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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쿱] 시계의 바늘은 죽음을 향해

파수꾼 / 글

All my possession for a moment of time.

    - Elizabeth I 

 

     

시계의 바늘은 죽음을 향해  w.파수꾼

     

 

 

 

 

시간 여행자.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으나, 시간대를 지정한 여행은 할 수 없다.

 

최한솔은 그 시간 여행자였다.

 

-

 

한솔은 시간 여행자가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한솔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시계가 박혀있었고, 그 시계의 바늘을 돌리면 과거나 미래로 돌아가는 일이 생겼다. 처음 시계를 발견한 날엔 아침에 눈을 떠 자연스럽게 외출 준비를 위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본 순간, 낯설지만 당연하다는 듯 가슴팍에 자리 잡은 시간이 맞지 않는 원형의 시계가 한솔의 시선을 끌었다. 내가, 왜 나가려고 했더라. 시계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솔의 머릿속은 엉망이 된 한솔의 하루만큼이나 엉망으로 물들었다. 침대 한구석에서 찾아낸 ‘C’가 적힌 알 수 없는 작은 쪽지는 한솔의 손에서 잔뜩 구겨졌으며, 한솔은 가슴팍에 박힌 그 시계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형이자, 애인이었던 승철이 직접 박아 넣은 시계라는 사실을 영영 알지 못할 것이었다.

 

-

 

스무 살 한솔의 입학과 스물세 살 승철의 복학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과가 달라도 동아리가 같았던 둘의 첫 만남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복학하자마자 다시 동아리방에 자리를 잡고 엎어져 잠을 자던 승철이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문고리를 잡고 동아리방 내부를 둘러보는 남학생의 모습이 잠이 덜 깨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남학생은 입을 열었다.

 

"동아리 문의 사항은 종이에 적힌 번호로 연락 달라고 쓰여 있었는데 전화를 드려도 연락을 안 받으셔서요."

 

"아, 미안해요. 자느라 무음으로 돌려놔서. 동아리 입부 신청인 거죠? 들어와요."

 

승철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깔고 자던 파일을 열어두고 한솔의 손에 들린 기껏해야 학번, 이름, 학과, 번호가 쓰인 종이를 받아 눈으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여기보다 재밌는 동아리가 더 많을 텐데."

 

안 받아줄 거니까 다른 동아리로 가라는 소리인가. 그렇다고 다른 동아리에 들 생각은 없지만. 한솔은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눈썹을 문질렀다. 입부신청서를 대충 꽂아 넣은 승철은 파일을 정리해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영화 감상보다 술을 더 먹어요. 그래도 지금은 뭐, 영화를 더 많이 보긴 하겠다. 따로 궁금한 거 있으면 번호 알죠? 거기로 연락하시고. 여기 더 있어도 되고 볼일 있음 가도 되니까 알아서 해요. 전 수업이 있어서."

 

수업이 있다며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쓸어 담던 승철이 동아리방을 나가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한솔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승철이 어깨에 덮고 자던 담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롤로매닉. 꼭 자기 같은 걸 덮는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한솔은 수업이 있든 없든 종종 동아리방에 들러 영화를 틀어놨다. 번듯한 스크린은 없었지만, 스크린을 대신하는 흰 벽에 노트북과 빔프로젝터를 연결해 틀어놓는 영화는 고전 로맨스 영화일 때도 있었고 액션 시리즈 중 하나일 때도 있었으며, 판타지 장르의 시리즈 중 하나일 때도 있었다. 동아리방에 오면 책상 위로 엎어져 잠을 청하기 바쁘던 승철은 이제 늘 빔프로젝터의 뒤에 놓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영화가 흘러가는 벽을 바라봤다. 혼자인 날엔 소파에 늘어져서, 어느 날엔 다른 동아리원인 원우와 함께, 또 한솔이 있는 날엔 나란히 앉아 한솔의 어깨에 기대어. 한솔이 문을 여는 날엔 늘 승철이 소파에 등을 기대어 영화를 보고 있었고 한솔은 반복되는 작은 우연들에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 된다는 생각에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

 

"형은 왜 이 동아리 왜 만들었어요?"

 

"애들이랑 먹고 놀려고. 원래 술을 더 많이 마셨는데. 너 들어오고 영화 보는 거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꼭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솔아."

 

"네?"

 

"......."

 

승철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옅은 갈색의 한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엔 로맨스로 가져와라. 난 그게 더 좋더라."

 

-

 

승철과 한솔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애인이라고 생각했다. 전까진 동아리방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유일한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공강이나 주말에 약속을 잡아 데이트를 즐겼다. 

 

그리고 한솔이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

 

최한솔이 죽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차를 직접 몰다가 사고가 난 건지, 차에 치인 건지 승철은 기억하지 못했다. 분명 들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충격이 컸던 건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구역질이 났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그 얼굴이, 숨을 쉬지 않아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는 그 몸이 눈앞에 선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화장실까지 갈 힘도 없었다. 들어있던 게 없었으니 게운다고 게워지는 것도 없었다. 승철은 그저 침대 머리맡에 둔 삼천 원짜리 싸구려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고개를 처박고 침과 눈물을 쏟아낼 뿐이었다.

 

-

 

시간은 형태가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잡고 만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보내야 하는 것이며, 다시 되돌릴 수 없어 곁에는 늘 후회가 가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후회 없이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들이 시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시계는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될 자격의 상징이었고, 그 자격은 곧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역사의 변화와 미래의 개척을 동시에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의미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시간 여행자'라고 불렀다.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던 소수의 시간여행자들 사이에서는 금기라고 불리는 규칙이 존재했다. 승철은 그 소수에 포함된 시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바늘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규칙을 지키지 않은 최초의 시간 여행자이기도 했다. 그의 끝은 결국 죽음이었다.

 

-

 

승철은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시곗바늘을 돌렸다. 뒤로, 또 뒤로. 생명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어겼다는 것은 더이상 승철에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번을 돌려봐도 자신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으로는 한솔을 살릴 수 없었다. 시곗바늘을 돌린 횟수가 열 손가락을 채웠을 때, 승철은 자신의 시계를 한솔에게 넘겼다. 어차피 자신은 금기를 어겼으니 죽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죽을 거라면, 그럴 거라면 한솔의 시간을 돌려 그를 되살려야만 했다. 비록 그가 불완전한 기억을 안고 살아갈지라도.

 

한순간뿐이더라도 너를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승철은 굳어가는 손으로 한솔의 시간을 뒤로 돌렸다. 머리맡에 놓아둔 작은 종이는 자신의 마지막 흔적이 될 터였다. 승철은 그렇게 존재를 지웠다.

 

-

 

"원우 형."

 

"어?"

 

"우리 동아리에 복학생 선배는 지금 없는 거죠?"

 

"그렇지. 왜?"

 

"아니에요. 친구들 얘기하는 거 들으니까 그냥 좀 궁금해서요."

 

원우는 한솔에게 향했던 고개를 다시 정면의 스크린으로 돌리며 생각했다. 재미없게.

 

한솔은 가끔 생각할 거리가 생기면 시계를 돌렸다. 자신이 알고 있던 공간이 알지 못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것에 한솔은 안정감을 느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삼 년. 어쩌다 보니 시곗바늘을 돌릴 때마다 점점 더 먼 미래를 여행했다. 한솔이 미래를 여행할 때마다 자신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학교 복도에서, 동아리방에서, 강의실에서, 자신의 집에서까지도. 분명 동아리방에서 원우가 앉은 소파의 밑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래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리에 함께였다. 다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이름과 얼굴, 목소리를 전혀 기억할 수 없어 답답했다. 흐릿하게 누군가 옆에 같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만 기억날 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침대에 누워 며칠을 고민해봐도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계속 바늘을 돌려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

 

한솔의 시계는 불완전했고 불안정했다. 열 번 중 한 번은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바늘을 미래로 돌렸는데 과거로 가게 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였을 뿐이었다. 이번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던 적도 없었으며, 현재로 돌아가지 못했던 적도 없었다. 한솔은 본능적으로 시계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음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일 리가 없었다. 

 

미래의 나, 고장 난 시계,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붙들고 울고 있는 누군가. 

 

"……승철이 형."

 

"최승철."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보이는 것은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뒷모습뿐이었지만 쓰러질 것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승철은 힘이 풀린 건지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숨을 크게 몰아쉬느라 등이 들썩이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승철에 손에는 자신의 가슴팍에 있는 것과 같은 시계가 들려있었다. 설마. 한솔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한솔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승철의 손에 들린 시계가 자신의 삶이었구나. 형의 목숨을 담보로 한 나의 시간이었구나. 한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팔이 움직이지 않아 눈물을 닦을 수조차 없었다. 그동안 승철은 이미 한솔에게 시계를 넘기고 작은 쪽지에 무언가를 적고 난 뒤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한솔의 가슴에 승철의 손가락이 닿은 순간, 한솔은 정신을 잃었다.

 

-

 

아, 그날이다. 세 번째로 맞이하는 스물한 살의 시월 이십육 일이었다. 잠에서 깼지만 한솔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고 살아온 두 번의 삶의 기억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온갖 기억이 섞이는 와중에도 단 한 번의 삶에만 존재하는 승철의 기억은 한솔을 괴롭혔다. 구역질이 났다. 형을 괴롭게 한 건 난데, 무슨 자격이 있어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승철의 삶을 빼앗아 온 건데. 나 때문에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하는 삶을 살았는데.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형은 본인의 삶을 전부 나에게 줄 정도로 나를 사랑했던 건지. 승철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조차 자신의 손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고 생각하니 다시 숨이 막혔다. 당장 창문을 열고 악이라도 쓰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한솔은 화장실로 가 거울 앞에 섰다. 시계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고장 난 시계는 더이상 승철과 한솔을 이어줄 수 없었다. 한솔은 한참을 거울 앞에 서서 시계만 바라보다 결심한 듯 숨을 길게 내쉬고 물을 틀었다. 오늘 꼭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한솔은 대충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곤 자신을 살리던 승철이 서 있던 자리로 발을 옮겼다. 

 

한솔은 침대의 옆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시계의 바늘을 부러뜨렸다.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한솔은, 그대로 부러진 바늘을 쥐고 있던 팔을 들어 가슴을 향해 힘을 주고 내렸다.

 

고작 나의 한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형의, 바란 적 없는 희생에 대한  바라지 않을 속죄였다.

 

한솔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바늘을 잃은 시계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생명을 주기 위한 바늘에 결국 죽음을 건네받은 한솔은 생각했다.

 

다시 한번 그 어깨의 온기에 닿아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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