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윤버] 보편적 가족 윤리
마리 / 글
누나가 사라졌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더니 누나가 없다. 시스콤 말기 최한솔이 혼비백산한다.
사람이 언제고 집에 있는 건 아니지만 한나는 그랬다. 직장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365일 24시간 내내 집 안에만 있는다. 한나는 직장도 친구도 없지만 돈은 있었다. 4인 가족이 전부 무직이어도 떵떵거리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 그래서 현재 한솔을 제외한 이 집 인간들은 무직이다.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거실 소파에서 세상 편하게 자는 금발을 걷어찬다. 아악! 자다가 봉변당한 금발이 미간을 찌푸린다. 처남. 왜 자는 사람을 때려... 원래 이런 폭력적인 성향 아니었잖아. 역시 예술을 해서 그런거지? 안 되겠다. 그만두고 이만 들어와 처남. 그러면서 팔을 더듬더듬 만진다.
“됐고. 누나 어디 갔어요?”
“집에 없어?”
“네 없네요.”
“나갔나보지"
“누나가 어딜 나가요. 안 나가는 사람인 거 알면서. 아 자지 말고 일어나요.”
“들어오겠지.”
“아니... 누나가 어디 간다고 한 적 없어요?”
“모르겠는데. 일본 갔나.”
진짜 아무 말이나 내뱉는구나. 웃기지도 않는다 이젠.
정한이 다시 디비 누운다. 백수 새끼면서 뭐가 피곤하다고 맨날 쳐 자는 건지 모르겠다. 가짜매형씨발아 뒤질래. 퍽퍽. 주먹으로 등을 퍽퍽 쳐도 정한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인간한테 물은 내 잘못이다. 조카를 찾아간다. 똑똑. 조카야 있니? 조카는 올해 열다섯이다. 자주 만나지도 않고 한창 예민할 때라 노크 필수다.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삼촌.
“라미야. 너 학교에서 왔을 때부터 엄마 집에 없었어?”
“그런 거 같은데”
그런 거 같은데는 또 뭐야...
“엄마가 어디 간다 말한 적 있어?”
“모르겠는데.”
허탕이다. 조카도 누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한솔은 이마를 짚는다. 아이고 두야... 앞서 말했듯 한나는 친구가 없어서 더 물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남은 선택지는 두 개다. 1번. 누나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2번. 경찰에 실종 신고 한다. 다시 깬 정한이 거실에서 말한다. 뭐하러 경찰에 신고를 해. 알아서 오겠지. 라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엄마도 어른인데 집 하나 못 찾아오겠어? 이때 뉴스가 나온다.
지난 3일. 신림동에 거주하던 20대 강모 씨가 의문의 납치를 당했다가 경찰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범인은 20대 후반 함모 씨로…
집 안이 한순간 조용해진다.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한솔이 핸드폰을 꺼내 들자 라미가 재빠르게 빼앗는다. 정한은 처남의 두 팔을 잡았다. 형. 신고해야 돼요. 방금 뉴스 못 들었어요? 아니야. 한나 일본 갔어. 무슨 일본이야. 걔가 비행기를 어떻게 타요. 어어. 그래서 배 타고 갔어. 지랄 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이 가짜가족들아 제발. 처음으로 누나가 원망스럽다.
누나 대체 어쩌자고 이런 사람들이랑 가족을 하자고 한거야... 그렇다. 최한나, 최한솔, 윤정한, 윤라미는 처음부터 한 가족은 아니었다. 최한나랑 최한솔만 피로 이어진 가족의 형태로 존재했다. 거기에 윤정한이 더해지고 윤라미가 더해진 거다.
그럼 네 사람은 어쩌다가 가족이 됐나요? 이에 대해 답변을 하려면 무려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시곗바늘을 한 6만 번 돌리면 되려나.
한나에겐 물건을 주워오는 버릇이 있었다.
집에 없는 게 없는데도 늘 무언가를 주워왔다. 짠 토끼 인형이야. 짠 식물도감이야. 짠 돌멩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뒤에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니까 잘 지내야 해? 비록 그 가족은 움직이지도 않고 감정도 없지만 누나가 가족이라니 한솔에게도 가족이었다.
한나는 사람도 주웠다. 짠! 내 남자친구야.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니까 잘 지내야 해? 남자친구라길래 남체형 인형이라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진짜 사람이었다. 심지어 상태가 S급이었다. 이 사람은 진짜로 돈 주고 사온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사지 멀쩡하고 이목구비 주차가 잘 되어있는 남자였다.
한솔은 여태 누나의 말에 그러마 했다. 토끼 인형을 주워 와도 가족이라며 깨끗이 세탁하고 식물도감을 주워와도 가족이니까 한 번쯤은 읽어주었다. 애초에 최한솔이 최한나를 따르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구가 갑자기 네모나질 수 없는 것처럼. 그런 한솔이 처음으로 누나 말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누나.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남자친구야. 보내드려.”
“사랑하는데?”
주워진 사람이 말한다. 사랑한단다. 우리 누나를. 아 그러세요... 저희 누나 어디서 만났는데요? 학교에서 만났지. 한솔의 눈이 가늘어진다. 누나는 1학기 때 학교 세 번 나갔다. 집에 학사 경고가 날아올 정도인데 학교에 친구는 커녕 남자 친구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설령 있다해도 저 사람은 아니었다.
누나 다른 거 가져와도 괜찮으니까 저 사람은 돌려보내. 한나가 눈썹을 축 늘어트린다. 정한과 한나는 정말 학교에서 만났다. 오티 때 만나고 오늘이 두 번째 보는 거긴 했지만 학교에서 만나긴 했다. 한나가 현관문에서 소리친다. 한솔아. 나 정한이 사랑해! 정말 너무너무 사랑해! 우리 허락해주면 안 돼? 현관문이 안 닫혀 있었다.
열린 현관문 틈새로 옆집 아줌마가 보인다. 남매가 초등학생일 적부터 본 아줌마다. 한나 남자친구 생겼니? 네 아줌마. 근데 한솔이가 싫은가 봐요. 전 정한이 없으면 정말 죽을 거 같은데... 정한도 초면인 아줌마 앞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저한테는 한나가 전부예요.
두 남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본 아줌마는 한솔을 혼낸다. 한솔아! 느이 부모님 그렇게 되시고 누나가 널 지키려고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누나의 사랑 한 번 응원 못 해주니? 아니 아줌마 그게 아니고요... 네 다 제 잘못입니다. 소란에 못 이긴 한솔은 정한을 집으로 들이는 데 허락한다. 정한이 신발 벗자마자 제집처럼 벌렁 드러누웠다. 한솔은 다시 정색했다.
“한솔아. 누나는 정한이 진심으로 사랑해.”
“… 진짜?”
“응. 누나 첫사랑이야.”
“진짜?"
“그렇대두”
저와 똑같은 다갈색 눈동자가 눈을 맞춰온다. 한나의 눈을 보니 그런가? 정말 누나가 저 남자를 좋아하나? 싶었다. 아닌 거 같다가도 이 눈을 보면 누나 말이 다 맞는 거 같다. 한솔은 결국 한나 말을 믿는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솔은 열일곱 살이었고 지독한 시스콤을 앓고 있었다.
“한나를 사랑해요?”
한나가 씻으러 들어가고 거실에 둘만 남자 한 말이다.
정한이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응 사랑하지. 그러니까 사귀는 거 아니겠니. 이렇게 집에도 들어오고.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개뻥을 쳤다. 너가 안 믿는 것 같은데 나 진짜 한나 동기야. 오티 때 만났어.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솔은 시스콤 환자답게 누나 말은 믿어도 외간 남자 말은 믿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 말한 죄로 정한은 멱살이 잡혔다.
“그딴식으로 말하면 누가 믿어요.”
죽일 듯이 쳐다봐도 앞의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눈빛이 살짝 달라지기는 해도. 한솔은 일순간 정한의 눈이 번뜩이는 걸 본다. 잡고 있던 옷을 놓았다. 놓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멱살 잡혔다고 희열을 느끼는 얼굴이 소름 끼쳤다. 죽일 듯이 쏘아보던 눈이 경멸로 가득 찼다. 정한은 실실 웃고 있었다. 미친놈.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알겠어.”
“뭐가 알겠다는 거예요. 난 우리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요.”
“알겠다구.”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 말이 하나도 안 통했다. 서로 귀마개 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들처럼. 거실에 정적이 잠깐 흐르고 정한이 묻는다. 나 한나 남자친구로 인정해주는 거야? 한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아니요?
“인정해줘서 고마워.”
“저 인정 안 했어요.”
“어차피 인정해줄 거잖아.”
“안 할거거든. 미친놈아.”
미친놈이라는 세 글자에 정한의 눈빛이 금새 형형해진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댄다.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다. 누나가 불쌍해. 누나는 왜 이딴 놈이 첫사랑이라는 거야? 당장에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한나가 곧바로 정한에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한솔은 누구보다 누나의 행복을 바란다.
시간이라는 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어느 날은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지루해서 뒤질 거 같고 어느 날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쉬워도 어찌 됐건 시간은 흐른다.
한솔은 정한이 이 집에 빌붙은 지 3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다른 가족 구성원이었을 정한은 어느새 완벽하게 이 집에 동화됐다. 너무 완벽하게 동화돼서 한솔의 졸업식에도 찾아왔다. 누나한테만 졸업식 한다고 얘기했는데 형이 왜 와요? 쏘아대도 정한은 꽃다발을 품에 안겨주며 미소를 짓는다.
처남이 졸업한다는데 매형이 와야지. 체육관 가운데서 한솔이 소리 지른다. 누가 처남이고 누가 매형이야? 미쳤어?! 한솔이 소리 지르는 걸 본 적 없는 학교 친구들이 수군댄다. 뭐야 무슨 일이야... 몰라... 자칭 매형이 눈과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묻는다.
“한솔이 진짜 몰라?”
“뭘요”
“나 한나랑 결혼하는데.”
“누나 이 사람 미쳤나 봐. 아무 말이나 막 내뱉네.”
한나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한솔아.”
최한솔의 세상이 무너진다.
3년 동안 같이 부대껴 산 것도 신기한데 기어코 결혼까지? 한나 바짓가랑이 잡고 누나 제발 이 여우새끼랑 결혼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한솔은 그럴 수 없었다. 나 이제 예비 신부라며 웃는 한나가 너무 밝았다. 이놈의 시스콤... 뒤지고 싶다. 한솔은 언제나 그랬듯 누나 뜻을 따른다. 불가항력이다.
한솔의 졸업을 축하하고 한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중국집에 갔다. 한솔은 중국집 가자마자 예비 매형을 화장실로 끌고 가 벽에 몰아세운다.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정한이 응? 벽치기? 한다. 씨발 아니거든요. 아님 말구.
“누나랑 결혼 물러주시면 안 돼요?”
“이유는?”
“글쎼 누나가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한다니까요 저는”
“알아. 근데 이 결혼이 한나의 행복이야.”
개소리. 결혼이 당장의 행복이 될 순 있어도 평생의 행복은 보장 못 한다. 특히 윤정한과의 결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학교도 휴학 때렸으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사람이 결혼 생활 한다면 얼마나 한다고. 한솔은 편견이 없는 사람인데 윤정한 한정으로 편견이 있었다. 정한은 여전히 입만 웃고 있는 상태다.
“근데 너희는 남매들 우애가 참 좋은 것 같아.”
“갑자기 왜 말 돌려요."
“한나도 너랑 같은 걸 바래.”
“네?"
“그래서 나는 한나랑 결혼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정한이 먼저 화장실을 나간다. 한솔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밖에서 한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둘이 들어갔는데 너 먼저 나와? 한솔이가 자기 싸는 거 보지 말래. 저 미친 새끼가. 화장실 문을 부실 듯이 열고 나온 한솔이 정한의 입을 막는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매형. ‘매형’ 발음에 입술에 힘이 팍 들어갔다.
싱글싱글. 매형이라는 말에 정한의 광대가 볼록 올라온다.
빙글빙글. 어지럽다. 왜 웃어. 왜 그렇게 웃어. 뭐가 좋다고 웃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면서 왜 웃어. 왜 매형 소리 듣고 웃어. 이 의문들을 한 겹 벗겨내면 이유를 알 것 같긴 한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한솔은 애써 무시한다. 싱글 웃는 얼굴도 무시한다. 일렁이는 마음도 무시하고 덮어놓는다.
시간이 또 속절없이 지나간다. 정한이 집에 들어온 지 5년 되고 한나와 결혼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해가 찾아온다. 한나는 다시는 물건을 주워오지 않았다. 집안의 애물단지들이 된 가족이라는 이름의 물건들을 싹 다 모아 버리기까지 했다. 누나 언제는 우리 가족이라며. 쓰레기를 버리던 한나 뒤에서 물었다. 한나가 고개를 젓는다. 이제 가족 있잖아. 그 날 한솔은 방에서 혼자 눈물을 조금 흘린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솔도 이제 가족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본인 포함 세 사람을 떠올린다. 눈물을 닦으며 다짐한다. 이제 꼬박꼬박 매형이라고 불러야지. 정한이형 안 싫어해야지. 셋이서 잘 살아야지.
그 다짐도 잠시.
회상만 해도 당장 칼로 가짜 매형을 찌르고 자신마저 찌르고 싶은 일이 생긴다.
누나가 새로운 가족을 주워, 아니 데려왔다. 새로운 가족은 교복을 입은 여자애였다. 여자아이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윤라미예요 삼촌. 누가 니 삼촌이니...
“누나 이거 유괴야.”
“유괴 아니에요. 저희 엄마 아빠예요.”
“거짓말.”
진짠데 하면서 흰 종이를 보여준다. 주민등록등본. 세대주 최한나. 그 밑에 배우자 윤정한. 그 밑에 최한솔. 그리고 그 밑에... 윤라미. 누나와 매형은, 최한나와 윤정한은, 입양을 한 것이다. 열네 살짜리를. 현관 앞에 선 세 사람은 천진하게 웃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그런가. 피하나 안 섞인 라미는 젊은 부모와 닮아 보였다.
그걸 보는 한솔은. 배가 아팠다. 먹은 것도 없는데 창자 안에 있는 게 다 올라오고 창자까지도 입 밖으로 나올 거 같았다.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한다. 나오는 건 없었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생리적인 눈물을 찔끔 흘리며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을 본다. 매형이었다. 우욱 씹. 변기를 세게 끌어안았다. 꺽꺽 대면서 깨닫는다. 난 지금 배알이 꼴리는구나. 매형이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해서. 이젠 아이까지 생겨서. 배알이 꼴린거구나.
나는 매형을 사랑하는구나.
정한이 등을 두들겨준다. 식은땀 흘리며 그를 보니 눈빛이 슬프다. 졸업식 때 간 중국집에서의 매형을 떠올린다. 그 땐 쪼개고 있고 지금은 울상을 짓고 있는데 상황이 같다고 느껴졌다. 알 것 같은데 알고 싶지 않은 그런거.
매형도 나와 엇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결국엔 알아버렸다.
덮어놓고 모른 체하던 걸 알게 되자 더는 이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한솔은 조카와 친해질 새 없이 그림 작업을 핑계로 짐 싸고 홍대 어딘가에 있는 옥탑방에 기어 올라간다. 이것도 벌써 작년 일이다.
허름한 다세대 주택 옥탑방 문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난다. 끼이이익. 다 쓰러져가는 외관과는 달리 안은 깨끗했는데 한나가 사라지고 나서는 안도 엉망이다. 한나가 실종된 지 한 달이 지났다. 가짜가족의 만류로 신고는 안 했다. 그저 기다리는 중이다.
정한은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와 이불을 걷어치운다. 이불 속에 숨어 울던 인영이 드러난다. 혼자 울고불고 지랄을 했는지 퉁퉁 불은 처남. 한 달 만에 하는 재회다. 너무 울어서 코가 새빨개진 한솔이 울음을 멈추는 대신에 정한을 노려본다.
"한솔아. 형이랑 가자."
"어딜 가요."
"집에.
"여기가 제 집이에요."
한 달 만에 본 정한은 전보다 더 반질반질해 보인다. 그래. 이 사람은 최한나 안 좋아했지. 누나가 사라지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이는 사람이었지. 근 2년 동안은 정한이 미친놈이라는 걸 잊고 살았다. 짜증이 확 치민다. 한솔이 벌떡 일어나 정한의 어깨를 덥석 잡는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고 마주쳐오는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있다. 정한은 뒤로 물러나지도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그럴수록 한솔의 열만 뻗쳐간다.
이럴 때마다 정한은 저를 잡아먹을 듯이 본다. 처음 만난 날에도 비슷한 눈빛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예 저를 씹어 삼킬듯한 빛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솔은 정한의 눈에 의해 살살 벗겨지고 있었다. 좆같았다. 더 좆같은건 그 시선에 배가 끓는 자신이다. 둘 다 미친 새끼다.
한나가 사라진 지금. 이러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이 혐오감은 잘 먹고 잘사는지 얼굴에 살이 오른 정한에게로 향한다. 그럼 또 매형의 이상야릇한 눈빛을 기대했던, 기대하고 있는, 제 자신이 싫어진다. 무한 반복이다. 마침내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분노한다. 눈물이 방울방울 져서 떨어진다. 정한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내 준다. 최악이었다.
왜 울어 갑자기. 나 죽일 듯이 쳐다보더니. 불쌍한 척을 한다. 누나가 없어도 괜찮아요? 누나가 없다니. 일본 갔다니까. 지랄 좀 하지 말구요. 씨발...
우리 누나 불쌍해. 저런 남자가 좋다고 결혼이나 하고. 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도 안 쓰는 남잔데. 우리 누나 너무 불쌍해. 동생도 잘못 키웠어... 동생은... 차마 그건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어 입술을 꽉 깨문다.
아이고야. 한솔이는 진짜 바보네. 정한이 한솔의 뒤통수를 감싸 안는다. 가슴과 가슴이 맞붙은 자세가 된다. 뭐하는 거예요 미친 새끼야. 가만히 좀 있어. 귓가에 바로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숨 쉬는 걸 멈춘다. 얼굴이 빨개진다. 한솔아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까? 정한이 물었다. 애초에 대답 따윈 필요 없는 질문인 듯 바로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한나
나
안 사랑해.
한나. 나. 안 사랑해. 한나 나 안 사랑해. 최한나는 윤정한을 안 사랑해. 한솔이 고개를 들었다. 미친 듯이 흔들거리는 애처로운 동공이 정한을 바라본다. 이런 눈도 할 줄 아는구나. 신나서 더 얘기한다.
한나는 매 순간마다 널 위했어.
널 위해서 가족을 만들었어.
그리고 우리는 6년 동안 널 속였어.
광대가 또 볼록 올라와 있다.
시곗바늘이 다시 6만 번 거꾸로 감기고 3번은 더 감긴다. 6년에 걸친 대사기극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랑 결혼해줄래. 아직 민증 풀린 지 1년 채 안 된 정한은 프러포즈를 받는다. 두 번 만난 최한나로부터. 저기, 나 여친 있어. 대가릴 긁적이며 말했다. 한나가 째려본다. 아니... 여친 있는데 어떡해. 그리고 우리 만난 지 두 번밖에 안 됐어.
가족이 필요해. 우리 한솔이 지켜야 하거든. 한솔이가 누군데. 우리 한솔이... 너무 너무 예쁜 우리 한솔이... 아니 씨발 한솔이가 누구냐니까. 아무리 물어도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지 얘기만 하고 다른 사람 말은 귓등으로 안 들었다. 한나 한솔 대충 비슷하니까 쟤 동생이겠지. 했다.
한나가 가족이 필요한 이유는 정말 간단했다. 동생을 위해서. 비행기 사고로 부모님 돌아가시고 일가친척 없는 한국에 동생 편들어줄 사람이 지뿐이란다. 내 생각엔 그냥 브라콤이다. 동생 친구 없니? 물으니 싸늘해졌다. 한솔이 친구 나보다 많아. 그래 미안. 근데 친구 많으면 동생 편 많은 거 아니야? 오히려 너가 없는 쪽 아닌가. 또 분위기가 싸해진다. 아 미안하다구.
장소를 분식집으로 옮겼다.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푹 찍으며 묻는다. 왜 하필 난데.
“너 어린 여자 안 좋아한다며.”
“그건 또 어디서 난 소문이지?”
“맨날 검은색 아우디 끄는 아줌마가 너 데리러 온다는데.”
“엉. 이제 그 누나 안 와. 요즘은 페라리 와.”
“그래.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구.”
이유는 타당한데 미안하지만 나 결혼하면 누나들한테 돈 못 받아. 나 부모도 없고 학비도 없어. 나 돈 많아. 얼마나. 너 아우디 페라리 사주고도 학교 4년 다니게 해줄 수는 있어.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민다. 0이 족히 8개는 넘는 통장 잔고. 보통의 이십세 통장에 십억 원 상당의 돈이 있을 수 있나. 출처를 물었다.
"나는 누님들 등쳐먹고 산다지만 넌 뭔데 돈이 이렇게 많니?"
한나가 떡을 쫙쫙 씹는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작가셔. 좀 유명해. 주기적으로 돈이 들어와. 그리고 안 써서 쌓여있기도 하고."
정한이 떡볶이 그릇을 한나 쪽으로 민다. 그래서 우리 식은 언제로 할까 자기야? 식은 3년 뒤에 우리 한솔이 성인 되면 할 거야. 우선은 오늘부터 우리 집 들어와. 우리 집에서 살아. 돈이 없는 자는 말이 없다. 정한은 아무런 말없이 짐을 싸 최 씨 남매 집에 들어간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한솔에게 멱살이 잡힌다. 한나를 사랑한다고 구라친 죄였다. 억울했다. 최한나도 나 안 사랑하는데... 물론 말은 못하고 입술만 삐죽댔다. 6년 전 한솔은 지금보다 좀 더 동글동글했다. 눈, 코, 입, 턱선 등. 한솔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작고 동그랬다. 때문에 얘가 멱살을 잡든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대든 아무런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강도가 높아 보이는 눈동자 밝은 갈색 눈동자. 한 번 더 구라 쳤다가는 야산에 끌고 가 생매장시킬 수도 있어 보이는 눈빛이. 타인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 없는 정한을 자극 했다.정한은 새로움에 환희했다. 한솔이 또라이 보듯 봤다.
“인정해줘서 고마워.”
“저 인정 안 했어요.”
“어차피 인정해줄 거잖아.”
“안 할거거든. 미친놈아.”
미친놈이라는 세 음절에 아랫배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열기의 소용돌이가 가슴까지 올라온다. 열기는 가슴에서 멈춰 계속 빙빙 돌았다. 정한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진다. 나 취향이 이런 쪽인가. 한솔을 한 번 쳐다봤다. 저런 얼굴이 날 막 대해주면 변태가 될 만하지.
정한은 가짜 여자친구의 미짜 동생에게 반했음과 변태 성향을 빠르게 인정하고 아주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한솔을 좋아하는 건 숨길 생각이었다. 알려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가짜 남친이 진짜 남동생을 상대로 욕정 하는 걸 알면 브라콤 최한나가 가만있을 리 없지. 그러나 너무 쉽게 들켜버린다.
너 우리 한솔이 좋아하니. 이 말을 듣자마자 사고 회로가 올스탑한다. 짱구 돌리기랑 구라치는 게 장기인데 한나 앞에서 써먹을 수가 없었다. 정한은 시인한다. 그렇게 됐어... 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라 걜 건드린 적은 없어 진짜야. 어엉.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보여서요... 눈에서 내 동생을 아주 잘근잘근 씹고 싶다는 욕망이 보여서요...
“난 괜찮아. 뭐 어떡하니. 사랑하는데. 건들려면 성인 지나서 건들구."
브라콤 말기 환자치고 굉장히 아량이 넓은 발언이었다.
“진짜 괜찮아?”
“응. 난 한솔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한솔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남매간의 우애가 아주 대단하다. 얘네가 조선 시대 때 사람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동화책으로 만날 수 있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정한은 돈이 궁해서 시작한 가족 놀이를 청산하고 진짜 가족이 되기로 한다. 한솔의 행복은 한나의 행복이고 한나의 행복은 한솔에게 가족이 생기는 거니까. 자본의 노예가 사랑의 노예로 변해보기로 한다.
한솔은 이 속도 모르고 누나의 결혼 소식에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 누나가 일방적으로 날 좋아한다고 믿고 있으니 절망하는 건 당연한데 서운하기도 했다. 째려봐 주는 눈빛이 좋아서 웃고는 있는데 서운했다. 진짜로. 나는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너네 누나랑 결혼하는데 너두 나 좋아해 주면 안 될까? 에휴 되겠니 씨발아. 자문자답이었다.
되겠니 씨발아가 될 거 같다 씨발로 바뀐 건 결혼 후다.
스물은 괜히 스물이 아니다. 열아홉 때까지 자기가 어떤 시선을 받는지 몰랐던 최한솔이 둘만 있을 때 장착하는 멜로눈깔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의식만 하면 좀 좆됐을 텐데 갈망까지 했다. 새벽에 무섭다고 편의점 좀 같이 가 달라거나 일부러 한나가 먹지 못하는 회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거나. 단둘만 있을 상황을 만들어냈다. 꽤 귀여운 짓이었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더 들이대 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먼저 한솔은 지금 자기가 하는 게 욕정인 줄도 몰랐다. 매형이 미묘하게 꼴아보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떤 의도로 그렇게 보는지 몰랐고 지가 계속해서 그 눈길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이유로 정한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소중히 하기로 했다.
그 기회는 아이가 생김으로써 증발한다. 내 아이는 아니고. 아니 내 아이는 맞는데 내 유전자로 생긴 아이는 아니고. 쨋든 라미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되겠니 씨발아?가 됐다.
가짜 처남은 조카가 생기자마자 지 감정을 알아챈다. 시스콤이었던 나머지 구역질을 하며 인정하게 된다. 정한은 등을 두드리면서 환호했다. 씨발 된다. 되긴 뭐가 돼. 가짜 처남은 집을 나간다. 나를 사랑해서 집을 나간다. 주소는 알았지만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혼자 갔다간 칼빵 맞을 거 같아서.
“한솔아 나 좋아해?”
“얘기하다 말고 뭐라는 거야 씨발...”
“나는 너 좋아하는데”
못 볼 꼴 봤다는 듯 존재하는 얼굴 근육이란 근육은 다 끌어서 구겨버린다. 한솔이는 내가 뭔 말만 하면 이러네. 나 때문에 빨리 늙겠어. 주먹이 날라온다. 정확히 광대를 친다. 볼록 올라온 광대 들어가라고 퍽퍽 친다. 경락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아팠다.
“그럼 누나는,”
“말했잖아. 너한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대. 그럼 행복할 거 같대.”
“형은 왜...”
“누나가 행복해지길 원한다며 니가. 나는 너 좋아해서 니 말 다 들어줬어. 와 완전 호구 새끼 같네. 그치?”
혼란스럽다. 대가리가 아픈 거 같기도 하고.
“호구는 저 아니에요? 지금까지 저 빼고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던 거잖아요.”
“아니지. 넌 귀엽고 예뻐서 호구 아니야. 그런 건 내가 다 해.”
으. 면역이 없는 한솔이 몸서리를 친다. 진작에 이런 말을 좀 해줬어야 했는데. 하하.
한솔은 매번 이 사람을 가짜가족이라고 욕했지만 뒤로는 죄책감이 따랐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잖아. 누나가 사랑하잖아. 그리고 내가 사랑하잖아. 근데 이게 다 날 두고 지들끼리 짠 판이었다고.
6년 동안 대사기를 당한 기분이 어떠십니까. 빡치나? 빡치진 않는 것 같다. 구라치는 거 세상에서 제일 싫긴 한데 날 위해서 그랬다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했다니까 화는 안 난다. 궁금한 게 있기야 있지만 그건 누나한테 묻기로 한다.
이제 깊게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할 쪽은 다른 쪽이다. 진짜 가짜매형이었던 윤정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전부터 날 좋아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었을 때부터 음흉한 마음으로 날 본 거다. 이것도 기분 나쁠만한데 기분 나쁘지 않다. 사랑이란 게 좀 대단하다. 6년 동안 두 사람한테 속은 게 빡치지 않은 이유 중 6할은 윤정한일지도.
한솔의 올라갔던 눈꼬리가 서서히 내려간다. 경계가 풀려가는 눈은 다시 6년 전처럼 동글동글해진다. 정한은 녹아내리는 한솔의 양 볼을 잡고 고갯짓한다. 뭐하냐는 눈.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눈.
“눈 깔아봐”
“또라이... 무드 없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한솔아 나랑 무드 챙기고 싶어?”
그렇다고 말해주면
“닥쳐 시발”
분위기 좀 잡아보려 했는데. 고운 말 하는 법이 없다.
욕하면서도 눈은 순순히 감는다. 속눈썹이 부채마냥 촥 펴진다. 몇 개인 지 세어보고 싶다. 앞으로 셀 날 많으니까 이건 뒤로 미루자. 정한이 얼굴을 틀고 다가간다.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린다. 에라이 씨발...
발신인. 아내.
실눈 뜬 한솔이 글자를 보고 휘둥그레진다. 정한의 가슴팍을 팍 밀친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이 시스콤아. 영상 통화도 아닌데 괜히 찔려서 난리친다.
“여보세요”
[야! 나 데리러 와!!]
“어디신데요”
[부산항 새끼야... 돈키호테에서 가루쿡을 사재꼈더니 캐리어가 너무 무거워. 겨우 끌고 들어왔어 배에.]
전화 내용을 듣는 한솔의 표정이 똥 씹은 표정이 된다.
“알았어 갈게.”
정한은 전화를 끊으며 한솔의 주름 진 미간을 매만진다. 인상 풀어. 주름져.
“내가 말했잖아. 일본 갔다고.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 왜?”
“글쎄다. 가루쿡이 만들고 싶어졌나.”
정강이가 까인다. 그딴식으로 말하면 누가 믿어요. 첫 만남과 똑같은 대사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솔의 뒤로 있는 침대를 슬쩍 보고 시계를 본다. 아무래도 안 되겠지.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한나가 화날 거다. 본인이 사라졌던 한 달 동안 동생이 얼마나 걱정하고 화냈는지 상상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리며 욕지기를 할 수도 있다.
정한은 페라리를 몬다. 조수석에는 한솔이 있고. 가는 길에 학교에 들러서 딸도 좀 태우고. 엄마 짐도 많다는데 엄마는 어디 타? 아이패드로 넷플릭스 보는 라미가 물었다. 니 엄마 트렁크에 타라고 해.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만 무시했다. 도로를 달리며 생각한다. 아무래도 최한나가 캐리어 질질 끌고 ktx 타고 오는 게 빠르겠는데. 돌아가기엔 늦었다. 고속도로다.
라미는 차에 있어. 응 알겠어. 넷플릭스 삼매경인 딸은 페라리에 남기로 한다. 페라리 차주는 옆구리에 처남을 끼고 아내를 마중 나간다. 아내의 옆구리엔 30인치 초록색 캐리어가 있다. 정한은 손을 흔들다가,
“최한나! 재밌는 거 보여줄까?”
처남 볼에 입 맞춘다. 그리고 처맞는다. 씨발 무슨 짓이에요! 이 형 진짜 정신이 나갔나 봐. 한솔이 절망에 빠져 누나를 쳐다본다.
“왁! 미친! 축하한다!”
어깨를 으쓱한다. 니네 누나는 알고 있어. 우리 진짜 비즈니스라니까? 한솔은 이제 어디까지 사기당했는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본다. 아이패드를 들고 허망하게 서 있는 라미가 있다. 정한을 꾹꾹 찌른다.
“라미한테는요?”
“애한텐 숨겨야지. 아무리 가짜 가족이라 해도 말이야.”
니 아빠랑 니 삼촌이 서로 성애의 의미가 담긴 뽀뽀를 하는 사이란다. 하면 놀라지 않겠니?
“어. 놀랐어.”
세 어른이 벙찐다.
한나가 무거워서 들기 힘들다고 찡찡댄 캐리어를 우당탕 끌고 뛰어왔다. 미친 라미야아. 네 사람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든다. 유동 인구 많은 부산항에서 기막힌 이야기 실제상황에 나오는 실화들과 겨뤄도 지지 않을 흥미진진한 상황이 일어나니 그럴 만도 했다. 가짜가족은 재빨리 페라리로 대피한다.
“난 괜찮아 아빠 삼촌.”
“아니 안 괜찮아. 니 정서에 안 좋을거야”
“정서는 도둑질 했을 때부터 안 좋았어.”
“그건 또 무슨 말이니”
라미 문구점털이범이었어. 훔친 거 들켜서 문구점 아저씨한테 쳐맞고 있길래 우리가 데려왔지. 저것도 구라 아냐?
“응 나 고아였어. 난 돈이 필요하고 엄마는 삼촌을 지켜줄 가족이 필요하대서 내가 라미가 됐어.”
“... 원래 이름은 뭔데?”
“미라. 고미라.”
그러니까. 이 중딩도 한솔을 겨냥한 대사기극의 공범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한솔이 한나 쪽으로 몸을 튼다. 동생의 아군을 만들기 위해서 초등학교 졸업하는 만큼의 시간동안 사기를 친 한나가 떳떳이 동생을 마주 본다. 라미가 속삭인다. 아빠 괜히 얘기했나 봐. 삼촌 빡친거 아니야? 아니야. 삼촌 화 못 내. 이제 쉿. 공범들이 숨을 죽인다.
"왜 내 편을 만들려고 한 거야?"
"있으면 좋잖아."
누나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넘겨 주며 말한다. 있으면 좋잖아. 처음에는 싫지만. 있으니까 좋잖아. 윤정한은 사랑해서 좋고 윤라미는 귀여워서 좋잖아. 그런 게 가족인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한솔아.
라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엄마아. 모녀가 부둥켜안는다. 정한이 빤히 본다.
"한솔아. 우리 좋아?"
우리? 대체 누구랑 누구를 엮은 우리지?
따져봤자 의미 없다. 한나 말대로 가짜매형이건 가짜조카건 진짜 누나건 이제는 싫은 사람이 없다.
"좋아요. 좋아해요."
정한의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키스하고 싶다는 욕구를 참는다. 뒤에 아내도 있고 딸도 있으니까.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 6년 동안 당한 사기는 가짜 가족이 비로소 진짜 가족이 되는 것으로 합의 봤다. 한나랑 라미가 곯아떨어진 사이에 본 합의다. 어차피 두 사람도 찬성했을 결정이지만. 잠깐. 진짜 가족이면 더 큰일 아닌가? 한솔은 생각한다. 또. 또. 미간 주름. 엄지손가락이 쫙쫙 주름을 편다.
"하나라도 정상적인 게 없는 가족인데 뭘 따져."
그냥. 사랑을 하자. 너가 누나를 사랑하듯. 니 누나가 너를 사랑하듯. 우리의 사랑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원래 가족끼리 사랑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