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원솔] 98년과 20년에 생긴 일
익명 / 글
이름 최한솔. 나이는 스물 셋. 할리우드에서 레드카펫을 꽤나 밟아 보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의 미모를 지녔지만…현실은 그냥 동방에서 후드 모자 뒤집어쓰고 영상을 편집하는, 그게 아니라면 후드 모자 대신 비니를 뒤집어쓴 채로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학교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는 모 대학교의 영상제작과 학생1일 뿐이었다. 말이 학생1이지 사실 학교의 간판이나 다름없는 한솔이 영상을 한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그가 카메라 앞에 서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카메라 앞이 아니라 뒤에 선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이건 적폐다. 최한솔이 카메라 앞이 아니라 뒤에 서는 것은 한국 영화계, 아니 전세계 영화계의 손실이자 후퇴이다. 감독들은 눈이 없는 것이냐, 이건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솔은 금붕어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그렇지만 제작가로서의 기질과 감각은 타고난 재능충이었다. 두 문장 이상은 한 번에 외우지 못하는 한솔이 꼬북칩 광고 공모전에서 받았던 상이 금상이랬던가? 밥보다 꼬북칩이 좋아 꼬북칩을 밥에 비벼 먹는다는 파격적인 연출을 해냈더랬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한솔은 절대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한솔을 브라운관이나 영화관에서 볼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 여기 학교 앞 골목 곱창집 맞은 편 건물 지하 2층 작업실!]
며칠 간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동아리방에서 편집을 하며 썩어가던 한솔을 학교 밖으로 이끈 건 순영이었다. 순영은 한솔보다 두 살 많은, 학번으로는 한 학번 위인 동아리 선배였다. 춤의 ㅊ자도 모르고 살았던 새내기 한솔을 댄스 동아리의 부원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야, 너 춤 추냐? 아니요. 영상 하는데요. 카메라 앞? 아니요, 뒤요. 너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나랑 같이 작업하자. 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당찬 순영에 한솔은 어떤 동아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조차 물어보지 않고 동아리에 가입했다. 와우, 웬만해선 잘 놀라지 않는 한솔이 답지 않게 놀랐다. 가히 감탄할 만한 춤재간이었다. 순영의 믿는 구석이 다름아닌 자신의 실력이었다는 사실에 한솔도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풀었다. 형, 거기 서봐요. 형, 여기서 춤춰봐요. 형, 형, 형. 그렇게 만난 지 6시간도 되지 않아 한솔과 순영의 첫 작품이 만들어졌다. 대박…너 미쳤다. 그리고 순영은 한솔을 믿고 그 길로 학교를 자퇴했다. 야, 나 유튜브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야~야하학 내가 보는 눈은 있어, 그치 솔아~? 남들이 보았으면 미친 놈이라고 혀를 찼겠지만 확실한 건 순영은 모험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은행에서 상품을 추천받을 때도 무조건 고안전성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자신의 춤 실력을, 그리고 한솔의 능력치를 믿을 뿐이었다. 용기있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누가 그랬던가, 학교를 때려치고 시작한 순영의 유튜브가 대박났다. 이 영상 중독성 오진다 1일 3호시한다. 중독성 별론데? 하루에 7호시 하는 정도?ㅋㅋ. 아니 안무영상 연출이 개신박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호시 영상 연출 보면 존나 깜짝 놀란!다ㅋㅋㅋ. 존나 칸영화제 초청각. 연출 개독특하다. 마이다스의 손 한솔을 등에 업은 순영의 유튜브는 입소문을 타고 타 원 밀리언 저리가라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아무튼 오늘은 순영이 자신의 작곡가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친구의 작업실로 한솔을 부르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여태껏 한솔은 순영이 친구에게서 받아온 노래로 안무 창작까지 마친 뒤 촬영과 편집에만 참여했었기에 그 얼굴을 직접 본 일은 없었다. 맨몸의 순영을 호시로, 호시를 80만 유튜버로 이끈 주역들의 역사적인 첫 만남의 순간이었다. 한솔은 순영의 문자 속 장소로 발걸음을 가벼이 옮겼다. 학교 앞 곱창집…맞은 편…아, 여기인가보다. 한솔이 건물 지하로 쏙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한솔은 멋쩍게 서성일 뿐이었다. 아니, 다 어디 간 거야…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악보가 눈에 띄었다. 악보를 몇 장 훑어보았지만 역시 알아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곱게 뉘어진 베이스 기타를 살짝 만져보았다. 흠, 순영 형 노래에 기타 소리가 들어갔던가. 뭐, 새로운 노래는 좀 서정적이려나 보지. 단순히 생각을 마친 한솔의 발등 위로 베이스 밑에 깔려 있던 가사지가 떨어졌다. 허리를 굽혀 가사지를 들어올린 한솔이 소파에 앉으며 대충 휘갈겨진 가사를 뒤적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문 밖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형, 원우형… 저기…저 소파에 앉아있는 애 누구에요?”
“원우형 쟤 요즘 극장에 걸려있는 영화 주인공 닮지 않았어요?”
“글쎄?”
“아 그 있잖아요, 타이타닉! 잭!”
“헐, 김민규 눈썰미 대박 진짜 완전 똑같이 생겼다. 진짜 디카프리오 아니야?”
“그치 부승관, 맞지! 디카프리오 맞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한솔과 민규의 시선이 맞닿았다.
“형…나 쟤랑 눈 마주쳤는데…?”
한솔이 문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문을 열어 세 남자를 마주했다.
“익, 익스큐즈미…?”
승관이 더듬이며 말을 건네자 한솔은 피식 웃어보이며 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최한솔입니다. 순영이 형은요?”
“순영이요? 그게 누군데요?”
얼떨결에 한솔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눈 승관이 되물었다. 옆에서 민규는 감탄을 할 뿐이었다.
“와, 근데 요즘 길거리 돌아다니시면 힘드시겠어요. 최근에 개봉한 타이타닉 남자 주인공이랑 완전 똑같이 생기셨는데?”
종종 디카프리오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 한솔이었지만, ‘최근 개봉한’이라는 말은…
“에? 최근이요?”
“응, 최근이요. 일주일 정도 전에 개봉했는데, 몰랐어요?”
손을 놓지 못한 채 얼굴이 뚫어져라 한솔의 얼굴만 쳐다보는 승관과 연신 와, 와 감탄사를 내뱉기만 하는 민규를 뒤로하고 원우가 대답했다. 그제서야 한솔은 세 남자의 옷차림부터 스캔을 했다. 멀대 같이 키가 큰 민규의 끌릴 것 같이 길고 통이 넓은 바지와 체인이, 승관의 머리 위에 얹어진 빵모자가, 원우의 코에 대충 걸쳐진 투박한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솔이 말이 없어지자 멀뚱이며 서 있던 세 명의 남자가 각자 소개를 시작했다.
“흠흠, 안녕. 나는 빛과 소금이라는 밴드에서 드럼과 비주얼을 맡고 있는 민규야.”
“아, 김민규 진짜 뭐래. 나는 부승관! 보컬이야.”
“나는 전원우, 베이스야.”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민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려 2020년의 밴드 이름이 빛과 소금일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솔은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익숙한 옷차림이긴 한데, 뭔가 묘하게 어색하다. 물론 유행하는 패션의 형태가 10년 마다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 미묘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게 디자인이든, 핏이든, 재질이든 간에 트렌디함이 가미되지 않는가. 근데…근데 너무 투박해! 한솔은 혼란스러웠다. 아니, 혹시…내가 이 공간에 들어올 때 시공간이 바뀐 건가? 역시 엉뚱한 한솔이었다.
“저, 혹시…지금이 몇 년도인가요?”
한솔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1998년인데요?”
승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솔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1998년이면 도대체…무려 22년이라는 세월을 앞질러 온 한솔이었다. 그렇지만? 최한솔은? 역시 평범하지 않죠? 까마득해져가는 정신줄을 가까스로 붙잡은 한솔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왜냐? 반쯤 미치면 세상은 즐거우니까. 그리고 애초에 한솔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음, 좀 많이 괴짜같은 구석이 있다.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한솔의 얼굴에 이내 스믈스믈 웃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 여기가 진짜 1998년이에요? 제가 98년생인데?”
엄마, 나 1998년도에 왔어. 와 여기 진짜 막 데모고르곤 나오는 거 아니야? 헐, 나 혹시 초능력도 있는 거 아닐까? 어, 그럼 스타워즈도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아, 카메라 가져올 걸 이런 게 바로 리얼리즘인데…아쉽다. 한솔은 피가 끓어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꼈다. 어렸을 적부터 시간에 대한 한솔의 갈증은 컸다. 늘 궁금했고 흘러가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 너무 아까웠다. 오죽했으면 여섯 살 한솔에게 가장 무서웠던 것이 시간이었으랴.
“우리 지혜는 세상에서 어떤 게 가장 무서울까요~?”
“저어는 늑대요!”
“우리 찬이는 세상에서 어떤 게 가장 무서워요?”
“저는 곰이요…곰은…곰은 사람을 찢어요…”
“우리 한솔이는 세상에서 어떤 게 가장 무서워요?”
“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를 천천히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입니다.”
실제 한솔이 유치원 선생님께 한 말이었다. 선생님은 당황해서 말을 못 이었더랬다. 다,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선생님이 한솔이 말을 못 들었네? 하하?... 아무튼 한솔은 유구한 독특함의 역사를 지닌 사람이었다. 특히 시간에 관해서라면 더. 다만, 형, 삶은 뭘까요? 삶은 계란이지. 촤하하 한솔아 재밌뉘~? 네, 재밌네요. 고민이라곤 깃털만큼도 하지 않는 순영을 만나 잠깐 뜸했을 뿐이지.
생각해보면 현재라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은 과거와 미래로만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죽기 위해 사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솔에게는? 1998년에 태어나서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자아에 1998년이라는 물리적 시간 역행의 상황이 도래한 상태이죠? 그러니까 현재의 시간이 멈춘 채로 과거에서 미래를 살죠? 현재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를 살죠?! 짜릿함에 한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98년생이라구요? 지금이 1998년인데?!”
민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원우가 조용히 입을 뗐다.
“한솔이가 이 공간으로 들어올 때 시공간이 달라진 게 아닐까?”
또한 쾌재를 불렀다. 어떻게 이렇게 나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역시 순영이 형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도 있군. 원우형, 너무 마음에 든다. 한솔은 너무 행복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슴이 벅찼다. 아, 가슴 존나 웅장해.
한솔이 1998년에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다. 그 시간 동안 한솔은 정말 많은 것을 경험했다. 딱 하나만 말해보자면 빛과 소금 밴드의 새로운 비주얼을 자처하며 함께 대학 순회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강변 가요제에선 대상까지 휩쓸었다. 한솔이 본인의 능력치를 십분 활용해 획기적인 무대를 기획한 덕이었다. 그래서 한솔은 이제 말할 수 있다. 이수만? 그게 누군데. 최고의 엔터테이너는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권순영을 호시로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모자라 대학가나 좀 주물렀던 빛과 소금을 당대 최고의 밴드의 반열로 격상시키다니, 20세기와 21세기의 대중들이 한솔의 손에서 쥐락펴락 되었다. 한솔이 나르시즘에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전원우, 김민규, 부승관과 같이 동고동락을 하며 한솔이 알게 된 건 민규와 승관이 정말 못 말리는 환장의 콤비라는 사실이었다. 뭐든 부숴버리고야 마는 마이너스 손을 가진 민규와 그런 민규를 쫓아다니며 잔소리하는 승관. 정말 한 편의 시트콤이 따로 없었다. 매일매일 거침없이 하이킥, 무한도전 저리가라 싶은 대환장 개그쇼가 펼쳐졌다.
“아, 김민규 내 마이크 떨어뜨렸지!! 소리가 안 나오잖아!”
“아, 그거 나 아니야! 아까 원우형이 던졌어!”
“으그, 으그 이 화상아. 원우형이 마이크를 왜 던지는데! 핑계를 대도 진짜!”
그리고 원우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종종 돌발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 실은 민규 말이 맞긴 했다. 승관의 마이크를 망가뜨린 건 원우였고, 그것도 마이크를 고의적으로 던졌던 것이었다. 형, 근데 왜 던진 거에요? 던지면 망가지나 안 망가지나 궁금했어. 음, 그럴 수 있죠. 온전히 공감은 못하더라도 이해의 폭은 넓은 한솔이었다. 형, 근데 나 혹시 외계인인 거 아닐까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온전히 이해는 못하더라도 공감은 잘 하는 원우였다. 원우와 한솔은 제법 잘 맞았다. 결은 비슷한데, 다르긴 다른. 그러니까 같은 색깔이지만 모양은 다른 도형이랄까? 정말 환상의 콤비가 따로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둘은 꽤나 잘 맞는 편이었다. 둘 다 매사에 진지하고 건조한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같이 엉뚱한 면들이 있었다.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처럼 원우와 한솔은 멀리서 보면 연로한 고양이 부부처럼 아이고, 임자하면서 그루밍해주는 한 쌍 같았다.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가늘고 길게 가는 그런 뜨뜻미지근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를 서로로 빈틈없이 꽉 채우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주제에 손이 스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넘치는 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혈기왕성한 아기 고양이 커플이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먼저 자각한 것은 한솔이었다. 물론 한솔은 그렇게 생각했다.
“형은, 고양이 같아요. 가만히 늘어져서 잠만 자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보면 식탁에서 컵 떨어뜨리려고 미는 고양이 같아요.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 순간에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날 쥐락펴락 해요. 예측할 수 없어요. 늘 내 예상 밖의 행동을 해요. 늘 조마조마하게 만들어요, 늘 신경쓰게 만들어요. 컵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아찔해요. 속이 울렁여요. 치워도 남는 유리파편처럼 나도 몰랐던 곳까지 자리잡고 있어요. 어쩌다 베여서 나는 상처나 바닥에 남아버린 자국처럼 움푹움푹 나를 파고 들어와요.”
“…”
“…무슨 의미인지 왜 안 물어봐요?”
“무슨 의민데?”
“…저 고양이 좋아해요.”
“그래? 나는 너.”
“네?”
“나는 너 좋아한다고.”
한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한솔의 정수리를 보며 원우는 으하하 웃어보였다. 아, 웃지마요, 진짜아…원우는 한솔보다 빨리 제 마음을 알아챘다. 다만 한솔이 스스로도 알지 못한 것 같아 말을 않고 기다렸다. 한솔이 스스로 제가 원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생각 정리가 안 되어 혼란스러워 보여 아무 말 않았다, 그런데 앙큼하네. 원우가 타이밍을 재던 중에 늦게 알아챈 것에 비해 제 감정을 빠르게 받아들인 한솔이 선수친 것이었다. 약간 실감이 안 나 얼떨떨하긴 했지만 제 마음을 고양이에 빗대 빙빙 돌려 표현한 한솔이 원우는 귀엽기만 했다. 솔아, 고개 들어봐. …싫어요. 아, 빨리이. 한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귀 끝이 묘하게 붉어진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빨개진 한솔의 얼굴을 보며 원우가 빙그르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한솔의 얼굴은 한층 더 붉어졌다. 그리고 순간 원우의 입술이 한솔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가 떨어졌다. …형, 형. 나 잠깐, 잠깐 화장실 좀. 그리고 한솔이 원우를 남겨둔 채 허둥지둥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으하하, 그 모습마저도 마냥 귀여운 원우였다.
“형, 어?”
“순영이 형?”
“야, 너는 문자 보낸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어?”
바람을 쐬며 안정을 되찾은 한솔이 문을 열자 보인 건 원우의 단정한 검은 머리가 아니었다. 개털같이 삐죽삐죽 다 상한 노란 순영의 탈색머리였다. 연습실 안에는 의자에 기대 누운 채로 핸드폰을 하고 있는 순영만이 있었다. 한솔이 다시 2020년으로 돌아왔다. 이제서야 원우에게 제 마음을 표현했는데. 야속하게도 1998년으로 갔던 것이 제 의지가 아니었던 것처럼 2020년으로 돌아오는 것도 제 의지가 아니었다. 전원우를 혼자 1998년에 둔 채 최한솔은 2020년으로 돌아왔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지훈이 잠깐 친구 마중 나갔는데…”
“지훈이?”
“아, 그 내 작곡가 친구. 이따 오면 인사해.”
한솔은 혼란스러웠다. 다시 1998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왔다.
“아, 순영이 동생?”
그리고 지훈의 뒤로 키가 큰 남자가 한 명 같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지훈 친구 전원우입니다.”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드니 원우가 한솔의 앞에 와서 서 있었다. 한솔과 눈이 마주치자 원우가 싱긋 웃어보였다. 한솔이 놀란 표정으로 원우를 쳐다만 보았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지훈이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 누구랑 얘기하니.
“…형,형 뭐에요?”
“나? 네 남자친구.”
“아니, 그건 나도 알고. 형이 어떻게 여기 왔어요?”
“글쎄? 너랑 뽀뽀해서 내 시공간이 바뀌었나?”
“네?”
“한솔이가 나 책임져야겠다~ 알겠지?”
크게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 한솔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 누우며 원우가 말했다. 최한소올~ 나 책임져야 해~ 내 입술도 가져갔으면서 그렇게 갑자기 떠나면 어떡해! 아니, 입술은 내가 아니라 형이 먼저, 그래서 책임 안 져? 너 때문에 내가 21세기로 훅 왔는데? …아니이…으하학 원우가 웃어보였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원우를 보니 부끄러움에 또 얼굴이 붉어지는 한솔이었다. 근데 진짜 나 때문에 형이 2020년으로 오게 된 걸까? 다시 진지해지는 한솔이었다.
“아, 형. 이렇게까지 해야 돼?”
“김민규 조용히 해. 우린 이제부터 1998년을 대표할 밴드, 빛과 소금이다.”
“아, 원우형 작명센스 뭔데요 진짜아…”
“부승관, 너는 보컬. 김민규 너는 드럼, 비주얼도 너 해.”
“진짜? 무르기 없다?”
“원우형 왜 김민규는 비주얼까지 주는데에.”
“너는 메인 보컬이잖아.”
“아, 그래? 그럼 오키. 근데 이렇게 한다고 최한솔이라는 애가 형한테 넘어갈까요?”
“응, 난 다 해. 못하는 거 없어 다 해.”
아마 한솔은 원우가 자신을 1998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평생 모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