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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윤버윤] 시간을 팝니다

돌 / 글

나는 어떤 남자를 보고 있다.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없는 태양을 자기 두 눈 속에 나누어 담은 남자를.

 

일기를 적으면서 정한은 생각했다. 언젠가 그 남자와의 만남을 회고한다면 분명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할 것이라고. 그가 주었던 강렬한 느낌을 설명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적절한 말을 고르고 골라 조합하는 과정에 있어 확실한 두 가지는 있었다. 첫째로, 회고하는 시점이 언제가 되었든 늘 현재진행형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 처음과 끝을 알 수 없게끔. 특히, 끝을 알 수 없게끔.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을 추구하는 정한이지만 어쩐지 그 남자를 표현하기에는 그런 화법이 어울렸다.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 정한의 ‘밑’과 ‘끝’을 저 너머에 숨겨버린 사람이므로. 둘째로는, 남자의 눈동자에 대한 묘사도 꼭 함께 담아야 한다는 것. 시선에도 잔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길게 머무르며 빨려드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던 그 눈. 어쩌면 그 눈을 본 순간부터 말려든 건지도 모르니까. 그리하여 탄생한 미완성의 문장, 정한은 페이지 구석에 낙서처럼 적힌 그 글자들 위로 펜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정한의 대학 선배는 글을 쓰면서 가장 부질없는 짓이 마침표를 미리 찍어놓는 일이라 말하곤 했다. 우리 인생도 글과 같고, 절대 미리 써둔 결말대로 흘러가는 삶은 없다고. 그래서 정한더러 끝을 바라보며 살지 말라고 했다. 설계된 가상의 미래에 비위 맞추며 살아 봤자 소용 없다고. 살다 보니 그 선배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정말 생각한대로 흘러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을 하든 중간에 변수가 생기고 돌발상황이 터져서 계획이 틀어졌다. 자신이 어떠한 말로에 서 있음을 뜬금없이 고지 받은 것마저도 어쩌면 계획이 틀어지는 일에 해당됐다. 내가 연출하는 내 인생 속에서 갑작스런 하차 요구를 받다니.

 

심지어 그런 줄로만 알고 있다가 결말까지 향하는 그 길이 무진장 길어져버리기도 하지 않았는가. 바로 오늘. 오늘 말이다. 다 재생되었다고 생각한 테이프가 계속 감기더니 갑자기 모르는 트랙이 뿅 튀어나오는 것처럼. 언제 끝날지, 총 몇 곡인지도 알 수 없는 노래는 지금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건 그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부르던 콧노래 같은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생일대의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그리고 코 앞에 찍혀 있던 마침표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이제 정한의 인생을 담은 글과 노래가 어느 곳을 향해 어떻게 치달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끝을 쥐고 있다 빼앗겨버린 것이다.

 

오늘은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 모든 게 꿈인가 싶을 만큼.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는 상관 없었다. 이대로 날이 무르익고 새 아침이 떠오르면, 우리는 시간으로 충만한 여행을 계속할 테니까. 숙소 주인이 틀어 놓고 간 카세트 플레이어를 껐다. 작은 태양처럼 타오르는 불씨가 두 사람 옆에 춤추는 긴 그림자를 남겼다. 막 잠에서 깬 남자는 모은 두 발 끝을 자꾸 옴질대며 제 발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한은 그걸 따라서 보고 있다 다이어리를 소리 나게 덮었다. 이제 점점 어두워지는데. 안 들어가요? 남자가 대답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먼저 들어갈래요?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아니요. 저도 같이 별 구경할래요. 그는 낮 동안의 햇살을 모조리 끌어안은 눈을 하고서, 밤 하늘을 수 놓은 무수한 별빛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동경하듯이.

 

 

 

시간을 팝니다

 

 

 

여행이 싫었다. 벌여 놓은 사업 때문에 비행기 탈 일이 많았던 정한은 국경 넘는 일이 한결같이 달가웠던 적이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명목을 차지했던 ‘현지 시장 조사’ 타이틀부터 이미 심각하게 노잼이긴 했지만 친목 도모 차원에서 직원들끼리 아무런 목적 없이 놀러가는 여행도 사실 정한에겐 노잼이긴 마찬가지였다(물론 사적으로는 굳이 갈 리가 없었고. 가게 돼도 호캉스란 명목으로 항상 숙소에만 처박혀 있었다.). 왜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진 빠지고 피곤하니까. 그래서 정한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딘다는 설렘에 도취되기는커녕 늘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공항서부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하곤 했었다.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각국을 정처없이 유랑하는 게 소일거리가 돼 버렸다.

 

윤정한은 부유한 시한부였다. 비보를 전하던 담당 의사의 덤덤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 앞에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 났다. 그는 사무적인 태도로 차트를 정리하며 정한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말했다. 그때 정한은 의사의 그런 태도가 내심 고마웠다. 스스로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진리처럼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준비라면 이미 되어 있었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늘 해왔기 때문에. 대충 돈 되는 일이라면 옳든 그르든 닥치는 대로 다 하며 살았던 게 업보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모르고 사는 자와 알고 사는 자의 삶은 달랐다. 정한에게는 흘러가는 1분 1초가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급하진 않았다. 도리어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삶에 치여 엄두도 못 냈던 여유가 찾아왔다. 그리고 목표가 생겼다. 자신의 끝을 아는 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현재가 중요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제한 시간 안에 최대한 행복해지기. 인생을 가치 있는 경험으로 채우자. 주위를 둘러보니 곁에는 어느새 젊은 시한부의 유산을 탐내는, 가식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 기웃댔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게 남의 얘기가 아니었던 거다. 인복두 없지. 아니, 사실은 변한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치 않는 건 역시 뭐니뭐니 해도 머니밖에 없었다. 돈이나 펑펑 써야지. 정한은 그래서 모든 걸 훌훌 떨쳐버리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가이드도 없이 홀로, 자유롭게.

 

그러던 중 마지막이리라 마음 먹고 온 어느 도시의 길바닥에서 만난 게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시간을 팔아요.’ ‘이 주머니를 사시면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남자는 가판대를 벌여 형형색색의 주머니를 진열해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호객행위라봤자 뒷짐을 지고 서서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저 두 문장만 외치는 게 다였지만. 그는 장사에 능란하지 않아 보였다. 익숙한 한국어에 호기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오는 정한에게 남자의 시선이 꽂혔다. 정한은 만면에 가득한 순진한 표정을 보고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신비로운 호박색의 눈동자와 마주치고, 1초, 2초, 3초. 안녕하세요.

 

“진짜 이거 사면 시간을 줘요?”

“네. 제가 주는 건 아니고 주머니가요.”

“아……. 이 주머니에서 어떤 시간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시간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요.”

“그럼 수명을 얻을 수도 있나요?”

 

남자는 정한의 눈길을 물끄러미 되받았다.

 

“네. 당신의 시간이 수명이라면요.”

“근데 그럼 확인할 방도는 있는 건가요? 그니깐, 시간이 늘어났는지 안 늘어났는지요.”

 

그 말에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턱 밑에 손가락을 짚으며 말했다.

 

“자기가 느끼는 법 밖에요. 시간은 관념적인 것이니까요.”

“그러면 이 물건은 효과가 증명이 안 되는 거예요?”

“음……. 꼭 증명 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죠. 그치만 신뢰가 달려 있는 문제니까요.”

“…….”

“그니까, 이 주머니를 당신한테서 사면 나한테 필요한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또 끄덕끄덕. 정한은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을 붙든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한의 입가에 조금씩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 그짓말.

 

“우와. 자수 엄청 섬세하다. 시간이 담겨있다는 컨셉도 로맨틱하구.”

“거짓말 아닌데……. 저 거짓말 안 해요.”

“…….”

“당신이 저를 믿지 못하는 걸 이해해요.”

“…….”

“물건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억지로 팔지 않아요.”

 

그 덤덤한 말에 정한은 살짝 무안해졌다. 아니 왜 이렇게 무뚝뚝해.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구만. 꼭 내가 무슨 자기 중요한 가치를 부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무안함과는 별개로 이 이상한 남자와 이상한 물건에 대한 흥미와 관심은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 나 이 호기심천국.

 

“아닌데. 저 시간 필요한데. 그래서 이거 엄청 필요한데.”

 

정한은 보라색 주머니 하나를 집어들고 요모조모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별자리 무늬가 가로지르는 가운데 ‘時’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근데 정말 비쌀 것 같다. 시간을 담았다고 할 만 하네.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원가는 얼마나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남자 쪽을 보니 그도 정한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빙성 있는 마케팅은 아니지만 물건 퀄리티는 좋네요.”

 

개시하고 얼마나 팔았어요? 하나도 못 팔았는데요. 정한은 속으로 수긍했다. 알 만 하다.

 

“좋아요. 살게요, 다. 여기 있는 시간은 다 주세요.”

 

남자가 깜짝 놀라더니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정말 다 사시려고요? 네. 12개 다 주세요. 정한은 이 즉흥적인 상황이 어쩐지 조금 즐거워졌다. 그런데 남자는 곧바로 반색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근데 인당 하나씩만 판매해서.”

“아, 그래요? 그치만 다 너무 예쁜데……. 그냥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알겠단다. 정한은 즉시 남자에게 값을 지불했다. 그런데 거슬러 받은 돈을 보니 귀한 시간을 샀다기엔 너무 저렴하다. 진짜 뭐하는 사람이지? 바가지를 씌울 것도 아니면 왜 파는 거람. 관광지 주변 스토어에서 키링만 한 복주머니 하나 사도 이거 열두 개 값은 넘겠다.

 

담아주시겠어요? 아, 네. 남자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남자가 지퍼를 열고 배낭에 천천히 주머니들을 담기 시작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의 잡음 사이로 흥얼흥얼 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정한이 아는 노래였다. 누구 노래였더라? 제목은 뭐였지? 주세요.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꼭 쥐어 보이고 말했다. 아, 이건 들고 갈게요. 수고하세요! 잠시만요, 아직 덜 담았어요. 앗. 그래요? 색깔이, 참 예쁘고 영롱하다. 주머니도. 눈동자도.

 

“많이 파세요.”

“안녕히 가세요.”

 

정한은 자리를 부스럭부스럭 정리하는 남자에게 목례를 하고 떠났다. 멀리서 시간을 판다고 소리치는 걸 들을 때까지만 해도 정한은 남자가 여행객들한테 기념품 팔아먹는 흔한 장사치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판다느니 하는 소리도 당연히 상술 중 하나겠지 생각했단 말이다. 사실은 만리타향에서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가 반가웠던 거고 적당히 장단만 맞추려던 건데. 남자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치는 바람에 덩달아 맞장구를 치다가 덜컥 사 와 버렸다. 꽤나 진심인 듯 해 보이길래. 재밌잖아, 행운의 아이템. 남자의 말이 진짜일 수도 있고. 예정에 없는 지출을 했는데 불쾌하기는커녕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상하네. 왜 신나지. 기분이 너무 좋아. 정한은 남자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길을 걷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멀찍이 접이식 가판대를 등에 짊어진 남자가 보였다. 정한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가는 길이 겹치나 보다. 시가지를 조금 벗어난 것 뿐인데도 곧 한적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한적함을 깨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계속 뒤를 밟았다. 정한의 것과 겹쳐져 터터벅 터터벅. 이건…… 길이 겹치는 게 아니라 아예 그냥 같이 걷고 있는 거다. 정한은 신경 쓰이는 발걸음 소리에 홱 몸을 돌렸다. 턱을 박을 뻔한 남자가 뒤로 흠칫 물러서며 멈췄다. 벌써 바짝 붙어있었다.

 

“안녕히 가라면서요. 왜 따라오세요?”

“……많이 팔 물건이 더 이상 없어서요.”

“팔 물건 없다고 손님을 미행해요?”

“갈 곳도 없어서요…….”

 

말소리는 우물거리면서 둥그렇게 뜬 눈은 피하지 않는다. 정한은 대답 없이 돌아서서 그냥 걸었다. 따라오는 남자를 쫓지도 않았다. 그러다 한참 뒤에 한 마디 했다. 저도 딱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닌데요. 남자도 한참 뒤에 대답했다. 둘이 걷다 보면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을까요?

 

“저기…… 잠깐만 동행해도 되나요?”

“…….”

“귀찮게 안 할게요.”

 

정한은 어느새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남자를 빤히 보았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미 지금도 동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볼수록 눈이 참 보석 같다. 예쁜 호박석.

 

 

 

-

 

 

 

둘은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알 수 없는 이국의 땅을 정처없이 내딛었다. 자박자박 걷는 소리와 새소리만이 시공간을 채웠다. 지금 이 공기와 하늘과 땅을 어디선들 다시 겪어볼 수 있을까. 자신만의 이 오롯한 느낌과 그 어떤 조건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을 자유를. 아마 다시 삶을 얻게 된다면 이런 기분은 못 느끼겠지. 끝을 향해 갈수록 삶은 소중해졌다. 그러나 욕심은 없었다. 정한은 다만 이 순간이 벅차도록 즐겁고 행복했다.

 

정한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팔을 크게 벌렸다. 멀쩡히 가던 사람이 갑자기 뚝 서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니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정한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 공기가 너무 좋아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배운 사람처럼.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네. 뭔데요?”

“여행을 왜 다니세요?”

“여행을 왜 다니냐구요?”

 

음……. 정한은 일찍이 자기가 저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함과 생경함 속에 빠졌다. 내가 살다살다 여행 왜 다니냐는 말을 다 듣다니. 저거 원래 내 단골멘트였는데.

 

“그냥, 돌아다니다 보면 문득 내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운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지금처럼.”

“…….”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요.”

 

번잡한 도시, 차 경적 소리와 바쁜 교차로, 조용한 마을, 고요함과 인적 드문 시골길. 이 공기, 하늘, 나무, 풀,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 한 마리까지 전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게 좋아서. 정한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나도 당신한테 궁금한 게 많은데. 이번에는 제가 물어봐도 돼요?

 

“그쪽은 운명을 믿어요?”

“아니요.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해서.” 

“저두 그래요. 운명적인 사랑, 뭐 그런 건 다 허상이드라구요.”

“…….”

“근데 확실히 정해져 있는 미래란 게 있다면요?”

“…….”

“전 운명은 안 믿는데, 끝은 믿어요.”

 

윤정한은 원래 적당히 염세적이고 또 적당히 낭만적인 인간이었다. 정한의 마음 속에는 염세의 방과 낭만의 방이 하나씩 있어서, 어떤 삶의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둘 중 하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으로 선택과 판단을 해 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자신은 꽤 오래도록 염세의 방에 갇힌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현실적인 사고와 실리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일상의 채찍질에 쫓겨 도통 열어볼 일이 없던 낭만의 방에는 거미줄이 쳤다.

 

“혹시 종말론자예요?”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일에는 다 끝이 있다는 걸 믿는다구요. 그게 다행이든 불행이든.”

 

염세의 방에 살던 정한은 운명론 비슷한 건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자신을 초월하고 압도하는 당연한 무언가가 삶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삶이 종착지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끝이란 건 모든 존재가 예외 없이 끌어안을 운명이다. 처음과 끝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으니까. 자기가 곧 있으면 세상과 안녕하리란 사실을 알게 되고,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 일련의 흐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정한의 마음 속 쪼그라들어 있던 낭만의 방을 조금씩 키워 그를 꿈꾸게 만들었다. 느껴보니 알 수 있었다. 꿈을 꾸는 건 현실감의 상실 같은 게 아니었다. 뒤늦게 맞이한 여유였지.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래서 정한에게 운명애란, 지극히 환상적인 사랑만큼이나 달콤하고 한편으론 계약과 거래만큼이나 건조한 것이었다. 큰 나뭇잎들 밑을 지나는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들이 빠르게 얼룩을 지우고 사라졌다. 정한의 말을 차근차근 곱씹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고 묘한 얼굴이었다. 버릇인가 보다. 보다 보니 이 사람은 표정 구경하는 맛이 있단 말이야. 말수는 적어도 표정으로 다 대꾸한다.

 

“원래는 돌아다니면 피곤해서 여행 별로 안 좋아했는데, 마음이 편해지니깐 경험이 고프더라구요.”

“…….”

“뭔가 심오한 목적이 있어서 돌아다니는 건 아니구요. 그냥, 추억 쌓으러 다녀요.”

“…….”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니까.”

 

남자는 발걸음을 맞추며 묵묵히 정한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요새는 그냥 모든 것에 고마워요.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고맙고. 낯선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도 고맙고. 이 머나먼 타국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고맙고. 싸고 예쁜 기념품 산 것도 고맙구요.”

“…….”

“끝이 다가오니까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 보이지 않게 됐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끝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정한은 한참을 고민하다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그냥. 누구에게나 오는 거요. 어쩐지 선뜻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죽음이라는 두 음절짜리 말을 내뱉지 못해 장황하고 우회적인 말로 숨겼다는 것 자체가 마음속 꽁꽁 숨겨둔 두려움을 탄로 내는 것만 같아서. 죽음을 왜 죽음이라 말하지 못하나? 나는 여태껏 껍데기를 입고 있었구나. 괜찮은 척 하는 껍데기. 그래,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 하지만 그 속내가 남자에게 전해질까 봐 부끄러웠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도 겁쟁이로 보이기는 싫어.

 

“피할 수 없어서 즐기고 있어요.”

 

남자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속눈썹이 차양처럼 그림자를 만들었다. 정한은 혼자 자기 얘길 떠드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머쓱했다. 아 나 원래 낯가리는데. 죽을 날 받아놓고 사니깐 처음 만난 사람한테 주절주절 하소연도 하게 되네. 그치만 어차피 곧 헤어질 사람인데 뭐. 미소짓는 정한을 멀거니 바라보던 남자는 눈길을 거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피할 수 있어요.

 

“네?”

“운명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심리적인 굴레일 뿐이에요.”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앞날은 내 선택의 결과인 거. 그래서 나도 안 믿는다니까요? 그냥…… 언젠가 다 끝난다고 생각하면 평화로워진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건 그냥 포기한 거잖아요.”

“…….”

“그게 운명을 믿는 거죠. 거기 맡겨버리는 거죠. 왜 끝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자기가 정하는 건데.”

 

사람의 힘으로 어쩔 도리 없는 걸 무슨 수로? 자기가 정하는 거였으면 진시황도 아직 살아있게. 정한은 싱겁게 웃었다. 능력 있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굳이 매달리고 싶지 않아서요.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죠. 영원한 게 어딨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사실 남자의 말이 맞다. 다 스스로 정하는 거다. 운명처럼 끝이 다가온다 해도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몫은 달라지지 않는다. 너무 아쉽든, 너무 고통스럽든 자기 힘으로 그 시간을 직시하고 겪어내야 하는 건 변함 없다.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거니까.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그래서 정한은 현재를 살아가는 중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혹, 현재를 살아가다 보면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지. 끝을,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저 남자는 좀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간절한 이들에게 자꾸 희망을 심으려 하는 사람. 쓸데없는 희망이 집착이 되고 곧 고문이 되는 건데.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정한의 옆 얼굴을 지긋이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둘 사이는 오래도록 발소리만이 메웠다.

 

 

 

-

 

 

 

시나브로 걸어온 끝에 눈 앞엔 드넓은 들판이 드리웠다. 정한과 남자는 탁 트인 풀밭 아무곳에나 대충 짐을 부리고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정한은 남자에게 물병을 건넸다.

 

“그쪽은 어쩌다 여기서 행상을 해요? 집이 여기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물 한 모금을 삼킨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이 크게 서는 마을로 물건 팔러 왔어요. 신세 지던 집에서 쫓겨나서 집은 이제 없고요. 아……. 정한은 받은 물병을 가방 옆구리에 끼워넣었다.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같이 다니게 됐는데.”

 

풀꽃을 뜯어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윤정한이고, 얼마 전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요.”

“…….”

“제가 세계일주가 꿈이거든요. 그래서 죽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어서 막 유럽이랑 아시아 가리지 않구 여행했어요. 아마, 여기가 마지막.”

 

인정해버렸다. 겁쟁이로 보이기 싫어서. 속이 후련해진 정한과 반대로 외려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할 말을 찾는 듯 입술을 움질거리면서. 부담 주려고 말한 건 아닌데……. 줘 봐요. 정한은 남자가 들고 있던 풀 포기를 서로 꼬아 남자의 귓바퀴 뒤에 꽂아주었다. 이쁘다. 정한은 바람결이 남자의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어놓는 걸 보며 턱짓 했다. 그쪽은요.

 

“어…… 제 이름은 버논이고, 장인 밑에서 수를 놓았었어요. 몇 주 전에 쫓겨났고요. 지금은 하고 싶었던 일을 해요. 그리고, 당신이 제 첫 손님이에요.”

 

느릿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편안함을 주었다. 우와. 내가 첫 손님이래. 정한은 그걸 자기에게 굳이 말해주는 남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정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세계일주는 성공한 거예요?”

“아뇨. 다 못했죠. 시간이 부족해서. 주치의 쌤이 이제 그만하구 입원하래요.”

“…….”

“당신은 돈이 없고 나는 시간이 없네요.”

“우리가 함께 하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거예요.”

“글쎄, 그게 될까요. 돈은 언제든 채워지는 것이라지만 흘러가는 시간은 다시 채우기가 안 되잖아요.”

“왜 안 돼요?”

 

남자는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아까 나한테서 시간을 사 갔잖아요. 정한은 조금 황당했다. 이 사람 진심인가?

 

“뭐 증명도 안 된다면서요.”

“증명이 안 된다고 해서 효과가 없는 건 아닌데요. 시간은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가늠할 수도 없으니까요. 모든 건 사람 마음에 달려 있거든요.”

 

아니 무슨 그런. 그럼 고객한테 제대로 된 서비스가 제공 될지 안 될지 체크도 안 되는 걸 무작정 돈 받고 판다는 거예요? 시간이 늘어났다고 느꼈어도 그게 위약 효과인지 아닌지는 또 어떻게 알아요. 정한이 빙글빙글 웃음기를 달고 반박하자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효과 없을 사람에게는 아예 안 파니까요. 그리고 그래서 제가 여기 있잖아요. 체크해드리러. 정한은 까르르 웃었다. 아, 내가 매입한 시간 잘 쓰고 있는지 보려고 같이 다니기로 한 거예요? 남자는 정한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뾰루퉁한 표정을 했다. 당신도 내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하는군요. 아니에요. 믿으니까 돈 주고 샀죠.

 

“근데 있잖아요. 언제까지 나 따라다닐 거예요?”

“……혹시 불편하세요? 저 돈 있어요.”

“돈은 저도 있어요. 빈털터리 벗겨먹어서 뭐하게요. 그게 아니라 언제까지 동행이 가능한지 궁금해서.”

“어…… 아마도 당신이 날 필요로 할 때까지는 계속요?”

 

정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러니깐 꼭 내가 같이 다녀달라고 사정한 것 같네. 자기가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 와 놓구선. 뭐 나쁘진 않지만.

 

“그러면 저 출국할 때까지는 같이 다닐래요?”

“좋아요.”

“아님, 혹시 뭐, 버논 씨만 괜찮으면 계속 같이 다녀도 좋구요.”

“좋아요.”

“다 좋대. 무슨 예스맨이에요?”

“다 좋으니까요.”

 

결 보드라운 산들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와 이마를 간질였다. 근데 이 남잔 갈 곳이 없다더니 정말 나 가는 대로만 주구장창 끌려다닐 셈인가. 어디 가냐고 한 번을 안 묻네. 내가 델꾸 가서 확 원양어선에라도 태우면 어쩌려고. 정한은 남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말했다. 좀 이따가 숙소로 가요. 예약해둔 곳 있어요. 저기, 그 전에.

 

“우리 경치 구경하러 안 갈래요.”

“무슨 경치요?”

“여행 온 거라면서요. 전 항상 이 마을 오면 구릉으로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는 진짜 예쁜 풍경이 있어요. 좀 많이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아.”

“근데 보려면 해 지기 전에 빨리 가야 돼요. 지금부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저물녘 바람이 선선했다. 그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정한의 손을 꼭 쥐고 깍지를 껴 왔다. 정한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냥 두었다. 남자는 해맑게 웃더니 정한의 손을 끌고 뛰었다. 이게 무슨, 산책 나와서 신난 강아지한테 끌려가는 견주도 아니고. 정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리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남자를 따라 잠시 달리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벼웠다. 평소 때라면 정한의 몸으로 이렇게 뜀박질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남자에게 끌려가던 정한은 내친 김에 발을 맞춰 뛰기 시작했다. 둘은 완만한 언덕을 힘차게 달려올라갔다. 정한은 문득,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 동행을 하고 초원에서 함께 손을 잡고 달리기까지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리고, 재밌었다.

 

30분 정도를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남자를 따라갔다. 앞서 가던 남자가 불현듯 멈춰 섰다. 정한은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풀밭에는 벌써 잘려나간 태양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몸을 펴고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사진 같은 광경을 목도했다. 순간 숨 쉬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압도되고 말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눈 앞에 펼쳐진 건 흔하디 흔한 노을 지는 모습이 아니었다. 단언컨대 수없이 많은 저녁과 밤을 보내온 정한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노을이었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해가 가까이 다가온 고지에서 조우한 낙조는 어릴 적 해안가에서 수평선 밑으로 침몰하던 해를 보았던 기억 다음으로 오감을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용암처럼 녹아흐르는 빛을 우두커니 보고 있던 정한은 문득 한 발 앞에 선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자가 팔을 벌리고 크게 들숨을 마셨다. 그의 콧대와 뺨을 타고 붉은 빛이 눈물처럼 맺혔다 떨어졌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정한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불렀다. 버논 씨.

 

“네?”

“혹시 지금, 슬퍼요?”

“아니요. 왜요?”

“…….”

“……?”

“아. 아니에요.”

 

너무 슬픈 날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마흔네 번이나 지켜봤다던, 유명한 동화 속 꼬마 왕자가 떠올랐다. 파일럿이 어린 왕자랑 같이 성간 여행을 했다면 보았을까? 저런 표정을.

 

“저는 지금 너무 기쁜데.”

 

안 슬프면, 다행이구요. 대충 얼버무리고 남자의 곧게 닿아오는 시선을 외면했다. 대체 왜 저렇게 쳐다본담. 부끄럽게. 저 눈은 참, 문제다.

 

마음이 설렜다. 태양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는 순간. 목전에서 저무는 커다란 노을. 사진기를 챙겨오지 않은 게 처음으로 후회가 됐다. 괜한 미련을 남길까 봐 가져오지 않았는데. 눈에라도 열심히 담아야지. 정한은 집게손가락끼리 포개어 프레임 모양을 만들었다. 파노라마처럼 앵글을 움직이다 손가락 사이로 남자의 뒷모습을 잡았다. 때마침 남자가 정한 편을 돌아보았다. 미풍에 흩날리는 머리칼과 환하게 웃는 입모양이 시원스러웠다. 이건, 그 어느 나라를 돌아다녀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인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정말…… 멋있네요.”

“뿌듯해요. 어떠한 시작에 제가 함께하고 있다는 게.”

“……시작이요?”

“네. 시작. 일몰 후에는 달이 떠오르잖아요. 달 뜨는 밤이 되면 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

“그래서 전 기쁜 날에는 해가 지는 걸 봐요.”

 

시작. 떨어지는 태양을 앞두고 나온 그 단어를 정한은 천천히 되뇌었다. 끝을, 시작으로도 읽을 수 있다니.

 

“제가 이런 곳을 여러 군데 알아요. 앞으로 같이 보러 다녀요.”

“오래 함께하지는 못 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물론이죠. 지구 열두 바퀴도 충분해요. 당신은 시간 주머니를 열두 개나 얻었으니까요.”

 

정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완판한 게 엄청 기분 좋은가 본데. 남자의 호박색 눈이 의아하다는 듯 반짝였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저 남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얻긴 했다. 그동안은 쭉 혼자 여행을 했었는데,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한은 문득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 산등성이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몰락하는 태양이지만 사무치도록 아름답다. 나의 인생도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 채로 저물어간다. 남자의 그림 같은 옆선이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먹을거리 좀 사 왔어요. 숙소 앞에 피워 놓은 불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아이처럼 신나서 박수를 짝짝 쳤다. 오와. 엉성하게 만든 모닥불로부터 타닥타닥 나뭇가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물거리며 빵을 먹는 남자를 지켜보다 정한은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주머니에 담았어요?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궁금했다. 무슨 근거로 무형의 시간을 주머니에 담아 판다고 하는 건지. 남자는 입가를 닦고 말했다. 원랜 비밀인데. 정한 씨는 내 손님이니까 말해줄게요.

 

“저기 하늘에 별 보이죠? 여긴 하늘이 맑아서 엄청 잘 보여요.”

“우와, 별빛이 엄청 선명해요. 진짜 예쁘다.”

“근데 저 별들이 아직도 어떤 데서는 시공간의 척도라는 거 아세요?”

“오. 몰랐어요.”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그래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많이 얘기해줬어요.”

 

남자가 하늘을 우러르며 잠시 침묵했다. 유리구슬 같은 눈이 별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반짝였다.

 

“별은 모든 나그네들의 등대예요. 옛 상인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별을 나침반 삼아 걸었대요.”

“…….”

“여기는 기후가 사시사철 비슷비슷해서 계절이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사실 있어요. 미묘하게 계절이 변하는 걸 별자리를 보면서 가늠하기도 해요.”

“정말 시공간을 재는 척도네요.”

“그뿐만 아니에요. 별들이 시간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하거든요.”

 

여행을 하면서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고 했잖아요. 혹시 밤하늘에 총총 뜬 별 보다가 그런 적은 없었어요? 저는 있었어요.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한다는 걸 생각하면서 자기 앞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이요. 남자는 목을 축이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도 별하고 똑같아요. 생겼다가도 사라지고, 또 생기고.

 

“우리 조상들은 보이던 별이 하나씩 사라지면 누군가가 죽은 거라고 생각했대요. 별하고 사람은 이어져 있어서, 하늘의 별이 지면 지상의 별도 수명이 다 한 거라고. 반대로 못 보던 별이 생기면, 누군가가 태어난 거라고.”

“…….”

“별은 힘을 갖고 있어요. 사람처럼.”

“…….”

“저는 매일 밤 별을 바라보면서 주머니에 수를 놓았어요. 그리고 그 안에 사라져 갔고, 지금 여기 있고, 곧 생겨날 별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남자는 정한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에 귀 기울이는 순간 작은 속삭임 하나하나가 당신의 찰나가 될 거예요. 정한은 황당했다.

 

“그게 다예요?”

 

그런 추상적이고 주술적인 방법을 써서 시간을 물리적으로 저장했다고?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한은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남자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평범한 사람인데요. 이거 우리 마을에선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당신 고향은 대체 어디길래 평범한 사람이 별에서 시간을 떼다 팔아요? 한 번 가보고 싶네.”

“못 가요.”

“왜요?”

“저 위에 있거든요.”

“…….”

“…….”

“……오오.”

 

정한은 흔들리는 눈빛을 들킬까 봐 얼른 눈을 피했다. 남자가 하늘을 향해 솟은 손가락을 무심하게 내리고 빵도 내려놓았다. 진짜 어린 왕자였네…….

 

“그리고 수 놓는 기술은, 그니까 주머니는 그냥 담는 그릇일 뿐이에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 가는 사람에게 있어요.”

“…….”

“시간은 형태가 없잖아요. 그래서 준비물도 형태가 없는 것이에요. 마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희망과 상상력. 그게 있어야 제가 만든 주머니로부터 시간을 얻을 수 있어요. 희망은 간절히 염원하는 무언가를 위한 것, 상상력은 시간을 벌어 쓸 수 있다는 믿음을 위한 거예요.

 

“흘러가는 시간은 억지로 붙잡을 수 없어요. 대신 흘러가는 내 마음을 붙잡을 순 있어도.”

 

마음을 붙잡으면 비로소 시간을 얻는 거예요. 남자가 제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파는 시간은 지금 여기 있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 효과 없을 거예요.”

“좀, 어려운데요. 어른들은 마련하기 힘든 준비물이네요. 약간 착한 사람, 동심을 간직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대긴 하지만요. 사용하면 사라져서 안 보일 테니까.

 

“그럼 난 착하고 아직 동심도 갖고 있으니까 효과 좀 보겠다.”

 

장난기 섞인 말에 남자가 그렇다는 듯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농담이 안 통하는 사람이네. 괜히 민망해진 정한은 헛기침을 했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거네요.”

“근데 우리 모두 원래 시간을 감당하면서 살아요.”

“응, 그러네요.”

 

그렇네 진짜. 쉬우면서도 어렵고 간단하면서 복잡하다.

 

“신세 지던 집에서는 어쩌다 쫓겨났어요?”

“이러다가요. 자꾸 허무맹랑한 소리만 하고 헛짓거리 한다고.”

“헐. 그런다고 쫓아내요? 너무하다……. 앞으로 계획은 있어요?”

“…….”

“그래서 저 따라온 거죠.”

“…….”

 

남자가 못 들은 척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근데, 쫓겨나면서까지 만든 귀한 걸 왜 버논 씨가 안 썼어요?”

“저한테는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처음부터 시간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만든 거예요. 시간은 함부로 줘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 대가는 조금 받고요.”

“아.”

“시간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요.”

“…….”

“사실은 당신 이전에 딱 한 번, 어떤 사람이 저한테서 시간을 사 간 적이 있었어요. 근데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저더러 사기꾼이라면서 고발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시간을 되돌려서 죽은 연인과 다시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는데, 몇 날 며칠을 가지고 있어도 효과가 없다고.”

“…….”

“하늘에 있는 연인이 돌이키기를 거부했어요. 계속 별로 살고 싶다고.”

“…….”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물러줬어요.”

“…….”

“남을 멋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 사고 싶다는 사람에게 그냥 팔았던 건데. 누군가의 시간이 타인의 의지를 거스르는 일방적인 소원 같은 거라면 참 곤란해요. 그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근데 그런 속사정을 어떻게 알았어요? 눈에 보여요?”

“보이는 건 아니고 그냥, 뭐. 느껴져요. 말했잖아요. 사람하고 별은 이어져 있다고.”

“그럼 저는 어떤데요? 건강하게 잘 쓸 거 같아요?”

“네. 보다시피.”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웃는 정한을 보며 남자도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그런데 그 사람보다도, 시간이 필요한데 저를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한테서 마음이 더 상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살면서 체념하는 법을 배우나 봐요. 남자가 눈썹 위를 긁으면서 말했다. 정한은 남자의 동화 같은 얘기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남자가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말마따나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 사람 홀리는 저 신비론 눈동자 하며, 낮고 잔잔한 목소리 하며. 저런 낭만에 젖은 얘기를 듣는 이로 하여금 어느새 경청하게 만드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다.

 

눈, 남자의 눈에는 태양이 있다. 그 눈은 이해를 유도한다. 깜빡임 한 번에 낮과 밤이 휙휙 바뀌는 것처럼 출처 모를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쏟아내는 언어는 마음 깊이 공감할 수는 없어도 어쩐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얘기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는 게 시간인데.”

“그 체념한 사람들도 예전엔 마음을 먹어보지 않았을까요. 간절히 소망했을 거예요. 내게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하고.”

“…….”

“너무 절실히 바라면, 다 포기해버리기도 쉽잖아요. 기대한 만큼 실망은 크고 염원한 만큼 좌절은 깊은 법이니까요. 너무 지쳐서 다시는 희망을 품지 않게 돼요. 더 이상 상상하지도 않구.”

“…….”

“그냥 순응하는 게 편해지는 거예요. 모든 게 내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거죠, 결국은.”

“……그런가요.”

 

남자는 시무룩하게 무릎을 감싸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망이나 상상이란 게,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닌가 봐요.

 

자신은 어린 왕자를 만난 파일럿, 그에게서 그림 하나를 건네받았다. 이해를 원한다는 신호. 정한은 문득 그냥 남자를 알아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 언젠가 꿈꿨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기는 그 그림이 보아뱀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겐 보아뱀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남자의 눈을 하고 본다. 그리고 보이는 그대로, 읽어주면 된다.

 

“준비된 사람에게만 좋은 거니까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겐 분명코 좋은 일이긴 하니까요, 없던 시간을 준다는 게. 원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잖아요.”

“네…….”

“시간이란 건 가능성을 주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시간을 파는 일은 아주 즐겁고 보람찬 일일 거예요.”

“…….”

“말하자면 작은 낙원을 파는 게 아닐까 해요. 그냥 아편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

“근데 당신이 파는 건 왠지 낙원일 거란 확신이 있네요.”

 

남자의 일 자로 굳어있던 입매가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당신의 손님들이 당신을 만나지 못한 게 안타까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나 가면 시간 주머니 또 만들어서 팔 거예요?”

“이젠 못 만들어요. 주머니는 별자리를 따서 딱 12개만 만든 거고, 거기 담느라 이미 엄청 오랜 시간들을 빌려버렸거든요.”

“헐. 그런 줄도 모르고 한꺼번에 싹 쓸어와버렸네. 내가 너무 욕심쟁이였네요. 지금이라도 무를래요? 하나만 가져갈게.”

“괜찮아요. 전 제 물건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부 돌아갔다고 생각해요.”

 

정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버논 씨 진짜 어린 왕자 같아요. 남자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린 왕자가 뭐예요? 역시. 모른다고 할 줄 알았다.

 

있어요. 버논 씨랑 닮은 애. 작품 이름이기도 한데 당신이랑 닮은 인물 나오니까 꼭 읽어봐요.

네.

있잖아요. 내가 지금 여행 경비도 다 대주는데 나중에 고향 한 번 데리고 가주면 안 돼요?

당분간은 안 될 거 같은데.

왜요? 아아. 나 데리고 가줘요.

그게, 음…… 노력해볼게요.

노력만?

…….

히히. 알겠어요. 나중에요.

……다 고치면, 같이 타고 가요.

네?

같이 가요. 꼭.

 

 

 

-

 

 

 

서리가 내리기 전에 들어가야 되는데. 야경이 너무 예뻤다. 조금만 있다가 깨울까. 정한이 사온 음식을 먹고 곯아떨어진 남자는 모로 누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가 어느새 사라졌다. 어디 갔지? 가방에 넣어 뒀나. 정한은 주머니를 꺼내보려고 조심스레 배낭을 열었다. 그런데 안을 확인한 정한의 당황한 손은 곧 가방을 거칠게 뒤질 수 밖에 없었다. 들고 있던 것뿐만 아니라 낮에 분명 가방 속에 넣었던 주머니들까지 온데간데 없어져 있었다. 순간 소매치기를 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정한은 남자와 함께 쭉 사람 없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걸어왔다. 기척 없는 노련한 도둑에게 털린 것이라고 해도, 그가 돈이 든 지갑 말고 굳이 가방을 열어 부피도 큰 주머니들을 훔쳐갈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물건들은 그대로 들어있었다. 남자가 가져갔을까? 하지만 남자에게는 짐을 담을 가방이 없었다.

 

그때 정한은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혹시. 내가 산 것이 진짜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었단 말인가? 정한은 남자를 흘긋 넘어다 보았다. 남자는 세상 모르는 얼굴로 자고 있었다. 남자가 판다던 시간이, 정말……. 에이. 설마.

 

정한은 모포를 꺼내 남자의 몸에 덮어주고 검푸르게 물든 밤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일몰이 지나고 월출이 찾아왔다. 어쩌면 새로운 시작은 이미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점점이 떠 있는 수많은 별빛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시들어가던 별빛 하나가 다시 생생해져서 저 광막한 하늘 어딘가에 박혀 있을까?

 

남자가 몸을 뒤척였다. 모닥불은 조용히 타올랐다. 분명 자신의 끝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없게 됐다. 선명했던 운명은 안개 속에 가리어 버렸다. 여행길에서 만난 저 이상한 남자 때문에. 정말로 시간을 얻은 것일까?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진귀하고 값진 시간을?

 

그냥, 어딘가 칠칠맞게 흘렸거나 도둑맞아서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랬겠지, 당연히. 하지만…… 자신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정한은 바로 그 조그만 가능성이 이미 제 생의 마침표를 치워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괴롭히던 긴장이 비로소 풀린 느낌에 허탈감이 찾아왔다. 웃음은 자꾸만 터졌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었다.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정한의 마음 속에. 나는 앞으로 무수한 현재를 살겠지. 끝을 알지만 모르는 채로.

 

정한은 남자를 보고 있다.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없는 태양을 자기 두 눈 속에 나누어 담은 남자를.

 

저 남자와 함께 하는 순간이 나의 시간이었다. 이대로 날이 무르익고 새 아침이 떠오르면, 우리는 시간으로 충만한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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