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정] 양자물리학
익명 / 글
양자물리학
형. 형. 그러니까 있잖아.
"정한이 형. I got an idea."
"뭔데?"
"그 방 있잖아요, 형이 거기 들어가고 그 방의 시공간이 바뀐 거지. 생각이 현실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순간에 형의 시공간이 뒤틀렸고 거기서 형의 달라진 차원에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형 혼자 느낀 거고"
"뭐라는겨? 좃만아."
"아니 그런 말 좀 안 쓰면 안 돼요? 나 지금 진지해. serious. 리얼리. 진짜"
"그래서 시공간이 뭐 어쨌는데. 얼른 말해 나 바뻐"
"그니까 형이 들어가서 방의 시공간이 바뀌고 차원이 달라져서 그게"
"엉 알써 한솔아 어제 먹은 된장찌개집 어디였더라?"
"형 그 방 다시 들어가면 다른 차원으로 해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으래 말을 말자"
대한민국 전국 팔도를 뒤져도 이런 애들은 못 찾을 거라는 과대의 말이 눈앞에 선하게 서로 본인 할 말만 해대는 둘은 어김없이 주제 맥락 소통 삼박자에 어긋나게 대화를 마쳤다.
그러니까 방금 문을 박차고 된장찌개를 외치며 나간 노란 머리는 윤정한이요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시공간을 운운하는 쓸데없이 진지한 갈색 머리 놈은 최한솔이었다.
제일 친한데 맨날 싸우는 애들 뭐 그런 건데 좀 결이 달랐다. 싸움은 아니고 토론인데 그게 그렇게까지 괴상할 수가 없었다. 지들이 무슨 회담하는 국가 정상들도 아니고 뭐야. 그렇다고 초딩 토론 수준도 아니고 진짜 뭐 하는 거야.
윤정한은 그 따분하다는 국문과 최한솔은 그 머리 아프다는 기공과. 여기서부터 상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또 원래 상극이면 더 잘 맞고 끌리는 게 학계의 정설 아니겠는가. 자석도 N극 S극이 있고 그냥 레몬에이드보다 블루레몬에이드가 더 맛있는 법이라고.
아무튼 삽질만 오지게 해댔다.
친구 많이 안 사귀고 철벽 치는 걸로 유명한 그 최한솔이 장기자랑 1위 먹은 우리의 자랑 부승관 다음으로 깊게 사귄 친구가 윤정한이라더라. 아는 사람은 많으면서 지 얘기는 끝까지 안 한다고 소문난 다가가기 어려워요 윤정한 선배님!이 유일하게 난 이게 좋고 저건 싫어 말하는 게 최한솔이라더라.
그래놓고 지들은 몰랐다. 삽질도 정도껏 해야지 보는 윤정한네 동아리 사람들만 환멸나 죽을라 했다. 그럴 거면 둘 중에 하나 집에 가서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떨어지고 붙어먹고 다 하세요들. 모두가 속으로 외쳤다. 근데 본인들은 몰랐다. 알 수 없는 머저리들. 동기들이 또 속으로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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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정한이 형 생각을 해봐 진짜 시공간에 뭐가 있다니까?"
저거 또 시작이네. 동아리방에 남아 있던 동기들이 하나같이 혀를 끌끌 차댔다. 최한솔 쟨 우리 동아리도 아니면서 맨날 와서 저러지. 저번엔 된찌니 김찌니 그거 하나로 꼬박 하루를 토론하더니 이번엔 갑자기 웬 차원이래. 인터스텔라야 뭐야.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얼마 전에 유행 진작에 지난 그래비티에 마션 인터스텔라까지 전부 섭렵하고 온 최한솔이 화근이었다. 사건의 전말이라 하면, 또 어디서 보고 꽂혔는지 우주가 좋다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영상만 수십 번. 그걸론 성에 안 찬다며 인터스텔라 돌려 보기를 또 수백 번. 알아듣지도 못할 우주 어쩌고 방정식을 외워와서 동방에 굴러다니던 화이트보드를 가득 채우질 않나 이제는 양자 영역까지 손을 대기 시작해 틈만 나면 상대성이론을 꺼내기 마련이던 와중에.
윤정한이 동방에 들어왔고
해선 안 될 말을
"한솔아 너 양자물리학 잘하냐?"
그걸론 부족했는지 화룡점정을 갖다 붓기를
"내가 말이야 어제 학교에 빈 방을 들어갔다? 근데 거기에 뭔 퀀텀 어쩌구 공식같은 게 잔뜩 있었는데"
펑!
"들어갔다 나오니까 방이 안 보였다?"
최한솔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동아리 부원들은 목격했다. 확실히 사색에 잠긴 표정. 그리고 좆됨을 감지했다. 한 번 빠지면 잘 놓아주지도 않는 그 최한솔이 고민을 시작했다. 그것도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 천체물리 양자물리 상대성이론 시공간 어쩌구를.
결론이 나오긴 나왔다.
최한솔은 미친놈이다
아마도 좋은 뜻으로.
윤정한이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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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동아리에 눌러붙기를 벌써 몇 달째. 이제 최한솔은 동아리 부원들 이름도 다 알았다. 쟤는 민서. 쟤는 원준이. 쟤는 석민이 쟤는 뭐, 영순이? 화이트보드에 차원에 대한 공식을 끄적이고 상대성이론을 읊조릴 때마다 대꾸해주는 사람도 생겼다.
빈 방에 들어갔더니 quantum physics 가득에 나왔더니 방이 없어졌더라는 윤정한의 헛소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래 미친놈 기말고사 공부나 해! 학점이나 챙겨! 이 새끼 군대 다녀오더니 정신이 드디어 나간 거냐. 언제나 그랬듯 최한솔은 예외였다. 별로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 괴짜라는 명사가 잘 어울리는.
그 괴짜 최한솔씨-괴짜라는 말은 어딘가 어폐가 있는 듯하니 우리의 매니악가이 최한솔이라고 부르자-는 이 이콜 엠씨 스퀘어를 읊었다. 그걸 들은 윤정한은 엠씨? 엠씨? 엠씨라는 단어에 신나 옆에 있던 이석민을 불렀다. 엠씨 도울 어쩌구. 알 수 없는 이름을 지어 놓고는 자기들끼리 또 알 수 없는 비트에 랩을 얹으며 깔깔댄다. 최한솔은 신경도 안 썼다. 꿋꿋이 이 이콜 엠씨 스퀘어와 리치 곡률 텐서를 말했다. 옆에 있던 권순영은 홍진영의 엄지척을 부르며 엄지를 치켜세웠고 놀러 온 부승관은 어머 한솔아 왠일이니를 반복하며 권순영과 짝짝쿵 박수를 쳤다.
보니 클라이드 야 짝짝쿵 음. 흥에 겨워 북 몇 마디를 뱉고는 또 생각에 잠기는 최한솔이었다.
윤정한은 며칠을 그 방이 있던 자리 앞에서 서성이며 보냈다. 최한솔을 붙잡고 양자물리학 공부도 했다.
계량 부호수는 뭐며 리치 텐서에 리만 곡률 텐서에 아인슈타인 텐서 에너지-운동량 텐서. 아니 애초에 텐서가 뭔데? 과포자 윤정한은 울었다. 과포자도 아니고 물포자인데. 나 물리만 버렸는데. 나 과학 잘 하는데!
"형이요?"
윤정한은 또 몰래 울었다. 최한솔은 아직도 시공간 타령이었다. 그걸 믿기로 하고 머릿속에 물리를 때려 박고. 아인슈타인을 공부하고 기말을 공부하다가 또 양자와 상대성이론과 아무튼 거기에 매달리고. 그 와중에 커피로 수혈하며 겨우 본 기말은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꺼내서 빽빽하게 써냈더니 엔간히 잘 나왔다.
그리고 기말 끝나던 날 친구놈 자취방에서 낮술을 퍼마시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보자며 또 복도를 걷는데,
전에는 없던 게
아니 더 전에는 있던 게
그러니까 그 문이.
"양자 만세!"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흥과 술에 겨운 윤정한이 소리쳤다. 그러곤 힘찬 걸음으로 들어갔다. 또 언제 사라질 지 몰라 열심히 눈에 방의 모습과 그 널린 공식들을 담았다. 공부한 효과가 있었는지 최소한 공식에 쓰인 문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기도...는 윤정한의 착각이었지만 아무튼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 통일장 이론, 상대성 원리, 특수 상대성 이론과 광속 불변의 원리, 관성과 중력 등가원리, 빛.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론들이 진진자라 지리지리자라 수능 금지곡마냥 머릿속에 맴돌았다. 절대 다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일단 무작정 외우고 봤다. 개중에 몇 개는 알아들을 만도 했다. 죄다 최한솔에게서 배운 것들. 최한솔이 그 반짝반짝한 눈을 알려준 것들. 사람은 좋아하는 걸 말할 때 눈에서 빛이 난다. 최한솔은 윤정한과 말을 할 땐 유난히 더 빛이 난다.
그러고는 최한솔의 눈보다도 밝은 빛이 번뜩이더니
암전.
다시 방은 사라진 뒤였다.
-
윤정한은 그날 본 걸 다시 또 전부 최한솔에게 말했다. 결론은 똑같았다. 여전히 최한솔은 시공간이 뒤틀렸다 하는 미친 놈이었고 윤정한은 거기에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의 스펙타클 판타지 어쩌고저쩌고 경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이상한 놈이었다.
윤정한이 외워 온 양자물리학 공식을 읊으면 최한솔은 그걸 풀었다. 외우고 말하고 쓰고 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방 화이트보드도 점점 시커매져갔다. 전보다는 진도가 많이 나간 듯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최한솔과 윤정한의 관계에 진도가, 진도가. 삽질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이기적인 인간들. 둘 다 끝까지 본인만 보느라 서로 눈치도 절대 못 챘다.
그리고 며칠 뒤
시공간 룸에 관련해서.
그리고 최한솔에 관련해서.
윤정한 머릿속에 무언가가 퍼뜩 지나갔고
윤정한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술.
모두의 용기는 술에서 나온댔다. 술은 언제 어디서나 최종병기고 무기였다. 진심이고 용기고 나발이고 일단 뭐라도 좀 들어와야 살 것 같았다. 먼저 지른 건 윤정한이었으며 혼자 불안해한 것도 윤정한이었다. 그래서 그냥 질렀다. 솔직히 윤정한은 최한솔이 그렇게 덥석 미끼를 물 지 몰랐다. 그래서 더 당황한 것도 윤정한이었다. 아무튼 최한솔의 앞에서 윤정한이 말하길
"그으래서 나랑 술 먹고 저기 한 번 가보자니까? 그날 낮술하고 갔더니 짠하고 나왔단 말야"
"오?"
오는 뭔 오야. 정신 차려라 한솔아. 윤정한 저거 왜 저런대. 동아리 부원들이 입을 모아 최한솔과 윤정한의 술자리를 말렸다. 뭔 시공간 룸-최한솔이 그렇게 불렀다-을 보기도 전에 둘이 같이 어디 취해서 굴러다닐 일 있냐. 오바야 오바. 특히 너네 둘끼리는 갈 생각 하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우린 분명히 말렸다.
누가 그랬다. 말리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라고. 청개구리 본성이다. 원래 숙제를 하려고 앉았는데 숙제하란 말이 들리면 하기 싫고 별 생각 없다가도 누가 하지 마라고 하면 해야될 것만 같고 그런 법.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둘은 동방에서 뛰쳐나와 술 사러 편의점에 갔다. 맥주 몇 캔 검은 봉다리에 잔뜩 사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시공간 룸이 나왔다던 자리 앞으로 가 앉았다.
생각보다 금방 술기운이 올라왔다. 술 때문인 건지 아니면 부끄러운 건지 빨개지는 볼. 윤정한은 속으로 한여름 밤의 꿀을 불렀다. 술보다도 분위기에 취해서였을 거다. 서로 좋아하는데 둘만 몰랐다. 다 아는데 둘만 바보였다.
정신은 아득해지는데 최한솔의 눈은 더 밝게 반짝였다. 윤정한과 말할 때만 반짝이는 눈.
좋아하는 사람과 말할 때만 반짝이는 눈.
윤정한이 그걸 깨닫기 직전에
최한솔이 선수를 쳤다.
"난 형을 양자보다 사랑해."
좋아해요 사랑해요도 아닌 양자로 난데없는 사랑 고백을 받은 윤정한이 어버버하기도 전에 최한솔 고개가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런 최한솔을 보며 국어 전공 윤정한은 양자물리학과 천체물리에 대해 다시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인간은 영원한 시공간 속의 한낱 덧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생을 즐기자.
최한솔의 모토였다. 최한솔을 사랑하는 윤정한의 모토였다. 그리고 또 아득해지는 정신.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복도.
문.
시공간 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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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시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