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윤버] SUMMER TIME
ㅅㄷ / 글
헤이, 버논! 그와 동시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한솔은 못들은 척 뒤돌지 않았다. 보통은 정말로 못 듣는 경우가 많았지만 종종 그는 들었음에도 여느 때와 같이 듣지 못한 것 마냥 굴었다. 모든 소리를 다 들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목에 걸었던 헤드셋을 끌어올려 귀를 덮는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비트와 잘게 쪼개진 스네어 소리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한솔은 닫힌 문이 다시 열리기 전에 펍을 등지고 일몰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금빛으로 잠기는 해를 보며 해변가를 걷는 시간은 한솔이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숙박업소에서 가이드 일을 하는 한솔은 고객의 일정에 따라 가끔 뜨는 시간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꼭 사우스 비치를 찾았다. 마이애미의 그 해변은 아니고, 키웨스트에 있는 사우스비치. 누군가는 성의 없는 작명이라 하였으나 한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하나로 존재하는 건 외로울 것 같았다.
한산한 백사장. 조용하게 파도가 치고 물이 밀려왔다 떠난 흔적을 따라 찬찬히 걷는다. 붉은 기 없이 노랗게 물든 찰나는 정말로 순식간이라 유심히 담아두지 않으면 안됐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물자욱 옆에 남은 한 사람 분의 발자국이 드문드문 찍혀있었다. 한 사람. 한솔을 혼자인 기분이 들어 제 발자국 위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럼 앞 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서.
되돌아온 길 위에 누군가의 발이 시야에 걸렸다. 그는 한솔의 발자국을 밟고 서서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의 권능에 도전하려는 한낱 인간같이… 틴트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남자의 부스스한 금발 위로 지는 햇살이 부서져 반짝였다. 선글라스를 벗고 머리를 툭툭 털어 정리한 그가 한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윤정한. 6년만의 재회였다.
SUMMER TIME
윤정한 최한솔
급작스러운 재회에 극적인 만남을 연출하기엔 둘 다 그럴 성격이 아니었고, 그저 스쳐 지날 줄 알아 덤덤한 인사와 함께 헤어졌는데 두 번째 재회는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한솔의 근무지인 숙박업체의 프론트에서 당당하게 한국말을 하는 금발의 남자. 여기 예약했는데요. …What? 한국말 못하시나? Umm…… 꿋꿋하게 각자의 언어를 하던 둘 사이를 지켜보다가 끝이 없을 것 같아 한솔이 끼어들었다. 잠자코 한솔이 체크인 해주기를 기다렸다가 하는 말이란.
“한솔아, 고마워.”
아직도 한솔이라니. 물론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이 맞았으나 지나치게 뻔뻔한 그의 말에 딴지를 걸려다가 말았다. 윤정한에겐 어떤 대꾸를 하든 말려들어갈 수 밖에 없는 걸 알았으므로. 그러다 문득 궁금해져서 툭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계속 한국말 했어? 영어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정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네가 보고있었잖아.”
어이구.
-
혼자 있었다면 어떻게든 해결했을, 혹은 세상이 해결해줬을 사람이니만큼 정한은 빠르게 적응했다. 예전 기억과는 조금 달라진 면도 있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낯선 사람과 어색한 웃음과 침묵을 나눴을 그가 벌써 카운터 직원과 되도 않는 영어로 시답잖게 군다든지 하는 일. 언제 덤덤히 지나갔냐는 것처럼 정한은 한솔을 볼 때마다 한솔아, 하고 그를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걸 본 직원들이 궁금하긴 하고 그렇다고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는 정한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은근하게 무슨 사이냐며 한솔을 찔러왔으나 한솔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건 둘째치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도 모르겠으니까.
Ex-Boyfriend?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데.
자꾸 다른 사람 소개시켜주다가 연락 끊고 잠적 탄 애인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윤정한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한솔 역시 어떤 감정이 피어 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빡침? 애써 잊어버린 고민거리들이 타인에 의해 눈앞에 들이밀어진 기분? 이젠 그가 밉지도 않았다. 원망하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고 한솔은 자신을 갉아먹고 싶지가 않다. 결정권이 타인에게 있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자연재해에는 저항할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윤정한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을까. 알 생각도 없었지만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들었을까. 왜 하필 이 곳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게 윤정한의 계획이었을까. 6년간 정한도, 한솔도 변하였으나 한솔은 여전히 정한을 알 수 없었다. 형은 진짜… 정신이 좀 나간 것 같아. 그 시절 나갔던 정신 머리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버논? 제가 사랑하죠.”
저런 말들. 제가 정한과의 사이에 대답하지 않자 호기심 많은 카운터 직원이 결국 정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저렇게 대답하는 일.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쉽게 말해버리는 일.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 한솔을 발견한 정한이 밝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한솔아.”
-
“네?”
“산책갈래?”
“지금요?”
어… 한솔은 말끝을 늘이며 시계를 한 번, 학생부실의 낡은 소파에 길게 늘어진 정한을 한 번 봤다. 할 일 있다고 부르더니 할 일은 세 장의 서류정리가 다였고 그마저도 정한은 한솔을 시켜먹었다. 정한은 중요한 일은 빼먹지 않으나 본인이 판단하기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되면 요령을 피우는 버릇이 있었다. 범법은 저지르지 않으나 학칙은 은근슬쩍 들키지 않는 선에서 넘나들곤 했다. 한솔을 학생부에 끼워 넣은 것 역시 규정 상 어려운 일이었는데 정한은 기어코 신청기간이 다 지난 학기 한 중간에 그를 입부시켰다.
너 심심하지 않아?
혼자 헤드셋을 쓰고 운동장 구석 정자에 앉아있던 한솔에게 대뜸 한다는 첫마디가 저거였다. 음악소리에 묻혀 재차 물었더니 정한은 친절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심심하지 않냐구. 그는 단정한… 단정하다기엔 조금 길이감이 있는 흑갈색 머리에 하복 단추를 두어 개 풀고, … 그닥 단정하지만은 않은 차림새였다. 한솔은 약간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왜요?
그렇지만 공격적이지는 않은 투로. 한솔의 물음은 어떤 의도도 담고 있지 않았는데 몇 사람들은 한솔의 반문을 상당히 꺼려하곤 했다. 특히 어른들이. 질문을 제한당한 그 때의 한솔은 약간의 무료함에 잠식되어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재단 당할 때마다 한솔의 마음 위로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별 거 없는 작은 눈송이가 하나 둘 쌓여 한솔을 주저앉히려 노력하는 기분. 한솔은 그에 응해 나자빠지고 싶기도, 강렬하게 반발하고 싶기도 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는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와 다시 푸시식 식어버리기의 연속이었다. 말 수가 줄어들고 주변과 거리가 생긴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정한이 불쑥 시야에 끼어들어온 그 즈음.
심심하면 나랑 재미있는 것 좀 하자고.
누구신데요?
나?
나, 윤정한. 이제보니 그는 명찰도 없었다. 그래서 갈래 말래? 한솔은 정한이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 손을 겹쳐 잡았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재밌는 거 시켜준다니까. 가벼워지고 싶었다. 은근하게 내리누르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이제 막 이름을 알게 된 천진난만해 보이는 윤정한을 생각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다음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그렇게 남자 둘이 다정하게 손 잡고 도착한 곳이 학생부실이다.
한솔이 굴림체로 정직하게 적힌 명패를 보는 사이 정한은 거침없이 나무 문을 열었다 .벌컥 열리는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정한 선배! 모두들 반가워하는 신호를 내비쳤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는가 하면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다가와서 장난스레 주먹을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선배? 한솔은 정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머리 끝 선이 튀어나온 척추 뼈를 간질였다. 말로만 두발 자유를 표방하는 학교에서 자주 잔소리를 들었을 법한 머리였다.
뒤엔 누구예요?
누군가의 물음에 정한이 뒤를 돌아 한솔을 한 번 보고 씩 웃었다. 잔뜩 신이 난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얘? 우리 신입부원.
엥. 신청기간 끝났잖아요?
응. 근데 신입부원이야.
그거 가능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 되지?
물었던 학생은 머릴 긁적이다가 수긍했다. 선배가 그렇다면야 뭐… 그렇게 되겠죠. 다른 사람들도 얼떨떨하지만 어쨌든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한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한솔을 향해 말했다.
진짜 재밌겠다. 그치.
어… 네.
한솔은 눈을 굴리다가 어정쩡한 답을 했다. 정한은 그가 어떻게 대답하든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지런히 정리된 파일을 뒤적였다. 입부서가~ 어디 있더라~ 아, 찾았다. 한솔의 앞으로 회색 종이가 밀어졌다. 그거 써서 나 주면 돼. 한솔은 망설임 없이 모든 칸을 채운 뒤 정한에게 되돌려 주었다. 한솔의 글씨체로 채워진 칸들을 훑어 내리던 정한이 툭 뱉었다. 나도 4반인데. 심심하면 나 보러 와. 그럼 나한테 매점을 쏠 기회를 줄게.
어쨌든 그랬었다. 찾아오라면서 본인이 더 자주 한솔을 찾아왔고 자기가 보러 왔으니 매점 사라며 되도 않는 소리를 하다가 또 막상 매점에 가면 제 지갑을 꺼내며 한솔을 사줬다. 그게 한 일주일 반복되니 어느 날 아침 조회에 담임이 최근 3학년이 1학년 층에 자주 출입해서 압박감을 느낀 사람은 조용히 와서 말하라더라. 한솔은 대번에 그게 정한 얘기임을 알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정한이 3학년이라는 사실을… …
2주 정도 지나자 정한은 한솔을 학생부원들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줬다. 학생부원들은 한솔을 환대하며 정한을 향해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징하다…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정한의 집요함은 하루 이틀이 아닌 듯 했다. 한솔에게 조금 놀랍게 다가왔던 건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결국엔 일반을 뒤집어 낸 정한이 학생부 내에서 어떤 감투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고 순전히 정한의 힘만으로 보통은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들었다는 것.
이 사람 곁에 있으면 정말로 재미있을지도 몰라.
한솔에게 그런 감상을 줬던 정한은 현재 무료한 고양이마냥 축 늘어져 있다. 정한의 머리는 이제 아래로 내려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다들 한 번씩 만지작거리느라고 최근의 그는 남의 손을 타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한이 늘어진 소파의 빈 공간을 비집고 앉았다. 정한은 몸을 뒤척여 자연스럽게 한솔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그럼 또 한솔 역시 자연스럽게 허벅지 위로 흩어진 정한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산책은 나중에요.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
“그래, 그럼.”
열린 창문 사이로 후덥지근한 공기를 가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연보라색 커튼이 그림같이 흩날리고 째지는 매미소리가 간헐적으로 학생부실을 채웠다. 방학 보충수업을 하는 영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한솔은 쨍한 햇살이 우거진 교목을 데우는 것을 창문 너머로 보다가 손을 잡아당기는 힘에 정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한이 한솔의 손을 끌어다 제 눈을 가렸다. 눈부셔… 잠에 들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머리는 왜 안 잘라요.”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고. 시비를 걸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고. 그냥 떠올라서 물어봤다.
“그냥.”
정한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자의로 붙이지 않은 건지 잠에 들어버려 그러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솔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그냥 그랬다고. 말을 오래 곱씹다가 나지막하게 내뱉어 보았다.
“그냥… …”
한솔은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대신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꺼내볼 거라고 확신했다. 바래진 기억을 소중하게 닦아 두고두고 찾을 거라고. 우리가 이후에 어떻게 되든 지금 이 순간만은. 오로지 좋다는 단어만으론 정의 내릴 수 없는 벅참. 한솔의 안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이며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정한의 얼굴 위에 올라간 손으로 그의 눈가를 느리게 쓸어 내렸다. 그러자 정한이 천천히 눈꺼풀을 올려 한솔을 보았다. 선명한 눈동자가 또렷하게 마주쳤다.
이 몇 초의 찰나에 한솔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
-
산책 가자는 정한을 거절했으나 집요하기가 거머리 뺨치는 그를 완전히 거절해내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한솔은 결국 빨간 지프트럭에 정한을 태우고 도로를 달렸다. 내키진 않지만 최고 속도 55마일을 딱 맞췄다. 느리게 달렸다간 꼼짝없이 막히는 길이었으므로. 정한은 창문을 내리고 끝없이 펼쳐진 옥색 바다를 보고 있었다. 뭐, 정말로 바다를 보고 있는 건지 하늘을 보고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있는 건지 그의 뒤통수만 볼 수 있는 한솔로선 알 길이 없다. 휘날리는 금발이 정한의 뒷목을 마구 쓰다듬었다. 그 탓인지 튀어나온 척추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한솔은 다시 시선을 도로에 고정했다. 둘은 목적지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한은 한솔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한솔은 정한에게 어딜 가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해질녘의 갈대밭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있었다. 한솔이 차를 세우자마자 훌쩍 뛰어내린 정한은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높게 올라온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정한의 머리 색과 비슷했다. 마침 얇은 녹색 가디건을 입고 있어 정한은 그 속에 쉽게 섞여 들었다.
“이런 곳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설마 모르겠어.”
“잊은 줄 알았어.”
“잊기 어렵지. 이런 건.”
“…….”
“형은 잊었어?”
…아니. 정한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미안함? 그리움? 한솔은 정한을 추측해보려 하였으나 곧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예전이라면, 6년 전이라면 알 수 있었을까? 알 수 있었다면 정한이 그렇게 떠나버릴 것도 알 수 있었을까? 정한을 다 알 것 같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정한을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사람이 사람을 다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임에도 한솔은 정한을 앎에 있어 집착하게 되었다. 일종의 트라우마같이.
“어떻게 지냈어.”
왜 그랬냐고는 묻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을 걸 알아서. 의연해지고 싶은 동시에 의연해지고 싶지 않았다. 무던해지고 싶으면서도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지냈을 것 같아.”
정한이 태양을 등지고 섰다. 역광이 드리워 정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일본에 갔어. 거기는 겨울에 춥더라. 여름에 미친 듯이 덥고. 좋아할래야 좋아지지가 않더라고. 나 사람 많은 것도 안 좋아하니까. 도시에 사람이 너무 많아. 너무 붙어있고… 거기서 캐스팅을 받아서, 처음엔 아이돌할 생각 없냐고 그랬는데 그런 건 내키지 않는다고 했더니 배우를 권하더라고.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 끝까지 쫓아와서. 어쩐지 불쌍해 보였어. 그래서 그냥 사무실에 한 번 들렸거든. 사기꾼일 줄 알았으니까, 불쌍한 사람, 할 일도 없으니까 한 번쯤 따라가줘야지, 라고 생각했어. 그랬는데 진짜더라. 그래서 되도 않는 일본어로 드라마도 하나 찍고.”
“거짓말이지?”
“… ….”
“형은 속이고 싶을 때 말이 너무 많아.”
“속아 줄 생각은 없고?”
“한 번이면 됐지.”
혼자 남겨지는 거, 두 번은 싫네. 한솔이 중얼거렸다.
“혼자는 아니었잖아.”
“그치. 형이 형 대신하라고 붙여준 사람들이 있었지.”
“그런데도?”
“근데 형이 아니었잖아.”
그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정한이 입을 다물었다. 한솔도 입을 열지 않자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쏴아아. 붉은 바다가 넘실대는 것 같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저 수평선 너머로 다가오는 게 날 찾으러 온 개인지 날 해치러 온 늑대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저기 선 윤정한이 그 시절의 정한과 겹쳐 보였다. 형. 그거 기억해?
“형이 나한테 처음 말 걸었을 때.”
“너 혼자 앉아있고?”
“어. 형이 갑자기 나타나서 재미있는 거 하자 그랬잖아.”
“응. 그랬지.”
“왜 그런 거야? 사실 그렇게 남 신경 쓰는 사람 아니잖아.”
운동장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한텐 더더욱 그럴 사람 아니었잖아. 정한은 짧게 탄식을 흘렸다. 아…
“나, 그 날 너 처음 본 거 아니야.”
“… ….”
“내가 맨날 학생무실 소파 끝에 기대있었잖아. 거기서 내려다보면 그 정자가 딱 보여.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는데, 너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 그냥, 보기에 네가 재미없어 보였어. 늘 똑 같은 자리에서 헤드셋 쓰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
“… ….”
“그런데 왜 그랬을까? 네 말대로 내가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어.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애를 데려다가 즐겁게 해주고 싶었어.”
“그냥.”
“어, 그냥. 그래서 처음 너한테 말 걸었을 때 깜짝 놀랐는데.”
“왜?”
“너무 예뻐서. 정말 천사같았어.”
아, 이래서 세상이 재미없어 보였나? 싶었지. 정한의 얼굴 위로 잠깐 빛이 새어 들었다. 정한은 웃고 있었다.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아는. 마침 바람이 불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정한의 얼굴을 쓸었다.
“근데 넌 다시 봤을 때도 천사같더라고.”
한솔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묻어두기만 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방금 알아서. 매듭짓지 않은 일은 거기서 끝인 줄로만 알았다. 열린 결말처럼. 그런데, 그러면 뒤가 이어지기도 한다는 걸 지금 알았다.
저 웃기는 소릴 할 때는 거짓말을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게 느껴져서.
윤정한이 짜증나 죽겠는 와중에도 이 순간이 강렬하게 다가와서.
윤정한이 비겁하고 저 좋자고 이기적인 짓을 했지만,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져버린 채로 제 앞에 있지만 그럼에도 윤정한을 왜 좋아했는지 떠오르게 해서.
한솔은 정한이 저 좋을 대로 살아서 좋았다. 지금도 저렇게 말하면 한솔이 대번에 짜증낼 걸 알면서도 굽히지 않는다. 굽힐 줄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그는 한솔에게만은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솔의 반응을 곡해하지 않는다. 정한은 한솔이 솔직하면 할수록 좋아했으니까. 한솔은 별안간 억울해졌다. 그는 한솔을 그의 앞에서 투명하도록 만들어놓고 지는 숨어버린 게. 한솔이라고 정한을 모르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한이 한솔에게 결정적인 하나를 내어주지 않는 이상 한솔은 정한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형도 알지? 지금 형이 비겁하다는 거.”
“알지.”
정한이 자조했다. 근데 조금 더 비겁해도 돼?
“나, 기다려줄 수 있을까.”
정한은 아쉬운 소리는 잘 하지 않는다. 안 그렇게 생겨서 책임감이 있으니까. 쉽게 변명하지 않으며 지난 일에 두 번, 세 번 입대지 않는다. 그는 가벼운 일일수록 쉽게 대하고 무거울수록 속으로 삼킨다. 그로 인한 결과마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었는데 한솔은 정한의 순응이 체념이나 포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미 늦었다곤 생각 안 해?”
“알아. 다 아는데 포기가 안 돼.”
그런데 저런 절박한 눈이란. 생에 단 한 번도 절실해져 본 적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저런 얼굴이란.
“형, 우린 절대 되돌아 갈 수 없을 거야. 그 때로부터 너무 멀어졌고 형은 이미 많은 기회를 놓쳤으니까. 그리고 나는 형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런데도 형이 그렇다면.”
적어도 한솔에게 있어선 처음 보는 정한의 모습이라서.
“형이 더 많이 뛰어와야 돼.”
지난 시간만큼의 거리를 다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
한솔은 본래도 느리게 걷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세계를 보고 싶었으므로.
그러나 문득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걸음을 늦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한의 머리가 잘렸다.
잘’렸’다는 건 본인의 의지로 자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잘림을 당했다는 거지. 수능도 다 끝난 마당에 교사들은 이럴 때 일수록 마음을 다 잡아야 한다며 겁을 주고 다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인가? 하여간 정말로 끝나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다고 해서 한 번 풀어진 분위기는 돌아오기엔 아이들의 자유를 향한 목마름이 너무 심했다. 와중에 본보기로 걸린 것이 정한의 머리였다. 이젠 어깨를 넘어 등에 닿는 정도의.
정한은 모두가 보는 복도에서 붙잡혀 머리를 잘렸으며 한솔은 그걸 전해 들었다. 정한은 머리가 아니더라도 눈에 띄는 사람이라 그에 대한 이슈는 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녔는데 이번 일은 그 중에서도 충격적인 일이라 더욱 빠르게 말이 돌았다. 한솔은 그가 걱정되기도 하고 기괴한 불합리에 분노를 품기도 하면서 정한을 만나러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한 특유의 짜증난 표정으로 화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형,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정한은 학생부실 소파에 녹아있었다.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카락이 수습되지 않고 존재감을 뽐냈다. 한솔은 그의 옆에 낑겨 앉아 자리를 만들고 동복 니트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어주었다. 한참 동안 짜증과 우울과 막막함이 정한의 등을 누르고 있다가 별안간 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안되겠어.
뭐가?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이 반짝이는 걸로 봐서 한솔은 정한이 또 뭔가 사고를 치겠거니 생각했다. 평소엔 눈 뜨는 것도 귀찮은지 80%만 뜨고 살면서 꼭 사고를 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만 저런 눈을 하니까. 내일이 기대되는 동시에 걱정도 되고… 내일 되면 알겠지. 어쨌든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거니. 한솔은 속으로 정한을 응원했다. 한솔이 생각하기에도 그들의 처사가 심했다.
그리고 정한은 다음날 백금발로 등교했다.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파장이 일었다. 그럴만한 모습이긴 했다. 교사의 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까만 머리통들 사이에서 백금발이란 정말 파격적이었으니까.
정한은 본래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놓고 교칙을 어길 만큼 대담한 사람도 (그래서 안 들키고 몰래 하는 거지만) 아니고 불만을 표시할지언정 체제에 크게 반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지간하면 감내하고 넘어가는 일이 대부분이다. 대체적으로 까라면 깐다는 소리다.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하는 건 또 처음이라 한솔은 신기해하면서도 염려가 되어 물었다.
형, 나도 탈색할까?
그 소릴 들은 정한이 깔깔 웃으면서 만류했다. 괜찮아~ 나 이제 학교 안 나오려고. 어차피 정시로 대학이 확정되어 나올 필요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냥 나오라니까 나왔던 거지. 다시 말하지만 정한은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시키는 일에 고분고분한 구석이 있었다. 너 진짜 귀엽다. 나 걱정된다면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 한솔아, 나는 니가 걱정돼. 정한이 한솔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솔이 사랑해~
요새 부쩍 사랑한다는 말이 늘었다. 그건 정한의 입버릇 같은 거였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만큼 되돌려 받기. 그와 가까운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에 사랑한다고 돌려줬는데 한솔은 영 내키지 않았다. 사랑을 말하는 정한의 얼굴을 썩 무겁지 않아서. 그 얼굴에 마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제 마음이 가볍지 않았으므로. 그가 타인을 향해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종종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 놀라움을 느꼈다. 내가 남한테 간섭하고 싶어하다니. 그러다가도 이내 그럴 수 있지, 하고 수긍한다. 사람 마음이 생각대로 될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일테지.
나도.
한솔은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한이 제 마음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전달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서 그저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했다. 다른 건 그냥 할 수 있었는데 이건 그냥, 이 안됐다.
한솔이는 나 사랑한다고 언제 말해줄래?
나중에.
언젠가 한 번쯤은 고백할 마음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한솔은 혼자만의 마음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사그라들어 순간을 지나치게 되더라도.
다음날부터 정한은 정말로 등교하지 않았다. 소문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더욱 박차를 가하는 법이라 정한은 어느새 학교의 전설로 남을 선배가 되어있었다. 물론 그럴만한 사안이긴 했으나… 한솔은 과장된 루머가 들릴 때면 직접 해명했으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모든 말들을 고쳐주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래서 옮겨진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거구나. 발 없는 말의 위험성을 새삼 깨닫게 된 한솔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형 졸업식엔 오는 거지?]
[웅ㅎㅎㅎㅎ]
[나 보러 와줘~ ♡]
[어디야?]
[강당에 사람 너무 많아서 ㅠㅠㅠ]
[학생부실로 올래?]
[지금 다들 뒷정리 하느라 강당가서]
[여기 애들 없는데]
한솔은 노란색 프리지아 꽃다발을 한 손에 쥐어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한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정말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고 했다. 그와 메신저로 대화하면서 장소를 물었을 때 대부분은 집이었다. 그러면서 종종 하교 길에 한솔을 데리러 온다던가. 한솔은 그가 없는 학교가 생각보다 심심하다고 느꼈다. 정한이 처음 한 말은 지킨 셈이다. 그가 있을 때는 정말로 재미없다고 느낄 틈이 없었으니까.
졸업식이 다가오며 묘하게 초조한 느낌이 한솔을 잠식했다. 한솔로썬 생경한 감각이었다. 정한이 졸업하고 나서도 관계가 계속 이어질지에 관한 고민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단지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뿐인데. 여지껏 그래왔듯 메신저로 연락하고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는데도 사이가 벌어져 더는 이전과 같지 않을 까봐.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학생부실 앞이었다. 한솔은 처음 이 문 앞에 섰을 때를 기억한다. 꽃다발 대신 들어차있던 정한의 손도.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정한은 늘 앉아있던 그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솔이 왔어?
뿌리탈색을 새로 했는지 여전히 깔끔한 백금발이 셋팅 된 모습이다. 간만에 보는 단정한 교복이었다. 졸업식이라고 신경 쓴 태가 났다. 평소엔 넥타이도 느슨하게, 단추도 두 개 정도는 풀어 안에 받쳐입은 검은색 티가 보였으면서. 정한은 옆에 접어 두었던 코트를 챙겨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한의 뒤쪽 창문 너머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날렸다. 구름 낀 배경은 하나도 화창하지 않았으나 한솔은 햇빛이 뜨겁게 들이치던 여름날을 떠올린다.
졸업 축하해.
노란 꽃다발을 받아 든 정한이 그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어떤 종류든 향을 선호하지 않는 정한으로선 드문 광경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란 꽃들로 얌전히 둘러 쌓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솔은 어쩐지 지금, 고백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해야만 한다고. 그 순간 정한이 눈을 뜨고 살풋 웃었다. 여전히 꽃다발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로. 한솔아.
“형 좋아한다고 언제 말할 거야?”
“뭐?”
“난 너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일부러 애들 다 보내버렸는데.”
한솔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 되물었다.
“형 지금 뭐라고?”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한솔아.”
“지금 장난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해~”
아니, 형 진짜로? 언제부터? 한솔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정한이 장난치는 게 하루이틀이었어야지. 정한이 꽃다발을 내렸다. 웃는 얼굴이었으나 그는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놓았다. 그제서야 꽃다발을 감싼 정한의 두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몰라. 언제부턴가. 이렇게 된지 꽤 됐어.
“사실 해가 바뀌기 전에 말하고 싶었거든? 근데 영 타이밍이 안 잡히는 거야.”
“형.”
“그래서 결국 스무살 되고 말하네. 그래도 오늘까지는 고등학생이니까 참작해 줄 거지? 게다가 넌 빠른이잖아. 미성년자한테 고백하는 파렴치한 성인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형.”
응. 정한이 입술을 꾹 늘였다. 저 형도 지금 초조하구나. 전혀 그럴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는데. 한솔은 짧게 웃었다. 저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사람이 눈 앞에 있으니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다. 한솔이 느낀 지금이어야 한다는 직감을 정한도 느꼈으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동질감을 넘어 어떤… ….
“나 형 좋아해. 그닥 순수하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그건 뭐야… 정한이 피실피실 웃었다. 한솔 역시 마주 웃었다. 이런 고백이 될 거라곤 예상 못했는데. 둘은 말 없이 키득키득 웃다가 정한이 문득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는 안 해줄 거야?”
“그건 좀… ….”
한솔은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선심쓰듯 말했다.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정한이 밝게 웃었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
나,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보고 싶어.
지금 둘이 빨간 지프트럭을 타고 여름 밤을 가로지르는 것은 정한이 스치듯 흘린 한 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6시간을 꼬박 달려야 한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정한이 경악했다. 당장 세워. 정한의 굳은 얼굴을 본 한솔은 이걸 위해서라면 6시간 운전도 할만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거 참 좋겠구나, 하고 넘어갔을 일을 정한이어서 선뜻 차에 태운 것도 있었다. 왜냐면 놀이공원을 선호하는 건 정한이 아니라 한솔이었으므로. 정한은 오히려 환상의 트로피칼 랜드와는 취향이 동떨어져 있는 편이다. 갈대밭이나 평지가 대부분인 공원, 벤치가 많은 도로. 이런 곳들. 디즈니랜드는 한솔이 가고 싶어했던 장소였다. 미국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떠난 곳일만큼.
한솔아 나 좀 찍어줘.
정한이 만들어진 성 모형 건물을 배경으로 길 가운데에 섰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지나다니는데? 괜찮아. 내가 주인공이니까. 원래 주인공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법이지. 한솔은 정한의 휴대폰을 받아 들고 촬영버튼을 눌렀다. 열 번 정도 누르자 정한이 다가와 사진첩을 확인했다. 너 좀… 예술적이네. 좀 현대미술 쪽? 한솔도 스스로가 썩 잘 찍지 못한다는 건 알아서 찍기를 꺼려했으나 정한은 오히려 열정적으로 모델이 되기를 원했다. 재밌다. 내가 어디까지 빛을 발할 수 있는 피사체인지 알고 싶어. 뻔뻔스레 내뱉는 정한의 눈이 반짝였으나 그 위로 피곤이 쌓여있긴 했다. 애초에 정한은 사람이 한 반 단위를 넘어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데미지가 쌓이곤 했다. 그런 사람이 주말 낮 시간 놀이공원에 있으려니 진이 다 빠지지.
발단은 한솔의 동생이 보낸 펜팔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생이 보낸 유니버셜 스튜디오. 한솔은 그걸 정한에게 보여주며 해리포터에 대한 감상을 필리버스터했다. 정한이 10% 정도 영혼 빠진 얼굴로 한솔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고 반응이 요상해 물으니 해리포터를 안 보셨단다. 영화를 안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해리포터도 안 봤을 만큼인 줄은 몰랐다. 형 진짜 하나도 몰라? 주인공이 해리인 건 알아. 포터는 누구야? 이 형 진짜네… 어쨌든 한솔은 한 번 관심사를 말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고 정한은 그것에 흥미가 없을지언정 안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라서 장장 한시간동안 꼼짝없이 한솔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어야 했다. 그 와중에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주말 아침부터 한솔을 끌고 나온 곳이 여기다. 환상의 나라 트로피칼 랜드. 원래는 일본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명색이 고3인데 일본까지 가기엔 눈치가 보이셨댄다. 한솔은 정한관 달리 자유로운 영혼이었음에도 정한은 제 고3 시절을 생각하는지 학칙에 관해선 느슨했으나 그 이외의 사항들에 대해선 이래도 되나? 갸웃거리는 일이 많았다. 제 시험기간과 고등학생의 시험기간이 다르면서 한솔의 시험기간까지 포함해 계속 도서관 데이트를 한다던지 하는 일. 지금도 보충이 시작하기 전 짧게나마라도 있는 여름 방학이라 그나마 놀이공원까지는 왔다.
시시각각으로 정한의 체력이 복리 형태로 떨어지는 게 보여 어차피 둘 모두 기구를 즐겨 타지도 않는 터라 광장으로 나와 아무 벤치에 걸터앉았다. 꽃 축제 기간인지라 이 쪽도 인파가 꽤 있었는데 기구 쪽과는 비할 바 없이 한산한 편이었다. 정한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생수를 이마에 붙였다. 그런 정한을 한솔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생수를 떼고 이마를 붙여왔다. 급작스럽게 훅 가까워진 거리에 한솔이 물러나려 했으나 그보단 정한이 빨랐다. 맞붙은 이마에서 냉기가 넘어왔다. 공기는 뜨겁고 이마는 차갑고. 이번엔 한솔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아무렴 어때. 어차피 둘 모두 모르는 사람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이마가 미지근해졌을 무렵 정한이 떨어졌다. 그의 뒤로 피어난 해바라기가 싱그럽게 웃는 정한과 잘 어울렸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의 정한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 밤이었으면 했을 거야.
뭐를? 이해하지 못한 한솔이 갸우뚱하다가 번뜩 스치는 생각에 정한을 흘겨보았다. 정한도 한솔이 눈치 챈 것을 눈치채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솔 역시 마주 웃다 이번엔 한솔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정한이 피할 새도 없이 입술이 맞붙었다. 씩씩함을 넘어 전투적인 한솔에 정한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한솔은 눈을 치뜬 채 그걸 다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내 페이스를 찾은 정한이 눈웃음을 치더니 눈을 감고 한솔의 뒷목을 당겼다. 생수병의 바깥에 맺힌 물이 뚝뚝 떨어져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으나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섞이는 혀 사이 8월의 태양을 굴리는 것처럼 뜨거운 키스였다.
국제 라이선스가 없는 탓에 무면허 드라이브를 감행하려던 정한의 목표가 좌초되고 그러면 쉬기라도 해야한다며 강력한 주장에 결국 갓길로 차를 세웠다. 늦게 출발했으니 벌써 캄캄하게 밤이 드리웠다. 별이 빼곡하게 수 놓인 하늘이 아까워 한솔은 순순히 쉬어가기로 했다. 둘은 빨간 지프트럭 보닛 위에 앉아 말없이 하늘만 보다가 별안간 한솔이 드러누웠다. 형도 누워. 형 눕는 거 좋아하잖아. 그 말에 정한도 거절하지 않고 냉큼 누웠다.
“한솔아.”
“왜.”
“팔베개 해주면 안되겠니.”
등짝이 너무 추워. 뭐? 등짝이 추운데 팔베개가 무슨 상관이람. 어이없어하며 쳐다보자 정한이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어이구. 한솔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단 심정으로 팔을 내줬다. 그건 한솔이 그닥 좋아하지 않는 속담이었는데… 온전히 밉기만 한 건 아니라서 그렇다고 하겠다. 그러고 한참을 있다가 한솔이 물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정말 얘기 안 해줄 거야?”
“음…….”
“거짓말 할 거면 하지를 말어.”
“그래.”
미안. 내가 겁이 많아서. 한솔이 하늘을 보던 고개를 틀어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이미 한솔 쪽으로 방향이 틀어져 있어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알아. 알아? 어. 형은 옛날부터 그랬잖아.
“무서워서 중요한 건 하나도 말해주지 않고.”
“… ….”
“하지만, 형. 그건 너무 이기적이야.”
“… 네 말이 맞아.”
“형은 도망갈 게 아니라 나에게 형을 알려줬어야 했어.”
그러면 지금의 우린 조금 다를 수도 있었겠지. 한솔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고서야 지난 6년동안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형, 나는… 나는 우리를 그렇게 끝내버리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 대신에 책갈피를 끼워 놓은 거야. 언제든 다시 열 수 있도록… …. 정한을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기다린 적 없었을 6년의 시간이 정한을 만남으로써 6년의 기다림이 되었다. 형이 없는 편이 더 잘 살았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이미 형을 알아버렸잖아.
“나는 무서웠어. 네가 너무 무거워 보여서.”
“… ….”
“어쩌면 이 관계가 실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게 아마도 나 때문일 것 같아서.”
그땐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줄 알았어. 널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론 상처받은 사람 둘만 남았네. 그러면 안 됐었는데. 내가 다 처음이라서 그랬어. 하지만 너도 다 처음이었겠지… …. 별이 부서지는 밤하늘만큼 정한의 눈이 잘게 빛났다.
“실패는 이미 해버렸으니 두렵지 않아. 실패보다도 더 괴로운 게 있다는 걸 알아버렸어.”
“그게 뭔데?”
“우리가 더 이상 무엇으로도 이어져있지 않다는 걸 매일 깨닫는 일.”
정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동이 꺼진 자동차 보닛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와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습기 찬 팔과 당신의 반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 둘. 내 옆의 쏟아질 것 같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 둘은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나 한솔은 정한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았다.
“형, 어디쯤이야?”
“널 돌려세울 때까지 한 걸음.”
6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결국 네게로.
“빨리 와. 기다리기 싫으니까.”
한솔이 정한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기대었다. 정한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응. 이 밤을 날아서 너에게 갈게.
-
“이쪽은 조슈아 지수 홍. 여기는 최한솔.”
“그냥 홍지수라고 해도 돼.”
조슈아도 괜찮고. 삼자대면이라도 하는 것처럼 묘한 자리배치였는데 지수는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윤정한 정신 쏙 빼놓는 고딩이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친절하게 정한의 소개도 해줬다. 난 또 정한이가 수갑 차야 하는 줄 알고 들어오기 전부터 긴급전화 눌러놨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더욱 신고가 필요한 것 같아. 대학가서 부쩍 친해졌다는 친구가 생겼다더니 말하는 게 정말 윤정한 친구였다. 어우, 야~ 정한이 지수의 어깨를 밀었다. 살벌한 소리가 났는데 둘은 여전히 꺄르륵 웃고 있었다. 한솔은 둘 사이에서 그저 눈만 굴리고 있다가 윤정한을 받아주기 쉽지 않은데, 같은 생각이나 했다.
지수는 정한이 소개시켜주는 세 번째 친구였다. 그는 요새 부쩍 지인을 소개해줬다. 수능이 끝나고 스무살을눈 앞에 둔 겨울. 할 짓도 없는지라 정한의 주도대로 얌전히 따라다녔다. 전부 대학가서 만난 그의 지인들이었는데 성공적이거나, 그닥 성공적이진 않거나 했다. 그럼에도 정한은 포기하지 않고 지수를 소개시켰는데 지수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선 이전의 둘 보다는 편했다. (그들은 할 말이 떨어지면 침묵을 고수하는 타입이었다.) 나 잠깐만. 정한이 자리를 비웠다. 지수는 눈을 예쁘게 접어 웃으며 정한을 배웅했다. 응, 다신 오지마~ 너 없는 사이에 한솔씨랑 친해질 거야. 정한이 완전히 카페를 나설 때까지 그를 쫓다가 카페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그제서야 한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 주제 넘을 수도 있는데.”
지수는 몇 번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윤정한 요새 좀 이상하다고 못 느꼈어요?”
“이상하긴 하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소개시켜주지는 않는데.”
“그쵸?”
지수가 얌전히 웃어 보였다. 요새 진짜 이상해. 좀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서 누가 불러도 잘 못 듣고 하거든요. 아, 한솔씨한테는 이런 말 좀 기분 나쁜가? 지수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뇨, 요샌 제 앞에서도 좀 그래서. 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최근의 정한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집중을 못하는 건 아닌데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보였다. 정한은 자기 얘기를 잘 꺼내지 않으니까. 재촉하는 대신에 기다림을 선택했다.
“정말 왜 그러는지 몰라… ….”
지수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대학가서 사귄 친구치고 꽤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라서 한솔은 대학친구 다 부질 없다던 정한의 말을 떠올렸다. 다 부질 없지는 않네.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을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 기다림이 그렇게나 길어질 줄 알았다면 당장에 재촉했을 것이다.
일주일 뒤. 윤정한은 깨끗하게 증발한다.
한솔은 그 사실을 한달 내내 부정하고 나서야 바늘을 삼키듯 인정한다.
윤정한에게는 어떠한 사건, 사고도 없었고 제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난 게 사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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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구겨져 불편하게 선잠을 잤다가 새벽을 달려 도착한 사람들 치고 너무 신나게 놀았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나자빠졌을 정한이 끝까지 살아남아 있는 게 신기했다. 아무리 기구를 안 탔다고 해도 그 넓은 공간을 하루 종일 걸어 돌아다녔는데. 한솔은 새삼 시간이 지나긴 했다는 걸 느낀다. 지난 시간 속에 답이 있겠지. 그의 체력을 탐탁치 않아 했었기 때문에 한솔은 대강 수긍하고 넘어갔다. 건강해졌다는 건 좋은 거지.
날이 어둑할 때쯤 빠져 나와 카시트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기절한 것처럼 잠에 들었다. 그러다 깼더니 막 한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정한은 몇 번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야…? 잠귀가 밝은 건 여전했다. 한시. 한솔이 대답했다. 그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산 교복 망토를 두른 채로 기지개를 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한솔보다 정한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뭘 알긴 알아? 형 해리 포터 안 봤잖아. 이제 해리 포터가 한 사람이란 건 알아. 둘 다 그리핀도르 교복을 집었다가 서로를 향해 야유했다. 니가? 형이? 우여곡절 끝에 한솔은 후플푸프, 정한은 슬리데린의 교복을 샀다.
정한은 몸이 찌뿌둥하다며 차를 탈출했다. 그를 따라 한솔도 운전석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는 20도를 웃도는 기온에도 교복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남색과 짙은 보라색을 넘나드는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요 며칠간 낮 밤이 확실히 바뀌었다고 느꼈다. 어째 해를 본 날이 몇 없다. 몸을 쭉쭉 늘이던 정한이 문득 떠오른 듯이 말했다. 여긴 썸머타임이지? 이제 바로 세시 되나?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정확히 따지자면 사라지는 건 아닌데.”
“기분 상 그렇게 느껴지잖아.”
그 시간들이 모여서 나한테 왔으면 좋겠다. 형이 그걸 어쩌게. 널 따라잡는 데에 쓰게. 한솔이 픽 웃었다. 택도 없어. 정한 역시 웃고 있었다. 둘은 이 주제가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운명이 있다고 믿어?”
“아니.”
한솔이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다.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게 우리는 아니야.”
“왜?”
“그런 게으른 말로 우리를 묶어두고 싶지 않으니까.”
“섭섭해.”
“형이 더 노력하라는 말이야.”
한 걸음 언제와? 짐짓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정한은 말없이 웃었다. 그래도,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정한이 마법사처럼 두 팔을 펼쳐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망토자락이 펄럭였다.
“그 땐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형 진짜 뻔뻔하다.”
정한은 한솔이 헛웃음을 지으며 핀잔을 줘도 기죽지 않았다. 원래가 어디 가서 기죽어 있을만한 사람은 아니긴 했다. 낯을 가리지 기가 약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정한은 더욱 뻔뻔하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제멋대로인 마법사가 한솔의 앞에 있다.
“네가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지프트럭 보닛 위에 완전히 올라앉은 정한이 양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턱을 기대었다. 한 시가 거의 끝나가고 세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있잖아.
“사실 나 시간을 다루는 마법사야.”
[01:53] 지팡이도 있잖아. 정한은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산 지팡이를 흔들어 보였다.
“조금 있으면 한 시간이 사라질 거야. 그 사라진 시간 속에서 내가 고백할 거야.”
[01:54] 한솔은 잠자코 정한의 말을 들었다.
“네 사랑이 무서워서 도망쳤어. 그랬더니 세상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있더라고.”
“… ….”
“6년을 꼬박 그랬어.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는 매일이 실패였어. 넌 정말 무겁게 날 사랑해줬잖아. 난 내가 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네게 그만큼 돌려줄 수 없겠구나. 그런데 그걸 네가 알아버리면 어떡하지… …. 그래서 네가 받을 상처가 무서웠어. 그런데 너 없는 매일, 내 사랑에 질식하는 줄 알았어.”
[01:58]
“너무 늦게 알았어. 넌 이미 없더라. 너도 그런 기분을 느꼈겠지. 네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고. 그렇다고 막상 찾아 다니기엔 내가 너무 염치가 없고. 그냥 그렇게 살았어. 계속. 계속 도망치면서.”
허무의 연속이었던 삶을 하루아침에 전부 내버리고 짐을 쌌다. 그날 이후로 정한을 거세게 뒤흔드는 충동이그의 안에 자리 잡았다. 정한은 충동이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한솔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순전히 운이었다. 세상에 운이 좋다 좋다 했지마는 정말로 한솔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이후 남은 생의 모든 행운을 끌어다 썼대도 믿을 수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게 우연이라면 지나칠 뻔한 막차를 간신히 부여잡았다고 생각했고 이게 운명이라면 세상의 온갖 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두 번은 안돼.
정한은 전에 없이 절실해졌다. 절박한 마음이 염치를 이겼다. 한 걸음 늦은 대가로 6년을 제대로 숨 쉰 적 없이 살았다. 그러니 호흡이 트인 지금은 뭐라도 못할 게 없었다. 뭐든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한은 한솔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만 한다고. 너로부터 도망쳐 다시 네 곁에 도착했다. 이젠 네 옆에 단단히 발을 붙일 때였다.
[01:59]
“미안해.”
“… ….”
“그런데 네가 포기가 안돼.”
아직 널 사랑해서… 정한은 후련해 보였다. 이젠 정말로, 어떻게 되든 끝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모든 끝에는 시작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네가 안 내키면 못들은 척해도 돼.”
그러나 정한은 영영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난 시간의 마법사니까.”
마침표와 다음 문장 사이의 간극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사라진 시간 속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건 잊어버려도 돼.”
[03:00]
정한이 입을 다물자 그곳엔 침묵만이 존재했다. 한솔은 영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한솔은 실제로도 복잡한 아이였고 종종 1과 2를 더해 8이 나오는 괴상한 프로토콜을 가졌으나 그 안엔 분명 투명하게 내비치는 속내가 있었다. 정한은 그게 못내 사랑스러웠고. 형. 한솔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외계인이야.”
“갑자기?”
“어.”
한솔이 진지하게 눈을 맞춰와 정한은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래서 지구의 시간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지.”
“어… …”
“6년은 외계인의 삶 속에서 한 순간이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한솔이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정한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때때로 정한은 머리를 굴려도 한솔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외계인과 마법사가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뭐 같아?”
“음… 글쎄?”
별 거 없어. 한솔이 손을 내밀었다. 정한은 홀린 듯이 그 손을 붙잡았다.
“타이밍만 맞으면 돼. 형이 그 날 내 손을 잡았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내 손을 잡은 것처럼. 힘을 주어 손을 당기자 정한의 무게중심이 한솔에게로 옮겨갔다. 어어, 넘어질 거 같은데. 휘청거리는 정한을 한솔이 그대로 당겨 끌어안았다.
“형은 진짜. 겁도 많고 이기적이고 지멋대로고 용기를 내는 데에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대놓고 욕하는 거야?”
“그래도 내가 들어버렸으니까.”
사라져버린 시간 속에서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한솔이 가득 채웠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이마를 맞대었다. 빨리 해. 뭘 해? 기억 안나? 어… …. 말이 끝없이 늘어지자 한솔이 덧붙였다.
“밤이었으면 했을 거라며.”
아. 그거.
정한은 한솔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그대로 입술을 맞부딪혔다.
별이 쏟아지던 밤, 정한의 입 속으로 사랑이 쏟아져 들어온다.
치사량의 사랑에 슬며시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한솔의 눈동자 속에서 사랑으로 완전히 녹아 내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