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icon 2.png

1st Vernon RPS COLLABORATION

[부솔] 순간의 영원

 

​익명 / 글

승관은 눈을 뜬다. 눈앞에 들어온 건 온통 하얀 방, 불편하게 달린 산소호흡기. 제 팔에 주렁주렁 달린 각종 약물. 즉, 병원이었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2시 18분을 띄웠다. 누가 이딴 질 나쁜 장난을, 반 죽어가는 사람처럼 만들어 놓고. 이게 뭐야. 숨을 들이키고 내쉬길 반복할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이 거슬렸다. 승관이 호흡기를 떼려 팔 한쪽을 들어 올렸다. 우당탕. 각종 거치대들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아, 팔에 꽂혀있던 바늘 여러 개가 뽑혀 나갔다. 피가 후드득 흘렀다. 하얀 환자 복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왠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승관은 호흡기를 뗐다. 굉장히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들이쉬는 듯, 승관의 폐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승관이 베드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넘어졌다. 또다시 시끄럽게 소음이 일었다. 베드 밑 선반에 머리를 박고서야 깨달았다. 생경한듯 쉬어지는 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가, 제가 왜 병원에 있는가. 

 

 

드문드문 끊겨 있는 기억들.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두통만이 일었다. 지끈 거리는 머리를 짚고 일어섰다. 아직 다리가 제 기능을 못해 걷는 것 조차 불안 불안 했다. 베드 받침대를 옮겨 잡아가며, 승관은 힘겹게 문 쪽으로 걸었다. 하나, 둘, 셋… 어? 문 고리를 잡고 선 승관이 뒤를 돌았다. 평범한 6인실. 그런데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쎄한 공기가 승관의 목을 옅게 졸랐다. 

 

 

아, 침대가, 여섯개. 1인실이 아닌 6인실, 6인실. 그제야 승관은 알아차린다.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가족들. 그들이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승관의 앞에 있는 아주머니는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당 한 번씩 감겨야 할, 적어도 몇 초 간격으로 깜박여야 할 그 눈꺼풀이 5분 째 미동도 없었다. 툭, 승관이 문 고리를 놓았다. 그러고 보니 TV소리도 나지 않는다. 이 이질감이, 아니, 대놓고 느껴지는 괴이함이, 두렵다. 승관이 시선을 바닥으로 꽂는다. 해가 비추는 흰색의 병원 바닥이 밝았다. 분명 해가 떠 있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그놈의 소리가. 그 소리가. 낯엔 더럽게 시끄러워야 할 병원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시간이 멈춘 듯.

 

 

 

공포가 승관을 덮쳤다. 드르륵, 승관이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전속력으로 달리려던 승관은 제 앞에 있던 간호사를 보자마자 발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소용없다. 아, 부딪힌다. 승관의 몸이 전속력으로, 간호사와 부딪힌다. 아니, 간호사에게 들이받힌다. 쾅, 굉음과 함께 승관이 튕겨져 나온다. 얼떨떨한 얼굴에 당황이 서려 있다. 방금 교통사고를 당했나. 기침을 할 때마다 섞여나오는 피에 승관이 기겁을 했다. 저기, 죄송. 승관은 간호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 그런데, 이렇게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있나? 고개를 들었다. 어색하게 경직 돼 있는 입, 한쪽을 거의 뗀 채 유지되고 있는 발, 무엇보다,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옆으로 조금 밀렸을 뿐 끄떡도 없는 몸. 안돼, 안돼,안돼.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는다. 승관은 거의 실성 직전이었다. 본능적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도망, 도망치자.

 

 

 

맨 발바닥이 병원 바닥에 쓸려 따가웠다. 무언갈 넘어 트렸던가, 유리가, 깨졌던가? 그리고 박혔던가? 발에서 줄줄 새는 피에 승관이 경악을 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병원이 저를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까딱 정신을 놨다간 그대로 심연으로 자빠질 것만 같았다. 병원 정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제야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승관은 가던 길을 멈추곤 숨을 골랐다. 소름 돋는 기분에 휩싸여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자꾸만 아까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았다. 일체의 움직임도 없던 사람들. 승관의 눈길이 머문 그 긴 순간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로, 마네킹 마냥 딱딱하게 굳어있는. 부딪혔음에도 넘어지지도 않은 간호사.  등골을 훑는 섬찟함이 승관을 덮쳤다. 눈 뜨자마자, 기이의 연속. 그냥 정신을 놓고 싶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아, 무너진다.

 

 

" 승관. "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덮친다. 머리가 세차게 일렁였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향기. 눈이 감겼다. 아. 정신이, 아니. 그냥. 이대로. 승관아! 제 이름에 승관이 번쩍 눈을 뜬다. 눈앞의 향기를 밀쳐냈다. 승관이 아득해진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숨을 몰아쉰다. 머리가 핑 돌았다. 승관. 다시 제 이름이 들린다. 눈물 범벅인 얼굴을 벅벅 비비며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최한솔? 승관의 표정이 굳는다. 첫사랑이다. 승관의 고등학교 첫사랑. 갈색 머리가 잘 어울리던, 헤드폰이 그렇게나 잘 어울리던. 그리고, 그리고. 승관이 아직 사랑하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희열인지, 그리움인지, 감정들이 휘몰아친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꾹 잡는다. 되게 오랜만, 이다. 잘 지냈어?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 네가, 왜 움직이고 있어? "

 

" 뭐라는, 아, 아. 설마 나 병원에 집어넣은 거 너야? "

 

" ……. "

 

" 정말로? "

 

 

한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서는 계속 중얼거렸다. 이러면안되는데왜왜움직이는거지왜분명나빼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중얼임에 승관이 미간을 찌푸린다.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최한솔은 제정신이 아니다. 최한솔! 보다 못한 승관이 소리를 지른다. 그제야 한솔은 커진 눈으로 승관을 바라본다. 계속, 계속 바라보기만 한다. 

 

 

얼마간의 공백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슬슬 다리가 저렸다. 저, 승관이 말을 함과 동시에 한솔이 말을 꺼낸다. 너 먼저 말해. 승관이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한솔이 벤치 쪽으로 가 자리를 잡는다. 표정이 꽤 진지하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딱 그럴 타이밍인데도. 한솔이 승관의 손을 턱 잡는다. 입술을 몇 번 짓씹는다. 얘기하기 곤란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승관이 한솔을 불렀다. 한솔아.

 

 

 

" 입술 뜯지 말고. 왜 그러는데. "

 

" …말하면, 믿을 수 있어? "

 

" 일단 말해야 뭐든…! "

 

 

 

잘 들어 승관아. 시간이 멈췄어. 너무 큰 사건을, 담담하게 말해서, 하마터면 믿을뻔했다. 너무 평소의 최한솔이라. 승관이 실소를 터트린다. 시간이 멈춰? 한솔아, 자꾸 뭐라는 거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냐. 거짓말하는 거 다 티나. 한솔도 슬쩍 웃는다. 진짠데. 하는 말은 썩 유쾌하지 않지만.

 

승관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다. 한솔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드는 그때와 같은 기분, 같은 이질감, 승관은 시선을 사방으로 옮겼다. 덜컥 시선에 들어온 병원 간판의 시계. 시간이. 시간이. 2시 18분. 어, 어? 진짜야? 승관이 작게 욕을 읊조린다. 이거 지금 뭐 트루먼쇼 같은 건가? 내가 너한테 어떻게 속나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거야? 나 지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 스타라도 된 건가? 승관이 허겁지겁 말을 내뱉는다. 그럴수록 온몸 가득히 부정이 들어찬다. 아, 아, 아아아. 그래. 그 역겹도록 생생한 부정이 오히려 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래. 한솔이 옳다.

 

 

시간이 멈췄다.

 

 

저기 멀리 비행하던 새의 날개가, 제 옆에서 떨어지던 나뭇잎이, 길을 가던 사람의 발걸음이, 만물의 동작이, 향기가, 감정이, 모두 멈췄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비식비식 실소가 기어 나왔다. 초점 잃은 눈이 하늘을 향했다. 멈춰버린 구름을 응시했다. …느리게라도 움직였는데. 너무나 믿기 싫었다. 아니, 애초에. 애초에 현실일 리 없지 않나? 시간이 멈췄다니, sf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을 잘도, 잘도, …현실이다. 누군가에겐 여흥 거리로 지나지 않을 일이, 승관에겐 눈앞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물의 시간은 멈췄다. 

 

승관과 한솔, 딱 둘만 빼고. 승관이 한솔에게 묻는다. 초점 나간 눈이 흐릿하다. 우리만 움직이는 걸까. 한솔이 대답한다. 응. 승관이 다시 질문한다. 우리같은사람이또있진않을까. 한솔이 다시 대답한다. 없어. 왜?왜?왜?왜?왜?왜니가그렇게확신을해? 승관은, 하려던 말을 마음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또 묻는다. 어떻게 알아. 한솔은 또 대답한다. 아니, 대답하려한다. 승관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 한솔아, 나 성이 보고 싶어. 최성."

 

" ……. "

 

" 걔도 보고 싶어. 최성 단짝. 해단이, 그래. 윤해단. 그리고 내 짝이었던 현제도 보고 싶고, 그리고, 그리고. "

 

 

 

진성우랑, 김찬희랑, 김선재. 걔네를 어떻게 잊어? 승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적어도, 적어도, 우리 둘만 이렇게 움직이게 할 거였으면, 걔네는, 우리처럼 해줬어야지. 한솔아 너는 기억이 안 나? 우리 고등학교 때 지겹게 붙어 다녔잖아. 정말기억이안나? 아니, 아니지. 미안해. 네가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닐 텐데, 너도 충분히 혼란스러울 텐데. 네 탓은 아니지. 미안, 내가 감정이 앞섰어. 한솔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러 가자. 뭐? 승관이 한솔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선다. 난 걔네 어딨는지 알아. 네가 보고 싶다면, 데려다줄게. 

 

 

둘은 계속 걸었다. 계속, 계속, 계속. 혹시 움직이는 게 있지 않을까. 승관의 고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승관. 응? 한솔이 승관을 빤히 바라본다. 꼭 할 말 있을 때 저렇게 봤었는데. 한솔이 뜬금없이 묻는다. 정말 기억이 안 나? 앵무새 마냥 아까 승관이 한 질문을 따라 한다.

 

 

" …뭐가? "

 

" 아니, 아니야. 됐어. "

 

" 뭐가 됐는데? …예전부터 넌 맨날, 혼자서 맺고, 혼자서 끊어. 어떻게."

 

" ……. "

 

" 이런 상황에서 까지 감추는 게 있어야 해, 한솔아? "

 

 

근데 알려주면, 우리 이제 평생 못 봐. 또다. 또 저 눈빛이다. 혼자만 다 끝낼 준비를 한 눈. 이럴 땐 모르는 척 하는 게 속 편하겠지. …무슨 말이야? 정작 오라는 답은 안 오고, 한솔은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승관아, 세계와 날 놓고,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어떡할 거야? 승관이 한솔을 바라본다. 어떡할 거야, 승관아. 승관이 어렵게 입을 뗀다. 엉뚱한 소리, 지만. 상대가 최한솔이라면. …세계. 너한텐 미안해도, 세계를 구하겠지. 한솔이 씩 웃는다. 역시, 넌 그럴 줄 알았어. 근데 난,

 

 

난 널 구할 거야. 네가 내 세상이니까.

 

 

이래서, 우린 다르니까, 알려줄 수 없어. 네가 네 힘으로 직접, 알아내야 해. 승관아. 

 

 

 

네가 내 세상이니까. 의미를 되새기기도 전에 한솔이 발걸음을 멈춘다. 승관도 따라 멈춘다. 웬 건물 앞이었다. 승관이 위를 올려다본다. ' 푸른 납골당 '. 뭐? 승관의 미간이 구겨진다. 승관은 한솔에게 소리쳤다. 장난 치지 말라고.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넌 이런 거로 사람을 놀리고 싶냐고. 짜증 섞인 말들을 묵묵히 다 받은 한솔이 납골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휙, 돌아보고 말한다.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안 들어와? 승관이 기가 찬다는 듯 웃는다. 위를 한 번 더 올려다본다. 납골당, 납골당.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왜 온 건데. "

 

" 알고 있잖아. "

 

" 모르겠어, 전혀. 그러니까 장난 치지 마. "

 

 

 진짜, 다 잊었네. 혼자. 한솔이 한 유골함 앞에 멈춰 선다. 하얀 도자기 위로, 까맣게, 까맣게, 까맣게 적혀 있는 글씨. 故 김찬희.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환하게 웃고 있는 제 친구의 사진. 속에서 무언가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눈물이 멈출 새 없이 흘렀다. 승관이 납골당을 뛰쳐나간다. 머리를 싸맨다. 두통이 일었다. 언제? 언제?대체언제죽은거지?왜? 그러다 곧, 승관은 의문을 마주한다. 병원에서는 괴로움에 잊고 있었던. 제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제 뒤를 따라 나온 한솔을 바라보며 말했다.

 

 

" 한솔아, 솔아. 나, 기억이 좀 이상해. 뚝뚝 끊겨 있어."

 

" …알고 있어. "

 

 

승관은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혼자서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런 지겹다는 듯한 말투. 그러면서도 자기한텐 하나도 알려주지 않는. 자연스레 공격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솔이 승관을 지나친다. 승관의 앞에 우뚝 서서, 예쁘게 웃는다. …바다보러 갈까? 얼마 안 걸리는 데에 있어. 너 바다 좋아했잖아. 그치. 또 이상한 데로 향하는 주제. 승관이 한솔을 똑바로 쳐다본다. 한솔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아, 아. 왜 저런 태도에도 짜증한 번 낼 수 없었던 건지, 승관은 다시금 깨닫는다. 한솔 앞에서 승관은, 한없이 약해진다. 또다시 승관은 무너진다. 

 

 

" 그러자. 바다 가자. "

 

 

 

 

 

 

 

바다는 파랬다. 파도가 넘실대는 모양을 따라 멈춘 바다를 보고 승관은, 어울리지 않게 퍽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승관이 파도를 손으로 쓸었다. 만져지는 물결이, 처음 느끼는 굳은 물결의 촉감이 한없이 이질적이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모래가 사각거렸다. 승관은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가끔가다 보이는 꽃들로 머리를 꾸민다. 환자 복으로 이러고 있으니까, 꽃 꽂고, 좀 이상하다. 그치? 뒤에서 승관을 바라보던 한솔과도 시덥잖은 얘기를 나눈다. 승관이 모래사장에서 소라를 주워 귀에 가져다 댔다. 시간이 멈췄는데도 바닷 소리가 날까. 정답은, 나지 않는다. …안나네. 승관이 희미하게 웃는다. 아니, 운다. 승관은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한솔이 승관에게 다가온다.

 

 

한솔아,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아. 지금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세 시간? 네 시간? 아님 1분? 아니면, 벌써 내일일까? 파도가 안 움직여 솔아. 꽃이, 꽃에서 향기가 안나. 우린 지금 살아 있는 거야? 난 지금 숨 쉬고 있는 거야? 내 존재를 증명해줄, 내가 있었던 이 시간을 증명해줄, 누군가는 어디에 있는데? 이러다 영영 시간이 흐르지 않고, 내가 죽은 뒤, 멀리, 멀리, 아주 멀리. 내 시체가 썩어 문드러질 때 쯤 시간이 흐르면, 내 존재는 없어지는 거잖아. 

 

 

 

" 내가 있잖아. "

 

" 너도 결국 똑같아. 나랑 같이 이, 이, 순간의 영원 속에 갇힌 거잖아. "

 

" …순간의 영원, 이름 좋네. "

 

" ……. "

 

 

 

승관아, 돌아가고 싶어? 한솔이 묻는다. 승관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승관의 눈이 커진다. 저 말을 하는 이유, 나에게 알려줄 수 없다던 이유. 이제야 알 것 같다. 아, 아. 그런 거였어. 승관의 손이, 한솔에게로, 한솔의 정장 재킷으로, 승관의 손이, 한솔의 넥타이를 움켜 잡는다.

 

 

 

" 네가, 네가 그런 거였어? 어떻게? "

 

" 알았네, 결국. 축하해 승관아."

 

" 어떻게 그래? 네가? 나한테? "

 

" 승관, 진정하고 들어봐. "

 

 

 

한솔이 승관 옆 모래사장에 앉았다. 그리고 승관의 손을 꼭 부여잡는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도대체 뭘 말하려고. 승관이 한솔의 손을 더 세게 잡는다. 떨림이 잦아들기를 바라면서. 힐끗 본 한솔의 표정이 꽤 어두웠다. 어떤 것에나 담담하던 한솔이 아니다. 한솔은 어렵게 입을 뗀다. 그러니까, 지금 시간은, 내가 이런 것 맞아. 어떻게 했냐, 고 물으면, 열심히 기도 했더니 이렇게 됐다고 하면, 믿어줄 거야? 한솔이 승관을 바라본다. 승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뭐, 아무튼 그래. 아, 그거 알아? 우리 계속 사귀고 있었어. 사실 너, 시한부였는데, 네가 시한부인 거 알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 매일매일 병원에 찾아갔어. 그리고 매일매일 너 봤어. 그러니까 받아주더라. 네 병은, 뇌에 퍼져서, 기억 상실이랑 동반되는 거랬어. 의사가. 그래서 지금은 20대 때 일은 거의 기억 못하실 거라고 그랬어. 하루 걸러 하루를 잊어 먹는 샘 이래.  

 

아, 찬희는, 너 입원하고, 한 3년 후에 죽었어. 넌 거의 시체처럼 누워서만 지냈으니까. 당연히 몰랐을 수밖에. 진성우랑 나랑 김선재랑, 너한텐 말하지 말자고 했어. 스트레스 받을까 봐. 

 

…승관아, 나는 진짜 시간이 멈추길 바랬어. 네가 곧 죽으니까. 너까지 멈춰서, 나만 흘러서, 내 남은 삶은 너랑 함께하길 바랬어. 빌고 빌고 빌었더니 어떻게든 되더라. 근데 네가 움직여서, 좀 놀랐어. 넌 멈춰야 하는데. 

 

 

 

승관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울었다. 모든 것이 납득이 갔다. 왜 병원에 있었던 게 기억이 나지 않았는가, 한솔은 어떻게 알고 자신을 찾아왔는가. 한솔이 자신을 보고 왜 그렇게 당황했는가. 사라져버린 기억이, 차츰 되돌아왔다. 네가 내 세상. 의미를 알 것 같다. 승관이 한솔을 끌어안았다.

 

 

솔아, 솔아. 한솔아. 솔아아. 최한솔. 너는 흘러야지. 내가 멈춰도 너는 흘러야지.

 

 

너 진짜 바보야? 나 없으면 네 인생이 쫑나? 내가 죽는다고 너도 같이, 그러면 어떡해. 선재랑 성우도 네가 잘 챙겨줘야지. 걔네 정이 많은 애들이잖아. 그리고 뭐, 나까지 멈춘뒤엔, 뭐 네 평생을 멈춰있는 나 바라보는데 쓰게? 이 등신아. 기왕 네 인생을 쓸 거면 좀 가치 있게 써. 죽은 네 연인 몫까지. 승관은 계속 울었다. 어깨가 축축한 걸 보니, 한솔도 울고 있을 터였다. 

 

 

" 이제 끝내자, 한솔아. "

 

" …병원으로 가자. 나랑 같이. 넌 거기 누워만 있으면 돼. 그러면 끝날 거야. "

 

 

승관이 베드에 눕는다. 눈앞에 들어온 건 온통 하얀 방, 떨어져 있는 산소호흡기, 거치대에 걸려 넘어진 각종 약물. 즉, 병원이었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2시 18분을 띄웠다. 승관이 시계 너머를 본다. 6인실, 멈춰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무서웠지만, 제 옆의 한솔이 손을 꼭 잡는다. 한솔은 계속 울고 있었다. …너만 보내서 미안해. 

 

 

" 승관, 마지막으로. "

 

" 어? "

 

" 키스해도 돼? "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린다. 아, 한솔의 눈물이 입에 흘러 들어온다. 마지막 키스는 원래 짜고 그런가. 첫키스는 되게, 달았는데. 한솔이 승관의 눈높이로 내려온다. 승관의 혀가 한솔의 혀를 감는다. 작별 인사 같은 느낌. 승관이 살짝 눈을 뜬다. 한솔의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쁘긴 예뻐가지고. 아프지만 않았어도. 그냥. 승관이 다시 눈을 감는다. 승관은 한솔의 입술에서, 목으로 내려온다. 넥타이를 풀고 쇄골에 입술을 묻는다. 정장 입으면 가려지는 위치. 제가 한솔에게 남기는, 마지막 흔적. 

 

 

기억해줘

 

 

한솔아.

 

 

승관이 한솔의 목을 끌어안는다. 이제 진짜, 돌아간다. 한솔이 승관을 바르게 눕힌다.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아, 눈물도.

 

쿵.

 

승관의 심장이 갑작스레 요동친다. 전해지는 고통에 승관이 숨을 거세게 몰아쉰다. 한솔, 승관은 움직이던입을 멈춘다. 한솔이, 누구더라. 잡고 있는 손의 주인은, 누구지. 

 

 

승관은 이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승관은 다시.

 

 

눈을.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