인데 우주 착륙장을 열어주겠어요? 순영의 손을 잡아끈 한솔이 작은 우주 나룻배로 몸을 옮겼다. 이거 타고 극 지점으로 들어가면 모를 거예요. 허공에서 우주 나룻배를 몇 번 젓자 순간이동을 한 것 마냥 H218의 지표면을 밟을 수 있었다.

 

 

“이것도 우주 비행선의 일종이라 꽤 빨라요. 우리가 타고 온 파피용보다는 느리지만.”

 

 

내리자마자 입김이 나왔다. 추위가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우주 여행권이 아니었으면 얼어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날씨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우리가 헤쳐온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빨간 오로라가 바람에 나부끼는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산소비가 높아서 오로라가 빨간색으로 져요.

 

지구에서도 오로라를 본 적은 없었다. 여행을 갈 여유도 없었거니와 여행에 그다지 관심도 없는 탓이 컸다. 미디어로도 몇 번 보지 못 했던 진풍경을 목도하는 일은 생각보다 흥분감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그냥… 끝없이 이어진 오로라 아래서 조금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전봇대 마냥 묵묵하게 자리한 한솔에게로 순영의 눈길이 향했다. 한솔도 멀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솔의 속눈썹은 얼굴 아래로 길고 파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입술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순영은 웃기게도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따지고 보면 이 외계인은 무단 가택 침입에 납치에 절도죄까지 있는 우주 범죄자였다. 한솔은 순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웃옷을 벗었다.

 

 

“어? 야 야 미쳤어? 야 한솔아!”

“왜요? 형 얼굴에서 성적 흥분, 성욕 이런 게 뚝뚝 떨어… 읍.”

 

 

이놈의 72차원. 다급하게 입을 막자 한솔이 주섬주섬 상의를 다시 주워입는다. 들어갈까요? …그래. 어디로 들어간단 말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일단 동의를 했다. 어디라도 여기보단 낫겠지. 한솔의 말에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타고 왔던 파피용이 생겨났다. 아까 14차원 주머니에 넣어왔어요. 어 그래…. 이 초능력 같은 기행은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저쪽으로 가면 객실이 있어요. 한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수십 개의 객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오는 동안 뻐근하게 의자에서 밤을 지샜건만 그 고생이 무색하게 빈 객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왜 미리 말 안 해줬어? 안 물어봤잖아요. 이때까진 안 물어본 것도 잘만 말해놓고.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한솔이 티셔츠를 끌어올린다. 야 야 얘는 무슨 무드도 없이. 순영이 핀잔을 주자 한솔은 망설이다 순영의 손을 끌었다. 그럼 벗겨주세요. 순영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뭐 뭔 무슨 그런 말을 해…. 민망한 것과 별개로 손은 슬금슬금 허리를 타고 올랐다. 한솔이 상기된 얼굴을 한다.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뭐를…. 형이랑 섹스요. 한솔은 순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침대로 누웠다. 순영은 한솔의 위로 올라탄 채 눈을 굴렸다. 지구 상의 모든 청소년 관람 불가 매체를 공부했는데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연인이 된 후 섹스를 하고 가족 단위의 씨족 사회를 형성하더라고요. 순영에게서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자 한솔은 턱을 문질렀다.

 

 

“불편하면 여자로 바꿔줄까요? 지금도 할 수 있어요.”

“이제 와서?”

 

 

이제 순영에게 한솔은 지구에 도착했던 한솔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여자건 남자건 외계인이건 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고추 달린 몸과의 섹스가 처음이라는 게 문제지. 한솔은 우물쭈물 하다가 순영의 앞으로 손을 갖다 댔다.

 

 

“제가 잘해요. 공부 많이 했어요.”

 

 

한솔이 침대 밑으로 내려가 순영의 바지 버클을 푼다. 자신 있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헛손질이 이어졌다.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는데 서툰 사람'인 게 딱 눈에 보였다. 무슨 내비게이션 틀고 초행길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순영은 그 꼬락서니를 두고 볼 수가 없어 한솔을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여자랑 그렇게 다르겠나 싶어 일단 불부터 껐다. 형 근데 저는 야간 투시 기능이 패시브로 있어요. 제발… 그런 말은 좀 끝나고 해. 순영은 한솔의 하체를 더듬어 바지를 벗겨냈다. 한솔이 긴 숨을 내뱉는다. 다리 사이로 물렁물렁하게 자리 잡은 페니스를 몇 번 문지르자 한솔이 앓는 소리를 낸다.

 

형 잠시만요. 순영은 대꾸 없이 등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아 진짜 잠시만요. 연신 막아내는 한솔의 손을 걷어내고 허벅지를 쓸어내리려는 찰나, 한솔의 눈에서 무지개 빔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형 여기까지 추적이 붙었나 봐요 빨리 옷 입어요. 한솔은 외계인 능력을 쓴 건지 뭔지 벌써 고간이 잠잠하게 사그라들어 있었다. 순영은 진땀을 빼며 청바지를 추켜 올렸다. 한솔은 서둘러 파피용의 조종석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M1107으로 가야겠어요 여기서 한 6광년 정도 떨어진 행성이에요. 순영은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물리적으로 따라붙은 것 같지는 않았다.

 

 

“M1107의 사람들은 까칠하지만 공평하기로 유명해요. 모두에게 까칠한 셈이죠. 우리를 환대하지도 않지만 우리를 쫓아오는 사람들도 환대해주진 않을 거예요. 그쪽으로 가면 임시방편 정도는 돼요.”

 

 

한솔은 다시 한번 무지개 빔을 쏘더니 파피용을 출발시켰다. 추격이 엄청 빠른가 보네. 그렇죠 시간 날 때마다 보안 프로토콜을 강화하고 있긴 한데 접근하는 속도가 엄청나요. 목적지를 설정하자 눈 깜짝할 새 우주 한 가운데 놓였다. 순영은 못다 한 섹스의 여파로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꼰 상태였다. 한솔은 그게 신경 쓰이는지 조종석의 버튼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순영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이제 출발할 거예요. 미안해요.”

 

 

한솔이 파피용의 기어를 꽉 잡고 묻는다.

 

 

“나랑 살면 평생을 이렇게 도망 다녀야 해요. 지금 제 행성에 가서 파피용을 자진 반납하고 광명 찾는 방법도 있어요. 물론 최소 800년형에 처하겠지만. …후회해요?”

“72차원인가 뭔가 보면 알지 않아?”

“형 입으로 듣고 싶어요.”

“후회 안 해.”

 

 

한솔이 웃는다. 기어를 내리자 파피용이 매끄럽게 행성을 헤엄쳐나간다. 이 미친 로맨티스트 외계인 덕에 남들은 평생 살며 한 번도 못 뚫을 행성의 대기권을 두 번씩이나 뚫었다. 순영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한솔이 25년을 기다린 것도 38광년을 날아온 것도 지구보다 비싼 현상금에  쫓기는 것도, 그리고 순영이 지금 하는 이것도. 몽땅 다 사랑이니까.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