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버홋] 생
열 / 글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도로 한복판에 누운 순영은 하늘을 등진 채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한솔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깊고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주변의 소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그 적막이 좋았다. 마치 세상에 둘뿐인 것 같은 그 고요함이, 그 적막이, 너무나 좋았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한솔아.”
순영이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띠며 갈라진 목소리로 한솔을 부르자 느릿하게 깜빡이던 한솔의 눈꺼풀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커다란 눈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져 내렸다. 비가 오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은 순영이 눈동자를 굴려 한솔이 등진 하늘을 힐끔 올려다봤다. 어둡지만… 쾌청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뜬 순영이 다시 한솔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평안하던 얼굴에 어느새 깊은 주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에 순영이 한솔아… 너 울어? 하고 묻자 한솔의 미간이 조금 더, 훨씬 더, 깊게 파였다. 그리곤 이내 고통을 참는 듯한 목소리가 권순영 미쳤어? 하는 말과 함께 원망스럽게 터져 나왔다. 한솔의 원망 가득한 목소리에도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인 순영은 이젠 무겁게까지 느껴지는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려 축축하게 젖은 한솔의 뺨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한솔아, 한솔아. 한솔아…. 끊임없는 부름에 질끈 깨문 입술 사이로 응, 하고 대답한 한솔이 순영에게로 상체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가자 뭐가 좋은지 실없는 웃음을 흘린 순영이 한솔의 귀에 퍼석한 입술을 가져다 대고 한솔아…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알지? 하고 속삭였다. 그 말에 한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너무 많이 깨물어 이젠 너덜거리기까지 하는 입술을 다시 한번 질끈 깨물었다. 그런 한솔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 순영은 이내 잔뜩 구겨졌던 얼굴을 편안하게 피더니 나, 졸리다… 이제 좀 자야겠어… 한솔아, 안녕…. 하는 인사를 남기곤 힘겹게 뜨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그 일련의 행동에 조급해진 한솔이 순영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일어나… 눈 좀 떠… 봐.
하지만 야속하게도 감긴 순영의 눈꺼풀은 들어 올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저를 비추지도 않았다. 속이 미어터질 것 같은 저와는 달리 편안해 보이기까지 하는 순영의 얼굴에 한솔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리고 순영의 얼굴 위로 마치 수도꼭지를 덜 잠근 것처럼 간간이 떨어지던 물방울이… 한솔의 눈물이 이젠 수도꼭지를 전부 연 것처럼 쉼 없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형, 순영아, 권순영…. 순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는 절규를 하던 한솔의 뒤로 일사불란 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솔은 순영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일정 간격으로 뛰던 심장 박동이 멎었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순영의 몸을 더 끌어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저지되었다. 어느새 둘을 감쌌던 적막이 사라지고 시끄러운 소음이 고막을 찔러댔다. 한솔은 그 소음 사이로 보호자 분이신가요?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하는 질문을 얼핏 들은 것 같았지만 이내 전부 흘려버렸다. 그저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순영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러다 툭, 밖으로 빠져나온 순영의 팔을 본 한솔은 이미 멎은 지 오래인 심장이 다시 한번 멎는 기분에 심장 부근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저 손이, 순영이, 자신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 같아서. 한솔은 그게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 마… 가지 마…. 내게서… 권순영을 데려가지 마….
‘……한솔아, 안녕….’
항상 저를 볼 때면 으레 해오던 순영의 인사가 문득 생각났다. 안녕. 한솔은 그 인사가 싫었다. 안녕. 반가움의 인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별의 인사이기도 한 그 말이 예나 지금이나 정말… 너무나 싫었다. 그리고 그 말이 떠오른 지금, 이 순간 역시.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한솔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순영을 실은 응급차를 향해 뛰었다. 비록 순영이 원치 않았더라도, 순영에게서 원망의 말을 들을지라도,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에… 내가 널 보낼 수가 없어서… 아직은 널 보낼 때가, 시간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너를 향해 간다.
生
w. 열
한솔은 허공에 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밑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다 저마다 제각각의 모습이었지만 하나같이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에 혀를 내둘렀다. 인간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한솔은 이젠 호기심을 넘어 경외심이 들었다. 기껏 해봐야 구십 남짓한 인생을 살면서도 인간들은 저렇게 바삐 움직인다. 영생을 사는 한솔의 입장에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수명이 짧기 때문에 더 바쁘게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한다. 다만 한솔에게 네 수명도 저들처럼 짧았다면 똑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고 묻는다면 글쎄…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럼에도 한솔은 그들이 부러웠다. 구십 남짓한 인생을 살다가 가는 그들의 수명이. 너무나도.
한솔은 인간들이 흔히들 말하는 흡혈귀, 뱀파이어, 드라큘라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만. 속되게 말하자면 반푼이 뱀파이어. 어머니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한솔을 어릴 때부터 줄곧 반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누가 들어도 비아냥대고 깔보는 단어였다는 걸 어린 한솔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았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없고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건 오로지 한솔만의 생각이었는지 한솔을 향한 손가락질과 조롱은 그대로 제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한솔은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도망쳤다. 순수혈통이니 뭐니 하는 말들로 자신들을 깔아뭉개고 짓밟는 이들을 피해서. 그곳에 더 있기엔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원망하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신은(뱀파이어가 신을 찾는 것도 우습지만) 야속하게도 제게 하나뿐인 어머니를 앗아갔다. 뱀파이어의 피가 흘러 영생을 사는 한솔과 다르게 어머니는 인간이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어서 늙어갔으며 종내엔 병에 걸리셨다.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솔을 걱정했고 또 끊임없이 교육했다. 혼자 인간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해. 어떻게 그들 속에 섞이고 융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사실 한솔은 처음 얼마 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관에 들어가 잠을 청하던 자신들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실은 현실을 부정한 거였다는 걸 수백 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더는 제 곁에 안 계신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워서 감정을 죽였다. 하지만 그렇게 죽였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한솔은 영생을 살았고 그 영생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헤어졌으며 사랑하고 또 죽음을 맞닥뜨렸다. 사람도 시대도 변해갔지만 한솔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아마 그쯤부터였던 것 같다. 인간들이 부러워진 게. 자연의 섭리대로 살다 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가끔은 그 섭리를 어기고 자신의 생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게. 그에 비해 한솔 자신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반푼이라는, 반만 뱀파이어인 한솔은 여러모로 순혈의 뱀파이어와는 그 능력치가 매우 차이가 났다. 단적인 예로 순혈은 자신의 외형을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었지만 한솔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 순간 성장이 멈췄고 그 멈춘 시점의 모습으로 몇백 년째 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들과 인연을 맺는 게 한솔에겐 힘들었다. 그들의 나이에 맞춰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순혈과 달리 한솔은 몇 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니까….
나이를 먹지 않는 자신을 괴물 보듯 보던 이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말하자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보던 이의 얼굴 역시 생생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한솔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알려서 좋을 게 없다고.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들 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때부터 한솔은 얕은 인간관계만 가져왔다. 전부 끊고 홀로 살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지만 그러기엔 영생을 사는 자신이 너무 외롭고 또 인간들의 도움 없인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 역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솔은 처음 만난 날을 기점으로 그들의 나이와 성장에 맞춰 서서히 멀어지고 또 새로운 이를 만나고 다시 멀어지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 속에서 한솔은 크고 작은 사랑도 맛봤고 이별도 맛봤다. 죽었던 감정이 되살아나 크게 요동쳤던 적도 있고 반대로 차갑게 죽은 적도 있었다. 수백 년의 시간 동안 한솔은 많은 이를 만나고 헤어지며 많은 기억을 경험을 감정을 배우고 느끼고 깨달았다. 개중에는 후회되는 일도 있었고 뿌듯한 일도 있었다. 인간들과 별다른 거 없는 자신을 보며 한솔은 내심 그들과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심 기뻤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 주었던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솔은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걸, 그들과 자신은 달라도 한참은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얄궂게도 새로운 인연과 사랑은 계속해서 한솔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다시 한솔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사라져갔다.
그들과… 나도 그들과 함께 살다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한솔의 고민과 생각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멍하니 발밑을 바라보며 여기서…. 라는 생각으로 몸을 살짝 앞으로 움직였을 때쯤 돌연 등 뒤에서 어어!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하마터면 진짜 뛰어내릴 뻔한 상황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를 돌아보자 낯선 얼굴이 한솔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한솔은 누구냐는 의미로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남자를 쳐다봤지만 남자는 그런 한솔의 표정엔 관심 없다는 듯 제 할 말만 하기 바빴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죽을 거면 그 목숨 나한테 주던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짚으며 한솔을 향해 턱을 치켜들더니 아, 뭐해요. 빨리 안 나오고. 하며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한솔을 타박했다. 한솔은 어쩐지 그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남자의 말을 따라 위험한 난간에서 벗어나 안전한 옥상 바닥에 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저보다 조금 작은 체구의 남자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는데 환자인지 남자는 위아래로 펑퍼짐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한솔은 자신이 병문안 때문에 병원에 온 사실이 생각났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약속했던 시간에서 벌써 2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이거… 한 소리 듣겠는데. 지금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떼는 순간 돌연 팔을 붙잡는 손아귀에 한솔이 행동을 멈추고 붙잡힌 팔로 시선을 옮기자 예의 우렁찬 목소리의 남자가 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곤 남자가
“어디 가요. 저한테 목숨 주고 가셔야죠.”
라고 하는데 그 말만으로도 너무 어이가 없는데 그 말을 내뱉은 얼굴은 더 어이없도록 태연자약해서 한솔은 그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저기요.”
“저기 아니고 권순영이요.”
“네?”
“제 이름 저기 아니고 권순영이라고요.”
“아, 네네. 권순영 씨. 목숨을 달라니 그게 무슨….”
“그쪽…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최한솔이요.”
“한솔 씨가 버리려던 목숨 제가 살렸으니까 그 목숨 저 달라고요. 전 없어서 못 사는 거니까. 버리려던 사람이랑 그게 갖고… 필요한 사람이 여기 다 있으니까 서로 주고받으면 좋은 거 아닌가?”
순전히 마이페이스에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는 남자의 말에 한솔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여전히 제 할 말만 하기 바빴다. 애당초 뱀파이어도 못 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주고받겠다는 건지.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한 한솔이 길게 한숨을 내쉬곤 죄송한데 제가 말장난할 시간이 없어서 이만. 하고 남자, 순영의 말을 끊자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인 순영이 알겠어요. 제가 인심 좋게 봐 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그것도 너무 어이없고 웃긴 말인데 심각하게 늦어버린 약속 시각에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들을 핀잔과 타박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초조해진 한솔이 왠지 모르게 아, 네네. 그럼 저 이만 가도 되죠? 하고 순영에게 허락을 구했고 그런 한솔의 말에 순영은 그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 본 순영에게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한솔은 이 상황이 어이없고 웃겼지만 당장엔 눈앞에 놓인 늦은 약속 시각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모두 접어둔 채 그대로 순영을 지나쳐 병원 옥상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게 한솔과 순영의 첫 만남이었다.
언젠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순혈과 다르게 인간처럼 나이를 먹던 자신이 어느 순간 돌연 성장이 멈췄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성장을 멈춘 것은 아닐까, 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저 또한 잊지 않기 위해 성장이 멈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며 한솔은 몇백 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러하던 한솔의 생각은 순영을 만남으로 인해 서서히 변했다. 실은 이 모든 게 널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라고. 너와 사랑하기 위해, 혹은 사랑하라고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닐까, 하고.
한솔은 병원에 갈 때마다 순영을 마주치곤 했다. 안면을 텄다고 생각한 걸까 순영은 한솔을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지금껏 이렇게 사교적인 사람을 만나 본 적 없던 한솔은 당황하면서도 순영의 인사에 응했다. 그래서일까 한솔은 병원에 올 때마다 순영을 만나는 게 일상이 되었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가끔 못 만나고 가면 아쉬울 기분이 들 만큼….
한솔은 100살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나이 세기를 그만뒀다. 심장이 뛰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몸으로 언제 올지 모를 끝을 세며 살아가기란 너무 힘들었기에. 또 센다 한들 내 나이가 몇이오. 하며 있는 그대로를 말해줄 상대 또한 없었기에. 그래서 순영에게서 나이가 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솔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솔이 속으로 어, 그게… 몇이더라…. 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순영은 자신의 질문에 한솔이 난처해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물어봐 놓고 또 먼저 말하기 싫으면 됐어요. 꼭 중요한 건 아니니까. 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내내 난처해하던 한솔의 얼굴에 옅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아주 옅었는데도 순영은 한솔의 미소가 어딘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괜히 머쓱해져서 허공으로 눈을 돌리며 아니, 아무리 봐도 저보다 어린 거 같아서요… 저 26살인데, 맞죠? 한솔 씨 저보다 어리죠? 왠지 모르게 확신 가득한 순영의 말에 한솔을 티 안 나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스물여섯. 나이를 먹어도 내가 몇십 배는 더 먹었을 텐데. 하지만 확신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는 순영에게 이상하게도 실망을 안겨주기가 싫어 한솔은 네 뭐…. 하고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테니, 하는 생각에.
문제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영이 우렁찬 목소리로 그럴 줄 알았다며 그럼 우리 오늘부터 말 놔요. 순영이 형, 해봐요. 하며 눈을 반짝였다는 거지만. 한솔이 당황스러워하며 볼만 긁적이고 있자 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영의 혹시 형이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 라는 말에 한솔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 이내 다시 한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형이라는 호칭을 입 밖으로 내뱉어본 적이 없다. 한 번 마음을 굳게 닫은 뒤론 그런 친근한 호칭을 사용할 만큼 누군가를 가까이 둔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난 지 몇 번 안 되고 기간도 얼마 안 되는 순영은 한솔이 자신에게 그런 호칭을 사용해주길 원했고 어쩐지 마냥 싫지만은 않은 기분에 이번에도 역시 한솔은 알겠노라며 순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순영이 형. 한없이 어색했지만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한솔의 마음속에 순영이 자리를 잡은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순영은 한솔 자신에게 있어 너무나 큰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영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닫은 마음을 다시 연 자신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이 든 것은.
그렇게 순영은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한솔의 마음에 가슴에 스며들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순영과 처음 만난 게 불과 며칠 전의 일 같은데 어느새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으니까. 순영에겐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한솔에겐 눈 깜빡할 사이처럼 짧게만 느껴졌다. 순영과 자신이 살아가는 생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일까. 어쩐지 아쉬웠다.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없는 게, 공유할 수 없는 게, 그리고 곧 헤어질 때가 왔다는 게.
처음 병원을 드나든 목적은 순영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어느새 순영이 목적이 되었다. 한솔은 순영을 만나기 위해 병원에 왔고 순영에게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하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사실에 한솔도 순영도 어떠한 말도 의미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함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활기차던 평소와 달리 순영이 힘없이 침대에 축 늘어져 힘겹게 숨을 쌕쌕 뱉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솔은 자신이 순영이 어떠한 이유로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물어도 될까, 물어본다면 알려줄까, 말하기 싫은 건 아닐까. 하는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한솔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잠든 순영의 옆에 앉아 그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말들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잠든 순영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렇게 얼마나 순영의 옆에 앉아있었을까, 문득 옷소매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자신의 옷 소매를 꼭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언제 눈을 떴는지 힘없는 미소를 짓는 순영이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한솔아 언제 왔어? 왔으면 나 깨우지…. 하는 그 목소리가 마치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문득 마지막까지 제 곁을 지키다 숨을 거뒀던 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가 풍기던 기운이 지금 순영이 풍기는 기운과 너무 흡사했다. 그러자 한솔은 눈앞이 아득해지며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순영이, 죽는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 시기가 저마다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주어진 자연의 섭리이자 이치였다. 생이 있으면 사가 있고 사가 있으면 생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답이 정해진 이 감정을, 이 고통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인간들과 거리를 뒀던 건데… 언제 어떻게 아니 어느새 순영이 이렇게 제 마음속 깊숙이 들어온 건지…. 처음 만났던 날의 반짝이던 순영의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반짝이다 못해 빛나던 그 눈동자를, 그 얼굴을, 권순영을….
죽음이 눈앞에 드리워져서일까, 반짝이던 빛은 어느새 그 힘을 잃고 탁하게 바래있었다. 그런데도 더는 반짝이며 빛나지 않는데도 한솔은 순영이… 좋았다. 아, 그렇구나. 좋구나. 권순영이, 좋구나. 권순영을 사랑하는구나.
한솔은 대게 5년 주기로 직업을 바꾸고 사는 지역을 옮겼다. 5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인간의 외형이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말은 즉 나이를 먹는 인간과 달리 영생을 사는 한솔에겐 자신을 아는 이들에게서 떠날 시기라는 말이기도 했다. 순영과 보내는 시간이 한없이 소중하고 중요하고 좋았지만, 한솔이 떠나야 할 시간은 야속하게도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순영을 보기 위해 병원을 찾았던 거였다. 생기를 잃은 순영을 보기 전까진, 빛바랜 눈동자를 마주하기 전까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떠날 이라면…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주겠노라고. 그러므로 인해 제게 돌아올 모든 감정과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하겠지만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그럴 수 있다고.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그로부터 며칠 후 다시 순영을 찾은 한솔은 눈에 띄게 야윈 순영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죽음의 문턱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걸 순영도 눈치챈 걸까…. 말없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한솔을 불렀다. 한솔이 그런 순영의 옆에 살며시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그리곤 멍하니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얘기를 하나, 둘씩 혼잣말처럼 풀어냈다.
‘나 불치병이래. 병명도 없어. 신기하지? 병명도 없는 병이라니….’
‘신도 참 너무해. 갑자기 나한테서 부모님을 데려가 놓고 이젠 나까지 데려가려고 하다니. 욕심도 많아. 그치?’
‘난 널 알게 돼서 너무 기쁜데, 넌… 싫겠다. 그러니까 한솔아,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려. 어차피 난 너한테 스쳐 가는 인연 중 하나일 뿐이니까.’
‘너는 엄청 오래오래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
아아…. 아는구나.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니, 사실은 언제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면서도 옆에 있어 준 사실이 못내 기쁠 뿐. 하지만 그 기쁨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한솔의 입가에서만 맴돌다 이내 사라졌다. ‘부모님이 내가 빨리 보고 싶은가 봐.’ 하는 말을 들어버려서. 순영이 원치 않을 거 같아서.
“한솔아… 나 바다 보고 싶어….”
순영이 그렇게 말한 건 한솔이 순영의 상태를 안지 한 달쯤 되던 날이었다. 뜬금없이 웬 바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저 순영이 편히 갈 수 있게 도와줄 뿐.
병원의 허락을 구한 뒤 한솔은 순영을 데리고 한적한 바다로 드라이브를 하러 갔다. 가는 동안 순영은 조수석에 앉아 아픈 사람이 아닌 것처럼 쉼 없이 조잘조잘 떠들어댔는데 대게 한솔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뤘다.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게 잘생겼나? 어쩐지 너무 잘생겼더라. 운전은 또 어떻게 이렇게 잘하지? 면허증이 있긴 해? 사람들이랑 똑같이 땄어? 막 드라마에서처럼 위조로 만들었다거나… 아, 아니야? 오…. 근데 정확히 넌 정체가 뭐야? 신? 천사? 뭐 이런 건가? 아, 뱀파이어~ 어, 그럼 그… 밥… 피, 피는? 너도 피 마셔? 아 반은 인간이라 안 마셔~? 오호. 아! 맞다! 그러면 한솔이 너… 실은 나보다 나이가 엄청 많거나 그래? 막 몇백… 아… 100살 이후론 안 셌어…? 와… 나보다 훨씬 형…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 아, 미안, 미안해!’
모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순영의 모습에 한솔도 덩달아 기분이 풀어졌다. 그래서였을까. 도롯가에서 차를 세운 게. 그래서였을까. 차를 박차고 뛰어나가는 순영을 말리지 못한 게. 그래서였을까. 순영이 차에 치이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마치 슬로우모션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게 느리게 재생되는 것 같았다. 순영의 차 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순간부터 몸이 허공에 붕 뜬 채 날아가는 순간까지 한솔은 그저 멍하니 순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운전대를 잡은 채 굳은 한솔을 제외하곤 모두가 다시 원래의 속도를 찾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람이 몰리더니 한솔의 시야를 가로막고 순영을 에워쌌다. 꽉 막힌 시야에 그제야 한솔이 차에서 내려 인파를 헤치고 순영에게로 향했다. 아니야, 아니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인파 사이를 뚫고 나온 한솔의 눈에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순영이 들어왔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야… 단지, 편하게… 편하게 보내주려고….
한솔이 덜덜 떨리는 몸으로 다가가자 순영이 내내 감고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한솔을 마주 봐왔다. 그리곤 한솔아…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진심을 호소하는데도 한솔 역시 알고 있는데도 말문이 막혀 알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볼을 타고 후드득 쏟아지는 눈물에 한솔을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눈물… 얼마 만이지. 일부러 더 쓸데없는 생각만 거듭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언젠가 생길 일이었다는 걸, 그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도롯가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면, 차를 박차고 나가는 순영을 말렸더라면 그랬다면 적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별이 찾아오진 않았을 텐데. 다 제 잘못이다. 순영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긴장을 늦추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하지만 한솔에겐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힘이 없었다. 그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에게 순영을 데려가지 말라고 빌고 또 빌 뿐.
하지만 그런 한솔의 바람은 처참히 짓밟혔다. 천천히 눈을 감는 순영의 얼굴 위로 후드득 눈물만 떨궜다. 그런 한솔의 뒤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순영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안녕. …안녕이라고 하지 마…. 구급차 안으로 순영의 몸이 실리는 걸 본 순간 한솔은 지난날 불현듯 지워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순영이 원치 않을… 오히려 원망을 들을지도 모를… 한없이 이기적인 방법. 순영이 아닌 자신을 위한 방법….
구급차에 뛰어오른 한솔은 저를 막는 이들의 손을 뿌리치며 순영을 덮은 흰 천을 걷어냈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체를 숙여 순영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이렇게라도 네가 살기를 바란다. 죽지 못해 살아갈지라도, 눈을 뜬 네가 나를 원망하고 분노할지라도 그래도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나와 함께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게 비록 네가 원치 않던 일이었을지라도. 모든 게 다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일지라도….
그러니 순영아 이제 그만 눈을 떠…. 어서 눈을 떠서 나를 봐줘…. 모든 건 내가 다 끌어안고 살 테니… 그러니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