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겸솔] 야광별
쌀 / 글
1
지하철 출구를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한다. 살펴볼 것도 없이 저기 사거리에서 이제 막 파란 신호를 받은 마을버스들이 정류장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탓이겠다. 정류장은 걸어서 대략 서른다섯 걸음. 그러나 다음 버스를 기다려 탄다고 해도 앉아서 갈 수 있기는커녕 부대끼다 못해 미어터지는 환경은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무리를 따라 뛰기로 한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운 좋게 뒷문 쪽 손잡이를 잡고 선다. 이리저리 치이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내릴 수 있으므로 나름 좋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다섯 정거장이 지나고 나면 손을 뻗어 벨을 누른다. 열을 세기도 전에 버스는 다시 한 번 멈춰 선다. 피부가 아릴 정도로 차갑던 공기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흩어지고, 아스팔트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기다렸단 듯 뜨끈하고 텁텁한 것들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무얼 좀 먹고 씻을지, 씻고 먹을지, 혹은 곧장 누울 것인지 하는 고민은 늘 치열하게 머릿속을 떠다닌다. 어쨌든 당장은 좀 씻고 싶다. 찬물에 머리부터 들이밀고, 심장이 놀라든 어깨가 경직되든 그런 건 모른 체 하고.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예의 빌라 골목이 나타난다. 대부분은 원룸 건물이다. 그 중 유독 다닥다닥 붙어있는 네 채의 작은 빌라가 있다. 이들은 똑같은 이름, 똑같은 외형에 조금씩 다른 내부 구조를 갖고 있는데, 가장 바깥에 나와있는 것이 1동, 그 다음이 2동, 3동, 4동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제 막 2동을 지나쳐 3동 입구를 향해 걷는다. 그러다 입구 앞까지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인기척 소리에 문득 뒤를 돌아본다. 2동과 3동 사이에 입주민 전용 쓰레기 분리수거함이 있는 곳이다. 시선이 닿자마자 온몸이 고장난 것처럼 우뚝 멈추고 만다.
본의 아니게 남이 분리수거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툭, 툭, 소리를 내며 조그만 택배 상자들을 펼치고 있던 잠옷 차림의 남자가 문득 그 시선을 발견하곤 동작을 멈춘다. 그리곤 제 손에 든 상자를 한 번, 앞에 걸린 ‘종 이 류’ 팻말을 한 번, 마지막으로 무슨 문제 있냐는 얼굴로 3동 입구 앞의 남자를 한 번 바라본다. 그러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갤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곤 이내 빌라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느리게 사라진다.
2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일 년 하고도 팔 개월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술 약속이 잡혀 늦게까지 퍼마시다 겨우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보니 타야 할 버스는 모두 끊긴 상황이라, 석민은 잠시 고민하다 역 앞에 늘어선 택시들을 그대로 지나치며 걷기 시작했다. 히터 바람 빵빵한 전철 안에서 다른 승객들과 부대끼느라 울렁거리는 속을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버스로는 여섯 정거장이지만 돌아가는 길을 제외하면 대략 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길을 걸으며 석민이 뒤늦게 깨달은 바는, 아직 11월 초반이긴 했으나 절기로 따지면 입동이 지났으므로 사실상 계절은 이미 겨울이라는 것. 게다가 그 해에 첫 한파주의보가 떨어진 날이기도 했으니, 코가 없어져도 모를 만큼 춥다는 소리가 나와도 아주 오바는 아니었다. 석민은 서둘러 걸으며 롱패딩에 달린 후드를 푹 뒤집어 썼다.
당연한 듯이 편의점에도 들렀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편의점이었다. 석민은 거기서 에너지바 몇 개를 샀다. 가끔 그렇게 생각 없이 편의점을 둘러보다 보면, 딱히 필요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하나라도 더 사고 싶다는 영문 모를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 가장 고르기 쉬운 것이 석민에게는 바로 에너지바였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일단 사놓으면 언제든 간편하게 까먹기도 좋고, 어쨌든 맛도 나쁘지 않으니까. 에너지바를 패딩 주머니에 집어 넣고, 편의점을 나와서는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익숙한 빌라 단지가 보이자마자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아 빨리 눕구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 앞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석민이 주위를 한 번 슥 둘러 본 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 시선 끝에 정말로 무언가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는 뜻이다.
재활용 분리수거함과 헌옷수거함 사이, 아마도 그쯤이었다. 빛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별 감흥 없이 그대로 지나치려던 석민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뒤돌아 보았다. 하얗고 푸른… 빛…? 그제야 머릿속을 스치는 묘한 이질감에 가만 생각을 해보니, 안 쓰거나 못 쓰는 것들을 정리해 버리는 수거함 근처에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는 콘센트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담 아마도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충전하는 방식으로 빛을 내는 물건일 텐데, 그게 좀,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빛이 ’켜져 있다’고 하기엔 너무 작고 희미했던 탓이다. 당시의 석민으로서는 그것의 정체로 짐작될 만한 그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아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구나, 이건 이렇구나, 하고 마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술이 들어갔을 때의 석민은 약간 집요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저것이 어떤 물건에서 나오는 빛인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을 해야 그 성에 찰 것 같았다.
단 몇 걸음 만에 곧장 앞에 섰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놀랍게도 수상했다. 빛은 폐지 박스들 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우선 그 박스가 눕혀진 채 쌓여있지 않고 세워져 있다는 것부터가 매우 수상했다. 마치 어린애들이 소꿉장난을 하며 놀 때 집이라고 만들어 놓은 듯한 엉성한 모양새였다. 그런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라니, 이 얼마나 술에 취한 어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경이란 말인가. 석민이 얼른 손을 뻗어 한 겹의 박스를 옆으로 밀어내자, 마치 도미노처럼 그 옆의 것도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그 빛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
기절하지 않은 건, 다행이기도 했고 불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찬 바람에 거의 날아가버린 줄 알았던 옅은 술기운까지 모두 깨버린 건 분명 불행이었다. 지독하게도 맨 정신이었다는 뜻이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뱃속에서 빠르게 부풀던 풍선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로 목구멍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정말, 너무 놀라면, 아무 소리도 안 나온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그게 나한테도 해당이 되는 말이었구나…. 석민은 술기운과 함께 사라진 듯한 정신으로 희미하게 생각했다.
“…….”
“…….”
그러니까, 남자애였다. 스물은 넘겼나 싶을 만큼 앳된 얼굴에 새하얀 머리카락. 커다란 눈, 깜빡이며…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뿜어내고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옅고 희미한 빛을 온몸에 두른 채.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 한 번 더 깜빡.
아냐, 사람일 리가 없잖아. 석민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서 마찬가지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와중에 ‘이성’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눈앞의 현실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정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차암나 증말! 온몸에서 빛이 나는 인간이라니 석민아! 그런 건 영화 드라마에서도 본 기억이 없어요~ 뭐, 봤다고 해봤자 전설의 고향 같은 옛날 프로그램에서 귀신 등장할 때나 저런… 저런 빛이 나오고 그랬지 참…….
석민은 잠시 망설이다, 침을 한 번 꼴딱 삼켰다. 그리곤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두 손에 쥐고는, 그대로 무릎을 굽혀 남자와 비슷한 모양으로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간단한 동작이었겠지만 당시엔 어깨와 팔꿈치, 무릎의 관절이 느리고 둔하게 움직이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렇게나 놀랐으니 몸이 경직되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 삐걱대다 결국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석민에게서 다시 한 번 꼴딱 소리가 나오자,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석민을 따라 침 삼키는 흉내를 냈다. 정작 석민은 고개까지 돌린 채 눈을 감고 있느라 보지 못했지만.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흡! 하는 소리와 함께 패딩을 앞으로 쭉 내밀기나 할 뿐이었다.
아니 물론 귀신은 더더욱 아니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기는 했다. 막상 손을 뻗었는데 그게 그대로 남자의 몸을 통과해버린다거나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면 정말 기절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순간 떠올린 방법이 그거였다. 마치 동물 구조할 때, 포획 후 담요로 감싸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패딩을 내밀었는데 눈앞의 남자가 아니라 그 뒤의 벽에 닿게 되면 그냥 다 버리게 되더라도 곧장 집까지 뛰어 올라갈 생각이었다. 소리는 지르지 말자고 하나 마나 한 다짐까지 하며 손을 뻗자, 이내 폭신한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하면서 말랑한 촉감. 아… 있다. 남자가 거기 있었다. 그제야 숨이 길게 터져 나오며 몸에 힘이 조금 빠지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석민이 그러든 말든, 몸에 닿는 패딩의 감촉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는 삭삭 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아예 손을 들어 쓰다듬기도 했다. 패딩 윗부분에 달린 후드를 요리조리 들어 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결국 얼굴을 쏙 집어 넣었는데, 그 탓에 남자의 몸 전체가 패딩에 가려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모든 빛이 사라진 것이다. 눈앞은 당연하고도 평범한 어둠. 그러나 새삼스러울 새도 없이 후드가 스르륵 떨어지며 작고 희미한 빛이 다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밝아진 시야로 웃고 있는 빛이 보였다.
3
여기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온몸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 있다며 구급차를 부른다거나 하는 상식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그러니까 너무 추웠다. 좋은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겉옷을 남자에게 거의 줘버린 것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패딩을 뒤집어 쓴 채 삭삭 소릴 내며 쓰다듬는 그의 얼굴이 너무 즐거워 보여 석민은 다시 달란 소리를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조치를 어떻게 취하든 우선은 안에 들어가 생각을 해보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석민은 남자를 데리고 얼른 집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 들어가서는 불을 켜기도 전에 서둘러 창문의 커튼부터 쳤다. 무슨 나쁜 짓이나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오히려 그 반대였는데도 석민은 어쩐지 한껏 수상해진 기분이 들었다. 반대쪽 커튼도 마저 펼친 후 그제야 거실 불을 켜기 위해 뒤로 돌아서자마자 바로 코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석민이 깜짝 놀라 물러나려는데, 남자가 두 손을 들어 그런 석민의 관자놀이 부근을 가볍게 잡아 당겼다. 졸지에 머리통을 붙잡힌 채 남자와 마주보고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코끝과 코끝이 서로 부드럽게 맞닿았다. 그리곤 이마까지 서서히 닿아 오기 시작하는데, 뭔가 찌릿했다. 기분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랬다. 찌릿찌릿. 아니나 다를까 석민의 머리를 감싼 남자의 손에서 점점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 뭐, 뭐야……”
갑자기 판타지 어드벤처로 바뀌어 버린 장르를 석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믿든 말든 현실은 계속 재생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빛에 휩싸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석민은 제 머릿속에서 무언가 흘러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고 함께 시선을 마주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그는 석민이 지금껏 믿어왔던 모든 것들을 단 한 순간에 무너뜨리면서도 그저 고요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석민이 손을 올리자 남자도 손을 올린다. 석민이 그 손을 남자에게 가까이 갖다대자, 남자의 손 또한 석민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이내 서로의 뺨 위로 보드랍고 동그란 것이 동시에 닿는다. 손끝에 만져지는 피부는 차갑기도 하고, 또 따듯하기도 하다. 석민은 그제야 깨닫는다. 이어져 있는 것이다. 단지 손이 닿은 것만으로 그는 석민이 되고, 또 석민은 그가 되어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감히 시작을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된 그의 세계에 비해 아직 석민의 것은 작고 별 볼 일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찬란하고도 지루한 세계를 석민이 보고싶은 만큼 볼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린다.
오래지 않아 빛은 천천히 사그라들어, 석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처음과 같이 작고 희미해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던 중이었다. 점점 느리게 눈을 끔벅이는 남자를 조심스레 침대 쪽으로 옮겼다. 패딩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자 이내 더는 눈을 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석민은 어느 순간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침대 옆에 기대 앉았다. 손끝이 떨릴 만큼 무언가 가득 벅차오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는 말버릇에 가까운 물음마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명확한, 그건 모두 사실이었다. 그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치 석민을 위로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순간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그리하여 바람 부는 소리만 크게 울리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또다시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날이 밝자 그는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말도 하기 시작했다. 지난 밤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라, 그저 머리만 새하얗게 물들였을 뿐인 보통의 인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개에 눌려 뒷머리가 삐죽 솟아오른 채 그는 자신이 내는 빛의 양과 세기가 일정하기 때문에, 주변의 환경이 자신보다 더 밝으면 빛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고 석민에게 설명해주었다. 생각보다 더 낮고 둥근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자신의 설명대로 해가 저문 후 어두워지는 속도에 맞춰 다시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석민은 그게 꼭 야광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흘 쯤 지나니 그에게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동의 하에, 처음 발견했을 당시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박스의 글자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솔 온돌마루 카펫형 전기매트’ 중에서 석민은 이름 후보로 한솔, 마루, 매트를 골라주었고 남자가 한솔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솔은 지구에서의 생활에, 석민은 그런 한솔과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는 중이었다.
4
한솔은 가장 처음에, 그저 작은 돌멩이만 한 크기였다고 한다. 그 돌멩이가 스스로 자아를 깨우친 후 주변의 물질을 하나씩 끌어 모아 몸집을 키우다, 마침내 거대한 행성으로 거듭나게 된 존재였다. 물론 당사자인 한솔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그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석민은, 한솔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하기로 했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한솔은 그 모든 과거를 지나 현재에 실존 중이었다. 비록 지나온 시간에 비해 현재는 찰나보다 못한 순간일지라도.
어쨌든 그는 행성이 된 것에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우주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생명체들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성인 채로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 너머로 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 이동이 자유로울 수 있는 아바타 형태의 존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현재 모습의 시초가 됐다. 한계를 다시 출발선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런 한솔에게도 지구의 발견은 엄청난 우연이자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작고 푸른 별. 온갖 생명체로 가득한 곳. 원래 일정대로라면 새로운 채비를 하기 위해 본래의 행성으로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어야 할 때였지만, 눈앞에 지구를 두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기어이 방향을 돌려 그대로 돌진했을 뿐이다. 나름의 욕심을 담아 목표 지점으로 설정한 곳은 조그맣고 아름다운 어느 섬이었다. (나중에 그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듣던 석민은 거기가 ‘하와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조금 무리하게 방향을 돌렸던 탓일까. 지구 안으로 들어서며 한솔은 잠시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전혀 엉뚱한 곳에 불시착해 있었다. 하와이는커녕 심지어 바다 근처도 아닌, 어느 산속이었던 것이다. 바라던 곳은 아니었지만 거기에도 다양하고 매력적인 생명체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한솔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대하고자 하는 생명체가 가진 고유의 소통 방식을 한솔이 하나씩 깨닫고 배우기 위해서는 그 상대와 직접적으로 닿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작고 연약했던 탓에, 한솔의 손끝이 다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바스라지고 말았다.
지구에서의 첫 소통 상대는 그 산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한솔이 주저하며 손을 내밀자, 다행히 그는 바스라지지 않았고 대화에도 기꺼이 응해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무는 특히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한솔에게 설명해주고 싶어했다. 그 긴 설명을 가만 듣던 한솔은 이내 강한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직접 만나 그들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한솔을 예상했다는 듯, 나무는 가볍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인간을 상대할 때 조심해야 할 것들을 몇 가지 더 알려주었다. 첫째, 무작정 다가가지 말 것. 둘째,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보여주지 말 것. 셋째, 믿지 않을 것. 넷째, 다섯째…….
나무의 충고를 따르지는 못했다. 애초에 사람들이 한솔에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던 탓이다. 조심하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걷고 있는 길 외엔 그 무엇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한솔은 실망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수면욕, 식욕, 성욕 같은 아주 원시적인 감정들 뿐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예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내가 이런 존재들에게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일까? 행성들을 여행하며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의문이 한솔의 마음에 피어 올랐다.
하지만 실망을 하기는 했어도, 곧장 거길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당장은 힘이 많이 빠져 지친 상태였으므로 잠시라도 휴식을 취해야 했다. 심지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한솔이 가진 빛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한솔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하고 인간을 피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다시 날이 밝을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 더 한적한 곳, 조금 더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가, 마침내 석민이 사는 빌라 앞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는 뭐, 다 아는 이야기다.
5
석민의 할머니께서는 5년 전 갑자기 쓰러진 일이 있은 후로 곧장 담배까지 끊으시고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몸에 좋은 거라면 하여간 다 챙겨 드셨다. 그러다 갑자기 건강즙 쪽으로 빠지셨고, 차로 왕복 한 시간 반 거리에 딱 하나 있는 건강원까지 찾아내 그곳의 단골이 되셨다. 짤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건강원으로 가져가 즙으로 만들어 드시는 동안 할머니는 즙에 관해 거의 준전문가 수준까지 됐다. 이건 무슨 효과가 있고 이건 어디에 좋고 하는 말들을 할머니는 어디에 입력이라도 된 것처럼 줄줄 말씀하시곤 했다.
갑자기 왜 이런 소릴 하느냐 하면, 그런 할머니 덕에 혼자 사는 석민의 집에도 온갖 건강즙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염소즙이니 장어즙이니 하는 것들은 차마 누굴 주지도 못하고 쌓아두기만 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또 없어서 아쉬운 판이다. 한솔이가 아주 잘 먹고 있는 덕이다. 행성의 아바타 쯤 되는 녀석이 웬 건강즙인가 하겠지만, 제 말로는 힘을 축적해두어야 한단다. 자신은 아직 불완전한 형태이기도 하고, 본래의 행성과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깎이는 만큼 채울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보충을 해야 한다고 했다.
또 한솔이 잘 먹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에너지바다. 그중에서도 땅콩이나 아몬드 같은 견과류 같은 게 들어가지 않고 위나 아래에 초콜릿이 묻혀져 있는 것을 선호했다. 즙을 마시는 한솔을 보고 있으면 괜히 석민의 입까지 쓴 느낌이라, 집에 있는 것 중 가장 과자 같아 보이는 에너지바를 찾아 주었더니 그것도 그때부터 잘 먹었다. 덕분에 석민은 살면서 처음으로 즙을 보내달라는 말을 부모님께 연락으로 전했다. 석민의 부모님도 즙을 잘 드시진 못하는 편이라 본가에도 그게 쌓여져 있었던 모양인지, 며칠 지나기도 전에 석민의 집으로 꽤 묵직한 택배박스가 도착했다. 마치 최소 금액 맞추듯 대충 몇 개 고른 후 계산대 위로 올려 놓곤 하던 에너지바도 인터넷에서 통 단위로 구매를 하게 됐다.
그냥 외계인도 아닌 외계 행성과의 시간은 그렇게 평범했다. 사랑을 깨닫게 된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이부자리에서 눈을 뜨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또 같이 누워 잠드는 것. 그런 게 전부 사랑이라고, 석민은 생각했다.
겨울을 벗어나기 전. 늦은 점심을 먹었을 뿐인데 벌써 하루가 다 가려는 모양이었다. 아직 붉어지기 전의 노을빛이 석민의 원룸을 절반만 비추기 시작한다. 거실 창문으로 바깥을 멀리 내다보면 작은 산이 있는데, 운이 좋으면 그 산 너머로 손톱보다 작아진 태양이 지는 순간을 볼 수 있어서, 한솔은 늘 그 시간만 되면 창가 틀에 베개를 가져다 놓고 누운 채 바깥을 구경했다. 엎드리고 누워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한솔의 주변으로 은은한 빛이 번지기 시작하면 이제 곧 해가 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느새 완전히 붉어진 노을과 뒤섞여 오묘하고 신비한 색으로 다시 번져 나간다.
한솔아. 이름을 부르자 고갤 돌려 눈을 마주쳐 온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그 아래로는 온전히 석민만을 담아내는 다정한 다갈색의 눈동자.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석민은 갑작스레 울고 싶은 기분이 된다. 한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석민의 곁으로 다가간다. 느리게 껴안는다. 서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자 석민에게선 그제야 긴 숨이 터져 나온다. 여기에 있구나. 비슷해진 온도로, 아직 여기에 함께 있구나.
“우리 좀 따뜻해지면, 바다 보러 갈까?”
“바다? 하와이?”
“아니, 하와이까지는 아니구… 그냥, 바다.”
“응, 갈래. 그냥 바다.”
아직, 그러나 언젠가는.
6
이럴 줄 알았음 부산이나 갈 걸 그랬다고, 석민은 생각했다. 기차 타고 근 두 시간 만에 도착한 강릉 바다는 아직 겨울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완연한 봄 날씨가 예상된댔으면서…. 대부분은 추웠고, 아주 가끔씩만 따뜻했다.
“파도구나.”
“응, 저 소리.”
“예쁘다.”
“응, 듣기 좋네.”
한솔이 멍한 눈으로 바다를 한참 구경하는 동안, 석민은 메고 온 가방 안에서 차가버섯즙과 에너지바를 두 개씩 꺼냈다. 찬 바람 맞으며 차가운 즙에, 온기라곤 없는 에너지바를 모두 씹어 삼키고 나니 무언가 따뜻한 것이 마시고 싶었다. 조금 걸으면 나오는 카페를 가려다 그냥 바로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컵에 뜨거운 물과 함께 부어 마실 수 있는 유자차를 사이좋게 골랐다. 출입구 옆쪽에 마련된 자리에서 석민이 유자차의 포장을 뜯고 물을 받는 사이, 한솔은 밖으로 나가 또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는 듯했다. 석민은 이내 완성된 유자차를 스틱으로 저으며 그런 한솔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조금 이르게 숙소에 도착해서는 잠시 뒹굴거리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그래도 바닷가에 왔으니 회를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두부 전골을 먹기로 했다. 한솔은 전골의 국물부터 홀짝이다 언젠가 석민의 집에서 시켜 먹었었던 순두부찌개 이야길 했다. 그거 되게 짰잖아. 근데 이거는 맛있넹. 커다랗고 납작한 두부를 앞접시에 담아 젓가락으로 4등분한 후 한솔에게 건네며 석민은 잘 식혀서 먹으라고 했다.
그렇게 전골을 먹는 사이 해가 졌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피해 숨거나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전골이 너무 맛있었고, 둘째로 한솔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빛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빛의 기운이랄까 가까이 다가가면 무언가 옅게나마 느낄 수는 있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었다. 석민이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으므로 한솔도 대답을 해주진 못했다. 그저 둘은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 번 바다 구경을 하기로 했다. 뜨거운 것을 먹은 후 찬 바람을 쐬고 있어서인지 둘은 계속 코를 훌쩍였다.
어두컴컴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위로 파도 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밤의 파도는 낮의 것보다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거대한 느낌. 얼마나 지났을까. 석민이 고갤 돌리자 한솔의 옆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그렇게 바라본 한솔은 바다가 아닌, 더 먼 하늘 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둘은 조그만 샤워부스 안에 들어가 함께 물을 맞으며 시답잖은 장난이나 쳤다. 씻다가 씻겨주다가 그랬다. 욕실을 나와서는 한 번도 조명을 켜지 않았다. 내내 빛이 나는 밤이었으므로 이제는 어둠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녹녹하게 풀린 채로 급하게 몸을 맞추었다. 아주 꼭 맞지는 앉았다.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게 서투른 움직이었음에도, 한솔은 이 순간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석민은 잠이 들 때까지 한솔의 온몸에 입을 맞추었다. 금방 쏟아지는 잠결에 마지막으로 눈이 감기기 전 그가 본 것은,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석민 혼자였다. 한솔이 입었던 옷, 신었던 신발, 먹다 남긴 유자차 찌꺼기 같은 것으로 여기에 있었다는 흔적만 남긴 채, 한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임을 다섯 번째 깨닫고도 석민은 쉽게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내 자신의 가방 안에 한솔이 남기고 간 것을 전부 쓸어넣기 시작했다. 쫓기듯 숙소를 벗어나 강릉역으로 향했다. 오후 세 시 삼십 분 기차를 다시 오전 아홉 시 십오 분으로 두 분 다 변경하시는 거 맞으세요? 창구 직원의 기계적인 물음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석민은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오전 아홉 시 십오 분. 사실 석민도 처음 보는 낯선 강릉의 풍경이, 그가 앉은 기차 창문 너머로 하나씩 스쳐가기 시작했다.
7
흔한 일이었다. 그 바닥에선.
“이 바닥이 뭐 다 그런 거지. 너도 알고 있었잖아, 어?”
그래. 석민도 알고 있었다. 이 새끼가 도둑놈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만 참으면, 나만 모른 체 하면 모두 평화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작업실의 거의 모두가, 석민이 잠깐 자릴 비우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어떤 조치를 취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피해자는 오로지 석민 뿐이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후배라고 신경 써줬더니, 앞에선 시키는 것만 하고 뒤에선 호박씨 까고, 어?”
“…….”
“그딴 곡 혼자 쓰고 있어봤자 혼자 알지. 그것도 나니까 한 번 들어봐 준, 억…!”
의자에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있던 박효석이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내 쨍알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뚝 끊기자, 작업실 안은 정적보다도 더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기어이 박효석의 든 것 없는 대가리를 발로 까버리고 만 석민이 느리게 주머니를 뒤지다 막대기 모양의 USB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곤 박효석의 상체를 반만 끌어 올린 후 늘 꼴 뵈기 싫었던 그 면상에 대고 몇 번 꽂아준다.
“니가 도둑질 하는 거 찍어놓은 영상들이야. 더 필요하면 말해.”
그런 뒤에야 멱살이든 주먹이든 다 털어내고선, USB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다. 작은 플라스틱이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린다. 석민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조금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는 그대로 뒤돌아 나간다. 탁. 문이 닫히자 그제야 다들 우르르 박효석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일으켜준다. 저리 가 새꺄아!! 손대지 마!!! 뒤늦게 화풀이를 해보지만 이미 멀어진 석민의 귓가엔 닿지 않는다.
8
흡연부스 안. 석민은 창가에 이마를 대고 바깥을 가만 바라보고 있다. 별은 아마도 저기쯤, 아니 저기 어디쯤. 어쩌면 내내 그저 허공이었을 수도 있겠다. 석민이 그러는 사이 뒤에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매캐한 담배 연기가 코를 찌르기 시작한다.
“석민 씨 담배 피웠어요?”
“아, 아뇨.”
“응? 근데 왜 여기서 이러구 있어?”
“그냥… 여기가 제일 잘 보이는 것 같아서요.”
홍 대리는 당최 매가리가 없는 놈이라 생각하며 담배를 마저 피우고, 석민은 이참에 담배를 펴볼까 생각하며 흡연부스를 나선다.
할머니는 석민이 음악 나부랭이를 관두고 멀쩡한 물류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이 다 건강즙 먹고 정신 차린 덕분이라고 하셨다. 박효석은 그때의 일이 술만 마시면 생각이 나는 모양인지, 가끔 늦은 밤이면 욕 섞인 메시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러면 석민은 따로 대답을 하지 않고 그 메시지를 캡쳐한 사진만 전송했다. 참 구질구질하다 생각하면서.
오 그대여 으흠흠… 그럼에도 여전히 흥얼거리게 된다, 구질구질하게. 석민 씨 그 노래 되게 좋아하나 봐. 맨날 흥얼거리고 있네. 누군가 흘리듯 눈치를 줘도 그런 건 잘 모르겠으니까, 석민은 그냥 웃으며 속으로만 대답하는 것이다. 네,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후회도 못 할 만큼 너무 많이.
이제 정말로 ‘완연한’ 여름이다. 장마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폭염의 시작이다. 오늘도 무사히 퇴근한 후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한참만에 도착한 익숙한 동네 풍경. 석민은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편의점으로 쏙 빠져 들어간다. 더우니까 시원한 거. 캔맥주 만 원 어치랑 그리고… 이건 됐다 싶다. 에너지바 같은 건 아직 집에 박스 채로 널려 있었다. 조금 더 고민하다 결국 캔맨주만 결제한 후 봉투에 담아내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털레털레 걷는다. 걸으면서 오늘 오전 출근길에 확인했던 아버지의 멋 없는 메시지 한 줄을 다시 떠올려 본다. [칡즙 보냈다. 아마 오늘 도착할 것.] 그리고 오후 여섯 시 쯤 도착해 있는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하면, 고객님의 소중한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사람 속도 모르고 발랄하기만 하다.
뭘 좀 먹고 씻을까, 씻고 먹을까……. 이런 걸 고민하느라 퇴근길의 석민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오늘의 하늘은 맑은 건지 흐린 건지 좀처럼 잘 알 수가 없다. 물안개가 옅게 끼인 것처럼, 어딘가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한 느낌이다. 버릇처럼 하늘 위를 휙휙 올려다 보며 길을 걷던 석민의 걸음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춘다.
작고 낮은 빌라 단지의 세 번째 동, 세 번째 층. 그 중에서도 가장 안쪽이다.
빛은 거기서부터 새어나오고 있다.
푸르도록 새하얀 빛이다.
석민은 날아갈 수도 있을 것처럼 뛰기 시작한다. 그 가벼운 발걸음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선율. 이제 다시 석민의 노래다.
[: 한솔의 존재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의 등장인물 중 ‘에고’와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설명하는 부분은 나무위키 문서 ‘에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를 참고했습니다.]
[: 글 안에서 석민이 만든 노래는 새소년의 <난춘>으로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