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겸] 말해줘
잠 / 글
“세차 한 번 하고 나오면 허리가 다 뻐근해.”
“니가 세차 하냐, 어차피 기계가 다 해 주는데.”
“그건 또 그렇네요.”
별 웃기지도 않은 소리에 키득거리는 최한솔은 딱 봐도 그런 애였다. 얼굴이 모든 서사를 설명해 주는 그런 애. 최한솔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똥차게 잘 생긴 얼굴이라는 건 다 아는 애였다. 그렇다면 행동에는 전혀 무게가 실리지 않았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솔직히 최한솔하면 예측불가 아니냐. 사이드 미러를 마른걸레로 야무지게 훔쳐 내던 서명호가 말을 얹었다. 최한솔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듣기 좋네. 예측불가.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거죠. 세탁기에 돌릴 때가 된 연한 핑크색 비니 끝을 당겨서 소라게를 만든 최한솔이 곧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네처럼 한탄조로 읊었다. 너네 오늘 집에 안 갈 거냐? 주유소 사장이자 제 삼촌이 늘상 부르는 대로 아예 이름이 바뀌어 버린 슈아조가 본넷을 시원하게 닦고 일어섰다. 아이구 허리야. 낄낄거리며 마른 걸레를 모아 서명호에게 던진 최한솔을 보며 슈아조는 버럭 성질을 냈다. 조금 있으면 차주가 올 시간이었다. 얼른 마무리하고 국밥이나 먹자. 파란 모자와 핑크 비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냐면.”
“네.”
“겁나 큰 트럭을 몰고 다니는 거였어.”
“그 뭐라고 하더라. 화물차?”
“그렇지. 최소 4톤.”
운전을 흉내 내는 폼이 보면 볼수록 가관이다. 운전대를 잡은 각도를 나름대로 재며 발을 헛디딘 슈아조가 비틀거렸다. 서명호는 약속이 있다더니 빈 말이 아니었는지 한 잔 받아놓고 그대로 내뺐다. 어차피 잘됐어. 나 이제 간다 안녕. 한 블록만 내려가면 차이나타운 입구였다. 한 두어 번 놀러 갔었나. 새벽장사를 준비하느라 바쁘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골목 앞에서 놀라 벌어진 턱을 닫으며 한참 멍하니 서서 구경만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튼 슈아형은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에 함락 당했고 적지 않은 덩치를 살살 달래가며 부축하는 최한솔은 세차 하면서도 아끼던 땀을 줄줄 흘렸다.
“아무튼. 한솔아.”
“네 형.”
“고등학교는 졸업 해. 어?”
슈아형은 가만 보면 모르는 척 다 안다. 눈매가 깊은 얼굴을 해가지고 가끔씩 진지한 말을 뱉을 때가 있는데 최한솔은 그게 퍽 마음에 든다. 그래서요. 최소 4톤짜리 트럭 다음엔 뭔데요.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티가 났는지 슈아형은 반쯤 뜬 눈을 도로 꾹 감아버리곤 외쳤다. 수영장 있는 이층집. 무조건! 최한솔은 꺽꺽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시린 손을 비비며 차를 닦던 이듬해 겨울 2월 18일, 최한솔은 성인이 되었고 그 기념으로 소소하게 모은 돈을 가지고 해외로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통장 잔고는 늘 소소하다는 게 문제였다. 집에서 멀지 않은 청과물 시장 표 사과를 집어 들고 끼니를 때울 겸 한 입 크게 베어 물다가 송곳니와 그 뒤에 있는 작은 어금니를 때운 게 아작! 하고 깨졌다. 깨진 김에 충치 치료도 받았다. 최한솔님. 견적이 사십 칠만원 나왔는데 보험처리 가능 하셔서요, 삼십 육만 사천 육백원 6개월로 해 드리겠습니다. 마취용 주사를 맞아 감각이 없는 오른쪽 볼을 감싸 쥔 최한솔의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월말 즈음 빠져나갈 휴대폰 할부 요금을 빼고 삼만 구천 백원 정도였다. 그것조차 확실한 잔액이 아니라 최한솔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래 무슨 여행이냐, 하고 서명호에게 다시 연락을 한 게 엊그제였고. 최한솔, 너 그럼 알바 할래? 세차하고 마른걸레로 닦는 알바는 이제 질렸어요. 돈도 몇 푼 안 되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튜터링.
확실한 네이티브를 찾는 게 서명호의 임무였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야 너도 할 수 있어. 야 너두. 노란색 바탕에 고딕체로 진하게 박힌 광고화면을 떠올리며 최한솔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알음알음 소개를 넣어 주는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는 서명호도 중국어 튜터링을 반 년 정도 했었다. 생각보다 돈이 좀 되더라구. 한솔, 그니까 자리 있을 때 빨리 껴. 영어는 자리 잘 안 나는 거 알지? 경력 아예 없어도 괜찮아. 어차피 단기라서 짧게는 3개월도 계약 가능하거든. 최한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네요. 생각이 깊은 대신 내린 결정은 견고하다. 서명호는 나름대로 그런 최한솔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다음 주 수요일 7시에 면접만 간단히 보러 사무실로 와. 주소 찍어 줄게.
본질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다. 이건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었다. 최한솔은 그 애매한 말을 신조로 삼았다. 뭔가 그냥 멋있어서.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최한솔의 멘탈을 쥐고 흔드는 말은 온통 이거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 최한솔은 기꺼이 흔들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의미와 원인이 존재하며 그 행동이 갖는 의미에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은 결단코 없다고 믿는 최한솔은 갑자기 철학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흐르는가. 그래서 밥은 언제 먹나. 두어 정거장만 가면 서명호가 소개해 준 튜터링 학원 사무실에 도착하니까 일단 면접을 보고 나서 뭐가 됐든 대충 배를 채울 요량이다. 버스 창문에 빗방울이 쏟아진다.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웠다. 쌩쌩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이 적당히 기분 좋아서 잠깐 면접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곧 그만 뒀다. 레진 대신에 임시로 막아놓은 보형물을 혀끝으로 툭툭 건드리던 최한솔은 얼른 상체를 일으키고 하차 버튼을 눌렀다.
간단한 인터뷰가 진행됐고 최한솔은 어렵지 않게 프리토킹을 마치고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서명호의 말대로 계약은 3개월, 6개월 단위로도 가능했는데 최한솔은 별 고민도 없이 6개월짜리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튜터링이라고 해서 어려운 건 아니에요. 일주일에 두 번 스카이프로 화상 강의를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한솔씨 전임이 맡았던 분들 대상으로 간단한 일상 대화에서부터 비즈니스 인터렉션까지 맡아서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 콜 해주세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최한솔의 튜더 강사 라이프는 순조롭게 시작이었다.
보통 오전 일찍, 그러니까 출근 시간에 한 타임정도 튜터링을 마치고 나면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는 비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가끔 옆 파트에서 시간 조절이 어려워 한솔에게 부탁을 해 오는 일이 종종 있는 것 말고는 꽤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매번 화요일마다 튜터강의가 오전만 3개 연속으로 잡혔는데 차라리 그게 더 편했다. 거의 프리랜서 수준의 업무량을 적절히 가늠해보던 한솔의 휴대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튜터링 고객 만족도 설문 조서 결과였다. 아. 오늘이 벌써 월말이구나. 정산일은 매월 21일이었다. 아, 좋다가 말았네. 아쉬워서 아랫입술만 빨았다가 놓았다.
갑자기 강사가 바뀌게 되어 죄송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고객전용 발신 번호가 찍힌 문자가 한솔에게 한 통 왔고, 뒤이어 발신 정정 문자가 하나 더 날아왔다. 보통 이런 건 튜터 강사 전용 번호로 받게 되어 있는데. 업무용은 다 이쪽 번호로 저장을 해 놨으니 그랬다. 잘 못 온 거겠지. 신경 쓰지 말자. 휴대폰을 잠깐 엎어 놓고 넷플릭스를 켰다. 세차즈 셋이서 같이 사용하는 계정에 로그인을 하고 상단에 올라와 있는 드라마들을 건너 뛴 채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좀비. 다음 순간 휴대폰이 한 번 진동하면서 왼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한솔쌤. 미안해요ㅜㅜ 나 고객님 한 분 지금 급하게 봐 줄 수 있어요?] 쉬는 시간 종료. 없는 형편에 그래도 구색이나 갖출까 해서 꺼내 든 도도한 나초칩 봉투를 미련 없이 내려놓고 최한솔은 [네.] 답을 했다. 어차피 만족도 설문조사 링크가 고객들에게 보내질 테고, 고객들은 버논츄 선생님 너무 좋아요! 별 다섯 개짜리 평가와 함께 스윗한 코멘트들도 알아서 척척 달아줄 테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스카이프 어플을 켜고 발급받은 아이디로 로그인을 했다. Ay. This is Vernon chew. Um-um. 최 not chew.
최한솔은 주목받는 걸 부담스러워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가끔 진지한 면이 있는 애였다. 그런 최한솔을 모두들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선뜻 다가가지는 않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정도의 거리감을 최한솔은 마음에 들어 했다. 조금 사차원이고 엉뚱하지만 근본적으로 즐겁고 유쾌한 최한솔의 주위에는 인간관계가 문어발처럼 줄기를 엮었다. 사람들이 모이다가도 흩어지고 달라붙다가도 금세 떨어져 나갔다. 북적거리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외로운 건 더 싫어. 이중적인 자아가 최한솔의 안에서 꿈틀댔다. 그런 최한솔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 중에서도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유형의 관계가 딱 하나 있었다. 연애. 연애는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한솔은 타당한 고민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 나 외롭구나. 자각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내가 진짜로 고마워서. 울 솔쌤.”
제 앞에 수저를 밀어놓더니 얼른 양꼬치를 들어 틀 위에 하나씩 걸쳐 놓는다.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골랐는데, 괜찮지? 서비스로 나온 꿔바로우 세 조각을 잘라서 그릇에 올려놓은 이석민의 얼굴을 잠깐 보며 최한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괜찮아요. 다행이다. 사장님! 여기 칭따오 한 병도 주세요. 에이.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한솔쌤. 아니 한솔씨. 아니다 그냥 솔쌤이 입에 짝짝 붙는다. 그런 의미에서 짠 하자. 어? 술잔이 가볍게 부딪히는 사이사이로 끊이지 않고 대화 비슷한 게 흘렀다. 그냥 한솔이라고 부르셔도... 아이 진작 얘기하지!! 눈이 커다래져서 놀라는 이석민이 보여주는 표정들이 상당했다. 표정 없는 이석민은 상상조차 어려워서 최한솔은 그냥 잔을 들고 장단을 맞춘다. 이모티콘처럼 작게 찌그러지듯 웃는 얼굴이 신기해서 한참을 빤히 보다가 잘게 눈이 마주쳤다.
“왜. 솔쌤.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그래?”
“네. 취향의 얼굴이에요.”
“이야 너한테서 그런 말 들으니까 나 막 기분이 날아갈라 그러네.”
눈가 근육을 미세하게 찡끗거리면서 귀여운 척을 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다. 약 2초 정도 정적을 끊기 위해 석민이 늘 하던 대로 입을 크게 옆으로 벌리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최한솔도 따라 웃는다. 이렇게 사적으로 밖에서 만난 건 오늘까지 네 번이다. 네 번 중에 두 번은 밥을 얻어먹은 한솔이 커피를 사고 석민이 안 그래도 되는데~ 하면서 야무지게 아아를 마셨다. 매번 사양하는 것도 예의 없고 이왕 한솔쌤이 사주는 거니까 잘 마실게요~. 말끝에는 늘 물결이 붙었다. 최한솔은 그게 좀 웃겼다. 처음엔 그랬다.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제 주위에는 저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없어놔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석민이니까 그런 건지. 늘 물어봐야 했다. 때 늦은 고민을 시작하게 된 원인과 이유가 눈앞에 있었지만 최한솔은 이럴 땐 꽤 신중하고 답답할 정도로 진지하게 반응했다. 이런 최한솔에 대해 서명호는 ‘한솔이는 신중한 편이니까.’했다면, 조슈아는 ‘최한솔 완전 거북이지.’라고 대꾸했던 적 있다. 빠르다고 해결 되는 거 없고, 그럴 바엔 신중하고 천천히가 더 맘에 들어요. 주관이 뚜렷하게 서 버렸으면 저 좋을 대로 하게 놔두는 게 맞는 거지.
“진짜 미안해. 한솔아. 나 아침 잠 완전 없는 거 알지? 어제 게임하다 너무 늦게 잔건지 뭔지 암튼 아 오늘 이러다간 2타부터 쫙 밀릴 각인데 어떡하지, 하면서 있는데 마침 딱 니 생각이 나는 거야.”
“잘 했어요.”
“막말로 너가 싫다고 바쁘다고 쉬고 싶다고 해도 나는 정말 괜찮거든. 사정 얘기하고 죄송하다고 하면 되니까.”
“네.”
“휴. 그나저나. 너 없었으면 나 진짜 어떻게 됐을까 싶어. 그런 생각 종종 든다니까. 널 만난 건 정말 운명인 것 같아. 진짜 우리 운명인가?”
하하하. 최한솔은 별로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 편이다. 그러지만 문맥과 분위기를 못 읽는 편은 아니기에 제법 진지한 이석민의 얼굴에 대고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면서 정색을 빨 정도는 못된다. 그런가봐요. 하하하. 하며 대충 무난한 웃음을 흘리던 최한솔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이석민이 장난을 걸었다. 운명은 무슨 운명. 하하하. 한솔이 너 제법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초등학생이 어색하게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딱딱 끊어서 대꾸하는 이석민의 얼굴을 보며 최한솔은 아, 당했다 싶으면서도 피식 웃는다. 어이가 없게 웃겼다. 와, 형 저 지금 바보 만든 거죠? 지지 않고 대꾸하니 저도 민망한지 눈을 찡그리면서 웃는다. 시원하게 벌어지는 웃음이 기분 좋다.
이렇듯 이석민은 최한솔을 살뜰히 살피는 편이었다. 이유는 심플했다. 한솔쌤, 내가 많이 챙겨줘야 돼. 이건 약간의 동지애 같은 거랄까. 아닌게 아니라, 한솔이 들어오기 전에 꼭 일주일 간격으로 기존에 버티고 있던 강사들이 줄을 지어 빠져 나갔다. 계약기간 만료라는 합법적인 사유를 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잡지도 못하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석민의 땜빵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버티다 못한 이석민도 딱 올해 가을까지만 계약을 핑계로 갈려 나가듯 어찌어찌 강의를 이어 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투입된 최한솔은 홀로 남은 이석민의 무한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는 것이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거였다. 실제로 이석민은 계약을 반 년 더 연장했고 동시에 최한솔에게 개인 번호를 물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니까 목소리도 같이 커졌다. 형이 많이 도와줄게. 진짜진짜. 맹세맹세. 단단히 약속을 받듯 번호 열 한자리를 꼼꼼하게 누른 이석민은 최한솔의 휴대폰을 얼른 가져가더니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뿌듯한 얼굴이 좀 귀엽네. 이석민에 대한 최한솔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한 번에 드리프트를 확 꺾어버리는 모험은 좀 위험하다. 그렇지만 최한솔은 모험을 즐기는 스타일이다. 대신 천천히. 느리게. 누가 드리프트를 안전하게 타. 얘 진짜 웃기는 애네. 제주도 한 달 살이 중인 부승관이 들으면 놀라서 기함을 할 일이다. 최한솔에게는 저 나름대로의 바이브가 있을 뿐인데. 요상한, 바이오리듬을 타고 상황을 맡겨 보기로 한다.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이석민이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맥주 한 병을 끝낸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좌석 맨 뒷자리에 앉아 도착 시간을 가늠하던 이석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전의 기억을 더듬는다. 형 가방 안에 지갑이랑 폰 있으니까 꼭 확인해요. 최한솔이 이석민의 어깨를 바투 잡고 강조하듯 꼼꼼하게 얘기했다. 잘생긴 저 애가 뭔가 어마어마한 얘기를 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뭐였더라. 진지한 한솔쌤의 눈썹과 속눈썹. 그런 게 떠오르다가 곧 그쳤다. 일단 오늘은 퇴근. 너무 피곤하다. 눈썹을 축 끌어내린 이석민의 몸이 시트 위로 구겨졌다.
“그래도 진짜 안 되겠다 싶을 땐 꼭 말 해줘.”
“뭐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요.”
석민이 눈길을 움직여 한솔을 본다. 반 쯤 남은 음료 위에 동동 떠다니는 작은 얼음들 사이로 스트로우를 흔들던 중이었다. 턱을 괸 채 석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솔이 눈썹 한 쪽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나 형 좋아하잖아요.”
석민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잠시 뒤 컥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기침이 쿨럭 쿨럭 쏟아졌다. 작게 놀란 최한솔이 얼른 티슈를 뽑아다 석민의 앞에 내밀었다. 원형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흔들릴 정도로 정신없는 기침이 이어지더니 겨우 진정된 모양인 이석민이 빨개진 눈가를 비비며 최한솔을 올려다본다. 턱이 느슨하게 풀린 게 적잖이 놀란 듯 싶었다. 한솔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석민을 본다.
“몰랐어요?”
“야. 아니 한솔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저 형한테 말 한 적 있는데.”
이석민의 타임라인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미친. 그 때였나봐. 인수인계 비슷한 무언가를 하면서 가볍게 술 한 잔 마신다는 게 점점 늘어지니까 별 얘기를 다 떠들었는데 그 땐가봐. 이석민은 두 손을 들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야... 야. 한솔아. 잠만, 잠깐만. 머릿속이 팽글팽글 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이석민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는 걸 가만히 보던 최한솔은 입술을 깨문다. 불과 2주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너보다 한 살 형이니까 힘든 거 어려운 거 있으면 다 얘기해‘를 액면 그대로 믿어버린 최한솔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 결과가 이런 거였다. 고민 들어 드립니다. 한솔군. 뭐든지 말씀하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한솔을 계속 부추긴 건 이석민이었다. 형이 뭐든지 말 하라고 그랬으면서. 한솔은 왠지 야속한 기분이다.
“그게 나라고 한 적은 없잖아.”
“형이 아니라고 한 적도 없어요.”
“그건 그렇지만...”
매번 너한테 땜빵 부탁한 것도 그렇고, 너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무조건 오케이 했잖아. 솔직히 미안한 마음도 컸지만 니가 있어서 나는 진짜 안심이 됐고 마음이 놓였고 그랬단 말이야. 이제 스무살인데 딱 봐도 애기 같고. 내가 챙겨줘야 될 것 같고. 그래도 첫 직장, 첫 사회생활인데 나는 누가 날 챙겨줬던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내가 선배 비슷한 게 되면 꼭 후배 앞길은 이끌어 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너는 동생인데. 가끔 믿음직스럽고 어른스럽기도 하고 진짜 착하고 맨날 맨날 잘생겼고 내 말도 잘 들어 주고. 영어 이름도 벌논. 멋있고. 나를 좋아하고.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에요. 형 입장 곤란하게 할 생각도 없었어요.”
“...곤란하다기 보다는... 좀...”
“그냥 술자리니까 넘겨 들었나보다 했어요. 아니면 일부러 대답 안 해주는 건가?”
“야! 그런 건 아니야! 진짜...”
“네. 알아요.”
누구 놀리냐. 타는 속을 끌어안고 이석민은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남은 음료를 목 뒤로 삼켰다. 또 기침이 튀어나올까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최한솔의 컵은 이미 비어 있었다. 잠자코 이석민을 바라보던 한솔이 어깨를 들썩이며 억울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게 퍽 귀엽고 잘생겨서 석민은 잠시 얼을 빼고 가만히 최한솔을 올려다본다. 왜 또오...
“형이 다 말해 보라면서요. 형이 그러라고 하셔서 저는...”
“...응 그랬지...”
“형 좋아한다는 건 제가 실수한 거라고 치고,”
“...너는 실수로 사람 좋아해?”
네? 최한솔의 큰 눈이 댕그랗게 뜨였다. 눈커풀이 들리면서 숱 많은 속눈썹도 부채처럼 착, 따라 올라갔다. 어이가 없다는 듯 최한솔을 바라보는 이석민의 눈길에는 아주 약간이지만 원망의 감정이 담겨 있는 듯 했다. 적어도 최한솔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what? 진심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솔이 석민을 쳐다본다. 행간의 의미를 빠르게 찾으려고 애를 쓴다. 아차차.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먼저 알아차린 것은 이석민이다. 그래도 내가 형이니까 남..자를 좋아한다고 어렵게 커밍아웃을 한 동생이 많이 힘들 거야, 혼란스럽겠지. (놀랍게도 최한솔은 중학교 때 미리 정체성을 깨달은 조숙한 녀석이었지만) 생각을 정리한 이석민이 입을 열었다.
“너가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상관없어. 너는 솔쌤이고 내가 진짜 아끼고 좋아하는 애니까.”
“형 지금 나한테 고백 한 거에요?”
“야!”
나한테 시간을 좀 줘. 무슨 시간요? 대답할 시간. 네 그래요. 최한솔이 느리게 대답했다. 이제까지 기다렸는데요 뭐. 난 정말 몰랐다니까? 네. 알겠어요.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석민의 볼이 붉어졌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그만 일어나요. 내일도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 어? 어. 나도 지금 막 일어나려고 했어. 기묘한 관계의 스타트는 최한솔이 직접 끊은 셈이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첫 단추 아닐까, 한솔은 싱긋 웃는다. 뭘 웃어! 정 들어 임마.
“잘 들어갔는지 톡 줘요. 집 도착하면.”
“어. 뭐. 생각나면 할게.”
“네. 대답은 천천히 말해줘요.”
“그것도 생각나면 할 거라고.”
“그래요.”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