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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윤버] 아저씨

사감 / 글

돌이켜보면 최한솔과의 만남은 작은 호기심과 충동에서 기원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 생긴 만남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그래서인지 더더욱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충동적으로 구매한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들고선 동네의 놀이터로 향했다. 낙후된 달동네에 있는 놀이터라고 해봤자 삐걱대는 그네와 안장이 덜렁거리는 시네, 구색 맞추기 위해 가져온 듯한 미끄럼틀이 이곳 전부였다. 놀이터의 맞은편에는 주민들이 멋대로 투기해둔 쓰레기들이 쌓여 역한 악취가 풍겼다. 이런 점 때문인지 이 놀이터는 아이들의 쉼터는커녕 동네 양아치들의 소굴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담배라고는 쥐뿔도 모르지만, 적당히 매대에 있는 이름 중 눈에 익은 유명한 상표의 담배 하날 샀다. 충동적인 구매였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펴볼까 싶었다. 텅 빈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었다.

 

“정연이가 알면 경을 치겠네.”

 

여동생이 이 모습을 본다면 분명 뒷목 잡으며 쫓아올 게 자명했다. 그 얼굴이 벌써 선연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건지….”

 

처음 써보는 라이터에 허둥지둥하다가 머리끝을 약간 태우고 말았다. 1년 전 자퇴 한 뒤로 유지하고 있는 금발 머리는 태우지 않아도 이미 빗자루에 가까웠지만, 머리끝이 타니 영 아까웠다. 약간 말려 들어간 앞머리를 붙잡고 연기를 흡입했다.

 

콜록콜록-

 

잘못 들이마신 게 원인이었던 건지, 아니면 쓸데없이 가오 부린 것에 대한 벌이였는지 그만 사레에 들려버렸다. 누가 담배를 맛있다고 했던가. 쓸데없이 쓰고 맵기만 한데.

 

그렇게 한참을 고개 숙이고 기침하고 있는데 앞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거라도 마실래요?”

“어? 어… 고맙다.”

 

언제 나타났는지 10살을 돼 보일까 싶은 백인 꼬맹이가 공을 들고 나에게 물을 건네왔다. 엉겁결에 받은 물을 들이켜자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물을 건네자 자기 할 일을 끝났다는 듯, 아이는 미끄럼틀 옆에 주저앉아 바닥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쟤는, 뭐지? 이미 해가 저문 놀이터에 혼자 있는 백인 꼬마아이. 안 봐도 뻔하지. 이 달동네는 합법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려 이상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사회의 밑바닥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이 동네라면, 아마도 어머니가 일을 나갔거나 한 거겠지. 혼자 있는 모습에 묘한 동질감이 들어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 나갔다.

 

“너는 왜 여기 혼자 있어?”

“개미를 보고 있어요.”

“뭐?”

 

개미?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정말 아이의 시선 끝에는 개미가 있었다. 하여간 독특한 애네.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갑자기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이름이 뭐예요?”“…윤정한. 윤정한이야.”

 

기침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이의 얼굴을 퍽 귀티나게 생겼었다. 특히 옅은 갈색 눈은 마치 유리구슬같이 투명하게 빛나는 것이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아이는 빤히 나를 쳐다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아니야. 형이라고 불러.”

“저 좀 주워가 주실래요?”

뭐?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주워가 달라니 그게 무슨-. 당황한 내 모습을 아이는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나는 문득 묘한 충동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건.

 

“…네가, 성인이 되면 생각해볼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 묘한 눈동자가, 문득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이 말이, 훗날 어떤 일을 가져올지 모르고.

 

“전 최한솔이라고 해요.”

 

그렇게 만난 아이와의 만남은 뜻밖에 놀랍게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하였다. 매주 수요일 저녁 9시, 동네 놀이터. 이 암묵적인 약속은 우리만의 암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듯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아이는 놀이터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보육원에도 찾아가 봤지만, 보육원은 문을 닫은 듯 쇠사슬로 굳게 닫혀있었다. 후에 들어보니 재정난의 문제로 문을 닫은 듯했다. 얼마 뒤 내가 그 동네를 떠나게 되면서 나는 그 아이를 천천히 잊어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 괘씸했지만, 그냥 그렇게 잊고 살았던 아이를 재회하게 된 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소였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시간은 흘러 그 아이와의 만남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최승철이라는 호구, 아니 친구를 만나 그의 가게에 바텐더로 취직하게 되었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11살의 아이가 성인이 되어 바에 온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곳이 게이바라는 걸 제외하면.

 

갑자기 사라졌던 아이가 성인으로 돌아와 재회한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곳이 게이바라면 더더욱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옆에 같이 들어온 이는 최근 이 바에 출입하기 시작한 김민규라는 이였다. 반반한 얼굴과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최근 인기가 많은 손님이었다. 저도 한번 노려볼까 생각했던 이기도 했다. 물론 성격 탓에 포기했지만.

 

쟤랑 사귀나? 아니면 물들었나? 여길 왜 온 거야. 여러 생각에 복잡했다. 한동안 찾지 않은 편두통약이 필요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리와 달리 얼굴에는 하나도 티 내지 않고 태연함을 가장하며 칵테일 잔을 닦았다. 최대한 모르는 척해야겠다. 아무리 과거의 인연이라지만 지인에게 강제 커밍아웃 당하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형!”

 

멀리서 민규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저 도움 안 되는 녀석.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밝게 다가온 민규가 한솔을 소개했다.

 

“얘가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예요, 왜 미국에서 온다던 제 친구.”

“…그래.”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뜨뜻미지근해요.”

 

툴툴대는 민규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한솔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정한은 손을 휘휘 저었다.

 

“오늘 바빠서 그래 바빠서.”“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너무 그러지 말고 인사해요~”

 

이 형이 내가 말했던 바텐더 형. 버논아 너도 인사해.

 

버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새 개명이라도 했나. 저가 알기로는 태생 한국인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새 개명이라도 했나 싶었다. 더는 무시하기도 어려워 결국 그는 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최한솔이라고 합니다.”“윤정한입니다.”

“뭐야 왜 이렇게 딱딱해?”

“시끄러. 빨리 주문이나 해.”

 

나는 하이볼! 버논아 너는 뭐할래? 난…, 피치크러쉬.

 

“만들어줄 테니까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어디 가서 앉아 있어.”

대충 둘을 쫓아낸 정한은 얼음을 꺼냈다. 피치크러쉬라니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쓴 걸 못 먹는 성격은 여전한 듯했다. 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꽤 귀여웠는데 지금은. 힐끗 한솔을 쳐다보자 처음부터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예전의 귀여웠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제법 남자 태가 나는 성인이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 유리알 같던 눈동자만큼은 똑같아서 잠시 홀린 듯이 그와 눈 맞췄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번뜩 든 정신에 고개를 돌려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근데 쟤는 왜 나를 모르는 척하는 거지? 딱 보고 알아차린 것 같은데. 지금도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왜?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의 복잡한 감정으로 칵테일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이미 칵테일이 완성되어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벌어졌고, 그는 이미 그를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바에 앉아 있는 둘에게 다가가 잔을 건넸다.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얘는 왜 목소리까지 좋고 난리래. 속으로 생각하고 돌아섰다. 아무리 사장 친구라는 빽이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지금은 업무 중이기 때문에 너무 농땡이 피우는 건 좋지 않았다.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칵테일 잔을 닦고 손님을 맞이하는데 한쪽에서 자꾸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야…. 형 뚫리겠다. 뭘 그렇게 쳐다봐.”

 

모른 척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자신만 따라다니며 뚫어지게 쳐다본다. 먼저 아는척하라는 건지, 아니면 계속 모르는 척하라는 건지. 과일 몇 개가 썰린 접시를 들고 둘에게 다가갔다.

 

“서비스.”

“오, 감사합니다!”

“….”

그 순간마저도 자신을 바라보는 한솔에게 정한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민규가 당황해서 말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뭐…, 예전에 조금-”“아니, 모르는 분이야.”

 

두 사람의 엇갈린 반응에 중간에 낀 민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버버거리는 민규를 무시하고 잠깐 흘겨보았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모습에 열이 받았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아, 미안 나도 헷갈렸다. 모르는 사람이야.”“아, 그래요?”

헷갈려서 죄송해요. 예전에 알던 사람이 닮아서요.

 

대충 사람 좋게 웃은 후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의 표정이 싹 굳었다. 모르는 척 쌩까겠다 이건가. 그래도 내가 저를 챙겨준 게 얼마인데. 화보다 서운함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 내가 왜 서운해하지? 머리가 너무 아팠다. 당장에라도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는 바를 대충 정리하고는 앞치마를 벗어 스텝 룸에서 졸고 있던 승철에게 던졌다.

 

“나 오늘 아파서 퇴근. 지금부터 네가 대타 좀 서주라.”

“뭐? 야! 너 어디가!”

 

뒤에서 승철이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것까지 생각할 재간이 없었다. 10년 만에 나타난 최한솔. 그것 하나만으로도 머리에 과부하가 온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집에 가서 누워야 할 것만 같았다. 이태원 구석에 있는 집을 향하며 정한은 생각했다.

 

지금 회피하는 것이 후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윤정한은 회피를 선택했다.

 

-

 

“너, 쟤한테 뭐 사채 썼냐?”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날 그렇게 도망쳐버린 것에 대한 벌인지, 최한솔은 무려 1주일째 바에 출석 도장을 찍는 중이었다. 오후 9시부터 10시 바의 왼쪽 끝자리에서 피치크러쉬를 시키는 미형의 백인 혼혈 남성은 이제 바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의 외관만 보고 접근하려던 몇몇 머저리가 있었으나 무슨 일인지 그와 몇 번 대화하고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그는 이 바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었고, 손님들이 저를 붙잡고 그에 관해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매일 윤정한만 뚫어지라 쳐다보다 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것이 1주일 동아 반복되자 손님들끼리 둘의 관계를 쑥덕대기도 했다. 윤정한의 옛 애인이라는 소문부터 윤정한이 최한솔의 돈을 떼먹고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소문의 종류도 다양했다.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설거지를 하는 그에게로 승철이 슬쩍 말을 걸었다.

 

“오늘 일찍 퇴근 시켜줄 테니까 네 선에서 해결 봐.”

“뭘 해결하라는 거야.”

 

당연히 저 끝내주는 미남 아가 말이지.

 

“뭐, 홍보되고 좋긴 하지만, 더는 쓸데없는 소문 도는 건너도 싫잖아.”

“….”“그리고 저 사람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퇴근하고 오늘 내로 정리해라. 잘되면 밥 사주는 거 잊지 말고! 잘되기는 뭐가 잘된다는 건지. 그래도 더 이상의 회피는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그는 조용히 앞치마를 벗고 한솔에게 다가갔다.

 

“….”“….”

내가 진짜 뭐 하는 거지. 막상 그의 앞에 서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유리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기 부담스러워 슬쩍 시선을 피하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뗐다.

 

“나 지금 퇴근하는데.”

“네.”

“잠깐 얘기 좀 하죠.”“네.”

 

10분 뒤 바 뒷문으로 나오라는 말과 함께 스텝 룸으로 발을 옮겼다. 복잡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는데 뒤에서 승철이 쑥스러운 미소와 말을 걸었다.

 

“잘되면 걔 친구라는 민규 좀 소개해주라.”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지? 저기요?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도움 안 되는 친구 겸 사장을 무시하고 뒷문으로 나갔다.

 

뒷문으로 나가자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한솔이 보였다.

 

“저기요.”“….”

 

한번 집중하면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 내 기억 속의 최한솔 그대로였다. 원래라면 무시당한 거에 대해 화가 났을 테지만 왠지 모르게 안정감이 들었다. 불러도 대답 없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저기요.”

“아.”

“…일단 자리 좀 옮길까요?”

“네, 그래요.”

 

내가 지금 맞는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그를 이끌면서도 아리송했다. 10년 만에 만나서인지 그를 대하면서도 무언가 불편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편안한 것도 마찬가지라 이 극단의 감정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했다.

 

이태원 어디든 더럽고 방음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 그를 근처의 인적 없는 골목으로 이끌었다. 쪽방촌 사이의 골목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오렌지 주스면 괜찮죠?”

“아, 네.”

 

아, 어색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캔커피에 서린 물방울들을 손끝으로 훑다가 말을 건넸다.

 

“그래서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본 거에요?”

“아…. 티 났나요?”

 

그걸 모를 거로 생각한 걸까? 약간은 황당했지만, 그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네, 많이 티 났어요.”

 

예의 사람 좋은 얼굴을 꾸며내며 말을 걸자.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던 한솔이 이내 진지하게 물어왔다.

 

“저 아세요?”

“네?”

 

당황해서 표정관리도 못 하고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전…, 12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어요. 13살 때 사고를 당해서 그전의 기억을 모두 잃었죠.”

“….”“일어난 제가 기억하는 건 단 두 가지였어요.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윤정한이라는 이름. 그 두 가지가 다였어요.”

 

그게 무슨. 그럼 기억하지 못하던 것도 다 이해가 된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10년 만에 나타나더니 갑자기 하는 소리가 기억상실이라는 소리라니. 막장 드라마도 이보다 당황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저를 아세요?

 

간절해 보이는 표정에 침이 꿀꺽넘어갔다.

 

“그래. 아마도 네가 생각하던 윤정한이라는 사람이 내가 맞을 거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하는 윤정한을 한솔은 그저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뭐라고 해야 하지? 만나서 반갑다? 그에게 건넬 말을 속으로 고민하던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정한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한솔이 입을 열었다.

 

“저는 형을 기다렸어요.”

“….”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전 기다려왔어요. 윤정한이라는 사람을.

 

“알고 싶어요. 당신이 도대체 누군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정한을 똑바로 쳐다봤다. 곧은 시선이 그를 향하자 마치 잡아 먹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렸다.

 

“다 알게 되면, 저를 책임져주세요.”“뭐?”

“성인이 되면 아저씨가 주워가주기로 약속했잖아요.”

 

당황해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그런 약속을 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이렇게 돌아올지는 몰랐다. 당황해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한솔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 그의 눈을 보고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지금의 그는 호랑이였다.

 

자신을 별 반응 없이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약속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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