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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Vernon RPS COLLABORATION

[찬버] 찬란한 날

밀레 / 글

겹벚꽃이다.

 

그렇게 화려하게 생긴 주제에 이름은 한솔이라고, 또 그닥 유별나지도 않은 이름이라 어린 마음에 참 모자란 이름을 가졌다고 말을 걸었다. 상궁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당장 저를 데리고 이곳에서 멀어지고 싶어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사람이 맞는지 궁금해서, 제 말에 어떻게 대꾸할지가 궁금해서 묘한 갈빛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더랜다.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알았을 거야. 그 사람은 자신을 그렇게 홀린 눈으로 보는 사람들을 많이도 만났을 테니까. 제 아버지가 그랬을 것이고, 그를 모시는 궁인들이 그랬을 것이고, 하물며 고양이같은 미물마저도 그를 따랐다. 색소가 옅은 그의 곁은 함부로 침범하는 이 없었으나 손을 담가 물에 비친 그림자라도 쥐어보고 싶은 승냥이는 많았다. 나는 그것이 싫었고 또 그 역시 싫어하리라 생각했다. 최대한 관심이 없는 것 처럼 구는 것이 제일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인 줄 알았다.

 

얇다래한 입술이 열려 두어 번 달싹이다 곧 다물렸다. 등 돌려 제게서 멀어지기 시작하자 궁인들의 눈에 띄게 안도의 얼굴을 했다. 저주라 했지. 신의 노여움을 받아 저리 특이한 외양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지. 가까이 다가가면 알 수 없는 역병이 옮을 수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 했다. 하지만 찬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다가가 덜컥 하늘거리는 겉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것이 전부라면 어찌 저리 화려한 옷을 입혀 궁 안에 가두어 두겠어? 품에 가둬 탐하지 않은들 적어도 눈요기를 위해 데려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물어보고 싶은 것은 사실 다른 것이었다. 왜 벗어나려 하지 않는지, 왜 반항하지 않는지, 왜 그런 텅 빈 눈을 하고 있는지. 아주 오래토록 묻지 못했던 물음이었다.

 

 

 

 

 

 

 

 

 

찬란한 날

w. 밀레

 

 

 

 

 

 

 

 

 

셋째 왕자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위치였다. 첫째는 모자랐고 둘째는 망나니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가 이 나라 제 1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니, 누구는 그 셋째 왕자에게 죽지 않으려면 가만히 숙여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억울함을 알고 있었던 셋째 왕자는 그럴수록 더 열심히 노력했다. 공부를 하고 무예를 익혔다. 가끔은 멀리 국경지역으로 쫓겨나듯 시찰을 나가야 했고 더러는 세력이 약한 신하의 자식과 약혼이라도 맺으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그야말로 대쪽같은 자세로 버텨내었다. 당연하게도 궁 안은 언제나 전쟁 직전인 것처럼 살기가 맴돌았다. 그것을 모르는 척 하는 이는 매번 진탕 술에 취해 사고를 치는 둘째 뿐이었다.

 

첫째는 셋째를 안타까이 여겼고 둘째는 첫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다만 왕이 될 재목이 되지 않으니 세력이 모이질 않았고, 일찌감치 허수아비 군주로나마 삼아보려던 것들은 멋대로 휘둘리는 둘째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셋째는 굴복하고 싶지 않아 노력했던 것 뿐이지만 늘 첫째에게는 이간질의 소문이 달라붙었는데, 그 때마다 첫째는 셋째를 안아 위로했다. 찬은 두 형님을 모두 사랑했지만 아버지까지 사랑할 수는 없었다. 왕은 무능했고 이 궁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 태어난대로 살고자 했다. 찬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이 흉흉한 궁에 소문을 더하는 것이 있다면-무서운 줄 모르고 궁인들이 마음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있다면-바로 그 저주받은 귀비에 대한 것이었다. 피부는 밀처럼 희다. 머리카락은 짙지 못하고 옅으며, 눈동자 역시 그러하니 아무리 보아도 짐승의 피가 섞인 것이 분명하다. 하늘의 이치를 거르스고 태어나 나라의 괴이한 일을 불러 일으킬 것이 자명하니 궁 내에 법당 비슷한 별채를 하나 지어 그곳에 머무르에 하였다. 그 별채는 금줄로 감싸고 색색의 천을 둘러 마치 무당자리처럼 흉하더라.

 

태워야 한다더라. 태우면 그 재가 내려앉은 곳미다 피가 솟는다더라. 깊은 구덩이에 피묻어 올라오지 못하게 해야한다더라. 땅이 오염되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될지니, 먼 바다에 버려야 한다더라. 아니다. 죽음이 곧 저주의 시작이니 두렵게 모셔야 한다더라.

 

죽이되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죽이면 안 되는지 이유가 공존했다. 소문의 큰 줄기는 바로 이 무수한 죽이는 방법에 있었다. 황제께서 독한 것을 친히 감싸 안으시고 죽일 방법을 고민하고 계시니 평범한 천것들은 건드려서도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둘.

 

 

 

"저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찾으시옵니다."

 

"이번엔 또 어디가 아프시다더냐."

 

"그것이, 불충의 기운이 심증을 어지럽혀..."

 

 

 

나무로 된 허수아비들을 베어내던 찬의 뒤로 상궁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머지 하나를 채 베지 못한 체 제 아비의 명을 듣던 찬이 머리를 짚었다. 지난번에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니 제 배를 직접 눌러 만져보라 하였다. 감히 어떻게 옥체에 손을 대느냐며 그저 바닥에 머리를 찧어 청을 거둬달라 애원하는 찬의 앞에 튄 것은 황제의 곁에 있던 궁인 둘의 피였다. 결국 찬은 그날 피를 뒤집어 쓴 채로 광증이 날로 심해진다는 황제의 배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서, 폐하의 옥체가 아직 건강하오니 소자 걱정할 것이 없겠다는 말을 남겨야 했다.

 

 

 

"상궁."

 

"예."

 

"아니 가서는 안 되겠지요. 나도 압니다."

 

 

 

궁에는 셋째를 어여삐 여기고 또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뭐 하나 허투루 하는 것을 몰랐을 뿐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대부분이 나이 많은 이들이었다. 특히 찬의 옆을 지킨 송 상궁은 그를 아주 어렸을 적부터 모셔 불경하게도 자식과 같이 생각했던 적도 여럿 있었다. 찬의 포기한 듯한 말과 표정이 상궁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숙이는 일 뿐이었다.

 

황제의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두고 또 수근거림이 따라붙었다. 요새 황제께서 셋제 황자님을 그리 아끼신다지요. 옆에 두고 자꾸 의견을 묻는다지요.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고 아픔을 그에게만 털어놓으신다지요. 궁에는 찬을 잘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훨씬 많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황제의 총애라 했고, 찬이 원하는 것이 다음 왕좌라 말했다. 황제가 그 소문을 모를리 없었다. 어쩌면 오늘 죽겠구나,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것은 정말 벗어날 수 없겠구나. 찬은 어딘가 불길한 기분을 안고 있었다.

 

 

 

"찬아, 내 아들 찬. 이 찬. 그래. 얼굴이 빛나는구나. 새벽 이슬을 찾는 여우 같기도 하고, 내게 충성을 다하는 늑대 우두머리 같기도 해."

 

"폐하, 과찬이십니다."

 

"영특하고 아름답지. 내가 널 아끼는 것을 알지 않느냐. 아니 그래."

 

 

 

찬은 최대한 무난한 답들을 골랐다. 황제의 앞에는 독하기로 유명한 지방의 술이 아름다운 백자에 담긴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침구를 적신 술냄새가 독하게 올라왔다. 향으로만 취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취한 황제의 눈은 번들거리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수염은 제멋대로 자라 괴기스럽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 했던가. 틈만 나면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온다 소리친다 했던가.

 

 

 

"아들아, 내 네게 상을 내리니 결코 잊지 말고 항상 품에 새기거라."

 

"하명하십시오."

 

"그 꽃 같은 것을... 가까이 해서는 아니된다. 응? 그것은 너를 말려 죽일 것이야. 아예 바라보지도 말거라. 절대로 마음에 품지를 말아. 그 독한 것, 그 예쁘고 괘씸한 것."

 

 

 

황제가 말에 섞어 내뱉는 한숨에서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창 전쟁터를 누비고 다닐 적 산짐승같던 날카로운 것이 아니었다. 적을 두렵게 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살이 찌고 몸이 둔해져 이제는 제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도 없는 추한 인간의 것이었다. 찬은 이지경이 되어버린 황제와 이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궁 안 모든 사람에게 화가 났다. 그 화 안에는 제 자신도 있었다. 사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충하였고, 그래서 황제가 망가졌다는 생각에. 꿇은 무릎 한 쪽을 세워 황제의 앞에 기사의 예를 다하고 간언을 올리려 했다.

 

그때,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이라도 났는지 한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정적 뒤로 여인의 비명소리와 함께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반역이었다. 세자는 이미 죽었다며 칼을 버리라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찬은 황제를 모시고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로? 하얗게 질린 그의 손을 이끌어 병풍 뒤 숨겨진 통로로 데려간 왕이 속살거렸다. 꽃을 탐하지 말거라. 꽃이 아닌 네가 지게 될 테니.

 

애써 억눌렀던 이성을 여는 그 한 마디 때문에, 찬은 그 꽃의 거처로 향했다.

 

 

 

*

 

 

 

소문 둘. 사실은 황제의 힘이 그 꽃에서 온다더라. 꽃이 마를수록 황제는 더욱 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 잡아먹히게 된다더라. 사실 모든 것이 꽃의 힘이라더라.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며, 황제가 그것을 독점하려 하기에 이렇게 흉흉한 소문이 있는 것이라더라.

 

찬은 어렸을 적 꽃과 자신이 처음 대화를 나눴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불쌍했다. 그렇기에 건넨 말이었고 그렇기에 뒤도는 것을 붙잡았다.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나가자는 말이 나왔으면 했다. 나라면 도울 수 있을텐데. 실은 그렇게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꽃은 오히려 찬에게 말했다. 도망가라고.

 

그의 옷 소매는 불편하리만큼 길었고 덜 자란 왕자를 감추고 스스로의 입 모양이 읽히지 않도록 제게 뜻을 전할 수 있었다. 단 한 마디 뿐이었지만 찬은 느꼈다. 도망치지 않으면 나는 죽게 될 것이고, 아마 그 날이 이 사람의 마지막이라는걸. 꽃 역시도 어렴풋이 느꼈기에 어린 제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그 말을 믿기도 싫었고 의지하기도 싫어 더 열심히 했지만 결국 이리 되었다.

 

둘째 왕자의 반란. 그의 손속을 닮은 잔인한 병사들이 사람들을 속속 베어갔다. 왕이 알려 준 지하 통로를 걷는 내내 비명이 끊이지를 않았다. 어디로 나 있는지도 모를 길 끝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열어 저를 맞는 것은 다름 아닌 꽃이었다.

 

 

 

"...그러기에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무려 십 삼년 만에 다시 듣는 그의 목소리. 갑자기 다가온 현실에 찬은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는지, 왜 꿈꾸지 않는지, 왜 새로운 삶을 욕심내지 않는지. 데리고 가 달라 말해준다면 나는 당연히 그리할 텐데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지. 아버지는 죽었고 첫째 형도 죽었다. 송 상궁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부 죽고 이제 제가 아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 남았는데.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야 사이로 뒤돌아 가려는 모습을 다시 붙잡았다.

 

 

 

"오늘은 당신을 보내면 아니 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죽습니다."

 

"같이 도망가요. 같이요. 혼자 말고."

 

 

 

한시라도 빨리 자라 어른이 되어야 했고 현실을 모르는 척 어린아이가 되어야 했다. 찬은 십 삼년 만에 다시 오롯이 솔직해졌다. 눈물이 흘러 얼굴이 지저분해졌다. 곱지만은 않은 손이 찬의 눈물을 닦았다. 두어 번 만에 닦인 눈물이 부끄러워 찬은 고개를 숙였다.

 

 

 

"하나도 살기 어렵고 둘은 더욱 그렇습니다."

 

"홀로 목숨을 부지해 무엇 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을 데려가세요. 데려가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살아있어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하는 한 늘 목숨을 위협받아야 할 겁니다. 쉽게 숨겨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좋습니다."

 

 

 

눈물이 다시 흘렀다. 참 무던하게도 자신을 왜 버려야 하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가슴에 사무쳤다. 이 사람은 이렇게 평생을 포기하며 살았겠지. 혹여 나가자마자 죽는다 해도 잠깐의 희망이 되어주고 싶었다. 실을 그 첫날부터 당신을 구하고, 도망쳐서, 우리 둘만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제가 아는 모든 행복을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당신이 내 옆에 있는다면. 꽃은 아무 말 않고 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췄다. 찬은 간절하게도 마음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전해진다는 무언의 확신이었다.

 

 

 

"앞으로 한솔이라고 부르세요."

 

"네?"

 

"같이 나가요, 여기."

 

 

 

꽃이 비로소 꽃답게 웃었다. 찬의 옷자락을 쥐고 이리저리, 미로와 같은 공간을 달리는 꽃은 이미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출구를 두고 죽음을 이야기했던 꽃의 뒤를 부지런히도 쫓아가던 찬은 그제야 알았다. 당신도 나를 기다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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