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겸솔] somewhere over the galaxy
dobby / 글
꽝!
굉음과 함께 사방이 뒤흔들려서 튀어오르듯 깼다. 뭐야! 뭐야! 없는 정신에 위기 상황 훈련 받았던 건 또렷하게 기억나서 베개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지진났나? 어디서 도시가스라도 터졌나? 아니면 전쟁? 쪼그리고 앉아서 천장과 벽을 살핀다. 사방에 금이 가고 한쪽 벽 정도는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충격이었는데 어째 멀쩡하다. 뭐야뭐야. 뉴스를 보고 싶은데 책상에서 나가자마자 어디가 무너질까 싶어 그러지도 못한다. 핸드폰은 저기 침대 위에. 저것만 후다닥 갖고 오면 안될까? 그 사이에 집이 무너질까? 아니겠지? 석민은 베개를 뒤집어 쓰고선 오리 걸음으로 재빠르게 방을 가로질러 핸드폰만 쏙 가져와서 다시 책상 아래로 숨었다.
번쩍 밝아지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포털 사이트를 연다. 서울… 폭발…. 검색해도 별 게 없다. 서울… 전쟁…. 은 전쟁기념관 안내만 나온다. 서울…. 더 이상 검색할 키워드가 떠오르지 않아 멍하니 있다가 깨닫는다.
…아무 일도 없잖아?
슬그머니 책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말끔하고 멀쩡한 공간. 이 쯤 되니까 꿈꾼 건가 싶다. 우선 나가보자.
혹시 몰라 언제라도 뒤집어 쓸 수 있도록 베개를 손에 쥐고 나간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손바닥만 한 주방 겸 거실을 둘러보았다. 역시 멀쩡. 좁은 베란다 바깥은 조용하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터졌는데 작은 불꽃조차 없다니. 석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맨발로 현관 타일을 딛고선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한 층에 원룸 네 개, 다섯 개 층에 스무 집이나 있는데도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바깥으로 나가보려고 슬리퍼를 신었다가 유사시엔 달려야 할 수도 있으니 운동화로 바꿔 신었다. 야구 배트 같은 거라도 하나 사놓을 걸 그랬지. 베개만 들고 벽에 등을 딱 붙이고선 우선 계단까지 소리 죽여 걷는다.
계단에 닿아서는 잠시 고민했다. 석민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옥상으로 올라가서 상황을 살핀다. 2.1층으로 내려가서 일단 도망친다. 어느쪽도 내키지 않아 결국 운에 맡기기로 한다. 하나둘셋 하고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서, 끝자리가 홀수면 1번 짝수면 2번. 하나, 둘, 셋. 흡. 하고 숨을 삼키면서 액정을 보았다. 3시 27분.
이제 조심조심 옥상으로 향한다. 몸을 잔뜩 숙이고선 계단을 올라갔다. 석민의 걸음을 따라 센서등이 반짝반짝 켜졌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주황색 불빛을 맞으며 꼭대기까지 간다. 닫혀 있지만 잠겨 있지는 않은 옥상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슬쩍 손잡이를 돌려 문을 밀어 연다. 열리는 문을 따라 훅 불어들어오는 여름밤의 더운 공기.
진짜 아무 일도 없다고? 말도 안되게 평온한 새벽이라 황당하기까지 하다. 더운 새벽 공기 사이에서 멍하니 동네를 내려다 보았다. 꿈꿨나 봐…. 여기까지 꽉 쥐고 온 베개가 민망했다. 진짜로 아무 일도 없는 거지? 혼자 이 새벽에 재난영화 찍은 거 본 사람 아무도 없어도 괜히 머쓱해서 사방을 자꾸 둘러보게 됐다. 아무 일도 없는,
“으아악!”
무심코 눈이 닿은 옥상 난간을, 손이 하나 올라와서 탁 잡는다. 희고 말끔한 손이 하나, 그리고 하나 더. 탁, 탁, 옥상 난간을 잡는 손 두 개에 석민은 이미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철봉 잡듯이 난간을 쥐고선,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몸을 끌어올리는 사람.
…사람인데, 새벽 세 시에 5층 건물 옥상 난간을 맨손으로 잡고 맨몸으로 올라와서는 바닥을 딛고 선다. 석민은 이제 놀라서 말도 안 나온다. 눈도 입도 뻥 열려서는 바라보고만 있다. 나 지금 계속 꿈꾸나? 석민은 손을 들어 제 허벅지를 때려 보았다. 찰싹, 하는 소리, 따가운 감각. 꿈 아닌데?….
아닌데 왜 저러고 있는데…? 도둑이라기엔 뭐 하나 감추질 않았다. 좀 감춰야 할 부분도 안 감췄다. 진짜로 그냥 맨몸. 멀건하게 발가벗은 몸. 저러고서 남의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와서 옥상에 섰다고? 근데 이게 꿈이 아니라고?
“아, 찾았다.”
얼떨떨한 석민을 가리키며 웃는다. 찾았다고? 나를? 검지가 가리키는 대로 석민도 검지로 제 얼굴을 가리킨다. 저요…? 네, 너요. 까르륵 웃더니 와아, 하고 석민에게 다이빙 하듯 달려들었다. 잠깐, 잠깐! 뭐 어찌할 새도 없이 부둥켜 안고 옥상에 드러눕는 꼴이 됐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데!
발가벗고 남의 옥상을 클라이밍한 미친사람이 발가벗은 채로 달려들어 끌어안고 뒹굴기 시작할 때 이석민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선택하시오. 1.신고한다. 2.신고한다. 3.신고한다. 나가 떨어진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필사적으로 손을 더듬거리는데 문득 겹쳐져 있던 사람이 석민의 배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석민을 내려다 보았다.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석민을 내려다 보는데, 어쩐지 너무 감격한 얼굴이라 핸드폰을 찾던 손을 잠시 멈추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 위쪽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석민의 한쪽 볼을 감쌌다. 앗. 저도 모르게 어깨가 확 움츠러 들었다.
“못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
나를? 왜? 너는 누구신데요? 석민은 또 머릿속에서 영화 한 편 찍는다. 이 새벽에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나서 찾았다고 하는 걸 보면 사실 나 되게 중요한 인물이었던 거 아닐까? 알고 보면 국제 기구의 보호를 받아야 하거나 국제 테러조직의 표적…이거나….
그럼 이 사람은 뭐야? 날 보호하러 온 거야, 날 죽이러 온 거야? 덜컥 겁이 나서 다시 한 번 손을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는다. 아, 이거 때문에? 콘크리트 바닥을 헤매는 석민의 손을 보더니 한뼘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주워서 준다. 핸드폰 받자마자 112부터 누른다. 신호 가는 동안 여전히 제 배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어디다 전화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 신호 두 번 가더니 너머에서 전화를 받는다. 네 저기. 석민은 입을 열었다가 잠시 말을 멈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죄송합니다. 일단 전화를 끊었다. 우선은, 그래서 내가 국제 기구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건지 국제 테러 조직의 표적인지부터 얘기를 좀 들어보자… 는 이 사람 일단 옷부터 입히고….
-
아…. 석민은 눈만 깜빡거린다. 석민의 추리닝 세트를 입고선 석민의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소리만 줄줄 늘어놨다. 어… 네… 그러니까….
“그니까 나를 찾아서 몇만 광년을 날아서 왔다는 거죠, 그니까 어….”
이건 뭐 사이즈가 국제적에서 우주적으로 넘어가 버린다. 지구와 몇 만 광년 떨어진 우주의 어느 별에서 이 사람이… 아니 이 외계인이… 하지만 너무 그냥 인간 같은데… 아무튼 그 별에서 이석민을 발견했고 이석민을 찾아서 몇 만 광년을 날아왔다는 거다. 다행히 계산한 좌표에 오차가 거의 없어서 엉뚱한 곳으로 가진 않았지만 좌표가 아무리 정확해도 대기권 통과하면서는 미세하게 어긋날수 밖에 없어서 석민의 원룸 건물 옥상 대신에 골목길 어딘가에 떨어져서 벽을 타고 올라왔다는 얘기.
“…옷은 왜 안 입고….”
“아, 입었는데 지구인 눈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아….”
착한 외계인 눈에만 보이나 봐…. 그러면 지금 옷 위에 옷 입은 거예요? 석민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저기다 벗어 놨는데. 텅 비어 있는 구석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에 아… 네…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근데 왜 저를 찾아서 그렇게 멀리에서….”
혹시 제가 알고 보니 지구에 숨겨놓은 그 별의 마지막 희망 그런 건가요…? 석민의 물음에 민망할 정도로 푸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아니, 그런 거 아닌데. 손을 내저어가며 부정하니까 머쓱해져서는 볼을 긁적였다. 네 뭐 저도 아닐 거 같았어요…. 궁색하게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 정말 너무 사랑해요.”
웃다 말고 뜬금없이 그런다. 네에… 건성으로 대답했다가 눈이랑 귀가 번쩍 트였다. 뭘 한다구요? 눈이 동그래진 석민이 되물었다. 여전히 웃으면서, 그렇지만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랑한다구요.”
-
그러니까, 지구에서 몇 만 광년 떨어진 곳에 아주아주 평화로운 별이 있다. 별에 사는 주민들 역시 모두 평화롭고 온순했다. 다른 별에서는 전쟁을 한대요. 우주전파를 타고 거의 매일 흘러들어오는 나쁜 소식을 들으며 대체 왜 싸우는 걸까요? 하고 별 전체가 고민하곤 했다. 쌓인 고민들은 연구 주제가 되었다. 주민들은 각기 다른 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주민 모두가 연구에만 매달려 있으니 은하계에서도 손꼽히는 노잼별로 통해서 여행자도 별로 없다고 했다.
그 별에서 한솔은(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는데 석민은 도저히 발음할 수가 없어서 우선 부르기 편하게 석민이 사는 빌라 이름을 붙여줬다) 지구를 연구했다. 지구는 별 크기에 비해 생명체가 많아서 혼자 연구하기는 어려웠고, 지구에 관심 있는 다른 주민 여럿과 함께 아주 오랫동안 관찰했다고 한다.
“근데 큰일이 일어난 거예요.”
설명을 쭉 하던 한솔의 얼굴이 문득 심각해졌다. 아, 그… 전염병? 석민은 최근에 난리인 이슈들 몇 개를 떠올렸다. 전염병, 이상 기후,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시대 등등.
“네, 뭐, 그것도 문제긴 한데….”
“한데?”
“다른 별에서 지구를 공격할 거예요.”
“엥?”
“다 죽어가는 행성이 하나 있어요. 다른 은하계에…. 지구 시간으로도 몇백 년 이내에 블랙홀이 되어버릴 별이 하나 있는데, 우리 별에서 그 별을 연구하던 친구가 그 별 주민에게 그 사실을 알린 거예요. 그 별은 곧 죽습니다. 여러분은 대피하셔야 합니다. 우주 전파로 방송을 했어요. 그 별은 전 우주에서 가장 말썽이 많은 별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없는 어린 생명체들이 별과 함께 사라지는 건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그 별의 주민들은 이주할 행성을 찾기 시작했어요. 주위 행성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될리가 없죠. 워낙 싸움을 걸고 다니던 별이니까…. 그래서 자기들의 은하계 너머까지 범위를 넓힌 거예요. 그러다 지구를 발견했고….”
“그 별 주민들이 지구로 이주해 온다구요?”
“네.”
“이주해 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 그 행성 주민들은 일단 싸우는 걸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아마….”
“우주전쟁 같은 거?”
“네 아마….”
“아, 내가 어벤저스인 거구나?”
“어벤저스?”
한솔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벤저스가 뭐지? 골똘한 얼굴을 보면서 석민은 박수를 쳤다. 아, 스토리텔링 대박. 솔직히 우주 어느 별에서 왔다는 얘기까지는 믿었다. 그 별이 노잼이고 자신은 지구를 연구했다는 것까지도 믿었다. 근데 우주전쟁까지 믿으라는 건 너무 갔다. 석민은 자신의 순진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날이 밝았고 한 시간 후엔 기상 알람이 울릴 거다. 잠 안 자고 들을 얘기는 아니었는데 일단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자고 할 걸 그랬지. 뒤늦게 후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내 책상다리 하고 앉아 있던 탓에 종아리가 저릿저릿했다.
평소보다 일찍 씻고 출근 준비 하는 동안 한솔은 처음 그대로 바닥에 앉은 채였다. 집 여기저기를 오가며 씻고 머리 말리고 옷 갈아 입는 석민을 눈으로 쫓아다녔다. 마지막으로 가방까지 든 석민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여유가 있다.
“나가서 밥이나 먹어요.”
밥은 먹이고 보내야지. 시골에 대문도 없는 집에 살면서 마당 안으로만 들어오면 고양이 한 마리도 그냥 보내지 않던 증조할머니를 떠올리며 권했다. 얼른. 재촉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봐도 그냥 사람인데. 밝은 갈색 머리칼, 갈색 눈동자, 코도 입술도 이도 다 그냥 사람이다. 팔도 두개 다리도 두개 손가락 발가락 다 다섯개씩. 근데 막 배가 열리면서 에일리언이 나오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새벽에 발가벗고 제 위에 앉아 있던 게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다 그냥 사람이랑 똑같은데.
역 근처에서 아침 식사 하는 집이란 죄다 해장국 집 뿐이다. 메뉴판을 내밀며 뭐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한솔을 눈을 잔뜩 찡그리고선 한참동안 메뉴판을 내려다 봤다. 저 아직 한글은 잘 못 읽어서…. 읽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석민에게 도로 내밀었다. 석민도 아침부터 밥 먹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고심하다 그나마 제일 가벼워 보이는 콩나물국밥을 시켰다.
“한글은 못 읽는데 한국말은 할 줄 아네요?”
“아 이거는, 오기 전에 패치 받았어요.”
“패치?”
“말이 안 통하면 힘드니까. 오기 전에 원하는 언어 패치 받을 수 있어요.”
과몰입 오타쿠 같은 건가…? 진지하게 하는 말에 석민은 잠시 한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콩나물국밥 두 개가 사이에 놓인다. 뿌연 김이 올라와서 시야가 가려졌다. 나 같으면 영어 받았을 거 같은데. 뚝배기 안에 달걀 하나를 깨 넣으며 얘기하니까 한솔도 따라한다. 내 친구들은 영어 많이 했어요. 그리고 스페인어, 중국어도 좀 하고.
“근데 왜 한국어를 했어요?”
“나는 너만 찾으면 되니까.”
“아.”
다른 말은 잘하는데 인칭대명사가 한정적이다. 석민을 꼬박꼬박 ‘너’라고 했다. 당신, 그쪽, 뭐 이렇게 지칭할 말은 많은데 그것만 아는 것처럼. 패치가 제대로 된 건 아닌가 봐. 하긴 한국어가 좀 복잡하긴 하지.
“근데 그래서 나를 찾으면 뭐 하는 건데요?”
“데려가야죠.”
“어딜요?”
“내 별에.”
“아.”
그렇구나.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을 좀 떠나고 싶긴 했지. 소박하게 지방 어디 정도 생각했는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다른 별이라니 괜찮네. 고개를 끄덕끄덕. 거기까진 뭐 타고 가는데요? 석민의 물음에 한솔이 기차요. 하고 대답했다.
“…은하철도 999 같은 거?”
“아, 그거는 이제 없어졌어요. 너무 구형이라 웜홀 통과도 못하고, 워프 몇 번 하면 열차 전체가 거의 박살이 나서 멀리까지는 못 다니니까.”
“아아.”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국물을 떠먹는다. 과몰입 오타쿠라는 단어를 한 번 떠올리고 나니까 모든 게 명쾌해지는 기분이다. 갑자기 나타난 SF 과몰입 오타쿠가 썰을 풀고 있다. 나름 신선한 경험이다. 요즘 이석민의 매일은 엄청 지루하고 짜증났으니까….
“사흘 있다가 지구와 가까운 정거장에 멈춰요. 그때까지 가려면 오늘부터,”
아! 한솔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화들짝 놀란 석민이 한솔을 올려다 보았다. 내 셔틀! 한솔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셔틀?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데 한솔이 아악! 하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어어? 가게 나가자마자 도로고 뭐고 직진하는 한솔 때문에 클랙션 소리가 여러 번 울린다. 어어, 잠깐만. 석민도 숟가락을 던지고 일어났다. 사장님, 계산! 카운터에 카드를 내려놓고선 바깥을 내다보자 한솔이 중앙선 근처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게 보인다. 국밥 두개… 만육천원…. 세월아네월아 계산하는 걸 기다리다 속이 터질 거 같아서 이따 찾으러 오겠다고 말하고선 일단 뛰쳐나갔다. 저기요! 야! 부르니까 석민을 돌아본다. 어디 가는데요! 소리치니까 대답한다. 내 셔틀 찾아야 해요!
“그게 어디 있는데요!”
“아마 너네 집 근처에요!”
“우리집 이쪽인데?”
석민이 등 뒤를 가리키니까 아! 하고 또 후다닥 도로를 가로질러 온다. 빠앙! 시끄러운 클랙션 소리.
골목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아니 근데 우주를 다니는 셔틀이면 최소 크기가 자동차 정도는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딱 보여야지 이렇게 안 보일 수가 있단 말야? 한솔의 뒤를 따라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시늉을 하면서도 어이없다. 한솔의 뒤를 쫓아가며 팀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콧망울을 쥐고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반차를 써야 할 것 같다 말하자 한숨을 폭 쉬면서 그러라고 했다. 하도 별것도 아닌 일이 한숨을 폭폭 쉬는 분이라 이것도 별 일이 아닌 건지 진짜 큰일인 건지 잘 모르겠다.
“아, 여기 있다!”
거의 땅바닥에 붙을 정도로 허리를 폭 숙이고선 살피던 한솔이 문득 뭘 집어 들면서 그런다. 그거라구요? 길가에 흔해 빠진 돌멩이를 주워 들고선 그런다. 이 정도면 과몰입 오타쿠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연락을 해봐야 하는 건가…?
“이렇게 손톱만한 거에 나를 어떻게 태워서 가요?”
“아, 그 제가 입고 온 옷 있잖아요. 그거 입고 셔틀 앞에 서면 탈 수 있게 작아져요. 옷이랑 셔틀이랑 연동되어 있어서 좀 멀어지면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오고.”
“…….”
입고 오긴 뭘 입고와 벗고 왔으면서! 이 과몰입 오타쿠가 이제 나까지 미친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네. 석민은 이제 웃음도 안 나온다.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셔틀도 찾으셨으니 전 이만. 돌아서려는데 아, 그러면. 하고 등 뒤에서 석민을 불러세운다.
“저는 너 올 때까지 너네 집에서 기다리면 돼요?”
“왜요?”
“어…….”
갈색 눈동자가 동그르르 한바퀴를 구른다. 그러면 같이 갈까요? 왜냐고 물었는데 다른 소리를 한다. 왜요? 석민은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집에 가셔야죠. 장단 맞춰줄 만큼 맞춰준 거 같은데 끝을 모른다.
“내 집에 가려면 너를 데려가야 돼요.”
“아, 그 셔틀 타구?”
“아뇨, 셔틀은 정거장 까지만. 정거장에서 기차 타고,”
“저기요.”
그 새벽에 하도 이상한 꼴로 나타나니까 뭐에 씌인 것 마냥 얘기 들어줬지, 지금은 벌건 대낮이고 정신도 들었는데 돌멩이 주워 들고 셔틀이 어쩌구 하니까 좀 빡친다. 팀장님 한숨도 새삼스럽게 마음에 걸리고.
“저 이제 할만큼 한 거 같은데 그만 가세요.”
“아….”
그래도 끝까지 웃으면서 말한다. 마이너스 감정은 발산하는 사람을 몇 배로 더 힘들 게 하는 법이니까. 석민의 말에 한솔은 뭐라고 선뜻 대답을 않고 아…. 하고 자기 손바닥 위에 돌멩이만 내려다 본다.
“너 혼자 두고 못 가요. 죽으면 안되니까….”
“…….”
기운이 쭉 빠진다. 알아 듣게 얘기한 거 같은데 역시 화를 냈어야 하나? 석민은 기운 없는 손을 팔랑팔랑 내저었다. 니 맘대로 하세요….
-
오전에 빠진 거 메꾸려다 보니 저녁도 못 먹고 야근하게 됐다. 텅 빈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서며 불끄고 보안 걸고 엘리베이터 타니까 그제야 허기도 피로도 몰려온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맥주 한 캔 마시고 자면 딱 좋겠다. 가면서 떡볶이 사갈까? 치킨 사갈까? 마음의 위로라곤 그것 뿐이라 집에 가는 내내 먹을 것만 떠올렸다.
“…….”
지하철역 출구 나서자마자 있는 치킨집에서 치킨 한 마리 사고 생맥주도 포장해서 빌라까지 온 석민은 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다.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솔. 가까워진 발소리가 멈추자 고개를 들었다. 어, 왔다. 석민을 올려다 보면서 그런다. 석민이 준 추리닝을 입고선.
“…왜 여기 있어요?”
“어…….”
눈동자가 동그르르 굴러서는 석민의 발치에 멈춘다. 갈 수가 없어서….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리는 말에 그만 측은지심이 발동하고 만다. 한숨을 폭 내쉬고선 복슬복슬한 머리꼭지를 내려다 보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들어가요.”
말하니까 다시 고개를 들어 석민을 바라보았다. 싫어요? 물어보니까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다. 계단 올라가면서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치킨 박스를 내려다 보았다. 혼자 한 마리 다 못 먹는데 잘 됐네.
밥 먹었냐고 물어보니까 또 어……. 하고 눈동자만 동그르르 굴린다. 계속 기다리느라…. 중얼거리는 말에 기가 찬다. 그러면 그때부터 계속 현관 앞에 있었다고? 믿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모르겠지만 안 믿는다한들 배를 까볼 수도 없는거고. 식탁 대신 쓰는 작은 상을 펼쳐 놓고 치킨이랑 맥주 다 꺼내서 펼쳐 놓았다. 손부터 씻고. 치킨 박스 열기 전에 말하고선 욕실을 가리키자 한솔이 쏙 들어간다. 이거 근데 물을 어떻게…. 들어가자마자 도움을 요청해서 하는 수없이 석민도 들어간다.
수도 밸브 열고 폼세정제도 알려주었는데 한솔이 약간 어리둥절해 해서 손 펼치게 해놓고 세정제 쭉쭉 짜줬다. 손바닥에 거품이 내리니까 눈이 동그래져서는 바라본다. 오, 와우. 한국어 패치라더니 감탄사는 미국식인지 모를 일이다.
손 씻고 마주 앉았다. 한솔 앞으로 좀 더 가깝게 치킨 박스를 밀어주고선 석민은 맥주부터 마셨다. 오는 길에 다 식어서 시원하지도 않다. 석민의 눈치가 보여서 그러는지 한솔은 치킨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집어 들지를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맘에 안 든다, 정말. 결국 석민이 닭다리 하나 집어서 한솔에게 내밀었다. 받아 들고서는 석민을 본다.
“다 먹으면 돼요?”
“내껀 남겨놔야죠.”
“아니, 이거 하나를 다….”
닭다리 하나 쥐어줬다고 뭘 저렇게까지 황송해하고 그래. 어차피 석민은 닭다리 별로 안 좋아한다. 다 먹어요. 그러니까 네에. 하더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와작. 뼈까지 동강내서 씹는다. 맥주 마시던 석민은 풉, 하고 뿜어냈다. 아니아니, 뼈는 먹으면 안되지! 닭뼈가 얼마나 날카로운데!!!! 반려견이 닭뼈 먹었을 때만큼 다급하게 달려들어 한솔의 입을 벌리고 안에 있는 걸 손가락으로 끌어냈다. 에퉤퉤. 순순히 뱉어내고선 다시 석민을 본다. 뼈는 먹는 거 아니에요? 돌 깨는 소리 하면서.
아니 뼈를 왜 깨물어먹어, 닭뼈가 얼마나 위험한데 도대체. 궁시렁거리면서 석민은 치킨에서 살을 다 발라내서 한솔 앞에 따로 그릇을 놓고 거기다 올려준다. 다음에는 순살로 사야겠다. 아니 다음이 어디있어. 자아분열적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열심히 살을 발라서 준다. 한솔은 석민이 내려놓은 걸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오, 맛있다. 주는 대로 착착 잘 받아 먹는 걸 보면서 석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너는 안 먹어요?”
“먹을 거예요.”
닭다리 하나, 가슴살 하나 발라주고선 석민은 날개를 집어 든다. 한 입 먹고 맥주 한 모금 마시니까 그래도 천국 가장자리 정도 온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상하게 밖에서는 맥주 일 리터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데 집에서 혼자 마시면 약간 알딸딸해진다. 좀 따끈따끈해진 것 같은 볼을 손등으로 누르면서 습관처럼 치킨 살을 발라 한솔의 접시 위에 올려주면서 오전에 끊긴 대화를 다시 이어간다.
“그러니까, 그 돌멩이 타고 기차 타고 별에 간다구요?”
“돌멩이?”
“아까 주운 거. 셔틀.”
“아, 셔틀. 맞아요.”
“근데 나는 왜 데려가요?”
“곧 지구를 공격하는,”
“아, 우주전쟁.”
“네, 우주전쟁. 그러면 다 죽어요. 너는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왜요?”
“내가 사랑하니까.”
한솔의 대답에 석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언제 봤다고? 석민의 물음에 한솔은 어… 하고 손가락을 꼽아본다. 얼마나 됐지. 아무튼 너 요만했을 때부터. 앉은 그대로 제 어깨쯤에 선을 그으면서 그런다. 내가 그만했을 때부터? 못해도 이십 년도 더 전 얘기다.
“그때부터 나를 봤다고? 왜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그냥 정말 어쩌다 보니까.”
한솔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떨어트렸다. 지구를 연구하면서 친구들하고 파트를 나눴는데, 내가 이쪽이었어요. 아시아. 매일매일 살피다가 너를 봤어요. 너 요만할 때. 아마 누나하고 비눗방울 놀이하는 거. 한솔이 설명해도 석민은 잘 모른다. 그런 사진을 앨범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다 봤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자꾸 생각나서. 친구들은 정말로 연구를 하는데 나는 너만 볼 때도 있었어요. 그날 그날 자신이 연구한 걸 얘기하는데 나는 할 얘기가 너밖에 없을 만큼.”
“그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봐요?”
“우주 전파를 이용해서요. 너한테만 있는 주파수가 있어요. 그걸 맞추면 내 네트워크에 등록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다 보여요.”
“아. 그렇구나.”
“안 믿기겠지만 그래요.”
“안 믿기긴 해요.”
맥주 다 마셨네. 석민은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키고선 손바닥으로 허리 뒤쪽을 짚으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다리를 쭉 펴고 발끝을 달랑거리면서 한솔을 본다. 다 봤으면 내 비밀 같은 것두 알겠네? 석민의 물음에 한솔은 음. 하고 고민한다. 다 아는데 말해도 돼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보니까 시험하고 싶지도 않다. 아니, 됐어요. 석민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리는 얼굴을 하고 있던 한솔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지구를 공격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지구를 연구하는 친구들끼리 대책 회의를 시작했어요. 지구는 너무 예쁜 별인데, 물론 예전에 비해 지금은 많이 황폐해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정복 당하기엔 아까우니까, 우리가 좀 도와주고 싶다고.”
“어떻게 도와줘요?”
“지구에서 사라지면 안되는 걸 가져오기로 했어요. 자기가 사랑하는 걸.”
“아.”
“나는 그게 너 밖에 없어서 너를 데려갈 거예요.”
“아이구….”
석민은 팔에 힘을 풀고 그냥 쭉 누워버렸다. 고오맙네, 아주 그냥… 멸망하는 지구에서 나는 살려준다니깐…. 천장 올려다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상 너머에서 석민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솔이 보인다.
“그래서 새벽에도 대뜸 사랑한다고 했구나….”
깔깔 웃으면서 뜬금없이 말하던 게 되게 오래된 기억처럼 난다. 오늘 하루가 길긴 길었지. 피로에, 취기에, 시야가 점점 흐려지며 점멸했다. 한솔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보였다가,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서 눈을 번쩍 떴다. 와씨, 이러고 그냥 잤네? 옷도 안 갈아입고 치킨 먹다 말고 쓰러져서는 그대로 잠이 들어서 그대로 깼다. 맨 바닥에서 잤다고 일어나자마자 허리가 아프다. 아이고, 머리야. 그것도 술이라고 머리가 다 아프고. 이마를 짚으면서 무심코 돌아보았더니 치우지도 않은 상 너머에 한솔이 웅크려 자고 있다. 세상 모르고 자는 얼굴을 보니까 아침부터 황당하다. 아니 이 사람을 또 재워줬다고? 재워준 것 뿐 아니라 치킨도 먹여줬다. 어이가 없다 정말….
아무튼 후다닥 상 치우면서 한솔의 발치를 발끝으로 흔들어 깨웠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멀로 잠꼬대를 하면서 겨우겨우 눈을 뜬다. 저게 그 별 언어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었다. 한솔은 여전히 찬 바닥에 누운 채로 싱크대에서 쓰레기를 정리하는 석민을 올려다 본다. 일어나요, 나 출근해야 하니까. 한솔이 깬 걸 눈치챈 석민이 말하자 비척비척 일어났다. 잠이 덜 깼는지 멍한 얼굴로 석민이 오가는 걸 본다. 한솔을 둔 채 석민은 후다닥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지각하면 절대 안 되는 날이다. 옷 갈아입고 가방을 들고 현관을 나가려다 말고 깨달았다. 아직 손바닥만한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한솔.
“…….”
이제 가라고 해야겠는데 눈이 마주치니까 말이 선뜻 나오질 않았다. 일단.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한숨을 폭 쉰다.
“일단 기다려요. 오늘은 빨리 올 거니까.”
석민의 말에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요.
-
팀장님이 퇴근하자마자 석민도 퇴근 준비를 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후다닥 회사를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데 마음이 엄청 급하다. 생각해보면 뭘 믿고 집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여태까지는 나쁜 사람 아니었다지만 갑자기 나쁜 맘 먹고 내 집 홀랑 털어가면 어떡하려구? 뭐 대단히 중요한 걸 집에 두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계단도 두개씩 밟아서 올라와 현관문을 열었다. 문 여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엔 최악의 상황만 펼쳐졌다. 난장판이 된 집안, 사라진 한솔….
“어, 왔다.”
민망하게도 한솔은 말끔한 집안에 아침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다리라고 했더니 또 꼼짝도 안 하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강아지야, 뭐야.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계속 그러고 있었어요? 석민의 물음에 네.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아무리 기다리라고 했다한들 내내 꼼짝도 안 했다고? 얼굴만 봐서는 거짓말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된다. 알았어요, 씻고 밥이나 먹어요.
씻고 나와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동네 반찬집에서 저번 주에 사다 놓은 반찬들 대충 꺼내놓고 인스턴트 국 끓이고 즉석밥도 돌리고. 습관처럼 한개씩 깠다가 한개씩 더 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작은 상에 다 펼쳐 놓고보니 어쩐지 성의가 없는 기분이라, 이 와중에 성의 찾을 이유는 없지만 아무튼 제 마음에 영 들지 않아 닭가슴살 하나 까서 시들어가는 채소들 넣어 달달 볶았다. 그거라도 가운데 놓으니까 좀 낫다.
“근데 외계인도 밥 먹어요?”
“어… 사실 안 먹어요.”
“안 먹어요?”
뚝딱뚝딱 차려줬더니 그런다. 이런 식으로 지구인들 밥 먹는 것처럼은 안 먹어요, 원래는. 한솔이 상을 가리키며 그런다. 그럼 뭐 먹는데요? 석민의 물음에 이만한 알약이 있는데… 하고 자신의 검지 마지막 마디를 감싸서 보여준다. 아아, 뭐 그렇다치고.
“근데 나는 외계인은 다 좀, 지구인이랑은 다르게 생긴 줄 알았는데 똑같네요?”
“아, 우리는 외형을 선택할 수 있어요. 태어났을 때는 우리 다 좀, 음… 젤리 같아요.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상태로 자라요. 자라면서 선택해요. 어떤 외형이 될 지.”
“그건 편하겠네. 그래서 지구인처럼 되는 걸 선택한 거예요?”
“네. 그리고 그….”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한솔의 귀가 빨개진다. 자신도 느꼈는지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마저 했다.
“너 자주 보던 영화 주인공… 따라했어요.”
“내가 자주 보던 영화 주인공?”
내가 자주 보던 영화… 두 번 생각하니까 떠올랐다. 아, 타이타닉? 누나가 좋아해서 여러번 같이 봤었다. 어쩐지 얼굴이 눈에 좀 익다 싶더라니… 가 아니라.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런 스토리는 언제부터 생각한 거예요?”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이렇게 한번씩 석민도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말하니까 좀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걸 믿으라고? 도대체 설정을 어디까지 디테일하게 짠 건가 싶어 묻자 이런 스토리? 한솔이 되물었다. 우주전쟁 이런 거 보면 스케일도 되게 크고, 뭐 이런 알약 같은 걸로 끼니 대신한다, 태어날 때는 젤리였는데 자라면서 외형을 선택한다 이런 디테일도 있고. 석민의 말에 한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어낸 얘기 아닌데.”
“그럼 이게 다 사실이라구요?”
“여태 하나도 안 믿었어요?”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믿어요?”
“…….”
석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데 한솔은 퍽 마음이 상한 듯 했다. 잠깐 있어봐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상 모서리에 올려놓는다. 그리고선 구석으로 걸어가서는,
“…뭐, 뭐해요?”
옷을 홀랑홀랑 벗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석민이 준 추리닝을 다 벗더니 허공에서 뭘 집어들어 팔다리를 끼우는 시늉을 했다. 아니, 저기요. 그리고선 돌아서는 바람에 석민은 으악. 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무슨 벌거벗은 임금님도 아니고!
“이러면 믿어요?”
맨몸으로 석민 앞에 서더니 물었다. 믿어, 믿어, 그니까 가서 옷 입어요!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른 손을 휘저으며 말하는데 대답도 기척도 없어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돌아보았다.
“…….”
뭐야, 어디갔어? 방금까지 여기 있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야, 뭐야. 석민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상 모서리에 놓인 돌멩이가 달각달각 한다. 아, 설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석민은 그 작은 돌멩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설마 정말 이게 셔틀이라고? 우주를 간다고? 이러다 갑자기 튀어오를까 싶어서 아주 가까이는 가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한 번 건드려보려는데 달각거리던 돌멩이가 멈추더니 한귀퉁이가 문처럼 열렸다. 와이씨! 그리고 그 안에서 꼬물꼬물 걸어나오는,
개미 같던 게 상 아래로 톡 떨어지더니 막 열심히 간다. 석민은 어디서 돋보기라도 찾아오고 싶은 심정이다. 아 맞다! 백배 줌인지 이백배 줌인지 광고 보고 혹해서 산 핸드폰을 얼른 꺼내서는 카메라를 켠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꼬물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에 화면을 맞추고 배율을 막 높이니까,
“……헐…….”
진짜 한솔이다. 발가벗고서 호다닥 뛰어가는 진짜 존나 아주 너무 작은 한솔.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본다. 구해달라는 것처럼 두손을 흔들며 팔짝거려서, 석민은 화면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본다. 손가락이 닿으니까 한솔이 끄트머리에 매달려 등산하듯 안쪽까지 기어올라왔다. 아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손가락 위에 한솔을 올려놓고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다. 멀어지면 원래 크기로 돌아온댔지? 석민은 손가락 위에 한솔을 올린 채 최대한 베란다 가까이까지 갔다.
“으악!”
손가락 위에서 잘 보이지도 않던 한솔이 갑자기 커다래지면서, 석민이 다급하게 받아 들었지만 그만 둘 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듯 엎어져서 아이고오…. 하고 죽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자 코앞에 한솔이 있다. 본인은 옷을 입은 거라고 하지만 발가벗은 채로 석민의 위에 엎어져서는.
“이제 믿어요?”
바짝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이제 믿냐고? 미생물 같던 게 이렇게 커졌는데 안 믿겠어?
“…믿어요.”
근데 좀 내려갈래요…? 옷도 좀 갈아입구…? 애매한 신체 부위가 애매하게 닿아서 영 민망했다. 괜히 귀가 뜨거워졌다.
-
자, 이제 처음부터 다시 얘기를 해야한다. 그동안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게 다 사실인 거니까. 석민의 추리닝을 다시 입은 한솔과 다시 마주 앉았다. 분위기가 사뭇 심각하다. 우주전쟁이 나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거죠? 몇 번이나 물어본 걸 다시 물어보았다. 근데 그러면, 한국은 몰라도 미국은 알 텐데…? 석민의 말에 한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알 거예요. 근데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겠지. 너처럼. 한솔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혼자 찔려서는 아아니 나는 뭐….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나랑 같이 갈 거예요?”
“……어… 그거는…….”
선뜻 말을 못하겠다. 저 돌멩이가 셔틀인 것도 알겠고 한솔이 주는 옷을 받아서 입으면 셔틀에 탈 수도 있다. 셔틀에 타면 우주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도 탈 수 있고 몇 만 광년 떨어진 그 별로 갈 수도 있고. 근데,
“…나만 가요?”
내 가족은? 친구는?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저 셔틀에 다같이 타자고 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 가족만이라도…. 생각했다가 저 별의 옷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버지 대쪽같은 선비 기질에 절대 안 하시겠지….
“이게 보기보다 작아요. 두 사람 밖에 못 타요. 그리고 아마 강아지나 고양이 한 마리 정도.”
“그냥 봐도 작아 보여요….”
아직 상 모서리에 놓여 있는 셔틀을 보면서 대답했다. 기차가 언제 온다구요? 석민의 물음에 한솔이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모레 와요. 우리가 정거장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내일은 출발해야해요. 한솔의 대답에 석민은 입술을 물었다. 내일 출발이라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요.”
“정리할 게 많은데….”
갑자기 사라지면 가족도, 친구들도, 회사도, 다 얼마나 황당할까. 부모님은 또 나를 얼마나 찾겠어. 친구들도 다 나를 그리워하겠지…. 그 모든 걸 다 버리고서, 이 외계인을 따라간다고?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랑한다 말하면서 자기랑 같이 가자고 하는 외계인을?
“…내가 같이 안 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석민이 묻자 한솔을 대답 대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선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뒤늦게 대답한다.
“…그럼 나도 남을 거예요.”
“…멸망한다면서요.”
“근데 너 죽으면, 나 혼자 돌아가서 그걸 어떻게 봐요.”
“…….”
“나는 매일매일 너만 보고 있는데….”
“…….”
한솔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가기 싫다면, 억지로 데려가진 않을 거예요. 석민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그맣게 말했다. 석민은 또 한숨을 폭 쉰다. 일단 오늘은 이만 자는 게 어떨까요? 어느새 시간이 많이 늦었다.
누가 와서 잘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덮는 이불을 반으로 접어 침대 아래에 깔아줬다. 둘 다 덮는 것도 없이 누워서는 어두운 천장을 말없이 올려다 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그…. 석민이 입을 열자 한솔이 바라보는 기척이 들린다.
“그… 당장 쳐들어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쵸?”
“…당장은 아니긴 해요.”
“그러면 쳐들어오기 직전에 가면 안될까…? 정리를 좀 하고…….”
회사도 그만 두고, 집에도 사정을 좀 얘기하고…. 그러면서 한솔의 별에 지원 요청 같은 걸 좀 하면 우리 가족도 다 태울 수 있는 셔틀을 보내주지 않을까? 석민의 말에 한솔은 으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시도는 해볼게요. 안된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가망이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무거워진 공기. 지구 멸망 같은 우울한 미래를 얘기하게 될 줄 누가 알았어.
“그, 셔틀 있잖아요. 그거 기차 타러 갈 때만 탈 수 있어요?”
분위기 전환도 할 겸 그냥 물어본 말에 아뇨. 하고 한솔이 재깍 대답했다.
“타볼래요?”
갑자기 신이 난 목소리로 물어서 거절도 못했다. 그…럴까요? 석민이 애매하게 말하는 사이 한솔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아까 셔틀에서 너 입을 옷도 꺼내왔어요. 아까 손에 아무것도 없었으면서 그런다.
진짜로? 진짜? 거실에 서서 열 번은 물었다. 진짠데. 진짜예요. 일단 입으면 알아요. 한솔은 허공에 두 손을 올리고 뭘 잡고 있는 듯 했으나 석민에겐 아무것도 안 보였다. 이거 진짜 지구인만 못 보는 거예요? 아니 안 보이는 건 둘째치고 잡히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허공 뿐인데 한솔은 그렇다니까요, 진짜라니까요, 여기 있어요. 하면서 손을 펄럭펄럭 털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그럼 내가 먼저 입을게요. 석민이 망설이니까 한솔이 그런다. 아니 이건 누가 먼저 입고의 문제가 아니라…. 한솔은 이미 추리닝을 홀랑홀랑 벗었다. 아오, 진짜!
자, 빨리. 너도 갈아입어요. 자기 말로는 옷을 갈아입었다지만 석민 보기에는 그냥 안 입고 있는 한솔이 재촉했다. 진짜 이래야지 셔틀 탈 수 있어요? 눈으로 봤지만 못 믿겠다. 아니 그냥 옷 갈아 입는 건데 뭐가 어때서요. 한솔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러니까 도리어 석민이 이상한 사람 같다. 그래요… 알았어요…. 마지못해 파자마를 벗기 시작한다. 속옷만 남기고선 한솔을 보니까 그것도 벗어야 할 텐데. 그런다. 이건 왜요! 혹시 끌어내릴까 싶어 밴드 부분을 손으로 잡고 몸을 움츠렸다.
“지구에서 만든 것들은 우리 기술이 안 통해요. 특히 그런… 화학물질 섞인 것들은. 너 몸만 줄어들어요.”
“…….”
괜히 말 꺼냈다가…. 석민은 좀 울고 싶었다. 이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울상을 하고선 마지못해 속옷까지 내린다. 이게 웬 미친 짓이야….
다 됐다. 손을 여기로, 발을 여기로, 해 가면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다리 사이 가리기에 급급한 석민을 어르고 달래가며 옷인지 공기인지를 입혀준 한솔이 다 됐다고 그랬다. 다 됐다구요? 석민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나체의 두 남자. 아, 이것도.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한솔이 석민의 얼굴에 뭘 씌워주는 시늉을 한다. 아, 진짜 역시 미친짓이야.
“이제 진짜 됐어요.”
한솔의 말에 네네. 하고 포기한 채로 눈을 떴다가 깜짝 놀랐다. 어? 일초 전까지 발가벗고 있었는데 둘 다 옷을 입고 있다. 약간, 누가 봐도 우주에서 나온 소재로 만든 것 같은 옷.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느낌인데 약간 홀로그램처럼 여러 색깔이 스치면서 안이 비치지는 않는….
“어어?”
석민은 얼른 제 얼굴을 짚어본다. 아무것도 만져지지는 않는데 안경이에요. 하고 한솔이 대답했다. 아니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얘길 해주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한솔의 셔틀은 저기, 거실 한가운데에 두었다. 가까이 가면 작아질 거예요. 근데 갑자기 작아지면 적응 안되니까 나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손 잡아요. 한솔이 손을 내밀어서 석민은 한솔의 손바닥과 한솔의 얼굴을 한 번씩 보았다. 빨리. 말 대신 손을 흔들어 재촉했다. 알았어요. 석민은 한솔의 손을 잡았다. 진짜 그냥 사람 같은데. 촉감도, 체온도.
거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돌멩이 같은 셔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마 다섯 걸음 쯤에 작아질 거예요. 첫 발을 내딛으면서 한솔이 그랬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세자마자 갑자기 사방이 변한다. 자신이 작아진다기 보다는 사방이 갑자기 커다래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커다래져서 분자 단위로 보일 만큼. 어리둥절한 석민을 한솔이 잡아 끌었다. 가요. 셔틀이 되게 멀리 보인다. 석민이 커다랄 때는 그냥 돌멩이 같았는데, 작아지고 보니까 나름 디테일이 있었다. 비행기 탑승구처럼 아래로 열린 계단을 향해 한솔과 함께 뛰었다. 내 거실이 이렇게 넓었다니. 어이가 없어서 뛰는 동안 저도 모르게 막 웃었다.
우주를 다니는 셔틀이라더니, 진짜 거짓말이 아닌지 내부가 엄청났다. SF 영화에서 봤던 것만큼 화면도 많고 버튼도 많다. 이거 진짜 움직여요? 익숙하게 조종석에 앉는 한솔에게 다가가 묻자 앉아봐요. 하고 옆자리를 가리킨다. 시키는 대로 앉아서 한솔이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누르자 양 어깨 위와 허리 옆에서 안전벨트가 착 나와서 몸에 착 감겼다. 와, 신기하다. 그 사이 한솔이 정면과 측면 계기판에서 버튼과 노브를 누르고 돌리자 갑자기 앞쪽이 밝아지며 거실이 보였다.
“근데 창문 열어놨어요?”
“어… 아뇨?”
“아, 그럼 밖으로는 못 나가겠네.”
핸들 아래에 기어 같이 생긴 걸 당기자 셔틀에 진동이 온다. 어? 어어? 석민은 저도 모르게 의자 양쪽 손잡이를 꽉 쥐었다. 덜컹거리더니 떠오르는 느낌이 난다. 거실 풍경도 변했다. 바닥에서 공중으로, 천장의 등이 보였다. 한솔이 핸들을 돌리자 냉장고와 찬장과 문이 보인다. 우와. 와아. 석민은 애처럼 감탄했다.
“와, 이렇게 우주까지 가면 진짜 멋있겠다.”
“진짜 멋있고, 진짜 외로워요.”
한솔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거장에서 여기까지는 가깝지만 그래도… 혼자 우주를 건너는 건 외로운 일이에요. 석민은 고개를 돌려 한솔을 바라보았다. 혼자 우주를 건널 때의 기분이 떠오르는지 정말로 외로운 얼굴을 하고선, 한솔은 핸들을 움직였다. 몇 만 광년. 석민은 짐작도 되지 않는 거리. 웜홀인지 워프인지 석민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먼 거리를 오직 이석민 때문에 왔다는 건 이제 믿겠다. 오랫동안 이석민만 보고, 이석민을 사랑하게 되어서, 멸망하는 지구에서 이석민은 구하려고.
“그 우주전쟁 일으킨다는 종족 있잖아요. 그 종족이 만약에 지금 출발한다면, 지구까지 얼마나 걸려요?”
“음… 아주 금방은 못 올 거예요. 우주에서 이동하는 방법은 웜홀을 통과하는 게 제일 빠른데 지구 근처까지 바로 오는 웜홀은 아직 없거든요. 이 은하계 가장자리까지 웜홀로 오고, 거기서 기차를 기다리는 게 보통인데 걔네들은 아마 기차를 타진 않을 거고…. 자기들 함선을 타고 오겠지만 근거리 행성들 공격용이었지 이렇게 먼 우주까지 공격할 줄은 몰랐을 거라서 워프 기술이 아주 뛰어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출발해도 아마, 지구 시간으로 40년은 걸려요.”
“아….”
어쩐지 맥이 빠진다. 40년이라니. 석민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럼 40년 안에만 출발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석민의 물음에 한솔은 음…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차 시간표 때문이에요.”
“모레 말고는 없어요?”
“있긴 하지만… 지구에 있으면 시간표를 맞추기가 힘들어요. 지구는 우주전파가 잘 닿지 않아서 혹시 변동 생겨도 알아내기도 어렵고. 지금 시간표도 내 별에서 알아온 거니까.”
“모레 다음은 언제인데요? 다음주?”
“아뇨.”
한솔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런 계산은 지구에서나 가능해요. 지구는 작으니까. 이 기차는 다른 은하계까지 갔다가 오는 거잖아요. 아무리 웜홀을 통과해도…. 한솔이 핸들을 기울이자 셔틀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 다음 기차는 4년 후에요. 그거까지만 기억 나요. 4년 후 같은 날.”
“윤달 같은 거구나.”
“윤달?”
“4년 마다 오는 거 있어요. 기억하긴 쉽겠다.”
“그것도 기차예요?”
“아니, 그거는 29일이에요.”
“29일?”
한솔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그 사이 셔틀이 바닥에 내려앉으며 진동했다. 엔진을 끈 한솔은 한동안 심각한 얼굴로 계기판을 들여다보았다. 안전벨트를 푼 석민도 한솔을 따라 계기판을 내려다 보았지만 온통 알 수 없는 글자들 뿐이었다.
“뭐 문제 있어요?”
“연료가 이제 딱 우주정거장까지 갈 만큼만 남았어요.”
“아.”
“바깥에 나가보면 좋았을 텐데. 집안에서만 타서 재미없었겠어요.”
“재밌었는데.”
진심으로. 석민의 말에 한솔이 고개를 들었다. 내내 심각하더니 눈이 마주치자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면 다행이구. 눈꼬리가 둥글게 접혔다.
셔틀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다시 커지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아까는 다섯 걸음 만에 온 거리가 이 크기로 가려니 아주 멀었다. 한솔은 저 셔틀을 혼자 타고 우주를 건너고, 셔틀에서 내려서 이렇게 오래 혼자 걸었다.
이석민 때문에. 문장을 곱씹을 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고맙고 또 미안한 기분. 너무너무 넓어진 거실을 한솔과 함께 걸으면서 혼자 계산해 보았다. 가장 빠른 기차는 모레, 그 다음 기차는 4년 후. 우주 전쟁은 최소 40년 후.
“그러면 우리 다음 기차 탈래요?”
“네?”
“4년 동안, 나도 너를 좀 알고 난 다음에 같이 가면 더 좋을 거 같은데.”
“아….”
한솔이 잠시 석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은데…. 한참만에 한솔이 대답했다. 말꼬리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괜찮은데? 석민이 묻자 한솔은 음… 하고 말을 골랐다.
“…그 사이에 너 나 싫어지면 어떡해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석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그럼 어떡하죠? 농담 같은 말에도 한솔은 울상이 됐다. 아니아니, 농담이에요. 석민이 손을 내젓자 한솔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너가 나 싫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석민의 말에 이번에는 한솔의 눈이 커다래졌다. 말도 안돼.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계속계속 사랑해요.”
“그럼 4년 지내봐요. 다음 기차까지.”
“좋아요.”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자신 있는 얼굴로. 아마 한솔은 그 별에서 출발할 때도 이런 얼굴이었겠지. 어쩐지 좀 믿음이 간다. 4년의 시간 이후, 그 미래에 한솔과 자신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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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님. 대리니임. 아쉽다고 붙잡는 직원들에게 웃는 얼굴로 거절하고선 자리를 떴다. 빨리 일어난다고 일어났는데도 시간이 많이 됐다. 늦으면 어떡하지?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지하철 안에서도 발을 동동 구르고, 내리자마자 뛰었다. 술이 좀 들어간 상태에서 뛰니까 눈앞이 막 어질어질했지만 계속 뛰었다. 마음이 급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른다. 한솔아! 큰소리로 부른 게 무색하게 한솔은 거실에 있다. 홀딱 벗은 채로. 어, 왔다. 석민이 언제 들어와도 한솔은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그랬다. 어, 왔다. 하고.
“벌써 옷 다 입었어?”
“아니, 아직 안 입은 건데?”
“아, 뭐야, 속았네.”
“씻고 와.”
한솔이 웃으며 말했다. 석민은 차곡차곡 옷을 벗어 욕실 앞에 개켜두고 들어간다. 샤워기 아래에 서니까 마음이 막 두근두근했다. 까마득하진 않아도 먼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4년은 생각보다 금방 갔다. 4년 동안 엄청 많은 일이 있었는데 다 설명하기도 길다. 큰 것만 얘기하자면,
누나에게 한솔을 소개했다. 작년 이맘 때에. 그 전에 이미 넌지시 얘기는 흘렸었다. 누나, 내가 사실은 결혼을 못 할 거 같애. 하고. 누나는 대뜸 왜, 너 남자 좋아하니? 하고 물었다. 어어… 으응…. 어설프게 대답한 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외형은 남자인 외계인이어서였다. 그리고 곧 한솔을 소개해줬더니 누나는 석민에게 능력도 좋다고 칭찬했다. 어디서 저렇게 잘생긴 친구를 만났어? 하면서.
누나까지는 얘기했지만 부모님이 문제였다. 기차가 지구 근처에 멈추는 날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회사를 정리하거나 친구들에게 이민 간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까진 수월했지만 집에는 도저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대뜸 혼자 이민 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우주로 간다고 솔직히 말하는 건 더 이상하고.
누나에게 상담할 때는 한솔의 고향으로 간다는 정도만 얘기했다. 왜, 그냥 한국 살면 안된대? 누나도 되게 당황한 눈치였다. 어… 그게 좀 그런가봐…. 우선 내가 그 별에 가야지만 내가 사랑하는 걸 구한다는 이유로 좀 더 큰 우주선을 빌릴 수가 있나 봐. 곧이 곧대로 말할 수 없으니 얼버무리기만 했다. 석민아, 이건 진짜 큰일이야. 한솔이랑 좀 더 상의해봐. 한솔을 예뻐했던 누나이지만 이때만큼은 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다고 해도 방법은 정말 이것 뿐인 걸. 한솔의 별에선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석민이 그 별에 가서 한솔과 함께 정착한 후 석민이 사랑하는 가족을 데려오겠다고 하면 우주선을 내어줄 거라는 게 한솔의 설명이었다. 다음 기차 스케줄을 생각하면 석민이 최대한 빨리 그 별에 가야 맞았다. 그러니까, 이번 기차는 절대 놓치면 안되는 거다.
누나와 상의하에, 절충을 하기로 했다. 유학 정도로. 학창 시절 내내 공부에 별 뜻 없던 애가 갑자기 유학을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은 엄청 황당해하셨다. 너 뭐 사기 당한 거 아니니…? 한 번 가면 몇 년 있다가 온다면서, 말만 들으면 그 긴 유학 준비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걱정도 엄청 하셨다. 그런 거 아니에요. 연락 자주할게요. 연락 할 방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약속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기차가 지구와 가까운 정거장에 서는 날이다. 석민과 한솔의 셔틀은 오늘 밤 출발해야 했다. 한솔은 4년 간 틈틈이 셔틀을 정비했다. 정말로 지구를 떠나야 하는 날 문제가 없도록. 다 씻고 나온 석민에게 한솔이 두 손바닥을 펼쳐서 내밀었다. 나 안경부터 쓰고. 비어 있는 손바닥 위를 더듬거리니까 여기 있어요. 하고 한솔이 씌워줬다. 얘가 아직도 옷을 안 입고 있네. 안경을 썼는데도 발가벗은 채인 한솔을 보고 석민이 이마를 찡그렸다.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 한솔은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지만 괜히 한 번 얘기해본다. 입을게, 입을게. 석민에게 옷을 건네주고 한솔도 차근히 입기 시작했다.
베란다 창을 열자 맑은 밤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별로 없어서 달도 깨끗하게 보이는 밤. 비행하기 되게 좋겠다. 석민의 말에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갈까?”
한참 하늘만 보다 석민이 물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둔 셔틀을 향해 같이 돌아섰다. 손 잡을까? 석민이 먼저 물었다. 펼친 손바닥 위에 한솔의 손이 겹쳐졌다. 손가락 사이사이 빈틈없이 깍지를 껴서 쥐고, 셔틀을 내려다 본다. 다섯 걸음이면 간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이제 지구를 떠나고, 우주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한솔의 별로 간다. 한솔은 혼자 왔던 그 먼 길을, 이번에는 둘이서 같이. 석민은 한솔의 손을 쥔 손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