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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홍솔] 운수 좋은 날

타타 / 글

누런 황토색과 미세먼지 낀 하늘색이 어지럽게 섞인 실크 셔츠가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아무리 벌크업을 해도 가슴이 더 커지지 않던 순영이 신기한 듯 지수의 승모근을 찌른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지, 카메라 3개 달린 핸드폰 화면을 연신 잡아당긴다. 와야 할 문자가 오지 않았다. 최상 오늘 입금해준다고 했는데. 아침 9시까지 입금이라고 분명 말했는데도 오후 3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시간당 0.67% 이자 떼먹겠다고 경고까지 했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이제 스물 되는 아들도 있는 거로 아는데. 1달 간 달동네 판잣집을 기웃거리며, 허리까지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던 집을 떠올린다. 순영의 표정이 점점 불안해져 간다.

 

 "형. 그냥 안 받는 법은 없어요?"

 "뭔, 지랄 맞은 소리를 하냐 넌."

 "아니... 그냥. 그거 꼭 이자까지 다 쳐서 받아야 해?"

 "야, 그러면 니가 대신 몸으로 떼워주게? 너 그러다 갈비뼈에 칼빵나."

 

지수의 두꺼운 손이 정확히 갈비뼈 사이를 찌른다. 고작 손끝으로 눌렀음에도 욱신거리는 폐부에 몸을 웅크린다. 지수는 순영이 한심했다. 벌써 일한 지 2년이 넘었는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건 잔인한 짓이었다. 돈을 받을 상대한테도, 본인에게도. 결국, 내가 더 잔인해지지 않으면 더 길게 아픈 법.

 

 "형... 형이 그 집 아들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요?"

 "아들이 다 아들이지."

 "아니... 걔 진짜 열심히 산단 말이에요."

 "지금 아빠 때문에 장기팔릴지도 모르는 놈이?"

 "그러니까... 어. 우리 원금만 받는 거 어때요."

 

미쳤나. 딸내미도 아니고 아들내미에 마음이 약해지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물고 있던 얇은 담배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필터만 남아 타닥이던 담배가 구두 아래 짓이겨지는 걸 보고 순영이 어깨를 움츠렸다. 지수가 웃었다. 순영에겐 지수가 늘 어려웠다. 얼굴도, 행동도, 지수가 정확히 청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도. 지수는 솔직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에 반해 순영은 너무 티가 나서 문제였다.

 

 "그 집 아들이랑 잤어?"

 "형...! 걔 이제 열아홉이에요!"

 "야 요즘 애새끼들이 더 발정 나 있어. 열아홉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네."

 “한솔인 달라요."

 “한솔이? 이름도 알아? 잤어?”

 "아 됐어요. 형이랑 이야기 안해."

 

성인도 아니네. 삼거리 롯데리아에서 알바 열심히 하던데. 순영에게 넘어갔어야 할 장부가 지수의 손에 있었다. 결국, 이야기 하지 않으면 손해인 건 순영이었다. 그 집 인생보다 담배가 달 것 같다. 오늘은 주머니가 꽤 두둑해질 테니까 내일은 초밥집을 가야겠다. 셔츠도 하나 새로 사고, 누굴 데려가면 좋을까. 내일 정도면 순영도 분명 최씨네 집에 찾아갈테니, 지훈이 좋겠다.

검은 티셔츠에 박힌 호랑이가 점점 멀어진다. 내려가는 걸 보니 혼자 무언가 방법을 궁리하러 가는 듯하다. 괜한 애새끼 하나 걱정하다가 정말 목이라도 날아갈까 걱정이다. 순영은 이곳에서 지수가 정을 준 몇 안 된 동생이다. 머리도 샛노래서 지가 호랑이라고 빨빨 뛰어다니는데 실상은 아직 고양이에 더 가까웠다. 발톱을 세우면 뭐가 찍히기라도 해야하는데, 긁히는게 전부다. 어떻게 여길 버티나 싶다가도, 저번 고회장 무리를 박살을 내러 갔을 때, 행동대장 바로 뒤에서 희번득하게 뒤집어지는 눈을 보면 호랑이새끼는 맞는 것 같다. 유독 애 있는 집에 약해지는 게 문제다. 정말. 그게 너무 큰 구멍이라 지수는 늘 순영을 애새끼 취급했다. 실제로 지수에겐 애새끼가 맞았다.

 오후 2시 37분. 고등학교는 아직 한창 수업 중일 테니까 최씨네를 족칠 거면 지금이 딱이었다. 옆에는 순영도 없었다. 빨리빨리 끝내자. 배를 갈라 장기를 팔아 재끼던,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다시 혈서를 쓰던 볼 장은 봐야 했다. 빡치는 건, 그 집에 가는 방법이 오직 두 발밖에 없다는 거. 판자만 아니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동네의 한구석에 있는 최씨네를 찾아가는 법은 걸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진짜 좆같다니까... 돈 천천히 갚는 놈들이 제일 좆같다. 순영의 말 따라 애까지 딸린 놈이 도박질이나 다른 애먼 데서 지랄하고 다니다 갚지도 않는 놈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좆같다. 경박한 새끼들 때문에 입이 가벼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지수가 입술을 매만졌다.

 

 

 

운수 좋은 날

w.타타

 

 

 

8월에 경사가 산 같은 계단을 오르는 일도, 하, 이젠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셔츠를 좀 가벼운 걸 입고 온 게 다행이었다. 실크가 팔을 스치는 감각은 썩 나쁘지 않다. 그나마 나은 점이다.

 

 “최윤상.”

 

쾅쾅쾅. 얄팍한 문을 두드린다. 예상한 대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더러운 성격 다 뒤집어 놔야 혀라도 보여줄 건가. 어설픈 걸쇠를 걷어차자 힘없이 문이 나뒹군다. 간신히 경첩에 매달려 끽끽거리며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온다. 꽤 시끄러웠는데 여전히 조용하다. 다시 한 번 문을 찼다. 기척도 없는 마당으로 들어간다. 마당이라고 해봤자 벽돌이 들쑥날쑥한 시멘트일 뿐이다.

 

"안 나와?"

 

혀를 한 번 씹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아저씨는 한 번에 기어 나온 적이 없었다. 시간을 보니 아들은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다. 거친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 지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꽉 쥔 주먹으로 너덜거리는 철문을 두드린다. 꽝- 꽝- 달군 철을 뚜드려 부수는 것 같은 굉음에도 안은 조용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싶어 마루라고 하기엔 다 허물어져 가는 장판 위에 무릎을 올리는 순간-

 

"...누구세요?"

 

이 집 아들이랑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제 장기를 담보로 맡은 건 전혀 모르는 반짝이는 눈. 딱 봐도 어린 애였다.

 

"아버지 어디 계시니."

"...저도 알고 싶은데."

"무슨 소리야 그게."

"3일째 안 들어 오셔서요."

 

입술 끝에 걸린 욕을 겨우 참았다. 진짜 자식도 버리고 가는 새끼일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이런 구석진 동네의 구석에서 산다고 애 하나쯤 팔려 가도 모른단 이야긴가. 사실 정말 한솔이 팔려가 장기가 빠져도 모를 동네긴 했다. 그나마 학생이라 학교가 좀 뒤집어지고, 그놈이 학교의 명예 운운하다 보면 또 잊힐 일이 되기 쉽상이다. 근데 문제는 홍지수는 정말로 오늘 최윤상만 털고, 만약 없으면 다른 놈을 시켜 아들을 빼낼 작정이었지 제 손과 입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애한테 `너네 아빠가 네 장기로 담보 대출을 해서 집에 갚을 돈과 통장이 없으면 얌전히 따라와라.`같은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단 이야기다. 순영에게 큰소리친 게 후회됐다.

 

"아빠가 돈 빌린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서 도망갔나 봐요. 얼마나 빌렸어요?"

 

한솔이 지수를 스쳐 지나간다. 아무렇지 않게 다 무너져가는 장판을 밟고 들어가 안쪽 방 서랍을 연다. 지수의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 통장에는 빚밖에 없을 것이다. 한솔이 알고 있는 돈도 얼마 전 순영이 받아갔다. 이래서 애가 싫다. 아니, 애가 어렵다. 열심히 서랍을 뒤적거리는 소리에 명치가 답답해졌다. 지수는 신중해야 했다.

최한솔의 삶은 홍지수의 한마디로 결정되었다. 더 할 삶도. 덜 할 삶도 없었다.

 

"저기 말야."

"...이상하다."

"그 통장에 있는 돈도 어제 내 친구가 받아갔어."

"..."

"그러고 이제 우리가 받아야 할 건..."

"저라도 담보로 걸었어요?"

"...눈치는 빠르네. 아빠 닮았구나."

 

지수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농담이었다. 하지만 한솔에겐 더할 나위 없이 쓴 말이었다.  쓸데없는 데 마음이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돈을 빌린 건 최윤상이지, 이 쪼끄만 애가 아니다. 들어올 때만 해도 반짝이던 눈이 지금은 충격에 빠진 듯 죽어있다.

 

"...이건 내 돈이라고 아빠가 안 건드린다 했는데."

 

굳이 왜 그렇게 죽을상이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한솔이 술술 이유를 내뱉기 시작했다. 순영이 왜 아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다. 사실 대게 돈을 빌린 부모를 가진 아이의 상황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나마 이녀석은 제 살길 스스로 찾고 있었다는 것 정도. 어디서 아르바이트한다고 했지. 맥도날드? 롯데리아? 전단지? 일용직? 고작 중졸 신분으로 최대한 합법적인 선 안에서 찾아본 아르바이트일, 아, 생각났다. 삼거리 롯데리아. 굳이 기억을 헤집어 찾아냈다.

 

"제 뭘 걸었어요?"

"...신장."

"저 칼 무서운데."

"무서워하는 얼굴이 아닌데."

"형 손에는 칼이 없으니까요."

 

활짝 올라가는 입꼬리와 예쁘게 접히는 눈매에 지수는 핏대가 바짝 서도록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어떡하긴.”

 

따라와야지. 한솔이 알면서 묻는 건지 모르겠다. 속이 없는 것 같은 시선에 지수는 제 뒷머릴 조용히 쥐어뜯었다. 차라리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한 번만 봐달라고 하면 혐오감이라도 들 텐데, 이 아인 정말 아무 잘못이 없었고, 지랄 맞은 제 아버지의 희생양인 것도 맞았다. 그치만 한솔의 악의 없는 시선이 제 아비의 면죄부가 될 순 없었다.

 

“같이 가야지.”

 

지수가 겨우 뱉은 것과 달리 한솔은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의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지수보다 반 뼘 작았다. 차분한 듯하면서 적당히 곱슬 거리는 머리는 손가락 사이에 쏙쏙 들어와 감긴다.

집을 나오는 순간에도 한솔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지수를 원망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어지간히 날뛰는 놈들이었다면, 못해도 한솔의 아버지, 그러니까 최윤상이었으면 결박이라도 하고 손목이라도 붙들고 가서 잡생각이라도 안 들 텐데, 한솔은 너무 순순히 따라오는 거로 모자라 앞장서 가기까지 했다.

 

“신장은 두 개 다 떼어가는 거에요?”

“아니. 하나만.”

“하나만 떼어가면 끝나는 거에요?”

“…아마도.”

 

지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한솔과 걸은 시간은 고작 2분도 채 안 되는데,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망설여지는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뭘 잘못 먹은 것처럼 속이 부대꼈다. 한솔의 머리가 둥실 흔들릴수록 그랬다.

 

“살 수 있어요?"

"너같이 피도 안 마른 애가 장기를 어디서 사온다고."

"아니. 살 수 있냐구요."

"...뭐?"

"신장 하나 떼도 살 수 있어요?"

 

한솔이 더욱 구체적인 말을 붙이고 나서야 질문이 이해가 갔다. 지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 아빠를 두고도,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 어처구니없는 아버지의 빚으로 사라지는 삶이 억울하지도 않은가. 살 가치가 있는 삶인가. 제 뒤를 따라오지도, 가야 할 길을 알려주지도 않는 지수 때문에 한솔도 아예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게 불타는 해를 등진 한솔이 새까맣게 보였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속눈썹 끝, 오똑한 코끝, 선이 확실한 입술 산까지. 지수는 잠깐 최윤상을 떠올렸다. 애비가 아니라 어미를 닮았나 보다. 흐리멍텅하고 술에 취해 축 늘어진 눈두덩이랑은 차원이 달랐다. 선명히 그려진 쌍꺼풀이 눈을 더 단단하게 붙잡았다. 어둠 속에 파묻힐 법한데 한솔은 또렷했다.

순영이 왜 고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순영과 지수가 일하는 곳에는 저런 눈이 없었다. 초롱초롱하단 말로 부족했다. 전부 배움이 짧아 아는 동료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맞는 표현을 찾을 수도 없을 거다. 아까 쥐어뜯던 뒷목을 긁었다. 얼마 전 손톱을 깎았는데도 손톱이 두꺼워 긁힌 자리가 빨갛게 일어났다.

 

"살고 싶어?"

"모르겠어요."

"그래서 물어본 거 아냐?"

"살고 싶다고 말하면 살려줄 거에요?"

"내가 살려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

"제가 먼저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해줄 거에요?"

 

순영에게 잤냐고 물었던 게 갑자기 떠올랐다.

 

"아저씨?"

"아저씨 아냐."

"형이라고 불렀는데도 대답 안 해주길래."

"..."

"대답 못 해줘요?"

 

짜증도 독촉도 없는 어조가 낯설다. 팍팍하고 거칠게 굴러가던 지수의 삶에 한솔의 목소리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한솔과 마주 보는 공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해가 멈춘 것 같다. 여전히 그늘진 한솔의 얼굴은 여전히 지수보다 더 선명하고 반짝였다.

해와 두 사람 사이에 구름이 끼어든다. 얼굴 밑으로만 가렸던 그늘이 되레 옅어진다.

 

"..."

"형."

"살 수 있어."

"네?"

"집에 돌아가."

 

지수가 한솔을 지나쳤다. 옷깃도 스치지 않고 그냥 옆으로 사라졌다. 그대로 아예 사라질까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지수는 신기루가 아녔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뒤통수가 이상했다. 한솔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지수는 보지 못했다.

 

"돈 받으러 왔다면서요."

"그랬지."

"그래서 데려가려던 거 아녔어요?"

"그랬어."

"근데 왜 그냥 가요?"

 

목소리가 먹먹했다. 낀 구름은 먹구름이 아니라 비가 쏟아질 리가 없는데, 한솔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살 수 있냐고 물어봤잖아."

"..."

"살 수 있어."

"잠깐..."

"집에 들어가라."

 

지수와 한솔이 가야 할 방향이 달라졌다. 한솔은 다시 언덕을 올랐고, 지수는 다시 골목을 내려갔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쉬웠다. 한솔은 내심 지수가 뒤를 돌아봐 주길 바라며 뒤통수를 계속 쳐다봤다. 우습게도, 그 뒤통수를 보고 나서야 정말 제 목숨을 담보로 아빠가 사채를 썼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빠가 저러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이라는 걸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깨달았지만, 아빠가 빌린 사람이 오히려 더 괜찮은 사람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수는 저를 안타깝게 여겼고, 제 삶을 빼앗지 않았으니까.

고개를 들었다. 비가 오지 않는데 턱 끝이 축축이 젖었다.

 

"다음엔 아빠 모셔와라."

 

지수의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 이미 언덕을 반이나 내려왔고, 한솔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서로의 울음도, 탄식도 들릴 리 없는 거리였다. 거친 입술을 반쯤 깨물고 두꺼운 손가락은 갈비뼈 사이사이를 매만졌다. 순영이 아니라 제 몸에 칼 빵이 나게 생겼다.

다음에 올 때는 한솔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차라리 누군가 돌봐주지 못하더라도 혼자 살아갔으면 한다. 저 같은 놈이 잠깐 베풀어 주는 잠깐의 동정 말고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어쩌다 볼일이 생긴다면 대학교 과잠바를 입고 친구들 사이에서 해맑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들고 지나가다가, 얼떨결에 알아봤으면 좋겠다. 그것도 저 혼자 보고 말았으면 좋겠다.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에 섰다. 하늘에 구름이 다 사라졌다. 한솔이 사는 동네에 구름이 몰렸다. 끝난 줄 알았던 장맛비가 한 번 더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미 마음에는 구멍이 났으니, 천장에서 물이나 새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스 창문 밖으로는 한솔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창문틀에 가려져서인지, 너무 멀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잘 들어갔겠지. 노약자석 바로 뒷자리 좁은 자리에 몸을 구기고 눈을 감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돈을 받으면 지훈이랑 같이 초밥이나 먹으려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

타기 전까지도 맑았던 하늘이 금방 흐려진다. 두 정거장 정도 지나가니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비를 피하다니,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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