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버찌] time is the longest distance
킷 / 글
“나 형 좋아해.”
“한솔아, 나는…”
9월 8일, 최한솔이 고백을 해버렸다. 그리고 이지훈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거절을 예측했다. 깜빡. 한솔은 정신을 잃었다.
“야, 우리 지각이야!”
눈을 뜨자 부승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설마 고백하고 쓰러진 거야? 그리고 다음날까지 잔 거야? 쪽팔려. 한솔은 이제 이지훈을 어떻게 대해야 될까 고민에 빠졌다.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그 앞에서 기절하다니. 꼴 보기 좋다. 다행히도 부승관은 이 사실을 모르는 거 같았다. 알았다면 지금쯤 한솔을 놀리고 있었겠지. 아, 입학식 재밌었으면 좋겠다. 승관이 하품을 쩍쩍하며 중얼거렸다.
“입학식? 뭔 소리 하는 거야, 벌써 9월인데. 미쳤냐?”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승관을 쳐다보자, 승관은 오히려 그 눈빛을 그대로 반사해서 한솔에게 되돌려줬다.
“미친 건 너 아니야? 지금 막 3월 됐잖아.”
어? 아닌데. 분명히 지훈이 형한테 고백한 그 다음날인데. 어제 옥상에서 고백한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어떻게 3월일 수가 있어. 혼잣말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화면에 정확하게 적힌 3월 2일 월요일. 놀랍게도 승관의 말이 맞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꿈인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건가? 왜? 거절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질문들이 튀어나왔다.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 수 없는 외계어를 남발하는 한솔을 보며 승관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입학식은 승관의 바램과 달리 지루했다. 입학식이 다 그렇지 뭐. 특별해봤자 얼마나 특별하겠어. 아까의 신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승관은 해탈한 듯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 학교 재미없어. 전학 갈래. 한솔이 이미 한 번 경험했던 3월 2일에도 승관은 똑같은 말을 했다. 일단 이걸로 하나는 확실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꿈이면 이렇게 정확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헐. 나 방금 화장실에서 엄청 재밌는 얘기 들었다.”
역시. 승관은 학교 첫날부터 어디서 뭔 이상한 괴담 같은 걸 주워듣고 왔다. 학교 옥상에 귀신이 산다는 얘기.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누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기타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 괴담이 바로 최한솔이 이지훈을 만나게 되는 계기였다. 귀신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인데. 그냥 음악 하는 사람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며 한솔은 언젠간 옥상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와 같이. 그땐 4월 초에 찾아갔으니까, 이번에도 똑같이 해보기로 했다.
4월 6일에, 한솔은 옥상 위에서 휘파람을 불고 기타를 치는 사람을 찾아갔다.
“아, 깜짝이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진짜 귀신 있나 보려고요.”
“안녕. 내가 그 귀신이야.”
지훈에게 반갑게 인사하려던 자신을 말리고 대충 귀신 찾으러 왔다고 변명을 했다. 이 버전의 이지훈은 아직 최한솔을 모르니까.
이지훈은 옥상 한구석에 숨어서 태연하게 담배를 태우며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한솔은 처음에 기타 소리의 원천을 찾으러 옥상을 헤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옥상 뒤쪽엔 창고가 있었는데, 창고라고 하기엔 거의 방에 가까울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모두 이지훈이 차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최한솔은 점점 그 공간에 더 자주 방문함으로써 그 공간에 있는 모든 걸 자기 소유로 만들 작전이었다. 이지훈까지.
"한솔아. 넌 운명을 믿어?"
어느 날 이지훈이 물었다. 예전과는 다른 전개였다. 한솔이 만난 첫 번째 이지훈은 이런 말 안 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 질문에 한솔은 살짝 당황했다.
“뜬금없게 왜?”
“그냥.”
“딱히.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그걸 굳이 운명이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아.”
“... 참 너답다. 그럼 소울메이트도 안 믿겠네. 운명의 짝, 그런 거 말이야.”
지훈은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소울메이트… 최한솔은 그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마냥 곱씹었다. 너 혼혈 맞냐? 영어 잘한다며, 소울메이트도 몰라? 아, 알아, 그냥 생각 좀 하는 거야. 소울메이트, 난 믿어. 운명은 안 믿으면서 소울메이트는 믿어? 그거 모순인데. 어, 그러네. 그냥… 로맨스 한정으로 운명을 믿는 거지. 그럼 세상이 좀 더 재밌잖아. 재미? 넌 이런 걸 재미로 믿냐. 그럼 재미로 믿지, 뭐로 믿어? 종교도 아니고.
한솔의 말투가 웃겼는지 지훈은 웃음을 터트렸다. 창고 안에 지훈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내가 운명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믿어줄래?"
"당연하지."
"다행이네. 너라도 날 믿어줘서."
너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에서 최한솔은 왠지 모를 설움을 느꼈다. 왜 '너는'이 아니라 '너라도'였을까.
"한솔아. 난 운명이 보여."
"... 정확히는 뭐가 보이는데?"
"빨간 실. 온 세상을 뒤덮은 빨간 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그 운명의 빨간 실."
"우와. 신기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한솔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아 감탄사로 대체했다. 빨간 실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한솔은 호기심이 많아서 질문도 많은 편이었는데, 이번엔 조금 더 구체적인 걸 물어보고 싶었다. 절대 물어볼 수 없겠지만.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다. 봄이 지나가니까 여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계절이 바뀌면서, 최한솔과 이지훈의 관계도 급격히 발전했다. 어느새 한솔은 같은 반인 승관보다 고3 선배 지훈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공부해야 될 시간에 옥상 창고에서 지훈과 음악을 만들었다.
“형은 고3인데 공부 안 해?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대학 안 갈 건데. 음악 해서 돈 벌 건데.”
“... 아.”
새삼 이지훈의 천재적 재능이 부러웠다. 좋겠다. 공부 안 해도 되니까. 한솔이 그러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넌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나 망하면 네가 나 먹여살려야지.”
지훈은 웃으면서 말을 했지만, 곧 표정이 굳었다. 마치 하면 안 될 말을 한 거 같이.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연신 ‘아니야’를 속삭였다.
“나 형 먹여살릴 자신 있는데.”
“아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지.”
“내가 형 책임질게. 평생.”
그전과는 다르게, 이번의 고백은 약간 충동적이었다. 그냥 옥상 창고에서 둘이서 음악을 듣고 있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무엇보다 저와 같이 분위기를 즐기는 이지훈이 너무 좋아서, 입을 열어서 평생을 약속했다. 이번엔 좀 더 신중하게 하려고 했는데, 신중은 무슨 오히려 더 본능에 충실한 한솔이었다.
“좋아해.”
“...”
“사랑해.”
지훈의 입이 움직였지만, 한솔은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깜빡.
이번에도 한솔은 과거로 온 거 같았다. 혹시 저번과 똑같은 날인가 확인해보려고 핸드폰을 찾았다. 4월 6일 월요일. 한솔이 옥상으로 간 날이었다. 이번엔 입학식이 아니네. 그냥 랜덤인가.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과거로 가게 되는 계기는 고백이라는 사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너무 많았다. 이 법칙이 이지훈한테만 해당되는 건가? 그날에 고백을 하지 않고 다른 날에 고백을 하면? 장소가 바뀌면? 물음표들이 한솔의 뇌리를 채웠다.
“승관아.”
“어 왜?”
“내가 지금 강제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면 믿을 거야?”
승관은 ‘한솔아 네가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구나’라는 눈빛으로 한솔을 보다가, 한솔의 말이 장난이 아닌 걸 눈치채고 목소리를 낮췄다.
“왜?”
“나 지훈이 형 좋아하거든.”
“지훈이 형이면… 이지훈? 밴드부?”
“어.”
“지훈이 형이 이거랑 뭔 상관인데.”
“몰라. 근데 그 형한테 고백할 때마다 과거로 가게 돼.”
한솔은 승관에게 모든 걸 얘기해 줬다. 첫 번째 고백, 루프, 두 번째 고백, 또 루프. 따지고 보면 루프보다는 리프에 가까웠지만. 승관은 의외로 그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줬다.
“오늘이 지훈이 형을 처음 만나는 날이야?”
“어, 원래대로라면.”
“그럼 만나지 않으면 되지. 옥상 가지 마.”
아…… 싫어. 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승관은 기가 막혀서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후,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솔을 쳐다봤다. 뭐라고? 싫어? 너 이 루프에서 빠져나오고 싶기는 한 거야? 음, 딱히. 야 이 양아치야 기껏 얘기 들어주고 조언해 줬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참 나 네네 니 마음대로 하세요 평생 이 루프에 갇혀서 이지훈이랑 알콩달콩 잘 사세요.
옆에서 혼자 궁시렁거리는 부승관을 자체 뮤트하고, 한솔은 창밖을 쳐다봤다. 아, 지훈이 형 보고 싶다. 오늘 체육 쨀까. 쉬는 시간으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
한솔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가 이지훈을 만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다는걸. 하지만 한 번 닿은 연을 그렇게 갑자기 끊는다는 건 쉽지 않다. 그게 사랑이라면 더더욱. 최한솔은 이지훈을 만난 그 순간부터 이지훈을 갈망하고 이지훈이 고팠고 이지훈을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멈출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최한솔은 그날도 옥상 창고를 찾아갔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 고백을 했다. 역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여섯 번이나 루프를 경험하고 나서야 최한솔은 기록을 시작했다. 처음엔 이 방법이 통할지도 몰랐다. 이번 루프에서 기록한 건 다음 루프 때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통했다. 뭔가 시공간의 법칙을 거스르는 거 같은데. 한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공책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일곱 번째, 열일곱 번째, 쉰 일곱 번째. 계속.
타임 루프 61-2. 여기서 10은 열 번째 루프를 의미하고, 2는 세 가지 경우의 수 중 두 번째를 의미하는 거다. 첫 번째는 3월 2일 입학식, 두 번째는 4월 6일 이지훈을 만나는 날, 세 번째는 9월 1일 고백하기 일주일 전. 한솔은 그렇게 루프마다 일어난 일들과 발견한 것들을 적었다.
열 번째 루프에서는 옆반 여신 강소희한테 고백을 해봤다. 물론 강소희한테 진짜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다. 절대. 최한솔은 남자만 좋아한다. 그냥 시험 삼아 해본 거뿐이다. 그리고 이 루프의 법칙은 이지훈한테만 적용된다는 걸 알아냈다. 이지훈이 뭐라고. 이지훈이 뭐가 특별하다고. 스물네 번째 루프에서는 고백 대신 뽀뽀를 했다. 말로 하는 고백만이 고백이 아니니까. 마흔다섯 번째 루프에서는… 섹스를 했다. 사실 시작 전부터 잘릴 거 같았는데, 놀랍게도 그 과정이 다 끝난 이후에야 한솔의 눈이 감겼다. 신도 눈치는 있나 봐.
마흔아홉 번째 루프는 약간 특별했다. 최한솔이 제일 과감해진 회차였으니까.
“한솔아. 난 운명이 보여.”
이지훈은 또 이 대사를 쳤다.
“운명이 어떻게 보여?”
“사람들을 연결하는 빨간색 실. 그게 보이는 거야.”
“나랑 형은? 우린 운명이야?”
하고 싶은 질문을 드디어 해버렸다. 이 시간을 마흔아홉 번 반복하면서 처음 하는 질문. 지훈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와 어조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한솔은 그들이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뭐 어때. 설마 78억 명의 사람 중에서 운명을 거스른 사람이 한 명도 없겠어?
“근데 운명 그런 거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당연히-”
입을 맞춰버렸다. 그 뒤에 나올 말이 뭔지 알았고, 듣기 싫었다. 그래서 아예 그 입을 막아버렸다. 이지훈은 한솔을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반응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가만히 있었다.
“형. 난 형이 좋아.”
한솔은 지훈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 손은 그대로 지훈의 몸선을 타고 내려갔다. 잡고 싶은데 잡을 수는 없는 그런 행동이었다. 그저 서로의 살갗이 맞닿는 감촉을 느끼고 지훈의 뽀얀 피부 위를 누비는 한솔의 살짝 더 어두운 손이었다. 위태롭다. 위험하다.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형-”
깜빡.
타임 루프 62-3. 한솔은 무연했다. 아직도 이지훈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솔의 손이 살짝 닿을 때마다 슬쩍 움츠러드는 이지훈이, 한솔과 눈을 마주치며 암연한 표정을 짓던 이지훈이. 고개를 돌리면 이지훈이 옆에 누워 있을 거 같았고 집을 나서면 이지훈이 있을 거 같았다. 시야가 흔들린다. 최한솔은 울었다. 유치원 이후로 눈물 한 번 흘린 적 없었다 최한솔이 이지훈 때문에 울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최한솔은 자기가 사람을 꽤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과 모든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들에서 나오는 모든 반응. 그걸 다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한솔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자신의 감정, 이지훈의 감정, 자신의 반응, 이지훈의 반응 이지훈의 표정 이지훈의 말 이지훈의 행동 이지훈의 모든 것. 다 모르겠다.
그날 최한솔은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다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엔 나가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굳이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전화가 왔다. 이지훈에게서. 그 이름을 보자니 또 벅차오른다. 침을 꿀꺽 삼키고 감정도 같이 삼켰다. 여보세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왜 학교 안 나와.”
“아파서.”
“나 갈까?”
“아니.”
진짜 아픈가 봐, 평소 같으면 물어보기도 전에 와달라고 매달렸을 사람이. 그럼 지금은 말고 나중에 죽 사서 갈게. 끊어. 싫다고 오지 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지훈은 전화를 끊었다. 아, 안되는데. 진짜 안되는데. 한솔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열난다. 열나는 거겠지. 해열제 먹자. 대충 알약을 털어 넣고 최한솔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슴이 쓰라렸고 갈비뼈가 결렸다.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는 건가. 죽으면 이 되풀이에서 벗어나는 건가. 그럼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데.
벨소리가 울린 건 한참 뒤였다. 한솔아, 최한솔. 한솔은 문 앞에 서서 열어줄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뭐야, 사흘 결석한 거 치고는 별로 안 아파 보이는데. 이지훈은 장난을 치며 자연스럽게 한솔을 지나 한솔의 집으로 들어갔다.
“... 왜 왔어.”
질문이 아닌 문장이었다. 진짜 지훈이 온 이유를 묻는 게 아니라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거였다.
“걱정돼서.”
처음으로 지훈이 한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날이었다. 아니, 애정까지도 아닌 그냥 관심이었지만 그 관심마저 고팠던 한솔은 그 한 마디를 잡고 놓지 못했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삼 일 치 수업 빼먹으니까 좋냐?”
“아니.”
“대답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야. 당연히 안 좋겠지 바보야.”
“수업을 빼먹은 것보다 형 못 본 게 더 싫었는데.”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이지훈을 피하고 싶어서 학교를 가지 않은 거니까.
지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내 생각을 해주다니, 영광이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한솔은 쓴웃음을 보였다. 나는 매일 형 생각을 해. 나는 매일 하는데 형은 아니잖아. ‘영광이네’ 같은 소리는 내가 해야 맞는 거라고. 천하의 이지훈이 내 걱정을 해주다니. 이지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인데 그 세상의 주인공인 이지훈이 나를 생각해 주다니. 또 벅차올랐다. 눈가가 위험하게 젖어있었다.
“형, 나 보고 싶었어? 나 걱정됐어?”
한솔답지 않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안 그럼 왜 여기 있겠냐.”
“왜?”
“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친하잖아. 친하면-”
“어떻게 친한데?”
질문밖에 할 줄 모르는 로봇처럼 끊임없이 물음표만 던졌다.
“그냥 뭐, 선후배. 같이 음악 만드는 사이. 그렇게 친하지.”
“그게 끝이야?”
“끝이지 그럼, 뭐가 더 있겠어.”
“난 더 있는데. 사랑. 정확히는 짝사랑.”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히 그 검은색 눈동자가 출렁이는 걸 봤다. 한솔의 시야와 같이, 지훈의 시야도 같이 위태로워졌다.
“미안해 한솔아.”
이번에도 거절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또 눈이 강제로 감기기를 기다렸지만, 한솔의 눈은 멀쩡했다. 그럼 이건 거절이 아닌 건가.
"고생했어 한솔아. 미안해, 사랑해. 이제 다 끝이야."
지훈의 고개가 한솔의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눈물이 한솔의 셔츠를 적셨다. 짝사랑 그렇게 안 힘들었는데.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한솔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바보야, 그거 말고. 루프 말이야."
"...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미안해 한솔아.”
지훈은 흐느낌 사이사이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미안해’라는 세 글자만 반복했다.
“그거 다 나였어.”
“...”
“처음부터 다 내가 한 짓이야.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왜…?”
지훈은 한숨을 쉬었고 고개를 저었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운명이라는 것에 얽매여서. 내가 겁쟁이라서. 사랑하는 게 무서워서. 이미 정해진 범위에서 이탈하는 게 무서워서. 네가 제일 아팠을 텐데 그 순간 내가 너무 아파서, 그리고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널 위해 뭘 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널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어. 어떻게든 운명에 우리를 맞춰보려고.”
불편하고 아련하고 가슴 저린 정적이 흘렀다. 한 시간 동안, 두 시간 동안. 해가 질 때쯤에 이지훈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한솔아 사랑해.”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아마 더 일찍 좋아했을걸.”
그 말이 뭐라고 한솔을 울렸다. 혀엉. 하고 지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더 나올 눈물도 없어지자 한솔은 훌쩍거리며 지훈을 째려봤다. 지금까지 그토록 원망했던 신이 사실 신이 아니라 이지훈이었다니. 형 신이야?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아니. 그럼 이거 루프 어떻게 한 건데? 음, 비밀. 지훈은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아 왜. 알려줘.
“내가 말해봤자 모를 텐데.”
“지금 나 무시해?”
“메이비. 근데 내가 그걸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 이제 더는 안 해도 된다는 게 중요한 거지.”
맞는 말이라서 한솔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대신 주제를 바꿨다.
“형, 아직도 운명이 보여?”
“당연하지.”
“이제 안 보면 안 돼?”
“그게 내 맘대로 됐으면 진작 그랬지.”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뭐 어때. 운명은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거잖아.”
“명언인데? 한솔아 너 작가 해라.”
“싫어. 형이랑 작사가 할 거야.”
“그게 그거지 뭐.”
둘은 그렇게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밤 하늘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한솔의 집을 떠났다. 정확히는 한솔과 승관의 집이었지만. 아, 부승관. 까먹고 있었네. 룸메이트의 존재를 그제야 기억했던 한솔은 그에게 연락하러 핸드폰을 찾았다.
[현관에 남자 신발 있는데, 안에 누구 있냐?]
[야 씹지 마]
[야 최한솔 안에 누구 있냐고]
[나 들어간다????]
[아 씨발 됐어 이지훈이겠지 둘이서 핫한 시간 보내세요~]
[끝나면 연락해라]
부승관은 평소엔 눈치가 없다가도 항상 이렇게 중요한 순간엔 눈치백단이다. 덕분에 이지훈과 잘 되긴 했지만.
[이제 들어와도 돼]
[그리고 나 이제 지훈이 형이랑 사귄다]
한솔은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뿌듯한 듯 씩 웃었다. 타임 루프 63을 기록할 필요 없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지난 62번의 루프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