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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원솔] Seasons of Love

미쯔 / 글

Seasons of Love

 

*글에 등장하는 지명은 실제 장소와 무관합니다.

 

 

겨울

사랑, 나는 멀리 여기에

 

원우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이끌고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몇 년 전 같은 곳에 내렸을 때 느꼈던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몸과 마음의 수분이 쪽 빨린 상태였다. 쉴 틈 없이 바쁜 이 도시에 내 자리 하나 쯤 만들려고 고군분투 했던 지난날들은 야속하게 스쳐가고 이제는 그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재생되는 도시의 영상이 극심한 피로감을 줄 뿐이다. 더 이상 원인이 궁금하지도 않은 만성 두통이 몰려오는 머리를 간신히 서리가 낀 창문에 기댔다. 고향인 문월리 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있을 리 만무하고 가장 가까운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도 밤 시간에 딱 한 대 뿐이다. 원우는 쉽게 냉기가 빠지지 않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창문 밖의 어둠으로 빨려들어갔다.

부스럭대는 패딩을 벗지도 못한 채 잠이 든 원우는 가로등이 겨우 하나 켜져 있는 정류장에 내렸다. 여기서부턴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다. 떠날 때 쯤 하우스 천막 보수 공사를 할거라던 고씨 아저씨네 감자밭은 그대로였다. 여기서 조금 꺾으면 어릴 때 자주 밥을 주던 누렁이 남매들 집이 있다. 물그릇에 살얼음이 살짝 서려 있는 걸 보니 제 뒤를 이어 누군가 챙겨주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더 걸으면 나오는 언덕, 엄마는 꼭 여기에 다 먹은 토마토 꼭지를 던지면서 내년에 저 자리에 뭐가 자라는지 지켜보자고 얘기하곤 했었다. 그리고 아직도 깜빡대는 저 가로등은 ....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원우는 발걸음을 늦췄다. 집이 보였다.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있는 작고 아담한 푸른 지붕 집. 여름엔 높이 자란 해바라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집. 원우가 떠나고 오년 동안, 어쩌면 더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을 그 집, 비탈길을 오를 때도 가쁘지 않았던 숨이 차온다. 원우는 심호흡을 한 후 가방끈을 움켜쥐고 문을 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 오년 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 치고 매우 양호했다. 버석한 얼굴에 삼 일은 굶은 것처럼 가죽만 남은 몸을 이끌고 온 원우보다 집 꼴이 더 나았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돌보아진 티가 났다. 가구는 낡았지만 먼지는 없었고 난방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수도는 녹슬지 않고 성했다. 마치 누군가 돌아올 걸 알고 가꾸어 둔 것처럼 소박하고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었다. 

원우는 아직 2015학년도 정시표가 붙어있는 제 방에 들어가 장장 다섯 시간의 고행에 지친 몸을 풀썩 뉘였다. 서울에 올라간 후 5년 내내 5.5평짜리 자취방에서 구겨져 살아서 그런지 훤히 트인 창으로 작은 마당이 보이는 게 낯설었다. 시선으로 크게 포물선을 그려도 벽지의 얼룩이나 못다 치운 빨래가 걸리적 거리지 않는다니. 원우는 새삼 제가 포기해왔던 사치가 너무나 소박하는 생각에 울적해졌다. 

형, 금붕어는 자기가 담겨져 있는 어항에 따라 크기가 바뀐대.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래서 한 뼘만큼도 못 크고 돌아왔나 보다. 아등바등 살아도 한 발도 앞으로 못 나가고 5.5평 짜리 어항에 갇힌 금붕어처럼 여전히 그렇게. 원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몸이 반쯤 녹고 나니 점심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는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나라가 챙겨주는 밥을 먹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원우는 절대 끼니를 챙기는 것과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 픽픽 쓰러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응급실 수액 담당 간호사와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런 사람이 배달의 민족도 씨유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값진 노동을 퍼담아 한 끼를 완성해야 하는 이 곳에서 그나마 붙어 있는 살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원우 자신마저도.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엄마가 해줬던 밤참 레시피를 두세 개 쯤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누군가 언 땅 위를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우는 잠시 눈을 크게 뜬 뒤 호흡을 정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정이 가까워지는 이 시간에 굳이 원우를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이제 네 인생을 살아보라는 편지를 남긴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춘 엄마가 하필 이 타이밍에 돌아올 리는 없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친구라고 부를만한 동창들은 대학 입시가 다가올 때 쯤 앞 다퉈 이 동네를 떠났다. 오지랖 넓은 어르신들은 당연히 주무실 시간이다. 이 집엔 방범창도 cctv도 이중 잠금장치도 없다. 원우는 머릿속에 자동으로 재생되는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 몇 개를 애써 모른척하며 살금살금 현관으로 나섰다.

 

계세요?

문 밖에서 들려온 건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원우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아마 오랫동안 손님을 받지 않았을 현관문이 버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내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땅딸막한 키에 선한 표정, 김 서린 안경 뒤로 보이는 여전히 깊은 눈, 웃을 때면 주름이 깊게 패어지는 얼굴. 원우가 다니던 푸른꿈 고등학교의 문학 선생님이었다. 학교에 부임한 첫 날 자신의 이름은 최진송이지만 소나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길 원한다던, 이름처럼 원우의 유년기에 누구보다 든든한 그늘이 되어줬던, 몸이 찬 원우에게 따뜻함이 뭔지 처음으로 알려줬던 고마운 어른, 소나무선생님.

애매하게 녹았던 원우의 냉기 가득한 몸이 그제야 마음을 놓고 푹, 퍼진다. 원우는 미세하게 갈라진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고향에 왔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활짝 웃는 마른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째 더 말라서 왔냐고 핀잔하는 선생님을 원우는 반 박자 늦게 방으로 안내했다.

 

밤중에 어떻게 오셨어요. 아직 계실 줄은 몰랐는데..

아랫집 어른이 한잔 하고 들어오시는 길에 이 집에 불이 켜진 걸 봤대잖아. 그럴리 없대두 자꾸만 똑똑히 봤다 그러길래 긴가민가 하면서 와봤지. 진짜 있었네. 홀랑 도망가버린 미운 놈이.

 

선생님의 애정 어린 타박에 원우는 머쓱하게 웃는다. 

들어오세요. 아직 집에 아무 것도 없어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원우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던 소나무 선생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마당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들어와 뭘 그러고 있어. 형 온 거 맞대.

그리고는 원우를 향해 웃어 보인 뒤 발을 동동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얇은 문풍지 뒤로 내내 드리워져 있었던 큼지막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혼자 오신 게 아니었구나. 불현 듯 며칠 전부터 계속 꿈에 나와 원우의 일상을 헤집어 놓은 얼굴이 생각났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따라온 저 그림자는 아마도 그 애가 맞을 것이다. 선생님의 얼굴을 봤을 때부터 걔와의 만남이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반쯤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예민하고 성나 있는 도시의 공기가 못 견디게 힘들 때쯤이면 습관처럼 떠올렸던 얼굴인데도 당장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생각하니 원우의 심장이 못 견디게 빨리 뛰었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됐다. 어떻게든 마주칠 걸 알았지만 어떤 말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림자는 복잡한 원우의 머릿속을 기다려주지 않고 색채를 띠며 원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투박한 걸음걸이, 부스럭대는 점퍼, 늘어뜨린 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두운 다갈색 눈이 보였다. 마침내 그 얼굴을 온전히 마주본 순간 원우는 이 곳을 떠난 뒤 흐른 시간의 무게가 머리 위로 와장창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것 치고 꽤나 다채로웠던 원우의 유년시절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주인공, 고향에 내려오고 싶었던 이유이자 내려올 수 없었던 이유가 지금 제 눈앞에 서있었다. 앳되고 동그란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이 훌쩍 큰 키로 자신에게 고요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소나무 선생님의 아들 최한솔이.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는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서서 갈무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낫고 무뎌지는 그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해야 될 일투성이인데 서툴게 끝낸 첫사랑 정도는 세상이 알아서 정리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공과금도 근로계약서도 다 내가 알아서 하는데 그 정도는. 그게 얼마나 헛된 생각이었는지 증명이라도 해주듯 그 눈을 보는 순간 원우의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최한솔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는 원우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잘 지냈어? 한 마디를 건넨다. 귀에 익숙하게 감기는 갈라진 목소리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하고 너를 그렇게 남겨 둔 채 도망쳤던 어린 나를 애써서 변호해야 할까. 사실은 그렇게 좋다던 서울에서 나는 온갖 장르의 병을 얻고 너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못 만나고 왔다고 얘기해야 하나. 그게 창피해서, 민망하고 미안해서 더욱 돌아올 수가 없었다고 절박하게 얘기해볼까. 그럼 네가 묘하게 서린 눈가의 원망을 거두어 주려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겨울 묘목처럼 딱딱하게 굳은 원우 뒤로 12월의 차가운 공기가 들이쳤다. 한솔을 처음 만난 날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엄마를 따라 현이 아주머니네 김장을 도와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직 문월리에서 제일 큰 비닐하우스가 들어오기 전이라 휑했던 골목에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오늘 새로 이사를 들어오는 집이 있다더니 다들 궁금함을 못 참고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춥고 졸렸던 열한 살의 원우는 한 손으론 눈을 비비며 한 손으론 엄마 손을 잡고 곧 벡터맨이 시작할 시간임을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골목 끝에서 새파란 용달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오는 게 보였다. 트럭은 곧 사람들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내려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피곤할 만도 한데 다정한 목소리로 공손하게 응대하던 아저씨는 잠시 뒤 트럭 문을 열었다.

한솔아 인사해야지!

그리고 조막만한, 정말 자그마한 아이 한 명을 트럭에서 안아 내렸다. 아직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해 보이던 아이는 아저씨 품에 안겨 큰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힘을 주고 또박또박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어머. 어른들은 삽시간에 탄성을 질렀다. 애가 어쩜 이렇게 예쁠까. 원우도 눈을 비비적대던 손을 잠시 멈추고 멍하니 아이를 봤다. 하얗고 작은 게 꼭 방금 온 눈으로 만든 눈사람 같았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어머니가 외국사람 이랬던 것 같다. 미국과 외국이 같은 나라인 줄 알았던 어린 원우의 기억엔 그랬다. 애가 꼭 인형 같지? 탤런트 시켜야겠다 하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사이에서 원우는 한솔, 한솔이 하고 이름을 되뇌었다. 꿈뻑이는 한솔의 큰 눈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머물렀다.

이사 후 며칠 만에 한솔은 문월리의 유명인사가 됐다. 아침이면 꼭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한솔 주위로 또래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넌 미국도 가봤어? 너네 엄마는 지금 어딨어? 너 그럼 영어 잘 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질문에도 한솔은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을 맞추고 열심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저 집이 어떤 궤적을 거쳐 이 곳에 오게 됐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어른들도 저마다 과일을 한 접시씩 들고 한솔네 집 문을 두드렸다. 

요란스럽게 한솔을 데리고 문월리 이 곳 저 곳을 쏘다니는 아이들 소리가 들릴 때면 원우는 주방 옆 작은 창으로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곤 했다. 원우라고 티비에서 본 인형처럼 눈이 연한 그 아이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워낙 수줍음이 많은 성격 탓에, 그리고 그럴 때마다 원우야, 억지로 열린 마음이랑 스스로 연 마음은 다른거야 하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엄마 덕에 묵묵히 기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둘이 가까워진 건 의외로 한솔 덕분이었다.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 날, 한솔이 먼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원우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빨개진 한솔의 반대 쪽 손엔 팥죽이 든 보온병이 꼭 들려 있었다. 얘가 파란집 키 큰 형아랑 꼭 친구하고 싶다고, 새벽같이 일어나 눈꼽도 안 떼고 팥죽을 저었다니까요. 아직 소나무 선생님이 되기 전 한솔의 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하셨다. 원우의 엄마는 짐짓 반가운 얼굴을 하며 원우가 어린애답지 않게 팥죽 귀신인데 어떻게 알았냐며 활짝 웃으며 둘을 안으로 들였다.

그날 원우의 방에서 밤이 깊도록 웃고 떠들고 구른 이후로 둘은 수많은 겨울을 함께 보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면 원우의 방으로 달려와 함께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그림을 그렸고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웠다. 태웠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고구마도 한솔이 겨울 내내 입고 다니던 파란 패딩도 가끔은 머리카락도 태워먹었다. 원우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엔 한솔이 퉁퉁 부은 눈을 털모자로 가리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나타났다.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사진을 찍고 나서 한솔은 원우에게 꽃다발과 편지를 건넸다. 형 졸업 축하해, 중학교 가서도 나 잊지 마. 한솔이가. 

삼년 후 중학교 졸업식에선 한솔이 울지 않았다. 대신 나도 곧 따라갈건데 뭐. 했다. 한솔도 중2병은 피해가지 못했다. 문월리 유일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나란히 연결된 수도관이 얼어 단축수업을 했던 날, 둘은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함께 앙상한 나무로 가득한 뒷산을 코가 빨개질 때까지 걷기도 했다. 눈 위를 걷던 원우가 문득 너 아홉 살 때 나랑 왜 친해지고 싶었어? 라고 물으니 한솔은 망설이지 않고 애들이 형 집에 비디오 많댔어. 하고 대답했다. 원우는 그 말이 괘씸해 주변에 소복이 쌓인 눈을 한가득 퍼 담아 한솔에게 던졌었다. 한솔은 막 낮아지기 시작한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나무 사이로 도망을 다녔다. 한바탕 눈밭을 구르고 집에 들어오면 원우의 어머니는 어김없이 내가 못살아 하시며 국화차를 끓여주셨다. 난로 앞에 꼭 붙어 잔뜩 젖은 몸을 녹이고 있으면 꼭 세상에 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함께한 겨울이 많아질수록 관계는 깊어졌고 마음은 진해졌다. 스무살이 가까워지며 점점 두려움이 많아진 원우가 대학을, 미래를, 직업을 핑계로 한솔의 고백을 뒤로한 채 서울로 떠나버린 그 해를 빼면 겨울은 항상 둘에게 따뜻한 계절이었다. 

 

 

 

그리고 다시 올해 겨울. 소나무 선생님은 집을 둘러보다 그럼 둘이 얘기 나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원우 손에 그 때처럼 팥죽이 든 보온병을 쥐어주고 밥좀 잘 챙겨먹어 이놈아 하시고는.

그리하여 팥죽이 담긴 그릇을 사이에 두고 원우와 한솔은 몇 년 만에 다시 마주앉았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기 어색한 분위기에 김이라도 내는 건 팥죽뿐이었다. 원우는 여전히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솔이 낯설었다. 원우의 상상 속에서 한솔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선하고 큰 눈망울, 원우의 어깨 즈음에 오던 키. 원우의 게으른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앞엔 근육이 보기 좋게 붙은 팔과 넓어진 어깨가 잘 어울릴 만큼 훌쩍 큰 한솔이 앉아 있었다. 청년이 된 한솔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이 곳을 떠나고 흐른 5년의 묵직한 존재감이 다시금 원우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생각이 고리에 고리를 물고 깊어질 때 쯤 한솔이 먼저 목을 큼큼 다듬었다.

 

뭐..방학이라서 내려온 거야?

여전히 묘한 경계와 퉁명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원우는 그제야 한솔을 마주본다. 처음으로 둘의 시선이 제대로 마주쳤다.

아니.. 당분간 있으려고. 

.....

한.. 일년 쯤?

아무말도 없이 제 눈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한솔이 아주 강력하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어릴 적부터 궁금한 게 있으면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던 한솔이었다.

그.. 좀 쉬고싶기도 하고. 나 시험도 떨어졌고.. 집에 안 온지도 좀..좀 오래 됐고.. 

한솔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횡설수설하던 원우는 결국

서울 너무 추워서.. 나 추위 많이 타잖아. 

반칙을 썼다. 추억 꺼내기. 원우가 추위를 많이 타는 바람에 있었던 일 아흔 두 가지 정도를 떠올리게 하여 꽁꽁 언 한솔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이기. 그리고 눈치를 보며 살짝 웃는다.

진지한 눈빛으로 원우를 바라보던 한솔도 이내 바닥을 내려다보며 따라 웃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고 고개를 숙였지만 시원하게 벌어진 입매가 원우의 시선에 가득 들어찼다. 이렇게 허술한 작전이 통했다니, 원우는 스스로도 의아했다. 추위 한 마디 했다고 무서운 외국배우 같았던 얼굴이 삽시간에 아이처럼 풀어질 일인가? 여전히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조금 녹아내린 것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하긴 쟤가 어릴 때부터 작은 걸로 잘 웃긴 했었지, 원우는 생각했다.

 

그날 밤 한솔의 마음을 녹인 건 추위가 아니라 일 년이었다. 일 년은 여기에 있겠다는 원우의 말에 한솔이 품고 있던 걱정과 의문이 반은 녹아내렸다. 일 년은 밭을 일구고 모종을 심고 거름을 주고 열매를 수확하는 데에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일 년이면 원우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함께하고 또 어쩌면 미래를 꿈꿀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솔은 날 때부터 하루, 한시간 단위로 움직이는 바쁜 삶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어디에서 뭘 보고 사는지도 모르는 채 챗바퀴처럼 달리는 삶은 한솔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느리지만 크게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일 년이라면 할 수 있었다. 조급할 필요 없이 원우의 옆에서 발맞춰 걸으면 되는 거였다. 차근차근, 지금까지 해왔던 리듬대로.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는 한솔이 해결할 수 있었다. 한솔은 조급할 줄 몰랐다. 그게 지금까지 한솔을 살게 했다. 

드문드문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겨울도 녹고 두 마음도 녹고 있었다.

 

 

 

 

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아

 

원우는 방 안 가득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에 눈을 떴다. 8시였다. 느긋하게 마루에 걸터앉아 양치를 하곤 어제 밤 손질해 놓은 봄나물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아 아침을 먹었다. 네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원우가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는 데에 매 시간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여기선 해만 지면 어김없이 하늘이 새까매지고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러면 원우는 잡생각이 끼어들 틈새도 없이 어둠속으로 깔끔하게 빨려들어가듯이 잠을 잤다. 늘 부르터 있던 입가는 진정됐고 얼굴엔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 뜬금없이 고향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어쩌면 이런 시간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취업 난이도가 날이 갈수록 치솟는 시국에 이름난 대학의 인문학 전공자로서 포기해야 할 가치와 우선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 닭장 같은 학원에 갇혀 수업을 듣다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양일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당장 내일 뭘 해먹고 어떻게 잘지,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욕구에 집중하는 삶이 원우에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문월리에 내려온 뒤로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원우의 마음이 점차 곱게 풀어지고 있었다.

원우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보온병에 차가운 오미자차를 가득 담은 뒤 자전거에 올라탔다. 산수유꽃이 가득 피어져 있는 골목을 십오 분정도 달리면 한솔과 소나무 선생님의 포도밭이 나온다. 요즘 원우의 주된 일과는 포도밭 일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그늘에 앉아 한솔을 구경하는 것이다. 벌써 네 달 전, 원우가 문월리에 처음 도착한 겨울 밤 원우는 한솔에게 그동안 뭘 하고 지냈냐고 물었다. 한솔은 아버지와 함께 포도농사를 한지 삼년이 됐다고 했다. 원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너무 적어져 푸른꿈 고등학교가 폐교됐고 소나무 선생님은 작게 일구던 포도밭을 본격적으로 가꿔보기로 했단다. 한솔 역시 아버지를 도와 거름을 주고 묘목을 심는 것부터 시작해 이제는 인터넷 주문을 받고 읍내 우체국에 나가 발송하는 일까지 도맡아 한다고 했다. 한솔은 우리 포도는 당도가 너무 높고 신선해 한 번 맛본 손님들은 꼭 단골이 된다며 꽤나 뿌듯한 얼굴로 얘기했었다.

원우는 한솔이 기특했고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린 원우는 문월리 밖의 세상이 영영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릴까 두려웠다. 이 곳에선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닦달하며 서울로 떠났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행렬에 과잠을 입고 양복을 입고 함께 올라타고 싶었다. 피로를 등에 업고 어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빠르게만 걷는 삶이어도 여기서 흙을 밟는 것보다 가치 있다는 어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모든 것에 인사도 못한 채 서울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 흐른 뒤 원우는 건강을 대가로 내어주고 얻은 게 뭔지는 정확히 모른 채로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진득이 이 곳에 눌러 앉아 결국 스스로의 열매를 맺고 있는 한솔을 보니 원우는 제 방황이 부끄러워졌다. 한솔은 어릴 적부터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 치곤 얌전하고 묵묵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꼭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처럼. 그런 한솔을 다시 만나자 원우는 눈 딱 감고 나무 그늘에 쉬어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다들 나 빼고 바빠도 좋고 나 빼고 잘 나가도 좋으니 숨을 고르고 싶었다. 한솔의 옆에서 평화롭게.

원우는 얇은 셔츠 위로 선선히 부는 바람을 느끼며 포도밭에 도착했다. 한솔은 벌써 나와 나무뿌리 근처의 흩어진 흙을 모아주고 있었다. 자전거가 끼익 멈춰 서는 소리를 들은 한솔이 허리를 일으켜 원우를 바라본다. 햇빛을 받아 유독 빛나는 흰 얼굴과 떼 탄 목장갑을 끼고 있는 건강한 팔이 꼭 봄의 생명력을 한가득 담아놓은 것 같았다. 원우가 팔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한솔에게 건너가려고 하자 한솔이 입가에 손을 모으고 거기 기다려, 라고 소리친다. 어릴 땐 무조건 뒤를 따라오기만 했던 게 이젠 형한테 명령을 하는 게 퍽 자연스럽다. 

여기선 농사가 능숙하게 손에 익은 한솔이 형이고 선배고 선생님이었다. 원우는 한솔이 알려주는 제초제 종류를 헷갈리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떠야 했고 깔끔하게 가지를 치지 못할 때면 손에 힘을 좀 더 주라고 한솔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이 곳에서의 효용가치를 따진다면 원우는 거의 초등학교 삼학년과 비등했다. 토익 점수도 컴활 자격증도 한솔 앞에선 모두 무용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기 원우만의 문월리 최 선생님은 인구가 천만에 달하는 도시를 아무리 뒤져도 볼 수 없는 엄청난 미남이었으니까. 최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리고 잔뜩 진지한 표정을 짓다가도 원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밑줄 긋고 매우 잘생긴 얼굴로. 타성에 잔뜩 젖은 몸에 명품 가디건을 꾸역꾸역 끼운 인강 강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큼한 선생님이었다.

얌전히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뒤 한솔이 아버지와 함께 나타났다. 원우는 땀에 젖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긴 채 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솔을 보며 사람이 자연을 벗하고 살아야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봄 햇살에 건강하게 잘 익은 문월리 최한솔의 얼굴 같은. 

한솔은 원우의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방금 전까지 햇볕 밑에 있었던 사람의 열기가 훅 느껴졌다. 한솔의 아버지는 원우의 손에 큰 유리병 하나를 쥐어주며 선물. 하셨다. 오늘로 제초작업이 마무리 됐으니 푹 쉬라는 얘기도 남겼다. 가만히 병을 보고 있는 원우에게 한솔이 아빠가 작년부터 심혈을 기울여서 담근 포도주라고 얘기했다. 내가 한입만 달라고 할 땐 그렇게 안 주더니 형한텐 한 병을 준다면서 투덜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솔은 서운해 했지만 원우는 소나무 선생님께서 기특한 아들과 좋은 날 술 한 잔 할 소중한 기회를 자신에게 넘겨주셨다는 알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형은 옛날부터 우리 아빠 진짜 좋아하더라.

원우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본 한솔이 그늘 뒤로 몸을 늘어지게 젖히며 말했다.

응 나 선생님 진짜 좋아.

뭐가 그렇게 좋아?

듣고도 못 들은 척 잘 하셔서?

한솔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소나무 선생님은 혼란스러운 유년기 말 못할 고민들을 대나무숲처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어린 원우가 제 몸보다 무거운 고민에 휘청일때면 어김없이 옆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자신에게 시간을 오롯이 투자하여 가만히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원우도 시종일관 시끄러운 도시에 가기 전까진 몰랐었다. 한솔만큼은 아니지만 한솔 다음으로 그리웠던 소나무 선생님이었다. 

한참 고개를 젖히고 바람을 쐬던 한솔은 기지개를 펴더니 원우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씻고 간다.

까분다. 늦게 오면 내가 다 마실거야.

한솔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원우의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술도 못 마시는 게.

원우는 그 말을 남기고 척척 걸아가는 한솔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분명히 어릴 땐 천사같이 착했었는데.. 다 제가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난 것에 대한 복수이겠거니 했다.

 

 

 

한솔이 도착한 건 이른 저녁이었다. 수더분한 셔츠 차림에 감자를 들고 쫄래쫄래 들어오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원우는 문을 활짝 열고 최한솔, 쓰리 투 원, 을 외쳤다. 어릴 적 둘이 달리기를 시작할 때 어김없이 외치던 탑블레이드 구호였다. 느릿느릿 걸어오던 한솔은 원우를 향해 와다다 달리기 시작했고 고우 슛! 과 동시에 평상에 껑충 올라앉았다.

예전 같지 않네. 너도 늙었어. 옛날인 셋 둘에 바로 여기 와있었는데.

조잘대는 원우의 입에 감자 한조각을 밀어 넣은 한솔이 망설임 없이 포도주로 손을 뻗는다.

아니 무슨 오자마자 술을 까냐.

나 한 달 동안 술 구경도 못했어. 맨날 새벽에 나가느라고.

한솔이 불쌍한 고양이 같은 눈을 한다. 원우는 한솔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잔을 받았다. 짠, 꽃향기가 한 점 스며든 포도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마음에 아직 녹지 않은 불순물이 있다면 곱게 걸러 없애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었다. 작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고 꽃향기가 섞인 공기는 달았다. 둘 사이는 가까웠고 달콤한 포도주는 마음의 매듭을 헐겁게 만들었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말을 꺼내도 모른 척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늘이었다. 한참을 한솔과 마주보던 원우는 입을 열었다.

 

한솔아 나는..

막상 말을 꺼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될지 모르겠다. 변명처럼 들리긴 싫은데 최선을 다해 솔직해지고 싶었다. 

내가 그 때 그렇게 간 건.. 나는..너한테..

말과 생각이 이리저리 얽혀 꼬인 스텝을 만들어 냈다. 새벽 신도림역의 취객도 이것보다 엉망진창이진 않을 거다. 원우는 이미 붉은 얼굴이 한 번 더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사과도 고백도 아닌 엉킨 말을 꺼낸 것이 후회가 될 즈음이었다.

알아.

취기에 픽픽 넘어가는 원우의 뒷목에 손을 얹은 채 시선을 맞추던 한솔이 대답했다. 

나도 알아 형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

나도 형처럼 열아홉도 해보고 스물도 해봤어.

그래서 좀 알 것 같아. 형이 뭐가 불안했는지 왜 떠났는지. 

 

형 인생을 위해서 선택한 거잖아.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근데 형, 내가 궁금한 건 

.....

옛날 말고 지금. 지금은 어떤데?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진한 눈을 원우에게 고정하고 묻는 한솔을 보며 원우는 그 때를 떠올렸다. 근처 제일 큰 도시에 있는 학원에 다녀오느라 밤늦게 귀가하는 원우를 매일같이 기다렸던 한솔을. 피곤에 절은 원우를 말없이 집까지 데려다 줬던 한솔을. 쉬는 시간이면 곯아 떨어진 원우의 책상에 비타민 몇 개를 올려두고 갔던 한솔을. 평소와 같던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더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마음을 고백했던 한솔을. 그 때 한솔의 머리 위로 깜빡이던 가로등과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감정을.  

시간이 지나면 바래는 마음이 있다고 하지만 한솔에 대한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한솔을 향한 원우의 마음은 한 가지 색이었다. 손쓸 틈도 없이 진해지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도망쳤고 후회했고 다시 돌아왔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지금도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듯 눈을 맞추고 있는 지금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진해지기만 했다. 이 마음을 감히 말로 전할 자신이 없었던 원우는 조용히 고개를 꺾어 한솔에게 입을 맞췄다. 네가 내 안에 들어와 이 마음을 다 가져가주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잠시 놀란 듯 했던 한솔이 이내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원우의 뒷목을 단단히 바치고 있던 손목도 조금 더 부드럽게 방향을 바꿨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던 원우의 손에 한솔의 다른 쪽 손이 포개졌다. 맞닿은 입술의 온기는 포도주의 취기를 이길 만큼 따뜻했다. 4월의 밤공기는 둘을 정신없이 취하게 만들었다. 

 

 

 

여름

흔들어 날 잔잔히 넌

 

사방이 눈부신 초록빛으로 물든 여름이었다. 찌는 더위에 지칠 때 즈음 나타나는 나무 그늘에 철퍼덕 주저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땀이 마르고 청량한 하늘만이 눈에 들어오는 얄미운 계절이었다. 원우는 집과 학원과 알바를 오가는 대중교통의 에어컨 냄새로 기억되지 않는 여름이 오랜만이었다. 이 곳에서 본 여름은 생각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계절이었다. 풀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하늘도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덩달아 원우의 속에도 마법처럼 의욕과 활기가 가득 찼다. 무엇보다 한솔이 있었다. 한솔과 함께한 여름은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계곡에 놀러가 입이 새파래질 때까지 놀았을 때도 수박화채를 만들다 쏟는 바람에 바닥을 찐득하게 만들었을 때도 갑자기 오는 소나기를 피해 볏단을 파고 들어갔을 때도 모두 채도 높고 생생하게 행복했었다. 답지 않게 들뜬 원우는 여름을 알차게 준비했다. 읍내에 장이 선 날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화로와 평상에 놓을만한 작은 조명, 한솔이 일할 때마다 쓰는 모자와 비슷한 밀짚모자를 사왔다. 그리고 거액을 주고 2인용 여름 인견 이불까지 사들였다. 그냥.. 혹시 모르니까. 그때까지 원우는 책으로 글씨로만 보았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름다운 연인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문월리의 여름이 얼마나 바쁜지 알지 못한 도시 촌놈 원우의 과오였다. 여름을 맞은 한솔은 과장 좀 보태 한창 때의 아이돌만큼 바빴다. 포도나무에 꽃이 피기 무섭게 뺀찌를 들고 나가 넝쿨을 솎아야 했고 잔가지나 햇가지들은 철사에 칭칭 묶어 새로 나는 가지들과 섞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한솔의 애정을 잔뜩 받은 포도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그러면 한솔은 또 너무 길게 자란 가지가 포도의 영양분을 뺏어가지 않도록 하루 종일 가지치기를 해줘야 했다. 도무지 연애할 틈을 안 주는 포도들이었다.

그럼에도 한솔은 일과 사랑, 사랑과 일 둘 모두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끊임없이 생각나는 날, 한솔은 새벽까지 원우와 손을 잡고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동네를 돌아다녔다. 원우의 집과 한솔의 집 사이로 난 길을 열 번씩 왔다 갔다 하며 실없는 농담과 애정 섞인 말들을 나눴다. 간지럽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만 네시가 넘어서 원우를 집에 데려다 준 한솔이 한 숨도 못 자고 다섯시부터 포도 잎을 따러 나가야 했다는걸 안 후로 원우는 한솔을 늦게까지 잡아둘 수 없었다. 한솔의 하루는 원우보다 다섯 시간은 먼저 시작한다는 걸 백수 애인 원우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은 한솔을 찾아가는 것조차 부담이 될까 혼자 집에서 개도 안 씹는다는 여름 고독을 씹고 있는 원우였다. 술만 마시면 직장인 애인과 사귀는 고충을 털어놓던 취준생 친구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못 본지 꼬박 나흘 째 되는 날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문월리편도 아니고. 골목 하나를 지나면 한솔이 있는데 마음껏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답답했다. 사실은, 잘 먹고 잘 자서 원기를 이백프로 회복한 원우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원우는 살면서 이렇게 기력이 넘쳤던 적이 없었다. 그간 부족했던 식욕과 수면욕이 반년만에 채워지자 착실히 다음 단계를 원하는 자신의 몸이 낯설었다. 이렇게나 솔직한 몸이 내 것이라니. 자려고 누우면 땀 흘리는 한솔의 뒷모습과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이 아른거리는 게 괴로웠다. 특히 훌쩍 큰 몸을 하고선 눈은 여전히 어릴 때랑 똑같이 순진하고 맑은 게 정말 .... 여기까지 생각하다 원우는 진심으로 제 자신이 징그러워졌다. 더 이상 음침해지면 골방 삼류 야설작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서 한솔을 만나 건전한 교제, 정신적인 교류를 나누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원우는 닷새 째 되는 날 아침 무작정 자전거에 올라타 한솔의 포도밭으로 향했다. 그놈의 포도들은 원래 제 몫이었던 한솔의 관심을 잔뜩 받아 안 봐도 탐스럽게 열렸을 것이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어쩐지 더 열이 받았다.

포도밭에 도착하자 저 끝에서 선생님과 한솔이 보였다. 한솔의 석고상 같은 얼굴엔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한솔의 이름을 부르자 한솔이 돌아봤다. 땀에 젖은 얼굴이 사르르 풀어지더니 양 손에 포도 잎을 자르던 큰 가위와 제 키만한 봉투를 그대로 든 채 이 쪽으로 달려왔다. 그대로 팔을 벌려 원우를 안으려던 한솔은 땀이 범벅된 옷을 내려다보더니 잠시 멈칫했다. 안고 싶은데 땀이 너무 많이 났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우가 한솔을 세게 안는다. 한솔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솔은 농사에 열중하고 원우는 한솔에 열중하는 사이 구름이 심상치 않게 움직였다. 오늘따라 너무 무덥다 싶더니 비가 오려는 것 같았다. 톡 톡 떨어지던 빗방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서운 장대비가 되어 퍼붓기 시작했고 한솔과 원우는 재빨리 바구니를 머리에 쓰고 달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비를 피할 편의점도 마땅한 건물도 없는 이 곳에서 장마철이면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쫄딱 젖는 건 흔한 일이었다. 원우와 한솔은 그럴 때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가르며 한솔의 집까지 뛰어가곤 했었다.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샌들을 끊어먹기도 하면서. 포도밭에서 한솔의 집까지 뛰어가면 오분, 이번에도 역시 몸이 익숙하게 그 곳을 향했다.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원우는 오랜만에 한솔의 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와 파란 이불보가 씌워져 있던 침대는 없었다. 대신 깔끔한 벽과 프레임이 없는 매트리스가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항상 구슬과 딱지가 잔뜩 올라가 있었던 작은 책상도 안 보였다. 전체적으로 많이 달라졌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소나무 향만은 그대로였다. 어릴 때부터 한솔의 집은 토종 금강송으로 만든 집이라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원우는 금강송이 뭔지는 몰랐지만 다른 집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덜 화려한 그 집이 소나무 선생님과 한솔에게 꼭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솔의 집에서 낮잠이라도 잔 날이면 코끝에 향긋한 소나무 향이 오래 머물렀었다. 도시에선 비슷한 향이라도 맡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원우는 소나무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잠시 후 씻고 나온 한솔이 원우의 옆에 풀썩 기대앉았다. 한솔의 덜 마른 머리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포도 없이 둘만 있는 시간은 실로 오랜만이니 여름비의 선물인 셈이었다. 원우는 제 옆에 늘어져 있는 한솔의 손을 꽉 잡았다. 기억보다 훨씬 거칠고 단단해진 손이 한 손에 버겁게 잡히는 느낌이 좋았다. 막 씻고 나온 것 치곤 뜨끈한 손의 온기를 한참 느끼다 한솔을 돌아봤을 땐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을지 모를 눈과 마주쳤다. 보송한 몸과 달리 눈빛은 잔뜩 끈적이고 있었다. 원우가 익히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한솔은 어릴 때부터 원하는 게 있으면 뚫어져라 쳐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눈이었다. 원우가 열한 살 때였나 집에 놀러온 한솔은 엄마가 새로 사준 스페이스 오디세이 비디오를 발견하곤 종일 비디오가 꽂혀있는 선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드게임을 하다가도 구슬놀이를 하다가도 시선이 자꾸만 그 쪽으로 향했다. 원우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선반에 딱 붙어 플라스틱 껍데기를 녹일 것 같은 눈빛으로 비디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솔 때문에 원우는 웃음이 터졌다. 원우는 그 날 집에 돌아가는 한솔의 손에 비디오를 쥐어주며 보고 싶을 땐 너네 집 가도 되지? 하고 물었다. 한솔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하다 곧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방방 뛰었었다.

딱 그 때의 눈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보고 있는 게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아니라 한솔의 바지를 입는 바람에 훤히 드러난 원우의 다리 안쪽이라는 것 정도.

조용히 다가오던 한솔의 얼굴이 원우의 입술을 빗겨가 목으로 향했다. 한껏 부드러워진 살에 닿는 입술의 촉감은 발끝을 저리게 만들었다. 고요한 방에선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작은 소리마저 한껏 증폭된 자극으로 와 닿았다. 원우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통이 큰 한솔의 반바지는 다리 가장 안 쪽까지 손의 접근을 다이렉트로 허락했다. 어느새 훅 들어온 한솔의 손을 느낀 원우는 가까스로 소리를 삼켰다. 드로즈 위로 느리게 움직이는 손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더 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는 한솔의 얼굴은 곧 다가올 자극의 전희 같았다. 닿아올 감촉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숨은 거칠어졌다. 손과 발이 잔뜩 긴장해 이불을 뜯으며 이제 그만 닿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졌을 때 가장 딱딱한 곳 바로 옆에 입술이 닿았다. 최한솔의 느린 템포는 사람의 숨을 죽여 놓기 딱 좋았다. 원우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한솔은 망설임 없이 원우의 바지를 내렸다. 이번엔 느리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원우는 드로즈에 손을 올리는 한솔의 어깨를 잡으며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필 이 때 문 하나를 두고 밖에 선생님이 계신 게 기억났다.

밖에...거실에.. 선생님

원우를 올려다보던 한솔이 땀에 젖은 얼굴로 답했다.

괜찮아. 듣고도 모른 척 잘해.

그러고는 원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에만 은은하게 맴돌던 소나무 향이 온 몸을 휘감아버린 여름날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치곤 소리가 새어 나올 때마다 원우의 입에 손가락을 물리는 한솔 때문에 두 배는 진땀을 뺐다. 야 괜찮다며? 놀리는 투로 묻는 원우에게 한솔은 진지한 얼굴로 나도 아빠 옆방에서 한 건 처음이라. 하고 대답했다. 원우는 땀으로 얼룩진 한솔의 등을 퍽 때렸다.

 

 

 

 

가을

우리 같이 영원을 꿈꾸자

 

원우는 얇은 가디건을 걸쳐 입고 졸린 눈을 비비며 한솔의 집 앞에 도착했다. 어느 새 찬 공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다섯시 반이 넘어가는 시간에도 아직 동이 덜 튼 하늘은 또 한 계절이 갔음을 실감하게 했다. 평소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문월리 유일의 금강송 집 마당을 구경하고 있으니 얼마 뒤 현관에서 한솔이 양 손에 큰 캐리어를 들고 걸어 나왔다. 늘 걸치고 있던 헐렁한 갈색 셔츠 대신 검정 코치 자켓을 입고 흙이 잔뜩 묻은 긴 장화 대신 나이키 에어맥스를 신은 채였다. 검정 비니를 눌러쓰고 헤드폰까지 목에 건 한솔은 벌써 문월리 밖의 사람 같았다. 마침 잠깐의 이별도 앞두고 있겠다 센치한 감정에 빠져 보려는데 몸에 열이 많은 한솔이 자켓을 훌렁 벗으며 이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와 버렸다. 원우는 생각할 틈도 없이 달려가 한솔의 손을 붙들었다. 감기 걸려. 한솔은 시무룩하게 반쯤 드러난 얇은 반팔을 다시 자켓으로 가렸다.

 

몇 시 비행기랬지?

오늘 여덟시, 저녁.

잘 다녀와 캐리어 잃어버리지 말고. 버스 놓치지 말고.

.....

어머니 잘 뵙고 오고.

 

한솔은 장난스럽게 원우의 얼굴에 바짝 가까이 붙어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대충 끄덕이기만 했다. 어깨라도 한 대 쥐어박으려던 참에 소나무 선생님이 뒤따라 나오셨다. 무슨 일 없겠지만 있으면 좀 부탁한다. 하며 원우 손에 키를 쥐어주셨다.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원우는 선생님께도 조심히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둘 사이에서 조용히 눈을 굴리던 한솔은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잊은 게 없는지 살펴보는 틈을 타 원우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갔다 올게.

그리고는 원우를 꽉 안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선생님이 자 갈까? 하고 이 쪽을 돌아보셨다. 스릴을 즐기지 않는 원우였지만 한솔 때문에 불시에 가슴이 내려앉는 일이 많아졌다.

한솔은 쭉 뻗은 골목이 끝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며 원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버스를 타려면 꺾어진 모퉁이로 돌아 나가야 했다. 팔이 아플 때까지 손을 흔들다 보니 어느새 원우의 시야에서 한솔이 사라졌고 동이 터 있었다. 한솔 없는 문월리에서의 이주일이 시작되었다.

 

한솔은 매년 시월 이맘 때쯤이면 포도 수확을 마무리 하고 이주 정도 어머니를 보러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이젠 한솔이 없는 이 곳은 상상이 안 될 정도였기에 그 말에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원우도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한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일단 며칠 전 원우가 문월리에 내려올 때 쯤 취직을 했던 동기가 마침 정규직 전환형 인턴 한 자리가 났다며 연락을 해왔다. 공채 내기엔 좀 번거롭고 주변에 괜찮은 친구 없냐고 물어보시는데 딱 니 생각이 나서. 너 중국어도 좀 하잖아 그치? 원우는 새삼 자소서에 몇 줄로 정리되던 자신의 일부분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 고향 내려갔댔지? 월요일에 면접 보러 올 수 있어? 제 고향이 어디 광역시 쯤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던 친구는 시간을 넉넉하게 준답시고 토요일 아침에 전화해 월요일 스케쥴을 잡았다. 몇 개월 간 느릿한 리듬에 맞춰져 있던 원우는 난데없이 몰아치는 친구의 권유에 정신이 혼미해져 덜컥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찜찜한 마음이 들어 점심을 먹으러 온 한솔에게 털어놓자 한솔은 덤덤하게 터미널까지 데려다줄게. 하고 대답했다. 집 앞에 단풍 들었더라, 하듯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항상 스스로의 선택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솔이었지만 말리지는 못해도 놀라긴 할 줄 알았는데, 한솔은 묵묵히 우체국 나갈 때 타는 트럭에 시동을 걸 뿐이었다. 제 생각보다 더 덤덤한 애인건지 제가 떠날지도 모르는데 아쉽지 않은지,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원우는 한솔의 트럭을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새벽 버스표를 예매하고 나니 시간이 비었다. 원우는 한솔과 오랜만에 시내를 구경하고 커피도 마시다가 가게들이 하나 둘 영업을 종료할 때 쯤 어두운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고요하게 철썩이는 바다를 보고 있으니 그제야 하루 동안 체한 듯이 얹혀 있던 생각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이 됐고 확신도 없었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원우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다 생각보다 큰 한숨을 쉬었다.

 

왜.

한솔이 물었다.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원우는 기다려왔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복잡한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충실히 이 곳까지 데려다 준 한솔이 조금 원망스러운 참이었다. 이럴 땐 마구 간섭해주길 바랐다. 가지 말라고 질척이며 매달려주길 바랐다. 한솔은 언제나 가을바람만큼이나 보송했다. 불쾌하지 않은 선에서만 살랑거리는 사람이었다.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원우는 묵혀뒀던 걱정을 한솔과 바다에게 쏟아냈다. 둘 다 원우의 부끄러운 고백을 깊은 곳 어딘가에 잘 숨겨줄 것만 같았다.

한솔은 원우를 묵묵히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가고 싶어?

진심으로 궁금한 목소리였다. 한솔은 항상 그게 제일 중요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거, 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래도 엇나가지 않았다. 원하는 길을 가는데도 항상 바르고 멋지기만 했다. 원우는 용기가 없었다. 뭣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뭘 하고 싶은지도 뭘 잘하는지도. 원우에게 이십대는 제가 특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순간순간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어디에든 비집고 들어가 제 앉을 자리를 찾는 것밖엔 답이 없었다. 그게 생존 방식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래도, 그렇지만, 한솔에게만은 솔직하고 싶었다.

....아니.

원우는 터미널에 도착한 후로부터 버스 한 번만 타면 서울이라는 생각에 숨이 턱 막히던 참이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마음이 마구 불안해졌다. 나를 빼고 바쁘게 돌아가는 그 곳에 아직 돌아갈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나약하고 게으른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 문월리 품에 좀 더 숨어있고 싶었다.

 

나 다시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면 한심하게 볼 거야?

원우는 붉어진 제 얼굴을 불빛 하나 없는 밤바다가 꼭 숨겨주길 바라며 물었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한솔은 벌떡 일어나 원우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한솔은 놀랍도록 밝게 웃고 있었다. 

얼른 가자.

원우를 일으켜 세운 한솔은 상쾌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달렸다. 숨이 찬 원우를 돌아보는 한솔의 눈빛이 그 곳에서 가장 밝게 반짝였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원우는 한솔을 붙잡았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솔을 꽉 안고 누워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은 밀려오는 나쁜 감정들로 힘들 것만 같았다. 짧은 외출이 헤집어 놓은 뒤숭숭한 마음이 한 진정되었을 때쯤 가만히 누워 있던 한솔이 입을 열었다.

 

형. 

응?

형은 이야기를 진짜 잘하는 것 같아.

갑자기?

뭐든 형이 해주는 얘기는 엄청 재밌어. 옛날에 나 형이 영화 얘기 해주는 거 엄청 좋아했잖아.

........

그래서 그리웠어. 형이 얘기해주는거. 

 

나 일요일에 출발 비디오여행 끝나면 맨날 형한테 왔었는데. 저 영화 봤냐구. 형이 더 얘기해줬으면 해서.

맞아. 너 우리 집에 있는 비디오 하나씩 다 꺼내면서 이거 무슨 얘기냐고 물어봤었잖아.

솔직히 김경중 아저씨보다 형이 훨씬 재밌었어.

김경식.

아무튼.

 

한솔은 어느새 몸을 반 쯤 일으켜 원우를 내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얘기 많이 해줘. 뭐든 어떻게든 상관없어. 난 형 얘기 듣는 게 제일 좋아.

원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한솔의 이마에 제 이마를 쿵, 맞대며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영원히 5.5평일줄 알았던 제 마음이 한솔 덕에 한켠 넓어진 것 같았다.

 

한솔이 떠난 후 일주일, 날씨는 부쩍 더 추워져 있었고 원우는 그 날 밤이 생각났다. 거짓말이라곤 할 줄 모르는 눈으로 형 얘기 듣는 게 제일 좋아. 그렇게 말하던 밤이. 원우는 이불 속에 들어가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었다. 원우가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모은 돈으로 산 중저가 브랜드의 고물 노트북이었다.이 곳에 내려온 뒤 한솔과 영화를 다운받아 볼 때 한두 번 빼고는 켜본 적도 없는데 작동하는 게 용할 따름이었다.

2학년 1학기, 과제, 마케팅학회, 발표준비.... 몇 년 간 원우의 행적이 요약되어 있는 건조한 폴더들 사이에서 제목이 ‘.’, 온점인 폴더를 찾아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뭐라도 쏟아내고 싶은데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름을 붙여도 되는 감정인지 몰라서, 앞으로 뭘 쓰게 될지 몰라서 일단 눈에 띄지 않는 점으로 감춰둔 폴더였다. 그 속엔 원우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일기, 영화, 사진, 맛있었던 식당, 알 수 없는 메모와 낙서까지. 덮어두고 묵혀뒀던 감정을 조금 큰 후 마주하는 건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과거의 스스로를 재밌어도 하고 부끄러워도 하다 보니  꽤 위로도 되었다. 오랜만에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솔이 생각났다. 어떻게 알았을까. 과거의 자신이 외로움에 파묻히지 않고자 스스로 부지런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모두의 발걸음에 맞추느라 돌아볼 시간도 없었지만 사실은 정말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걸.

한솔이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었다. 두려움에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온점과 같은 제 이야기를 예쁘게 닦아 꺼내 준 한솔이 벅차게 그리웠다. 깊어가는 가을 밤 깊어가는 마음을 견딜 수 없던 원우는 당장 짐을 싸 미국으로 달려가는 대신, 핸드폰을 들어 페이스톡을 걸었다. 몇 초 만에 보고 싶은 얼굴이 뿅 튀어나왔다.

 

형!

입을 시원하게 벌리며 웃는 한솔 뒤로 넓은 잔디밭이 보였다. 한솔이 있는 곳은 햇살이 가장 뜨거운 시간인 것 같았다.

뭐하고 있어?

잠깐 산책 나왔어. 인사해 친구도 있어.

커다란 강아지가 방방 뛰며 한솔을 보채고 있었다.

 

형 여기 날씨가 지이인짜 좋아. 다음에 형도 같이 오면..

보고싶어.

....

너무 보고싶어 한솔아. 

잔잔했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돌풍이 일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게 습관이었던 원우는 한 번이라도 더 사랑을 말하고 싶었다. 한낮에 듣기엔 조금 진한 진심을 마주한 지구 반대편의 한솔은 잠시 멈추더니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어, 나도. 하고 대답했다.

둘은 평상에 누운 원우 뒤로 해가 질 때까지 오랫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원우에게 공원 이 곳 저 곳을 보여주던 한솔이 나무 그늘을 발견하곤 벌러덩 드러누웠다. 미국 햇살은 뭐가 좀 다른지 한솔의 머리칼이 한 층 더 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넌 나 없이 오년을 어떻게 버텼어? 

알 수 없이 차오르는 감정에 붕 뜬 원우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눈을 감고 있던 한솔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난 니가 돌아올 걸 아는데도 이런데 넌 어떻게..

한솔은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나도 알았어.

그게 언젠줄 알고..

언젠지는 안 중요해.

그치? 한솔은 어느새 옆에 누운 강아지에게 장난스럽게 얼굴을 부비며 대답했다. 예쁜 배경을 뒤로하고 평화롭게 누워 있는 한솔을 보는데 어쩐지 원우는 마음이 울컥했다. 어린 일상을 헤집어 놓고 무책임하게 떠났는데도 한솔은 저를 믿었다. 믿었고 기다렸고 이 곳에 있었다. 원우는 한솔에게 또 한 번 무너졌다. 빨리와. 응. 버스 제일 빠른거 타야 돼. 알았어. 안 자고 기다릴거야. 얼른 방에 들어가 모기 물려. 원우는 힘겹게 전화를 끊었다.

저보다 훨씬 먼저 어른이 되어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한솔 생각에 마음이 아려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게 두렵지 않은 건 시간보다 단단한 마음이 있는 사람만의 특권이었다. 이젠 원우가 보여줄 차례였다.

 

기다리고 기다린 한솔의 귀국 날 새벽, 원우는 바쁘게 길을 나섰다. 그새 날씨가 추워져 미약한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일찍이 나와 한솔네 포도밭을 봐주던 현이 아주머니가 아는 체를 해왔다. 어딜 가? 한솔이 데리러요. 아니 그 먼 데를? 네. 어이구 젊은 게 좋다. 조심히 다녀와. 원우는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대답하곤 길을 나섰다. 읍내까지 이십 분, 터미널까지 삼십 분, 서울까지 네시간, 또 인천까지 두 시간. 한솔과 함께한 시간을 생각한다. 한솔에게 제가 없었을 시간을 곱씹는다. 다시 함께한 세 계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곧, 만나게 될 한솔을 그린다.

꼬박 반나절에 걸려 인천 공항에 내렸다. 바쁜 출국장 사이에서 한솔이 타고 왔을 비행기의 이름이 반짝인다. 긴장되는 발끝이 동동거린다. 얼마 후 멀리서 한 손에 비니를 들고 한 손으론 캐리어를 끄는 밝은 갈색 머리가 보인다. 원우는 달려간다. 점점 시야에 한솔이 가득 찬다. 꽉 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사랑한단 말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시간은 더 이상 우리를 버리고 가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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