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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순솔] 호랑이만 아니면 네가 내 첫사랑이야

구이 / 글

그를 사랑하게 된 건 도깨비에 홀린 거나 다름없었다. 손 써볼 새도 없는 불가항력 같은 거.
그런데 구미호도 아니고 도깨비가 사람을 홀리나?

 

 

 

 

 

 

 


호랑이만 아니면 네가 내 첫사랑이야
92

 

 

 

 

 

알람 소리인 줄 알았는데 전화였던 모양이다.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순영이 형? 발신자를 확인할 겨를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엉.


“지금 일어났어?”


순영은 베개에서 머리를 떼려는 시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상대는 그 장면을 보기라도 한 듯 다음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머리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목소리가 작게 샜다.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
“3시 반.”
“끝나고 볼 거지?”


질문의 형식이었으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잠에 취한 순영은 순순히 그러마 답했다. 이따 봐. 전화가 끊어지고도 한참을 미동 없이 누워 있던 그가 별안간 몸을 파드득 일으켰다. 발신자를 확인한다. 떡하니 쓰여 있는 세 글자. 최한솔. 망했다.


한솔은 순영의 동생이다. 20년 가까이 업어 키운 옆집 동생. 한솔이 다섯 살이었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 인생의 절반을 훨씬 넘긴 시간을 함께해 서로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이웃집에서 자란 모든 남자아이들의 관계가 그들 같진 않겠지만 두 사람 모두 낯간지러운 형제애에 소질이 있었다. 순영보다 두 살이 어린 한솔은 2년의 차이를 두고 순영이 다녔던 모든 학교를 따라왔다. 일주일이면 전교에 소문이 퍼졌다. 쟤가 권순영 동생이래. 뭐? 옆집 동생. 아~. 애초에 친동생이라고 오인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순영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친동생이지 뭐.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는 분명 그랬는데. 이제 한솔은 순영의,


막 시작된 (것 같은) 짝사랑의 대상이다.

 

 

 

 


사건은 며칠 전 발생했다. 중요한 과제와 시험이 겹쳤다며 집에 빨리 가야겠다는 한솔을 붙잡은 건 순영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은 순영과 달리 한솔은 여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통학을 한솔은 군말 없이 해냈다. 심지어 8시 통금. 대학생이, 그것도 남자애가 8시 통금이 말이 돼? 물으면 한솔은 어깨나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경우 한솔은 수업이 마치기 무섭게 집으로 향했다. 가족들 사이가 유난스럽게 끈끈했다.


우리 집에서 공부하다가 잠깐 자고 학교 가지. 시간 아깝잖아. 순영이 한솔의 식판에서 김치를 덜어가며 슬쩍 눈치를 봤다. 학생식당 김치가 일품이었다. 어떻게든 등록금 값만 뽑으면 되는 거 아닌가. 순영은 학생식당 김치를 거덜 내는 걸로 스스로와 합의했다. 이미 리필을 두 번이나 받고도 모자란 지 슬금슬금 손을 뻗는 걸 한솔이 보고는 제 그릇을 아예 밀어주었다. 히죽 웃은 순영이 응? 하고 재차 물었다.

 

데일리 이벤트까지는 아니었으나 꽤 자주 신세를 지곤 했으므로, 한솔은 흔쾌히 순영의 자취방에 발을 들였다. 서랍에 넣어 두었던 한솔의 칫솔을 꺼낸 순영이 칫솔과 함께 갈아입을 옷을 건넸다. 요란하게 염색 물이 든 티셔츠가 딱 한솔의 취향이었다.

 

하나뿐인 책상을 한솔에게 양보한 순영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노트북을 열었다. 과제나 할 생각이었다. 급한 건 아니었으나 원룸의 면학 분위기를 위해 미리 하기로 했다. 동생이 공부하는데 방해할 순 없지. 조용한 방 안에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만 났다. 자장가 같았다. 두 시간도 안 되어 줄곧 꾸벅이던 순영이 결국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개만 겨우 돌려 한솔을 봤다. 곧은 등. 그에게로 휘몰아치는 무지갯빛 소용돌이. 어지러운 무늬도 오래 보고 있으면 차분해졌다. 약이라도 탔나. 한솔의 존재는 순영을 안정시켰다. 사육사 말이라면 죽고 못 사는 맹수처럼 약해지곤 했다. 한솔이 하는 건 가만히 앉아 있기, 가만히 이상한 얘기 하기, 가만히 노래 들으면서 흥얼거리기 정도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순영은 느리게 껌뻑였다. 우리 한솔이 집중력이 좋네….


"한솔아 형 잔다. 이따가 졸리면 너도 좀 자."
"응. 불 안 꺼도 돼?"
"아무렇게나 잘 자는 거 알면서."


구태여 상을 펴지 않고 엎드려 있던 건 다 이러기 위해서지. 히히 웃은 순영이 그대로 몸만 뒤집어 천장을 보고 누웠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한솔의 미소를 본 것도 같다. 웃는 거북이 같은 얼굴. 아. 편안해진다.


눈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사방이 어두웠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어스름한 빛 덕에 책상에 엎드린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맞아. 한솔이 와 있었다. 순영은 담요라도 덮어 줄 요량으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 접어 놓았던 담요를 들고 한솔에게 다가가자 왼팔 위로 이마를 얹어 놓고 곤히 잠들어 있는 한솔이 보였다. 어깨 위로 얇은 천을 올리자 한솔이 뒤채며 옆얼굴이 드러났다.


순영은 숨을 들이킨다. 세상의 고요는 모두 제 것이라는 듯 가만한 얼굴. 밖에서 들어온 빛이 타이밍 좋게 한솔의 얼굴 위로 내려앉는다. 인생이 판타지구나 너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한솔의 눈을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치웠다. 진짜 길다 속눈썹이. 요즘 애들은 다 그렇다고들 하던데 한솔은 유난히 더 긴 것 같았다. 동그란 코끝과 살짝 벌어진 입 틈새로 보이는 가지런한 앞니를 보다가. 업고 다니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대. 순영은 감개무량해지고 만다. 순간 한솔이 입을 다문다. 틈 없이 맞물린 입술이 앞으로 밀려 나온다. 넋을 놓고 감상했다.


어? 순영은 눈을 비빈다. 우습게도 사랑은 예고제가 아니고.

 

 

 

 


"핸드폰 고장 났어?"
"아니… 바빠서 못 받았지."

 

제가 들어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쟤는 사람을 왜 저렇게 쳐다본대. 20년간 한 번도 문제 삼지 않았던 다정하고 집요한 눈빛에 속으로만 태클을 걸었다.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로 수업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카페로 끌려왔다. 한솔이 강의실 앞에 쪼그려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는 건 2주 만이었다. 한솔 안녕. 이미 팔릴 대로 팔린 얼굴에 순영의 동기 몇몇이 인사를 하면 그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패닉하던 순영은 두어 번 심호흡 후 자진납세했다. 더 피해봤자 이상해질 게 뻔했다. 그 와중에 연하의 짝사랑 상대에게 얻어먹는 건 또 자존심이 상해서 음료를 샀다.

 

형 안 바쁘잖아. 아니 근데 이 자식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더니 아닌 걸 확인하자 순식간에 단호해졌다. 순영은 발끈했다. 야 나도 바뻐어! 당연하게도, 순영은 존나게 한가했다.

 

"이모가 집에 들르래. 김치 가져가라고."

"어 진짜? 고맙다."
"그래서 나는 왜 피하는데?"

 

한솔은 변명을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생각한다고 좋은 게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순영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시험도 있었고, 과제가 진짜, 너무 많더라고. 신화문화원형 교수님 알지 진짜 과제 많이 내주기로 유명한 거. 그 교수님이 갑자기 돌았는지, 돌으셨는지, 과제 세 개를 한 번에 내주시는 거야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 맞다 그리고 저번 제사 때 점괘가 한동안 사람 많이 만나지 말라더라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는 자신감이 붙어 말이 빨라졌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건드리면 안 될 게 있지 않은가. 가족, 종교, 정치. 대충 그 중 두 번째 카테고리에 비빌 수 있는 얘기였다. 이 정도면 한솔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순영은.

 

"왜 나한테 거짓말 해?"

 

저런 걸 안광이라고 하는구나. 늘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황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한기를 뿜었다. 몸이 얼어붙었다. 한솔의 눈빛은 금세 누그러졌지만 순영은 떠올리고 만다. 어릴 적 산에서 봤던 호랑이. 근데 그게 호랑이가 맞긴 해? 순영은 순식간에 일곱 살로 회귀한다.

 

 

 

 

 

태권도 도복을 입고 있다. 매일같이 도복을 입던 시절이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사범님을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느라 귀가가 늦곤 했다. 집과 도장 사이엔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높이의 산이 하나 있었다. 동네 언덕이었으나 이름에 산이 붙어 있어 모두가 산이라 불렀다. 그 날 순영은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산에서 길을 잃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지긴 했지만 그날따라 유독 더 그랬다.

무서워지려던 참에 허리에 묶인 띠가 눈에 들어왔다. 마법처럼 용기가 솟았다. 검은띠는 이런 거 안 무서워! 며칠 전 승품심사에서 받은 검은띠를 두 손으로 꾹 쥐었다. 게다가 순영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빠가 가르쳐 준 노래. 뜻은 반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건 눈치껏 알았다.

삶과 죽음의 길이 이 순간에 있다 해도
누추한 말에 기대어 감히 바라옵건대
신께서 저의 두려움을 거두어 가 주시기를
믿나이다
믿나이다


주변에 사람이 있을까 소리는 크게 내지 못했다. 순영은 몇 줄 안 되는 가사를 반복하며 길을 걸었다. 중간에는 얼핏 가사를 잘못 왼 것 같기도 했다. 그때였다.

인도에서 살짝 빗겨 난 풀숲에 저보다도 몸집이 작은 아이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검은띠는 약자를 두고 혼자만 도망가는 겁쟁이가 아니다! 정의감에 취한 순영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길 잃어버렸어? 형이랑 같이 가자.'


눈이 마주쳤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짙은 눈썹과 무표정한 얼굴. 순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의식적으로 띠를 움켜쥔 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같이… 가자. 아이는 순순히 순영의 손을 잡았다. 작고 서늘한 손이 감겨 왔다. 순영은 그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걸었다. 저보다 어린 동행이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습게도 안도했다. 둘은 한참을 걸었고 여전히 길을 헤맸다. 같은 곳을 계속 도는 느낌. 순영은 파하, 하고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너 진짜 말이 없는 편이구나? 나도 낯 많이 가리는데 이번엔 내가 졌어. 아이가 물끄러미 순영을 올려다봤다. 무서우니까 말 좀 하면서 걷자, 응? 알겠어. 순순히 대답이 돌아왔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질문을 주고받을 때마다 미로같이 얽혀 있던 길이 단순해졌다. 어 여기 아는 길인데.

 

그 순간 신발 끈이 풀렸다. 잠깐만. 줄곧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쪽 무릎을 꿇어 끈을 묶는데 눈앞이 번쩍했다. 시릴 정도의 밝기에 순영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고개를 들자,

 

호랑이의 샛노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오싹하지만 잘생긴 얼굴. 처음 든 생각은 진짜 멋있다… 였으나 그건 채 3초도 못 갔다. 신체 말단부터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 멍하니 벌리고 있던 순영의 입이 딱 소리를 내며 다물렸다. 딱딱딱딱딱. 추위와 공포에 이가 거세게 부딪혔다. 검은띠고 뭐고. 지리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몸을 옹송그렸다. 공격할 생각이 없는지 호랑이는 순영을 빤히 쳐다봤다. 어째 좀 같잖아하는 얼굴. 알 게 뭐야 순영은 살아남기만 하면 됐다. 호랑이 신이 있다면, 제발 이 호랑이 좀 물러가라고 해주세요.


삶은 죽음의 길이 이 순간 아 뭐더라
ㄴㅜ추한 말이 기다려 감히 바라옴건대
살려주세요… 아 제발….


푸핫. 정신을 잃기 전에 웃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깨어난 순영은 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애초부터 젖지 않은 듯 뽀송뽀송했다. 그제야 순영은 저를 내려다보는 두 쌍의 사람 눈과 마주했다.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아이는 무사했다. 얼굴에 눈물 자국 하나가 없었다. 얘 완전 용감한 어린이였어. 부끄러워지려던 차에 아이의 엄마가 말을 걸었다. 집이 어디니? 우리 한솔이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이름이 한솔이구나. 그때까지 한솔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솔아, 순영이 형한테 인사해야지?'
'고마워.'


아까와 정반대로 이번에는 한솔이 손을 뻗었다. 순영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집 주소를 읊으니 한솔의 엄마가 웃었다. 옆집에 한솔이 또래가 있다더니, 그게 너구나? 며칠간 이사로 분주했던 옆집의 새 주인이 한솔네였다. 여전히 어두운 산길을 내려와 집에 가는 내내 순영은 방금 전 겪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정신을 잃고 발견된 건 그새 잊어버렸다. 근데 호랑이를 만나기 전 제가 한솔에게 이름을 알려 주었던가?


가족들은 까무러쳤다. 한솔의 엄마가 순영을 집에 데려다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산에서 길을 잃었다는 얘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호랑이를 만났다니까 그랬다. 그러게 산길로 다니지 말고 돌아서 오랬지! 한솔까지 다 보는 앞에서 순영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심통이 나 입이 댓 발 나온 순영의 옆으로 한솔이 다가왔다. 손을 꼭 잡으며 그랬다.


'형, 다음에 또 놀자.'

 

 

 

 


대대로 호랑이 신을 모셔왔다고 했다. 21세기에 그게 웬 말이야, 싶을 법도 했지만 순영은 불만을 가진 적 없다. 신이 뭔지도 모를 때부터 동물 중 제일 좋아하는 걸 고르라면 호랑이를 골랐다. 게다가 순영이 어릴 적 호랑이와 맞닥뜨리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이후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꼼짝없이 신실해졌다. 모신다고 해 봤자 일 년에 네 번 사시제를 지내주는 게 전부라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헌작이니 독축이니 하는 절차까지는 몰라도 제사엔 늘 함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는 순영이 도맡아 해야 할 일이었다.


2월 제사는 대체로 한솔의 생일과 겹쳤다. 부모님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도움 안 되는 순영은 내쫓긴다. 말이 내쫓기는 거지 나가 놀라고 보내주는 거였다. 몇 걸음 걷지 않고 벨을 누르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솔이 뛰어나왔다. 한솔은 고집불통이다. 곧 죽어도 순영과 생일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고집이 의아했지만 거절할 일도 아니어서 순영은 참여자가 둘 뿐인 파티의 완성을 순순히 도맡았다. 언젠가는 놀이공원에 가기도 했지만 둘의 파티는 대체로 조촐하고 조악했다. 만나서 선물을 주고 기분 내키는 대로 피씨방이나 만화방에 갔다. 크게 재미도 감동도 없는 파티였으나 싫을 이유는 또 없는 것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용돈이 올랐다. 선물 말고도 한솔에게 생일밥 정도는 사 줄 여력이 됐다. 순영은 한솔을 데리고 동네 피자집에 갔다. 둘이 피자 한 판과 샐러드바를 ‘조졌다’. 순영이나 한솔이나 음식을 마다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피자 조각을 입에 넣은 한솔이 만족스럽게 포크를 내려놨다. 이미 나가떨어져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있던 순영이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한솔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한솔이 아직 애기네? 다 묻히고 먹고. 고맙다는 말 대신 어린 한솔은 이렇게 답했다.


'형이랑 평생 살고 싶어.'


넌 무슨 그런 소리를 미스터피자 샐빠에서 하니. 순영은 웃어넘겼다.

 

 

 

 

 

두 사람의 낯간지러운 사이는 지속되었다. 매일 고3 교실을 찾아오는 잘생긴 1학년이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우리 한솔이한테 눈독 들이지 마라. 순영은 자꾸만 한솔에 관해 묻는 친구들에게 엄포를 놨다. 누구도 그의 뜻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눈독은. 너네 한솔이 여친 있던데 뭘.'

'여친?'


되묻자 오히려 은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몰랐어? 순영은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섯 살 때부터 업고 다닌 동생이라 그런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은채가 어깨를 툭 쳤다. 뭐냐, 너. 질투해? 너도 여친 있으면서 걔는 안 된다 이거야?


그래. 섭섭할 건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순영도 중학생 때 연애를 시작했다. 또래들이 으레 그렇듯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왜. 수업 내용이 귓등으로도 안 들어왔다. 순영은 의자에 기대 팔짱을 낀 자세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앨까? 영화를 좋아해야 할 텐데. 요즘 힙합에 빠져 있으니까 힙합도 좋아해야 할 거고. 달달한 디저트도 같이 먹으러 다녀 줘야 되는데.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나랑 하루도 안 빼놓고 보면서 소개를 안 시켜줬다니. 단조로운 목소리의 국어 선생이 비문학 지문의 풀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유감은 한자로 ‘遺憾’ 과 ‘有感’ 두 종류가 있다. 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이라는 뜻이다. 有感은 ‘느끼는 바가 있음’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따라서 위 지문에서의 유감은 한자를 적시하지 않았다면 전자의 용례로 사용되었을….


이거였어. 섭섭한 이유.


'너 여친 생겼어?'


순영은 한솔을 보자마자 물었다. 먼저 말해주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묻는다. 간단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 어.'
'왜 형한테 말 안 했어. 서운하게. 여친 생긴 거 처음 아니야?'
'처음 아니야.'


이건 또 생각해보지 못한 경우네. 순영은 입을 벌린 채로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한솔이 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뭇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심지어 한솔의 구여친 리스트에는 순영보다 연상인 사람도 있었다. 말이 돼? 고백을 받는 대로 다 승낙했다는 말에 뒷목을 잡았다. 본래가 천진하고 다정한 성격 탓에 나쁜 남자친구는 아니었을 테지만 안 봐도 뻔했다. 누구에게나 다 보여주는 매너 정도만 베풀었겠지. 그게 나쁜 남자친군가? 그럴 수도. 분명 여친보다 나를 더 많이 찾아왔을걸. 순영은 확신했다. 얘기를 듣는 내내 벌어져 있던 그의 입을 한솔이 닫아 줬다.


'어이구….'
'어이구? 너 언제 그렇게 거만하게 컸어. 잘생기면 다야?'


두 손으로 볼을 누르는데도 한솔은 몸부림 한 번을 안 친다. 이렇게 착해서 어쩔래. 고슴도치 부모 같은 걱정을 하며 순영은 속으로만 눈물지었다.


'잘생겼어? 나?'
'당연하지 인마.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네가 제일 잘생겼어.'
'그럼 됐어.'
'뭐가 돼?'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솔이 씩 웃었다. 가자. 가긴 어딜 가. 집에. 네 여자친구랑 가. 걔는 나랑 집 반대 방향인데? 아… 그래? 낯간지러운 줄도 모르고 손을 잡아 오는 한솔에게 끌려가며 순영은 생각한다. 의외로 박력 있는 남자친구였을지도?

 

 

 

 


한솔이 기어이 같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순영은 혀를 내둘렀다. 너 진짜 내가 그렇게 좋아? 묻자 한솔은 웃음으로 답을 피했다. 과는 달랐지만 쓰는 건물이 같았다. 공강이 겹치면 밥을 같이 먹자고 지나가듯 말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매 학기 시간표 모양이 비슷했다. 결국 또 붙어 다니게 되겠군. 순영은 짐작했고 아직까지 틀리지 않았다.


대학생이란 본디 연애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 순영에게는 끊임없이 소개팅 주선 좀 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그 왜, 너랑 맨날 같이 다니는 애 있잖아. 몇 번 겪고 나니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그게 한솔을 지칭하는 말임을 알았다. 고등학생 때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집요했다. 몇 번씩이나 거절당했다. 이후로는 알아서 쳐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주현은 순영이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한솔이 너네 과도 소개팅 많이 하나?’
‘글쎄. 형 하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말끝을 늘이자 한솔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해. 평소엔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젠 말도 안 했는데 마음을 막 읽으시고. 이왕 말을 꺼낸 거 끝이라도 맺자 싶어 순영은 누구보다빠르게남들과는다르게 멘트를 읊었다. 다른 사람이면 나도 네가 아까워서 소개 안 해주고 싶은데 얘는 진짜 내 동기 중에 제일 괜찮은 애거든? 한솔이 고민하는 사이 순영은 곁눈질로 주현에게서 온 메신저 알림을 확인했다. 한대? 음. 긴가민가한데. 잠시 순영을 응시하던 한솔이 입을 열었다. 역시 안 할래. 순영은 곧장 답장을 보낸다. 나 노력은 했어.


아닌 건 끝까지 아닌 사람인 걸 알아서 더 묻는 대신 주현에게 추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에 내가 밥 살게. 계속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 한솔이 팔을 잡아끌었다. 앞에 안 봐? 순영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어, 아는 얼굴. 지나가던 후배가 꾸벅 인사했다. 오빠, 다음에 밥 사주세요. 오케이 콜! 원래가 밥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가만히 옆에 서 있던 한솔이 혀를 끌끌 찼다. 순영의 후배가 멀어진 후 한솔이 묻는다.


‘형은 잘생긴 사람 안 좋아해?’


'은'에 묘하게 강조점이 찍혀 있다. 누군가 그의 귀에 대고 저는 잘생긴 사람이 좋다고 염불이라도 외었나. 하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거리의 시선들이 모조리 그에게 꽂혀 있다. 갑자기 의무감이 샘솟는다. 과 내 평판 그런 게 중요한가. 우리 한솔이가 소개팅 하기 싫다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소개팅 주선 연락을 씹겠다 다짐하며 순영은 한솔에게 어깨동무했다.


‘예쁘고 잘생긴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근데 그것보단 편한 게 중요한 거 같아. 싫진 않지.’

 

 

 

 


싫지 않긴.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존나게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순영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18년을 봐 놓고 이제 와서 얼굴에 말린다고. 허무의 바다에 익사했다가 겨우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잠수를 탈래야 탈 수가 없는 구조였다. 간만에 본가에 방문한 순영은 두 손이 넘치도록 반찬거리를 받았다. 이걸 어떻게 다 가져가? 베란다 김치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는 어머니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내일 월요일인데 한솔이 데리고 가서 너희 집에서 재우고 학교 보내. 돌아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 순영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현관까지 반찬통을 끌었다. 왼팔에 두 개를 얹고 오른손으로 하나를 들었는데도 하나가 남았다. 나 그냥 다음 번에 가져가면 안 돼? 좋은 말로 할 때 한솔이한테 부탁하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솔을 만나는 것까지 지켜보려는 어머니를 억지로 집 안으로 떠밀고 옆집 벨을 눌렀다. 답이 없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우리 집에서 기다리느니 여기서 기다리고 말지.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깜빡 잠에 들었다. 남의 집 소파에서 추하게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순영은 팔뚝으로 입을 훔쳤다. 침은 안 흘렸고. 확인하는 순간 눈앞으로 빛나는 물체가 휙 지나간다. 또다시 휘릭. 눈을 비벼봐도 선명했다. 집에 반딧불이가 있나. 근데 반딧불이가 원래 저렇게 파르스름한 빛을 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순영이는 왜 안 일어나니?"
"그러게요."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무서운,
잘생긴,
험악한,
한솔이 얼굴.


"으아악!!!"
"어, 깼다."


호랑이? 순영의 사고는 점멸한다.
아니. 호랑이가 아니다.


거실에 무릎 꿇어 앉은 순영은 집주인 가족과 마주한다. 편하게 앉지 그러니.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한솔의 어머니가 말했으나 덜덜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순영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간 이후 그들은 순영이 18년간 알던 껍데기를 황급히 뒤집어썼지만 이미 본 얼굴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무섭게 생긴 건 아니었다. 똑같이 고우시고, 똑같이 잘생겼는데 다만 조금 더 한기가 도는- 신비로운- 아 모르겠다. 순영은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형네 집에서 모시는 도깨비가 사실 우리야."
"우리 집 도깨비 안 모시는데? 요?"


비굴하다 권순영. 눈치를 보며 존대를 했더니 한솔이 눈썹을 끌어내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는 지금 이게 웃기냐? 하지만 이 말 역시도 속으로만 생각했다. 무서우니까….


"아, 호랑이. 그거 원래 도깨비인데 와전된 거."


안동 권씨 몇 대 부터더라. 호랑이라고 하더라고. 정확한 숫자를 떠올리려는 듯 고민하는 한솔을 보며 순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정말로 멀쩡히 살아 있는 옆집 동생의 제를 대대손손 지내 준 거잖아.


우리는 사람 안 해쳐. 그냥 장난을 좋아해. 권씨들 근처에서 사는 것도 그냥, 지켜보는 게 재밌어서야. 혹시 불쾌하면 미안. 근데 진짜로 별거 안 했어. 그냥 소소하게 운 좋아지는 부적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우리 만났던 첫날도 그냥 장난만 치려던 거였는데 형이 기절해서,
잠깐. 잠깐만. 그 호랑이도 너였다고?
도깨비.
도깨비든 호랑이든 그게 너라고?
응. 미안.
근데 왜 말을 안 해?
재밌자낭.
어 그렇지. 근데 왜 지금은 다 말해줘? 사람 기억은 못 지워?
그런 건 못 해. 우린 그냥 사람이랑 별 다를 거 없어. 조금 오래 살고, 음, 외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 정도?
너 몇 살인데?
123살.
야 너는, 나… 내가 반말 계속 해도 돼?
당연하지.


키득키득 웃는 얼굴.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밀려들었다. 반은 이해하고 반은 걸러 들었다. 그래도 맞장구는 열심히 쳤다. 원래도 순영은 한솔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성실히 들었다. 이러다 거실에서 도깨비의 근원과 명맥 유지에 대한 밤샘토론을 하겠다 싶었는지 한솔의 어머니가 두 사람을 말렸다.


"순영이 정신없을 테니까 데려다주고 와."
"가자."


현관에서 한솔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현실로 돌아갈 시간. 다만 여전히 도깨비와 함께였다.

 

 

 

 


집에 오는 길에는 꼼짝없이 버스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피하지 마.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며 한솔이 말했다. 맞다 나 얘 피하고 있었지.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달라진 거 없어. 난 여전히 형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옆집 동생이고. 계속 형 옆에 있을 거야."
"야 너는,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하냐…."


한솔은 어깨를 으쓱하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결에 잘 빠진 옆태를 감상하게 된 순영은 추억에 잠긴다. 분명히 애기였는데. 예쁘고 순하지만 고집불통인 우리 한솔이.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거야. 한숨을 내쉬다 별안간 깨닫는다. 왜… 하나도 안 편하냐. 심박이 온 몸에서 느껴졌다. 그냥 하나의 커다란 심장이 된 것 같았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무서움 때문인지 짝사랑 상대를 보면 응당 느껴지는 설렘인지 모르겠다. 연인과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놀이기구를 타는 건 그 순간의 무서움을 떨림으로 혼동하기 위해서라는데 지금 이것도 그런 건가. 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연인? 불경스러운 소리. 괜히 무릎을 한 번 쳤다가 척수반사로 앞좌석을 찼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솔이 웃으며 순영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아 그니깐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한솔이 자취방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걱삐걱 움직이며 순영이 뒤따랐다. 천천히 신발을 벗는 동안 한솔이 냉장고에 반찬통을 정리했다. 나 씻는다?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욕실 문이 닫혔다. 순영은 숨을 참았던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리고 방 꼴을 보니 한솔이 벗어놓은 옷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습관처럼 주워 의자에 걸어 놓았다. 이런 걸 보면 아직 애 같은데.


춤을 오래 춰서 몸 쓰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순영을 앞에 두고 친구들은 연체동물 아니냐, 그렇게 추다간 뼈 나간다, 연체동물인데 뼈가 있긴 하냐, 고 만담을 나눴다. 나 뼈 있거든 저기 나 안 보여? 당사자의 개입을 번번이 무시하고 권순영 연체동물설을 주장한 그들이 지금 이 상황을 본다면 이건 권순영의 탈을 쓴 도깨비 아니냐고 물을 거다. 도깨비는 따로 있는데. 사지무스, 사지무스 왜 그래. 순영은 왼팔과 왼 다리를 동시에 내밀며 울상지었다. 어느새 자리를 깔고 제집마냥 편히 누운 한솔이 비어있는 옆자리를 팡팡 쳤다. 누우라는 거겠지? 저게 누우라는 뜻 말고 다른 뜻일 순 없는 거지? 순영은 잔뜩 위축된 채로 걸어가 누웠다. 배에 손을 가지런히 얹었다. 나란히 누운 횟수는 셀 수도 없을 텐데 이제 와서 어색하게 구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눈을 감고 100까지 셌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한솔을 살피러 한쪽 눈만 실눈을 떴다. 왐마야. 와불상 자세로 머리를 괴고 평온한 얼굴을 한 한솔이 순영을 응시하고 있다. 계속 저러고 있었나 봐. 거기다 대고 더 자는 척을 할 수 없어 슬그머니 눈을 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갈색 눈이 여전히 거기 있다.


늘 그런 눈이었다. 권순영을 바라보는 최한솔의 눈. 시선만으로도 마음이 우거졌다. 기억과 감정이 뒤엉키는 소리가 소란스러워 순영은 뒤척였다. 혹시, 어쩌면. 어쩌면 너는 과거부터 나를. 한솔이 깜빡이며 입을 연다. 습관처럼 바라본 입술이 동그랗게 모인다. 귓가에 와 닿는 한솔의 목소리.

 

잠들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못 자긴 개뿔을. 원래도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스타일이다. 머슴 최적화.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키고 나서야 깨달았다. 옆자리에 사람, 아니 도깨비가 없었다. 순영은 한솔과 함께 눈밭에 누워 천사를 만들던 어린 시절처럼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허전했다. 월요일 1교시 수업에 간 불쌍한 중생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깨웠으면 같이 갔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며 기꺼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가뿐했다.

 

알람 없이 눈이 떠진 탓에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며 좁은 방 안을 돌아다니던 순영의 다리가 쿵 소리를 내며 책상에 부딪힌다. 쓰읍…. 허벅지를 문지르려 몸을 굽히니 바닥에 떨어진 쪽지가 보였다. 알아보기 힘든 길쭉한 글씨체.


정심 같이 9어


역시 바뀌는 건 없나. 저는 한솔을 이해하고, 그는 저를 편안하게 하고. 하물며 그가 실은 스물 셋 동생이 아니라 123살의 도깨비라고 하더라도. 순영은 허벅지가 아픈 것도 잊고 곧장 메시지를 보낸다. 뭐 먹을래?

 

 

 

 


도깨비 생태는 원래 그런가. 정체를 들키자마자 한솔은 뻔뻔해졌다. 통금 있다며 왜 집에 안 가는데. 매일 순영보다도 먼저 순영의 자취방에 와 있었다. 이건 거의 동거잖아. 갓 사랑을 자각한 평범한 인간에게는 과한 담력 테스트다. 피해 다니려던 시도는 진작 실패로 돌아갈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꼭 붙어 지내고픈 마음은 또 없었다. 시험 기간이라 봐주는 거다. 집이 머니까. 자취방 비밀번호를 누르며 순영은 합리화했다.


연달아 시험이 있다더니 끝나자마자 왔는지 이제는 꽤 여러 벌 구비해 둔 제 옷을 알아서 꺼내 입고 잠들어 있는 한솔이 보였다. 잠든 얼굴이 천사 같다. 이 세상에 도깨비가 있는데 천사라곤 없을까. 그렇다면 도깨비와 천사를 동시에 할 순 없는 건가. 투잡 가능? 미간까지 좁히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순영을 한솔이 끌어내렸다.


"너… 야!"
"왜 보고만 있어?"


깜빡이는 눈과 팔랑이는 속눈썹. 도깨비의 눈에는 특별한 게 있나. 번번이 눈을 보면 무력해진다. 한솔이 도깨비이기 때문인지, 한솔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순영은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봤다. 자세가 기묘했다. 누가 보면 덮치는 줄 알겠네. 순영은 한솔의 얼굴에 침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깨닫는다. 도깨비인 걸 몰랐을 때도 늘 한솔에게 무력하지 않았던가. 인지는 곧 감정의 변곡점이고 순영은,


"혹시 내가 검을 못 봐도 괜찮아?"


그 와중에도 걱정이 앞선다. 뭐? 한솔이 아리송한 얼굴을 한다.


"난 가슴에 칼 꽂혀 있는 거 못 보는데 너 좋아해도 돼? 네 운명의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돼?"
"내 가슴에 칼이 왜 꽂혀 있어?"
"도깨비… 라며?"


도깨비는 가슴에 꽂힌 칼 뽑아주는 사람이랑 연애하는 거 아니야? 맞다. 그러면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지. 헐? 한솔아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꼭 형한테 먼저 말해야 해. 혼자 떠안지 말고. 형이…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 볼게.


작은 자갈들이 쏟아지듯 와르르, 하고 한솔이 웃었다.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봤어. 근데 형 나 좋아해?"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흐릿하게 먼 곳을 보던 순영의 초점이 대번에 맞는다. 말을 하겠다고 다짐한 건 맞지만 막상 저렇게 물어오니 머릿속이 표백된다. 한참을 아무 말도 없던 순영이 눈을 부릅뜬다. 근데 너 그날 밤에 나한테 왜…. 책임을 전가할 작정이다.


“나는 좋아해, 형.”


헐. 여태 멀쩡히 한솔의 머리 옆을 짚고 있던 양팔에 힘이 풀린다. 슬로우가 걸린 듯 몸이 겹쳐진다. 잠깐 서늘하고 오래 짜릿한 감촉. 네 입술 따뜻, 하지 않은 레모네이드처럼. 순영은 다시금 감개무량해진다.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잖아. 형이랑 백년해로하고 싶다고. 가만히 웃는 한솔의 얼굴을 순영은 넋을 놓고 본다. 그게 그 뜻이었구나.


오래 같이 있을게.

 

 

 

 


백년해로? 근데 너 백 스물세 살이라며.
와씨,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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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아이유 Black Out의 ‘다스베이더만 아니면 네가 내 첫사랑이야’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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