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솔원] 어디 한 번 살아보겠습니다
마시타 / 글
캡틴 아메리카와 캡틴 코리아가 대치 중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
"웃기는 소리군. 너희가 지금까지 해쳐먹은 주한미군방위비분담금이나 뱉어내라."
조악한 연극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이석민의 옷깃을 쥐었다. 선생님……. 캡틴 아메리카랑 캡틴 코리아가 이상해요……. 분위기는 애저녁에 죽사발 난 채였고 여태 뒷짐 지고 관망하던 보육원 선생들까지 연신 헛기침을 토해 뱉기 시작했다.
"쿨럭쿨럭쿨럭 (함의: 저 새끼들 당장 끌어내.)"
하지만 휘황찬란한 갑빠 갑옷을 껴입은 캡틴 최한솔과 전원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작극의 열기에 장작을 더했다. 역정 나는 건 이석민 한 명뿐이었다. 매년 콩쥐와 팥쥐로 봉사 활동 돌려막는 기선 행위는 집어치우고 아이들의 파란이 되어보자며 개쌉소리로 연막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부당함과 개선해야 할 지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캡틴 단군신화와 캡틴 쌀국은 이제 클라이맥스로 치달은 채 어설프게 장난감 칼을 엽엽 휘두르기 시작했고,
풀썩.
캡틴 코리아가 별안간 사지 뻗은 자세로 쓰러졌다.
…엥. 이거 사대주의 결말이었나?
"좆됐다."
상황을 한 발 느리게 파악한 이석민이 말벌 아저씨 빙의하여 우다닥 전원우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장난감 칼을 내팽개친 최한솔이 이미 소금쟁이 사이즈의 전원우를 소리 없이 제 어깨로 들쳐업은 직후였다. 나 차 쓸게, 형. 마감 처리가 허접한 짭수트를 걸치고 있던 최한솔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낯으로 이석민의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봉고 폴딩키까지 대뜸 갈취했다. 야 금품 갈취하는 히어로가 말이나 되냐 아니 그건 괜찮은데 잠시만 한솔아 니가 운전을 어떻게 하려고 너 고속도로에서도 60 못 밟는 애가…….
하지만 온점 제대로 찍기도 전에 이석민의 기회는 파쇄 당한다. 거북이 같던 최한솔이 말도 없이 시야에서 훌러덩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선생님선생님. 누가 이긴 거예요?"
졸지에 산등성이 보육원에 홀로 남게 된 봉사 동아리 <순례자의 길> 동장 이석민이 팔자 눈썹으로 얼굴을 뭉개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싸울 기회라도 있어야 할 텐데.
전원우의 심장이 또 말썽이다. 예감과 예후는 항상 좋지 않다.
어디 한 번 살아보겠습니다
마시타 @wakarimasita_
전원우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목격한 광경. 포도당 수액. 투박한 병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섹시 수트를 입은 채 병원 자판기에서 가장 인기 없는 솔의 눈을 뽑아 마시고 있던 최한솔.
"드디어 죽었니."
전원우는 알면서도 질문했다.
"살았어요."
이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시시하군. 뒤늦게 제 몰골을 훑었다. 애국보수꼴통단체처럼 가슴 정중앙에 태극권 떡하니 박혀 있던 캡코 수트는 증발한 지 오래였고 어느덧 환자복 차림이었다. 극우 껍데기 쓰고 좌파 대사 남발하는 재미 쏠쏠했는데 아쉽게 됐다는 생각이 잠깐. 그다음으로는 자연산 다금바리처럼 펄떡펄떡 뛰는 듯하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의식 말단에서부터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애들이 다 봤겠구나.
다른 건 다 괜찮대도 이런 건 아직 별로였다.
퇴원 절차는 간단했다. 자발적 퇴원동의서를 개발새발 작성하고 병원을 나오자마자 다시 뽕짝 수트 차림이 되었으나 캡틴 빨갱이의 입장에서는 한 겹의 병원복보다야 이게 더 숨통 트였다. 하지만 숨이 잘 쉬어진다는 것은 조만간 다시 조여든다는 것. 차라리 조금 전 공상과학 만담 풍자극의 일원으로 열연하다가 영원히 잠들었다면 블랙 코미디의 정수 취급받으며 유쾌하기라도 했을 텐데. 오늘의 죽을 기회 또한 얼레벌레 불발탄으로 날려 먹은 듯해 전원우는 영 개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작살난 그의 심기처럼 <순례자의 길> 봉고 차도 개박살 나 있었다.
"보육원에서 급하게 차 빼다가 귤나무에 박았어요."
최한솔이 멋쩍다는 듯 목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급하게, 차 빼다가, 박았어요. 문장을 이루는 구절이 전부 최한솔과 맞지 않고 따로 놀았다. 적어도 캡틴 빨갱이가 태극 빔을 쏘다 말고 쓰러졌다는 것보다는 흥미로운 서프라이즈였다. 어쩐지 봉고 차창 앞면이 핏물 새똥으로 질펀하더라니. 피똥이 아니라 모두 으깨진 귤인 듯했다. 전원우는 찌그러진 귤의 사체를 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음.
내 심장 같군.
"드실래요?"
과일 단내가 대가리를 찢어발길 것처럼 깊숙하고 흥건하게 코끝을 찔렀다. 한솔은 그 와중에도 멀쩡한 귤 몇 개를 챙겨두었다며 전원우에게 낑깡 사이즈의 좆만 한 귤을 건넸다. 과일에 죄책감 들기는 처음인데. 그래도 이거 1톤 정도 먹으면 요절할 수 있으려나. 배부르게 죽을 궁리를 도모하며 귤을 한 꺼풀씩 벗겨내던 전원우는 그제야 최한솔의 운전 실력을 문득 상기해냈다. 직진만 알고 후진이라고는 모르던 의외의 관성. 대천 해수욕장으로 동아리 엠티를 가려다가 고속도로 잘못 타는 바람에 그대로 전남까지 갈 뻔했던 언젠가의 기억이 토막 난 귤껍질처럼 의식 위를 둥둥 떠다녔다.
"한솔아."
너 오늘이야말로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니.
"아니야."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실패했다면 들을 필요 없는 계획이었으니까. 잡념에 빠져들던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 또한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아 저거 이석민 삼촌 차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석민이는?"
"걸어서 하산 중이래요."
저런……. 아멘이올시다. 대충 하늘 어드메를 향해 삼삼한 기도를 올리던 전원우가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좌표를 꺾었다. 이 앞에 괜찮은 백반집 있어. 마치 병원 아니라 제 나와바리 마실 나온 사람처럼 급발진하여 앞서나가는 전원우를 두고 최한솔이 느리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형. 천천히 가요."
쪼그라든 심장 더 이상 죽사발 내지 말고 제발 아껴 쓰라는 소리를 이토록 엉성하고 착하게 모사하는 사람은 최한솔밖에 없다. 저건 다정이 아니라 쟤의 성정. 전원우도 잘 알고 있는데. 밍숭하고 맹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새삼 전원우의 발목을 붙잡아 속도를 늦춰 세웠다. 염력이라도 쓴 건가 싶을 정도로 느릿하지만, 아주 강력한 점성을 가진 목소리.
"한솔아."
"네."
착한 말소리. 착한 발소리. 착한 한솔이.
"귤 맛있네."
전원우는 죽는 것보다 착한 것이 더 무서웠다. 항상.
"하나 더 드릴까요? 저 안 먹었는데."
그래서 최한솔에게 묻고 싶은 것은 언제나 딱 하나.
"아니. 너무 달다."
나를 대체 언제쯤 죽여줄 셈이니.
▒
전원우는 구멍 뚫린 선지를 볼 때마다 꼭 제 심장 같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고등학생 시절. 전원우는 체육복을 갈아입다 말고 교실 뒤편에서 기절했다. 말 그대로 픽 쓰러졌다. 그게 처음이 아니었던지라 앰뷸런스로 털털 실려 가면서는 기흉이 또 재발했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자기또. 자발성 기흉 이 새끼가 또. 일전에도 가슴 통증과 호흡 곤란으로 실려 갔더니 기흉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던 적 있었기에 또다시 2-3일 정도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겠구나, 막연히 짐작했는데.
문제는 폐가 아닌 심장이었다.
이식 아니고는 방도가 없으나 현재 환자분은 이식 또한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드라마틱하게 잘 빠진 대사를 들으며 전원우는 차례대로 구멍이 뚫리는 제 내장 기관을 상상했다. 폐. 다음은 심장. 이다음은 또 무엇이 될 것인가. 어느새 의사의 목소리는 뒷전으로 흩어지고 찌르는 대로 빵꾸 퍽퍽 뚫리는 퍽퍽살 그래픽만이 머릿속에서 무한정 재생됐다.
이거야말로 살아 숨 쉬는 선지해장국이군.
전원우는 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요행을 바란 적 없이 살았고 그것에 기대지 않은 채 정직하게 삶을 영위해 온 편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이번 한 번쯤은 그런 것을 바라봐도 괜찮지 않을까.
전원우는 다소 낙관적인 생각으로 의사가 권한 임상 실험을 수락했다. 부작용을 비롯하여 결괏값이 확인되지 않은 최신식 인공 심장을 끼워 맞추는 것. 보편적인 인공 심장은 수술 이후 환자의 상태에 따라 100일부터 300일까지 유지될 수 있었지만 만약 이 임상 실험이 성공한다면 전원우는 꽤 오랜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적응에 실패한다면 한 달도 넘지 못한다는 전제 조건이 혹 덩어리처럼 따라붙기는 했지만.
도 아니면 모. 심장을 건 내기였다.
이후 전원우는 100일을 갱신할 때마다 세간의 축하를 받았다. 케이크를 꽂고 박수를 받는 것은 기본이었다. 「살아서 축하한다」는 요지의 말을 100일마다 꼬박 들어야 하는 삶. 사람도 아닌 심장과의 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삶. 투투. 백 일. 이백 일. 삼백 일. 전원우는 그때마다 뭔가를 쪼개고 싶었고 잔뜩 과금하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였다. 심장이 제 기능을 회복할수록 마음이 뒤틀렸고 아무렇지 않은 척 건조하게 퉁 치려 들수록 생각이 질척질척 꼬였다. 물론 그런 억하심정은 잠깐이었고. 일 년을 찍은 이후 전원우는 빤한 낯으로 '이제 곧 내 기념일'이라며 반 친구들에게서 동정냥을 회수하기도 했다.
「야 뭐야. 사귀는 애 있었냐? 예쁘냐?」
전원우는 피씨방에 가기 위해 꿍쳐두었을 친구들의 토 묻은 돈을 받으며 막연히 생각했다.
예쁜가.
그냥 징그러운데.
한 달도 넘기지 못할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점쳐졌던 시한부 전원우는 그 징그러운 심장과 천 일 넘게 합방했다. 무사히 수능을 쳤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당연히 임상 결과는 성공적. 하지만 전원우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속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갔다. 시간을 보장받은 대신 불안과 공포를 매입했다. 언제 잘못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형체가 없었으므로 그 근간을 말살시키거나 해쳐먹지도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다음 일 분이, 그다음 한 시간이, 그다음 반나절이 두려웠다.
핏덩이가 나를 좀먹고 있군.
한 발 느리게 알아차렸으나 전원우는 임상 시험 성공자로 미디어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어느덧 멋대로 죽을 수조차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윤회를 믿으세요?」
그러니 동아리 후배 최한솔이 이따금 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코미디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몬교 취칙했니.」
「아니요.」
「너 한국에서 아무나 붙잡고 그런 거 물어보면 싸이비라고 크게 오해받아.」
히죽거리던 최한솔은 별안간 웃음기가 싹 가신 눈으로 말했다.
형.
「형은 아무나 아니지 않나요.」
해피밀 먹다 말고 무작정 윤회를 믿냐며 이런 식으로 무대뽀 밀어붙이다니. 너 혹시 내가 1일 1 햄버거 식단 강행 중이라서 아마 다음 생에 패티로 태어날 거라는 소리를 돌려 말하고 싶은 것이니. 전원우는 되묻는 대신 기름으로 이글거리는 햄버거를 한 입 크게 씹어 물었다. 하지만 성의 없는 자작 운동을 하는 순간조차 진득한 눈동자는 전원우의 턱가에 붙은 채 가시지 않았다.
「윤회를 믿으시나요.」
이걸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지 옹고집이라 칭해야 할지……. 심지 곧은 최한솔은 전원우의 심장을 닮아 항상 예상하지 못한 축으로 길을 뻗으며 사람을 쿡쿡 찔러댔다.
엉뚱하고. 꾸준하고. 누르면 누르는 대로 민둥하게 박피 터뜨리며 서 있을 것 같고.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어느 날 노아의 방주처럼「순례자의 길」동방 문을 열어젖혔던 형형색색 휘황찬란한 인간. 전원우와 이석민은 당연히 그가 옆방 힙합 동아리 오디션을 보러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힙동으로 향하려던 인간들이 호수를 헷갈려 백스텝 밟다가 이상한 나라의 순.길로 홀린 듯 걸어 들어오고는 했으니까. 요 요 요 저 저 저 마이크 드롭하겠습니돡. 전원우는 인사조차 없이 초면에 다짜고짜 랩을 때려 박는 막무가내 힙찔이들을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예, 그래요 어디 한 번 해보세요. 그 길로 얼레벌레 자체 오디션을 개최하는 사람들을 팔짱 낀 채 관망했다.
형 그렇게 살다가 조만간 진짜 천벌 받을 것 같아.
곁에서 지켜보던 석민이 참다못해 귓속말로 속닥거리면 전원우는 아예 스윙키즈 빙의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쇼맨십까지 선보였다. 아 계속하세요. 기대하고 있으니까 저는 서서 들을게요.
「저기. 근데 준비한 벌쓰가 여기까지인데.」
「아쉽군요. 조금밖에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럼 합격인가요?」
「저기 문 보이시죠.」
「예? 네네.」
「문 열고 나가서 왼쪽으로 고개 돌리면 503호 있습니다. 거기 가서 한 번 더 하세요.」
이런 시팔 뭐야……. 결국 야마 돌아 전원우의 심장을 향해 욕을 뇌까리고 퇴장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최한솔 또한 딱 503호 힙합 동아리로 향해야 할 몰골로 504호의 문을 두들겼다. 실례합니다. 정중하게 예의 차리며 들어오던 무지개 빛깔 대가리가 여태 전원우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번쩍거렸다. 쉽게 잊히지 않을 압도적인 채도와 명도. ……대체 어디서 저런 비니를? 자신의 올챙이 적을 생각하지 못한 이석민이 음소거 모드로 경악할 동안 전원우의 시선은 비니 아래쪽으로 향했다. 진짜배기는 진또배기를 알아보는 법. 전원우는 타이다이 비니보다도 더욱 선명한 눈동자 한 쌍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카라멜.
「순례하러 왔는데요.」
녹뿌리즙 같았던 제 옛날 심장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어 어 어. 안녕하세요. 원우 형 뭐해 저 분 우리 동아리 들어오신대. 아 근데 그, 여기 이름만 홀리하고 그냥 봉사 동아린데 알고 오신 거…… 맞죠?」
눈알에 나의 헌 심장을 박고 있는 인간이라니.
별안간 전원우의 인공 심장이 퍽, 퍽, 소리를 내며 박동했다.
「네.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요.」
퍽, 퍽, 퍽, 퍽.
멸망의 전조.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쟤를 얼른 내쫓아야 한다는 은근한 부추김 같은 예감이 전원우의 목덜미를 끈적하게 덮었지만.
「최한솔이라고 합니다.」
이대로 저 눈알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발 없는 질문이 뒤통수를 갈겼다. 빠른 고민 끝에 발 달린 심박동이 대신 답했다.
절대 아니오. (퍽퍽)
뭐가 잘못됐다는 건 알았으나 그 이유를 정확히 조각할 수는 없었다. 심장 이거 드디어 헐었나? 휴짓조각 같은 내성을 뚫고 동맥판이 그대로 튀어나올 듯했다. 동질감 때문인지 이질감 때문인지. 그 뒤로 전원우는 카라멜 같은 한솔 버논 최를 볼 때마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형 안녕하세요. 」
「응. 안녕(퍽퍽) 」
「뭐 보고 계세요? 」
「아…… 별 건 아니고. 포유류는 평균 심박동이 낮을수록 수명이 긴 편인데 인간은 분당 60회에서 90회 정도로 평생 25억 번 가량이나 심장이 뛰는데도 불구하고 수명이 길다는 글을 보고 있었어. (그냥 여물어…….)(퍽퍽) 」
죽고 싶다. 자연 소멸을 소망하는 전원우를 두고 최한솔은 녹뿌리즙 같은 눈알을 더욱 동그랗게 굴리며 말했다.
「어. 그러면 저희 방금 적어도 똑같은 60번을 공유한 거네요.」
전원우는 헐떡대는 인공 심장에 빙의하여 입술을 뻐끔거렸다.
한솔아 그거 아니.
아기들은 분당 120회까지 심장이 뛸 수 있대.
그 구절을 마저 덧붙여 읽으려다 결국 관두었다. 진짜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함께 공유하고 맞물리는 심박수 사이의 빈틈과 간극마저 제 모자란 심박수로 모조리 채워 넣고 싶어질 듯해서. 그걸로도 모자라 나잇값 하지 못한 채 베이비를 자처하며 분당 120회의 심박수까지 노리게 될 듯해서.
「윤회를 믿으시나요.」
그러니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다른 생이든, 전원우는 저 자신이 육신을 가진 생명체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전원우는 이미 제 몫의 25억 번보다 훨씬 더 많은 심박수를 이번 생에 땡겨 썼으니까.
「나는 충분한데.」
제 팔다리처럼 흐느적거리는 후렌치 후라이를 어그적 씹어 먹던 전원우는 그날 맥도날드 2층 창가 자리에 구겨져 앉은 채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아마 나를 죽이는 건 최한솔이 되겠군.
▒
형을 죽이러 왔어요.
시절과 계절이 한 바퀴 감기고 장르 또한 각색된다. 내가…… 예지몽을 꿨던가? 전원우는 잠시 착각과 공상에 물든다. 일 년이 지나 눈앞의 최한솔은 에크모 비슷한 무언가를 치렁치렁 매단 채 공중 부양을 하다 말고 살생을 속닥여 말하고 있었다. 진지하다 못해 어떤 종류의 숭고미와 비장미마저 흘러넘치는 표정으로 나즈막이,
저는 사실 형을 죽이러 이곳에 왔어요.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가 드라마틱하게 전원우의 시야를 가렸다. 실로 재림 예수의 현신이었다.
여름이었고 장마철이었다. 그때쯤 전원우는 늘 최한솔을 마주하면 부정맥의 위험에 시달렸으므로 고통 없이 평온하게 죽을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중이었다. 죽기 위해 열심히 사는 남자를 아는가. 전원우는 제 숨과 정신을 좀먹는 인공 심장을 거덜 내기 위해 집안의 문 틈새를 모조리 틀어막아 둔 채 하루종일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잠들기도 하고 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롹앤롤 밴드의 끔찍한 노래만 주구장창 골라 듣기도 하며 자연사를 기원했으나 패배의 쓴맛만을 맛보았다.
퍽, 퍽, 퍽, 퍽. 싸이코틱 강철 인공 심장은 조그마한 생채기조차 없이 폭력적으로 발광했다.
하지만 천 일의 사나이. 포기하지 않죠.
그날은 '방울토마토 1톤을 먹으면 몸이 붉게 변하여 홍익 인간으로 숨을 거둘 수 있다'는 민간 설화를 듣고서 밀양 얼음골 토마토 세 박스를 바리바리 이고 진 상태로 최한솔의 자취 집 현관문을 두들겼던 날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마지막. 모쪼록 인류애를 전파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최한솔에게 한 박스 정도의 식량을 나눠주기 위해 찾아간 것이었는데.
허벌로 열려 버린 현관문 너머 전원우를 반기고 있던 것은 친숙한 최한솔이 아닌 에크모를 닮은 장치에 둘러싸인 채 공중 부양 중인 최한솔이었다.
……웬 공중 부양.
눈알이 부딪혔다. 빗물로 축축하게 젖은 전원우를 발견하고 동그랗게 떴다 감기던 카라멜 같은 눈알. 마치 진공관에 들어선 것처럼 꼼짝하지 않던 몸통까지.
저기…… 지금 당장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신고하기 전에 뭐라고 말 좀 해줄 수 있겠니. 전원우의 넋두리 끝에 머지않아 최한솔이 고해성사의 물꼬를 텄다. 때마침 전원우의 줄 이어폰에서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ost 겟세마네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His steps were heavy and slow, Love and a prayer took Him there……
「형을 죽이러 왔어요.」
Gethsemane!
「저는 사실 형을 죽이러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대사의 변주.
「형을 죽이기 위해 아주 먼 미래에서 왔어요.」
음. 전원우는 크리스토퍼 놀란에 빙의하여 그 대사를 한참 곱씹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미래에서 왔다고. 이내 밀양 얼음골 토마토 박스를 내려둔 전원우가 그윽하게 대꾸했다.
「벌레도 못 잡는 게 무슨…….」
얘가 외계인 같다는 생각은 몇 번 해본 적 있었다. 이따금 여기 있는데도 엉뚱한 시공간에 몸담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할 때나 공상 과학 영화는 제 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고 말할 때. 전원우는 종종 그 확신 어린 표정과 말투에서 처음 최한솔을 마주했던 순간 느꼈던 재앙의 기운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직감하고는 했다.
「벌레는 형이 잡아주잖아요.」
예감.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내쫓아야 한다는, 은근한 부추김 같은 예감.
「그래서 저는 형을 잡으러 왔어요.」
아무래도 그 예감이 드디어 눈앞에서 확신으로 발발한 것 같았다. 그것도 '귀찮은 일'이 아니라 '세상에 이런 일이' 재질로.
내려와. 목 아파. 전원우가 최한솔의 옷깃을 잡아끌었고 최한솔은 그제야 에크모 파쿠리 기계를 껐다. 거짓말처럼 한솔의 몸이 아래로 풀쩍, 착지했다. 이마와 목덜미에 여기저기 붙어 있던 전극도 덩달아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허경영의 후손인가 아니면 진짜 외계인인가. 전원우는 파쿠리 에크모의 작동 원리가 궁금하여 한 번만 더 날아보면 안 되냐고 최한솔을 구슬렸으나 단호한 거절의 대답만이 돌아왔다. 안 돼요. 형 너무 많이 봤어요.
「아까 형이 들어오면서 시공간이 잠깐 바뀐 것 같아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자꾸 해대기에 전원우는 그냥 토마토 한 줌을 꺼내어 최한솔 입에 왕창 물려주었다. 그래 알겠으니 우선 이거 씹고 나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하지만 최한솔은 밀양 얼음골 토마토를 씹으면서도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원래 형이 알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오도독오도독) 저는 인류 멸망의 근원을 말소시키고자 아주 먼 미래의 지구에서 왔어요. (오독오독) 제가 살던 지구는 인체의 장기가 더는 못 견딜 만큼 중력이 변하고 공기가 탁해져서 이 장치로 호흡 기관을 정화하지 않고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거든요. (ode득 ode득)
「그리고 행성 자체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구요.」
전원우는 생각했다. 그럼 내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뜻인가.
「음. 그렇구나.」
내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희망 고문하는 주치의의 말보다는 훨씬 가능성 있고 그럴듯하군.
어찌 됐든 토마토를 먹고 있는 최한솔이 저를 죽이기 위해 시공간까지 거슬러 왔다고 하니 토마토 사망설은 반쯤 진실이 된 셈이었다. 밀양 얼음골 특수 토마토를 통해 맺어진 필사死의 운명. '어차피 내가 아니면 네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원우는 기꺼이 살생을 허했다. 네가 허경영이건 외계인이건 상관 안 해. 죽을 때까지 가보자. 그 자리에서 인공 심장을 담보로 한 종신 계약을 확정 지었다.
「근데 내가 어떻게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거니.」
이거 맛있네. 오득오득. 최한솔을 따라 토마토를 씹던 전원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 날 눈 떠보니 숨겨진 타노스의 후손 전노스였다는 세계관 설정이 아니고서야 허벌 인공 심장을 매단 저 자신이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몸을 설득할 만한 시놉시스는 가지고 있겠지. 생각한 순간 전원우의 심장 위로 최한솔의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억,
소리내기도 전에 카라멜을 닮은 눈이 전원우의 온몸을 덮쳤다.
「심장이요.」
퍽, 퍽. 심박수가 분당 120회로 죽사발 났다.
「형의 심장이 인간 복제의 초안이 돼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호러 스토리 스피드 웨건. 전원우를 실험용 기니 피그로 만든 임상 인공 심장이 생명 복제의 핵심 기술이 되고 그로 인해 무자비하게 복제된 인간들이 서서히 지구를 좀먹기 시작한다. 전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서서히, 아주 명백하게 진행되며 문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진앙지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생태계가 파괴된 상태이므로 결국 태초의 인간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럴수가……. 조곤조곤 나지막한 목소리를 전해 듣던 전원우는 끝내 감탄하고 말았다.
제 육신을 허덕대며 살리고 있는 이 인공 심장 껍데기가 인류를 갉아먹다 못해 서서히 병들게 하여 결국 멸망의 초고가 된다니.
그건 마치 뭐랄까. 제 죽음 앞에 대의와 명분이 생긴 기분이었다. 아주 확실하게 이 목숨을 끊어주어야겠다는 확신이 샘솟는 느낌.
그리하여 그날 두 사람은 악수까지 했다.
「잘 부탁해.」
「저두요.」
부디 고통 없이 깔끔하게 죽여주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는데.
"한솔아. 오늘이야말로 죽기 좋은 날씨인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음. 습도가 99퍼라서 좀."
그런데 속 편한 미래의 지구인 최한솔은 마무리가 느리다 못해 시발점조차 꿰지 않고 있었다. 습도 조명 온도까지 따져서 살생을 도모하다니 이 친구야말로 리얼 바이브 킬러군. 살인적인 더위에 인공 심장마저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했다. 이 정도 날씨라면 캔디류 같은 최한솔의 저 눈알도 액체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릴 법한데. 안광이 반짝이는 눈은 마치 고체 카라멜처럼 단단하고 고요하게 전원우를 빤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한솔아. 내 심장이 더 유명해져서 세계 각국의 인사들이 나를 기니 피그로 데려가려고 혈안이 되기 전에 하루빨리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전원우는 소리 없이 아우성 쳤다. 그러니 어서 나를 죽이도록 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지만 최한솔은 완곡하게 거절하며 제 뜻을 지켰다. 괜찮다니 뭐가.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놀랍도록 전원우를 안정시키는 대답이기는 했다. 약이라도 뿌렸나. 저 홀리한 눈알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칡즙처럼 투명하고 진한 동공이 선사해주는, 알 수 없는 소속감. 그럴 때마다 전원우는 종종 생각에 잠겼다.
"원우 형."
이 눈에 담겨 있던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가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전원우는 자꾸 최한솔의 시선을 통해 미래를 그리게 됐다.
▒
오늘이야말로.
최근 전원우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느낌표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앗, 오늘이야말로 죽을 수도. 당장 가능할지도. 전에 없던 더부룩한 체기가 항상 오 분 대기조로 식도와 기도를 꽉 메우는 듯했다. 덤블링하는 백업 인공 심장. 숨이 후달리고 속이 말렸다. 전원우는 살이 내린 팔다리를 죽죽 끌며 대학병원 주치의에게 찾아갔다. 다시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요. 고백하자마자 심장 질환의 재발을 비롯하여 장염 위염 위궤양 염증성 용종 담즙염 등등 의심되는 것들을 모두 열거했고 그대로 깡그리 검사했다.
하지만 결과는 백지. '이상 소견 없음'이라는 결과지를 받아들게 된 전원우는 속으로 뇌까렸다.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돌팔이가 아닐런지.
"원우 학생."
너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서는 전원우를 향해 주치의가 첨언했다. 이건 질병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니야. 그래도 질병분류코드가 따로 없으니까. 맞아."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주치의는 전원우가 열거한 증상을 하나씩 속발음한 끝에 웃으며 확신했다.
"상사병이지 이건."
그리하여 발견된 전원우의 질병분류코드. HVC.98. 상세 불명의 상사병이었다.
사랑이 양기를 앗아가고 기운을 흡수하고 인공 심장을 죽사발 냈다. 예감과 예후는 항상 좋지 않다. 인류의 멸망을 유발하고 촉진하는 분탕 종자의 말로가 상세 불명의 상사병이라니. 비척비척 학교 도서관 언덕을 오르던 전원우는 인공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잠시 길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박동이 퍽, 퍽.
호흡이 헉, 헉.
위기감이 머리를 때렸다. 진짜 죽을지도. 오늘 안에 죽을지도. 막연히 가늠하고 있었는데.
"형!"
그런데 저기 멀리. 밍숭하고 맹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구부정하던 전원우의 등허리를 단숨에 잡아 세웠다. 여전히 느릿하지만, 아주 또렷한 점성을 가진 목소리. 적당한 농도를 가지고 전원우의 인공 심장 판막을 쥐락펴락하는 목소리.
"원우 형!"
착한 말소리. 착한 발소리. 착한 한솔이.
해를 등진 최한솔이 언덕을 올라 제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안녕, 인사하듯 손을 높게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 해에게서 최한솔에게로 떨어지는 노을의 입자. 그 일련의 장면을 트레일러처럼 바라보던 전원우가 생각했다.
쟤는 왜 자꾸 내가 바닥 찍고 있을 때 저렇게 나를 등에 업을 듯이 뛰어올까.
"같이 가요!"
퍽, 퍽, 퍽, 퍽.
"…야. 뛰지 말고 천천히 와."
실로 진실된 위기감이 머리를 때렸다.
살 지도.
아마 살아남을 지도.
▒
말이 많아졌다. 대부분은 서로를 겨냥한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최한솔과 전원우는 거대한 에크모 기계를 뒤로하고 찹찹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낑깡만 한 귤을 까 먹으며 상습적으로 노가리를 깠다.
"솔아. 그런데 나 죽이고 나면 너 원래 있던 데로 빨리 돌아가야겠다."
"갑자기 왜요?"
"너도 호흡기 안 좋다며. 여기서 살인죄로 복역하면 에크모 저것도 못 쓸 텐데."
최한솔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처음 보는 얼굴로. 아주 오래 해맑게.
그 얼굴과 그 눈이 전원우를 카라멜 폭포에 담금질했다. 깜빡. 큰 눈이 크게 떴다 감길 때마다 빚진 목숨값이 불어나는 듯했다. 깜빡. 저 눈알이 제 인공 판막을 움켜쥐고. 깜빡. 그 속의 심장을 틀어쥐고.
깜빡.
"여기서는 좋은 기억만 남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저 돌아간다고 한 적 없는데."
…….
"형."
…….
"형. 자요?"
…….
"잘 자요."
불이 꺼졌다.
잘 자. 전원우가 숨죽여 인사했다.
▒
고기 구울 때 섹쉬한 남자. 이석민이 집게를 따각대며 고기를 구웠다. 작열하는 불판의 빗소리가 아니고도 가게 내부는 이미 도떼기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와 봐봐. 때깔 작살이지 그치. 슬픔을 감추기 위해 부러 두 톤을 올린 목소리를 두고 전원우는 사무적인 앵무새처럼 판에 박힌 리액션을 뱉었다.
"그래. 멋있겠구나."
"형 멋 아니라 맛."
전원우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못 먹을 메뉴였으니 맛이든 멋이든 알 바 아니었다. 알아, 맛. 맛있어 보이네. 그러자 이석민의 눈썹이 대번 팔자 사선으로 늘어졌다. 형 된장 라면이라도 시킬까? 여기 그거 작살 나 진짜. 전원우는 괜찮다며 손바닥을 펄럭펄럭 흔들다가 곧 티벳모래여우 같은 표정으로 제 앞의 상추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형은 참 사람 마음 쓰이게 하는데 뭐 있다……."
"그래. 내가 볼매이기는 하지."
"요새 누가 볼매를 쓰냐고 이 아저씨야."
이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너와 나의 파이널 만찬이다 석민아. 하지만 이석민은 전원우가 그런 염세적인 발언을 꺼낼 때마다 치를 떨었다. 응 절대 아니구요 내가 볼 때 형 너는 나 제대할 때까지 가챠 돌리면서 게임 폐인으로 엄청 엄청 잘 살아있을 것 같아.
"현질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아껴둬야 해. 나 휴가 나오면 밥 사줘야 하니까. 알겠지."
동아리 동장 이석민이 군대를 간다. 원래는 전원우와 최한솔까지 셋이서 조촐하게 송별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졸업한 순례자의 길 선배들이 죄다 몰려오는 바람에 죽사발 무드가 된 지 오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원우는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옆 테이블로 초라하게 밀려났다. 아는 얼굴은 몇밖에 없고 전부 고리짝 화석이 꿰고 앉은 자리. 예정에도 없던 정문 삼겹살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속이 더부룩했는데 이건 뭐 전신에 휘발유 들이 쬐고 불쏘시개를 향해 몸을 던지는 격이었다. 더구나 최한솔은 에크모로 심장 충전 중인 모양인지 뭔지 여태 연락 한 통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여기저기서 전원우의 안부를 물어대기 시작하는 통에 전원우는 아까 먹은 상추가 혓바닥 밑에서 덜덜 들끓는 듯했다.
"그래도 원우 새내기 때보다 훨씬 얼굴 폈네. 그때는 막 어? 난 얘 귀접한 줄 알았잖냐. 애가 맨날 힘도 없고 비리비리 비실비실. 안색 파리하고 허옇고 막 그래가지고."
그래요. 내가 파리대왕이고 바알세불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아멘.
"석민이는 1급이랬지? 야 원우 너는…… 아 맞다. 미안. 쏘리."
"근데 얘 이제 검사하면 4급까지는 뜨겠는데?"
"원우 니 심장이 그래도 특혜가 될 때도 있고 그렇다, 야."
전원우는 이럴 때마다 제 심장을 가시방석 삼아 깔아뭉개고 싶어졌다.
"원하세요?"
"엉?"
"가져가세요. 떼드릴게요."
화전민에 빙의한 전원우가 끝내 황야 벌판에 불을 지폈다. 타올라라 나빌레라. 분위기가 까맣게 타다 못해 죽사발 묵사발 났으나 전원우는 표정을 갈아 끼우지 않은 채 그대로 와구와구 고기를 쌈 싸 먹고 소주를 깔딱깔딱 넘겼다. 얼마 만이지? 지방과 알콜을 흡입한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전원우가 제 손가락으로 그 햇수를 셌다.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특혜는 니기럴거 이런 게 특혜지.
어어. 형. 형 왜 그래. 당황한 이석민이 테이블 건너 전원우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지만 이미 해묵고 자극적인 음식은 전원우의 식도를 지나 내장 기관을 향해 가열 차게 내려가는 중이었다. 단명을 향한 원대한 첫걸음. 허름한 혈관이 발광하고 인공 심장이 폭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울렁울렁 꿀렁꿀렁. 취기나 토기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오늘이야말로 죽을 수도 있겠군.
"형!"
'파리하고 허옇고 막 그런' 안색으로 벌떡 일어났던 전원우는 두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픽 쓰러졌다.
[속보] 세계 최초 4세대 인공심장 임상 시험 성공 환자 전원우. 삼겹살 가게에서 절명하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인류의 멸망을 책임질 언데드 좀비 심장, 역시 닉값 톡톡히 하죠.
그리하여 전원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 목격한 광경은 이러했다. 우악스레 꽂힌 링거. 고요한 중환자실. 그리고 비니를 대강 눌러쓴 채 보호자석을 지키고 있는 최한솔.
창밖이 어둑하여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이러고 있었고 쟤는 얼마나 저러고 있었나. 시간이 자연히 심박수로 계산되었다. 분당 60회에서 90회. 제 심박동에 잠시 문제가 생겼을 동안 그사이의 빈틈과 간극을 빼곡히 채워 넣어 주었을 최한솔을 잠깐 짐작해 보았다. 등을 반쯤 일으켜 팔을 뻗으면 곧장 닿을 거리인데. 몸이 물 먹은 솜뭉텅이처럼 침대로 계속 낙하하는 바람에 손짓 까닥 하는 것도 힘들었다. 뭐가…… 엄청난 게 지나갔나 보군.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촉과 직감으로도 가늠할 수 있었다. 고장 난 오르골처럼 관절과 혈관이 삐걱삐걱. 곧 느리고 점진적인 손길로 인공호흡기를 젖혀 올린 전원우가 간신히 목을 쥐어 짜냈다.
"드디어 죽었니."
전원우는 알면서도 질문했다.
"형."
대답보다는,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그런데 항상 고체 같던 카라멜이 마치 액체처럼 투명하게,
"저 형 못 죽이겠어요."
흔들리고.
전원우는 그제야 최한솔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한솔아."
시시하군. 솔직하고. 고집 있고. 그런데도 착하고.
"밥풀을 붙여 왔네."
또 사랑스럽고.
에크모 파쿠리 기계의 전극 실리콘 하나가 한솔의 이마 한쪽에 빼꼼 붙어 있었다. 낑깡처럼 깜찍한 사이즈. 손을 뻗어 그것을 긁어낸 전원우가 잠시 색색 숨을 골랐다. 어색하게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실리콘 끝에 핏방울이 묻어나 있었다.
"이걸로 심장이라도 쑤신 거니."
묻는 말에 최한솔은 그냥 웃었다.
"에크모가 고장 났어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전원우는 다시 숨을 골랐다.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고장 났다.
그렇다면 이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고의일까.
"한솔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나 이거 좀 떼줘."
죽을지도.
"그리고 집에 가자."
하지만 같이 손을 잡고 죽을지도.
▒
최한솔의 집으로 가는 길. 전원우는 조악한 홀 케이크를 샀다.
"누구 생일이에요?"
"아니. 내가 먹고 싶어서."
살아서 축하한다느니, 존버해서 축하한다느니. 제 인공 심장과의 온갖 기념일을 다 챙기고도 전원우는 평생 케이크 한 조각을 씹어 물어본 적 없었다. 당을 조절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제가 원하지 않는 축하 인사를 전해 듣고 나면 모든 식욕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만약을 대비하는 인공호흡기도 에크모도 뭣도 없이. 두 사람은 과일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앉아 크게 한 움큼씩 퍼먹었다.
"으."
"으?"
"너무 단데."
전원우는 한 입을 먹고 바로 포기했다. 더 먹으면 내일 당장 틀니 맞추러 가야 할 것 같아.
"심장도 짭인데 이빨까지 그런 건 좀……."
"곤란하죠."
"곤란하지."
케이크를 뒤로한 두 개의 짭 심장이 나란히 누웠다.
색색 불안정하게 퍼지는 두 겹의 숨소리. 호흡이 한 번에 작동되지 않고 자꾸 뻑 나는 느낌이었다. 핏덩이 같은 가래가 목덜미 정중앙에 가시처럼 틀어막힌 채 꼼짝하지 않는 기분. 전원우는 그걸 왁 뱉어내는 대신 걸걸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에크모는 어쩌다가 고장 냈어."
"그냥 고장 났어요."
"흠. 저절로?"
전원우는 이제 최한솔의 습성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거짓말하기 싫을 때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 언어로 말할 길을 찾지 못하면 비언어로 표현하는 것. 한솔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옆얼굴이 찹찹한 방바닥 한 면에 지긋이 눌리고. 정직한 표정과 솔직한 눈이 곧 전원우를 카라멜 폭포에 담금질하기 시작했다. 깜빡. 큰 눈이 느리게 떴다 감길 때마다 목숨값이 한 꺼풀씩 삭감되는 듯했다.
"한솔아."
깜빡. 그 눈알이 제 숨통을 움켜쥐고.
"다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깜빡. 그 속의 심장을 주무르고.
"대신 그때도 나 죽이러 와."
깜빡.
"안 아프고 깔끔하게. 알지."
…….
"한솔아. 자니."
…….
"잘 자."
불이 꺼졌다.
전원우가 숨죽여 속닥였다.
내일도 봐.
▒
온갖 무게 추가 발등 아래 들러붙는 느낌.
낯선 지구에 처음 당도했을 때. 최한솔은 온몸을 내리누르는 지구의 힘이 꽤 버겁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2배로 가해지는 중력. 그것을 감내하고 그 느낌을 체득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한 박자 뒤로 밀려나기도 했다.
말도, 걸음도, 행동도, 계획도. 조금씩, 한 박자씩.
하지만 에크모를 통하면 중력과 공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수중 동굴에 입수한 것처럼 둥둥 떠다니며 깊숙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 그제야 제대로 호흡할 수 있는 시간. 그건 마치 단잠과도 같았다. 이곳의 지구인들에게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소속감이자 유대감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한솔은 자주 유감스러웠다.
같은 시공간인데도 같은 무게를 공유할 수는 없는 거구나.
「내려와. 목 아파. 」
하지만 전원우가 대뜸 결계를 뚫고 들어와 제 옷깃을 끌어 내렸던 순간. 정확한 무게로 자신을 지탱해주는 그 손길을 맞닥뜨렸던 순간. 종래 최한솔의 계획은 수포가 되고 대의 또한 공수표가 되어버렸다. 분명 멸망의 전조가 되는 이 사람을 사멸로 유도하기 위해 기꺼이 시공간을 건너온 것이었는데.
그런데.
구부정한 뒷모습. 목덜미의 굴곡. 한솔은 그 곡선이 짊어진 많은 것들을 덜어주고 싶었다. 오만하고 순진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나 제가 아주 외로웠던 순간 자신을 잡아 주었던 그 손길의 무게만큼이라도 무언가를, 그의 버거운 짐 하나를 덜어주고 싶었다.
「형. 자요?」
더도 덜도 말고. 딱 하나만.
「잘 자요.」
그러니 못다 한 최한솔의 한마디는,
「형.」
그러면 저는 윤회가 아니라 형을 믿을게요.
그리고 그때도 제가 형을 찾을게요.
▒
눈을 떴다.
최근 전원우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하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제 내장 기관 중 하나가 벅벅 썰려나간 것만 같은 기분. 물론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허전한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 한때 인공 심장이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최근 들어 다시 회복의 궤도를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침잠하는 신체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전원우는 대학 병원 주치의에게 찾아갔다. 몸이 이상한 것 같아요. 증상을 말하자마자 CT와 MRI 등등 빼곡한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백지였다. 이상 소견 없음.
"원우 학생.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도 있어요."
전원우는 생각했다.
그런가?
예감과 예후는 항상 좋지 않다. 속은 여전히 꿰뚫린 듯하고 손에서는 자꾸 식은땀이 났다.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비척비척 학교 도서관 언덕을 오르던 전원우는 문득 숨을 삼켰다. 펄떡대던 인공 심장이 별안간 쪼그라드는 느낌. 결국 참지 못하고 길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박동이 퍽, 퍽.
호흡이,
…….
"저기. 괜찮으세요?"
무릎에 얼굴을 틀어박은 전원우를 향해 한 학생이 다가와 물었다.
"어떡하지. 어디 안 좋으세요?"
전원우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아뇨 그냥. 못 일어나겠어요."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는 것 같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